창세 6, 5-22: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홍수설화
홍수설화는 고대 근동뿐 아니라 세계의 여러 곳에서 특별히 큰 강을 끼고 형성된 문화권안에 전해져 오고 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나일강 유역에서 큰 물난리가 났다는 증거는 고고학적인 발굴로 입증) 홍수에 대한 이야기는 큰 강 유역에 살던 민족들이 모두 지니고 있는 설화로 물 조절을 하기 위한 댐을 이용할 줄 몰랐던 고대인들에게 큰 물난리에 대한 무서운 기억은 여러 세대를 두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근동의 홍수 이야기들 가운데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가장 비슷한 것은 바빌론의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홍수설화이다. 이 설화를 보면 신들이 어떤 도시를 멸망시키기 위해 홍수를 일으키기로 결정하는데 이 회의 석상에서 한 신이 빠져나와 홍수의 영웅에게 꿈을 통하여 배를 만들라고 명령한다. 이 때 배의 용도는 알려지지 않는다. 홍수의 영웅은 다른 가족들과 짐승을 태웠고, 대재난에서 살아남는다. 홍수가 끝나고 이 영웅이 제물을 바치자 신들이 제물의 향내를 맡고 파리떼처럼 제단 주위에 몰려들고 홍수의 영웅은 마침내 신들의 반열에 끼어들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저자가 바빌론의 홍수 이야기를 직접 이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설화의 매우 조잡한 다신적 요소들에 비해 창세기 설화는 훨씬 세련되고 정화되어 있다. 아마도 창세기 설화와 바빌론 설화는 더 오래 되고 따라서 보다 단순한 어떤 홍수 아야기로부터 발전되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태고의 대 홍수에 관한 전설들에 영감을 받은 성서 저자는 결코 단순한 역사적 목적에서 이 전설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대홍수를 믿고 있는 사실에 직면하여 심각한 사목적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멸하지 않으신다고 꾸준히 주장해 왔고 그리고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인간 쪽에서 가혹하고 욕설적인 행동을 드러낼 때라도 하느님은 한결같이 사랑과 자비로 충만해 계신다. 여기서 성서 저자가 처하게 되는 곤경은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도대체 어떻게 그런 우주적인 재난을 일으킬 수 있는지, 과연 앞으로도 다시 그런 일을 일으키실 것인지 설명하는 것이었다.
노아의 홍수 설화
노아의 홍수설화는 유연하게 한 사건으로 처리되고 있지만 가까이 살펴보면 두 가지 전승이 얽혀 있다. 이 두 전승이란 솔로몬 왕궁에서 문필활동을 벌이던 야훼스트와 바빌론 귀양 중에 활약했던 유다의 사제들이 기록한 문헌을 말한다. 사제계 문헌에 의하면 모든 동물들이 두 쌍씩 방주에 들어가는데 비해 야훼스트 문헌에는 노아가 일곱 쌍의 정한 짐승과 두쌍의 부정한 짐승들을 방주로 불러들인다. 사제계 문헌에선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대로 땅 위에 있는 물과 땅 아래에 있는 물줄기들이 터져나와 홍수를 이루지만 야훼스트 문헌에선 홍수진 대량의 물은 40일 동안 주야로 쏟아진 비 때문인 것으로 묘사한다.
노아의 홍수설화는 앞의 실낙원 이야기나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처럼 인간의 죄악과 하느님의 처벌과 구원이 그 핵심 내용을 다룬다. 그런데 앞의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범죄가 객관적으로 다루어지는 데 반해 여기서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인간의 죄악상을 바라고보 있다. 하느님이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참 좋았다.” 라고 감탄하시며 만족해 하셨는데 여기서는 인간의 죄와 그 죄로 인해 썩은 냄새를 피우는 세상에 충격을 받으시고 실망과 후회를 하셨다고 되어 있다.
구약의 하느님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느끼시고 생각하셨을까를 표현하기 위해 이처럼 인간적 정서를 이용하는 수법은 야훼스트의 두드 러진 특징이지만 구약의 시인들이나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활용되었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노여워하시는 하느님, 미워하고 사랑하고 질투하시는 하느님, 실망하고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모습(ex: 하느님은 동산을 거니시고, 카인의 이마에 표를 찍으시고, 아브라함과 저녁을 함께 하시며, 야곱과 씨름을 벌이시는 분)은 하느님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인간적인 표현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고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고 직접적으로 알아듣게 해준다. 이 표현들 덕분에 성서의 하느님은 추상적 관념이나. 철학적인 원리나 법칙으로 머무르지 않고, 온갖 희로애락에 얽혀 살아가는 인간과 대화하시는 인격신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인류의 죄는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이제 온 세상에 만연되었다. 창세기 저자는 세상이 속속들이 썩어 있다고 하면서 이 부패된 모습을 “폭력이 가득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공동번역에는 “무법천지”라고 되어 있다. 예언자들은 심판을 예고하는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온 모든 원인들을 한데 묶어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폭력이 난무한 세상은 멸망으로 치달리고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자비로우시고 참을성 많으신 하느님께서 죄(인간은 피조물로서 자신의 본질을 맏아들이기를 거부했고, 하느님의 자비를 악용했으며, 조상의 신성을 주장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많은 인류를 더 이상 참으실 수 없게 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폭력이 난무하고 썩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는 세상에 충격을 받으신 하느님은 인간과 세상의 창조를 후회하시고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신다. 하느님의 당혹은 어떻게 죄가 갑자기 세상에 들어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초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창세기 저자의 당혹을 말해준다. 하느님의 자비가 신비스러운 것처럼 죄의 정체도 신비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 사람
성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파멸의 홍수를 일으키기로 작정하실 때 슬픔과 실망에 눌려 계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홍수는 경솔하고 급하게 이루어진 보복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완전히 멸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분은 새로운 시작이 될 사람 하나를 찾으신다. 모든 사람들이 폭력의 펀에 가담해 있는데 노아라는 한 의인은 예외였다. 그는 하느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헤아리고 존중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노아 이전에 살았던 에녹도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에녹은 365세까지 살았는데, 이 숫자는 일년의 날수와 같아서 완벽한 숫자를 가리킨다. 에녹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았기 때문에 완벽한 지상생애를 마치고 죽지 않고 즉시 하느님께 갔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폭력에 가담하지 않고 당신의 뜻에 따라 당신과 함께 걷는 노아를 다가올 징벌에서 구하기도 작정하신다. 그리고 노아 한 개인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과 다른 동물들까지도 구하기로 하신다. 사람들의 죄가 세상에 멸망을 가져왔듯이 한 사람의 의가 새로운 창조의 시발점이 된다. 멸망과 구원의 연대성, 바로 여기서 하느님의 본뜻을 알 수 있다. 홍수로 멸망시키시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창조를 새롭게 하려는 하나의 쇄신 작업이라고 본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결코 인간의 집단적인 폭력으로 막을 수 없다. 하느님은 첫 번째 폭우를 내리겠다고 하신다. 노아에게 폭우로 인한 물난리에서 구제될 수 있도록 방주를 배로 된 집으로 만들라고 하시는데 배의 치수까지 자상하게 가르쳐 주신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51-54.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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