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 8(1-22): 다시는 전처럼 온갖 산 것들을 멸하지 않으리라

마리아 아나빔 2010. 7. 28. 09:43

 

 

성서나눔 15- 창세 8(1-22): 다시는 전처럼 온갖 산 것들을 멸하지 않으리라

 

 

   창세기 8장 역시 문체와 사상이 솔로몬 궁정의 서기관들과 유배 이후의 사제들의 글들 한데 얽혀 있다. 그리고 홍수가 빠지고 하느님이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기까지의 과정도 아주 복잡하게 묘사되어 있다.

 

- 하느님은 노아와 방주에 탄 모든 생명을 “기억”하시어 물이 빠지도록 바람(영)을 일으키신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은 그분의 성실한 사랑과 계속되는 중재하심을 의미한다(예레 2,22; 31,20). 하느님은 당신 기억의 대상을 향하여 움직이신다는 뜻이다(19,29; 탈출 2,24; 루가 1, 54.55) 특별히 여기서 하느님의 ‘기억’은 노아와 맺으신 계약의 징표와 관련해서 9,15에 다시 나오는 데 이것은 당신 백성 가운데에 자리한, 하느님 구원의 현실화를 표현하는 것으로, 사제계 본문에 나타나는 신학적 전문용어이다.

 

 

- 땅밑 물줄기와 하늘의 창문이 막히고 하늘에서 내리던 비도 멎게 하셨다. 노아의 방주는 물이 줄어들기 시작한 지 백오십 일, 곧 정확하게 다섯 달 만에 아라랏 산(아시리아 북쪽, 코카스 산맥의 남쪽에 있는 산-주교회의 성서 위원회)에 도착한다. 이 산은 약 5천미터 정도의 높이를 가진 봔이라는 호수 가까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아르메니아에 위치한 우라루트 산을 가리킨다. 히브리인들에게 이 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었다.(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정태현)

아라랏 산  : 터키, 이란, 아르메니아 국경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사화산으로 노아의 방주가 내려 앉은 산이다.

 

- 노아는 물이 빠졌는지 알아보려고 방주의 지붕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낸다. 까마귀는 돌아와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지만, 비둘기는 방금 돋아난 올리브 아파리를 물고 온다. 비둘기가 가져 온 이 올리브 잎은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상징한다. 이 이야기로부터 후대의 사람들은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민감한 반응을 보여 주었던 비둘기를 선호하고 까마귀를 싫어하게 되었다. (바빌론의 설화에서는 세 종류의 새, 곧 까마귀, 비둘기 그리고 제비 차례로 나간다. 그러기에 여기서 까마귀는 성서에서 그 이전 설화의 이야기 구조를 증언할 따름이다. 오히려 번식의 상징인 비둘기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 노아는 올리브 새 이 파리를 보고 물이 줄어든 줄 알고 일주일을 더 기다렸다. 비둘기를 다시 날려 보낸다. 비둘기가 끝내 돌아오지 않자 노아는 땅이 마른 걸 알았다. 야휘스트의 기록에 의하면 홍수가 시작된 지 40일과 세 이레가 지난 후였다. 노아는 지루하지만 배에서 하느님의 시간(Kairos)에 맞추어 나와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인내를 하며 침착하게 기다렸다.

 

-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 양력으로 이월 이십칠일은 한해를 시작하는 날이다. 땅의 얼굴이 새해와 더불어 새롭게 시작되는 걸 뜻한다. 이 날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배에서 나오라고 명하신다. 7장 11절의 사제계 문헌에서 홍수가 시작하던 날이 이월 십칠일이었으니 꼬박 일 년 십일 만에 노아는 하느님께로부터 방주에서 나오라는 분부를 받는다. 배에서 나오는 노아와 가족들과 온갖 종류의 짐승들의 모습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 다른 홍수 이야기들에서처럼 재난에서 살아남은 노아는 하느님께 제단을 쌓고 정한 들짐승, 정한 새 가운데 번제물(하느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은 이미 카인과 아벨 때부터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것은 에노스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흙으로 되었을 제단위에서 짐승을 통째로 바치는 “번제물”의 제사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을 골라 제단 위에서 완전히 태운다. 이 번제는 보통 공경, 봉헌, 속죄의 의미를 포함하는 제사이다.종교의 근본행위를 함으로써 하느님께 흠숭과 감사의 정을 표한다. 이것은 노아가 오랫동안의 방주 생활에서 풀려난 후 첫 번째 보여 주었던 행위는 행방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경의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새 땅은 이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그분의 것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고기타는 냄새를 향긋하게 느끼셨다는 말은 번제물이 마음에 드셨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노아의 번제를 받으시고 마음이 풀어지신다. 그리고 속으로 인간이 근본부터 비뚤어져 나간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땅을 저주하고 땅 위의 모든 생명체를 다시는 대량학살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신다.

 

-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이라는 하느님의 혼잣말씀은 악에로 기울어지는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아담의 범죄 이후에 사람들의 죄 때문에 땅은 저주를 받아 소출을 내는 데 인색했다. 그 다음에 나오는 하느님의 독백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여기서 생물이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란 인간과 짐승을 가리킨다.

 

- 하느님의 독백은 이제 다시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다짐에서 끝나지 않고 이 재앙을 절기와 기후의 변화와 사계의 정확한 구분 및 밤낮의 뒤바뀜 안에 고정시켜 놓으시겠다는 결정으로까지 발전한다. 인간은 이제부터 때의 징조를 미리 알아보고 다가올 홍수나 가뭄에 보다 쉽게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 하느님의 이 독백은 홍수로 비참하게 죽어간 수많은 인간과 짐승들을 생각하시고 황폐화된 땅의 모습들을 보며 후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독백은 다음 장에서 그분이 노아와 맺으시는 계약으로 표현되는데 이 대목은 사제계 문헌에 속한다.

 

 

   이 이야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노아의 인내와 충직한 태도이다. 야휘스트의 문헌에 의하면 61일, 사제계 문헌에 의하면 일 년 열하루를 방주에 갇혀서 살아야 했던 노아이지만 조금도 조바심치지 않고 하느님이 방주에서 나오라는 명령을 하달하시기까지 기다렸다. 이 인내는 근본적으로 즉 하느님의 계획을 믿은 데서 나온 것이다. 그는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이 보통 사람들로서 상상하지도 못한 커다란 배를 건조하라고 명령하셨을 때도 주의 사람의 비웃음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지시해 주신 칫수에 따라 이 배를 정확하게 만들었다. 이 배를 만드는 데에도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홍수가 계속되는 동안 노아는 참고 기다리다 비가 그치는 걸 깨닫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어 땅의 동정을 살핀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 삼 주간을 기다린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 지루한 인고의 세월을 마감해 주시고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라고 분부하셨을 때, 노아는 그 즉시 배에서 뛰쳐나와 해방의 기쁨에 도취되어 날뛰기보다는 하느님께 제사를 바칠 생각부터 한다. 하느님이 그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려 했던 까닭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노아는 참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를 이루려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 사람 이였던 것 같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59-62.

                   구약성서 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 성염, 바오로 딸, 1996, p.168.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5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