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나눔 14- 창세 7장(1-22): 주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였다.
들어가기 전에
대홍수
창세 6-9장은 노아 홍수라고 전해져 오는 대 천재지변을 담고 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온 지구를 뒤덮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인류가 아직까지 전 세계에 펴져 살지는 않았던 시대이므로, 그 당시 원조들이 살고 있던 땅을 온통 휩쓸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성서 저자로서는 이와 같은 재앙이 죄와 관련되지 않았음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홍수는 죄 많은 인류를 벌하려고 하느님이 명하신 재앙이었다. 완전히 하느님을 망각하고 천륜을 모르는 세상이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실 정도였다. 물론 하느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을 다 아시는 만큼 하시는 일을 후회하실 수가 없다. 결코 변경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선행을 상주시고 악행은 벌하실 따름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후회하신다.’는 인간적인 어투는 죄악이 얼마나 하느님을 상심시켜 드리고 인간을 파멸시키는가를 좀더 알게 하려는 것이다.
노아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모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과 가족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류의 혈통을 잇고 유일하신 참 하느님께 대한 사상을 전승시키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계승하도록 선택받은 사람이다.
성서는 노아의 복종심을 매우 대견하게 여긴다. “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대로 하였다.”(6,22) 하느님의 말씀에만 의지하고서 당대 사람들의 온갖 조롱을 무릅쓰면서 거대한 배, 그것도 지붕이 덮인 방주를 만드는 일은 수월하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방주에 들어간 자만 목숨을 건졌다. 노아의 방주에서 그리스도교회의 첫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TEXT 안에서
- 노아가 하느님의 분부대로 모든 일을 다 끝내자 하느님은 노아에게 방주(이집트 말에 유래한 것으로 보는데 궤 상자)에 들어가라고 지시하였다. “너는 네 식구들을 데리고” 라는 표현은 노아가 의인이기 때문에 그 덕분으로 다른 식구들이 구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여기서 노아라는 이름은 ‘위로하다’라는(이사 40,1 참조) 동사와 관련된 것으로 이로써 하느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 깨끗한 짐승과 공중의 새들을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두 쌍식 배에 데리고 들어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야휘스트의 기록이다. 사제계의 문헌에서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이 없이 암컷과 수컷 한 쌍씩 배에 들여보내도록 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이것은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에 각각 한 쌍으로 충분하다. 반면에 야훼계 설화에서는 다음에 바칠 희생제사를 위해서도 특히 정결한 짐승들이 더 필요했다.(8, 20-21) 또한 이는 하느님의 연대성을 상기시키는 야훼계 저자의 또 다른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묘사이다.
- 하느님은 홍수를 내기 전 7일을 유예기간으로 주신다. 홍수는 매우 임박해 있으나 그렇다고 서두를 것은 없다. 일곱은 완전한 숫자로서 홍수 전에 하느님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준비하셨음을 뜻한다. 창세기 첫 장에서 일곱째 날은 안식일로 하느님께서 쉬셨으니 이 은혜로운 날이 지난, 주간의 첫 날부터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실 것이다. 밤낮으로 40일 동안 비를 쏟아 지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다 쓸어버린다는 표현도 야휘스트에 의한 기록이다. 사제계 문헌에서는 땅 밑에 있는 큰 물줄기와 하늘의 창문에서 물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 홍수가 나던 때는 노아의 나이 육백 세 되던 해였다. 이 해는 창세기 5장 홍수 이전 족장들의 족보에 의하면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가 죽은 해이고 므두셀라보다 짧게 살다간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죽은 지 이미 5년이 지난해이다. 아담의 출생을 원년으로 잡았을 때 이 해는 정확하게 1656년이 된다. 이 연대는 노아 때의 홍수로 노아 이전의 모든 세대가 다 죽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 방주로 들어간 노아의 가족 구성을 보면 아내와 세 아들과 그들의 며느리로 되어 있다. 이로써 노아의 가문은 홍수 이후에 인류가 번성하게 될 때 근친상간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창세기 5장 32절에 의하면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을 때의 나이가 500세였으니 홍수가 났을 때 그의 아들들의 나이가 100세가 되어 충분히 아들을 가질 수 있었을 터인데 가족의 구성원 중에 노아의 손자가 끼여 있다는 말은 없다. 이것은 홍수가 끝난 후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리라는 걸 암시한다.
- 짐승들에 관한 묘사, 곧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새와 길짐승, 두 쌍씩은 야훼스트의 문헌에도 사제계 문헌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한 표현이다. 이것은 최종편집자가 15절 이하에 나오는 “몸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것 한 쌍씩”이라는 사제계 문헌의 표현을 반복하면서 그 숫자를 두 배로 늘린 것으로 추측된다. “살아 숨쉬는 모든 살덩어리들이 두 쌍씩 노아에게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 성서 안에서 ‘살덩어리’ 는 유한하고 무력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하면서 나약한 존재일 따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과 생명은 주님의 “영” 또는 “숨결(루아)”에서 온다. 그러므로 그분이 창조한 모든 것들은 하나의 유한한 피조물로서의 ‘살덩어리’들이다.
- 홍수에 대한 묘사에서는 야휘스트와 사제들의 기록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본문의 최종편집자는 “이레가 지나자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났다.”와 “그래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 위에 폭우가 쏟아졌다”는 야휘스트의 기록사이에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십칠일, 바로 그 날 땅 밑에 있는 큰 물줄기가 터지고 하늘은 구멍이 뚫렸다” 는 사제계 문헌의 표현을 끼워 넣고 있다.
- 노아는 자기 아내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들을 데리고 방주에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카인의 6대째 후손인 라멕이 여러 아내를 두고 산 것으로 되어 있지만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일부일처의 결혼생활을 했다. 노아 이후 일부다처의 결혼이 나오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부터이다. 앞에서 이미 노아가 가족들과 짐승들을 데리고 방주에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도 그 사실이 약간 다른 표현으로 또다시 반복되어 나온다.
- 16절의 “노아가 들어가자 주님께서 문을 닫으셨다”는 표현은 물난리 가운데서 인류의 구원과 생물의 보존은 오로지 주 하느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것 말한다. 하느님께서 창조의 쇄신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셨다는 뜻이다. 동시에 손수 문을 닫아 주시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아버지다운 사랑을 엿볼 수 있다. 40일 동안 궁창 위의 물이 쏟아져 내렸다는 보고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숫자인데 하느님의 계획이 완벽하게 실천되었음을 가리킨다. 홍수가 얼마나 계속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야휘스트 문헌과 사제계 문헌이 서로 다르게 보고하고 있다. 야휘스트는 홍수가 계속된 기간을 40일과 새들이 보내어진 세 주간을 합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는 데 비해 사제들은 홍수가 일년 열흘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 사십일 동안 쏟아진 폭우는 온 세상을 모두 잠기게 했다. 노아의 방주는 물 위를 떠다녔는데 점차 불어난 물은 하늘을 높이 치솟은 산까지 삼켜 버렸다. “하늘 높이 치솟은 산”은 어떤 특정한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 전체가 완전히 물에 잠겼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표현이다. 물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음에로 몰아가고 땅 위에 코로 숨쉬며 살던 모든 것들을 죽이고 말았다. 오직 노아와 함께 하느님이 만들라고 지시하신 대로 건조된 방주에 탄 사람들과 짐승들만이 대홍수의 와중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협조하는 노아의 성실한 모습이다. 하느님의 계획이 완성되도록 모든 피조물이 온전히 협조했듯이 노아도 하느님의 지시대로 모든 일을 빈틈없이 수행했다. 창세기 저자들은 “노아가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였다”는 표현을 네 번씩이나 반복한다.(6,21;7,5;9,16). 노아의 순종적인 태도는 자신의 분수와 한계를 잊고서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규칙을 수정하고 위반한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의 태도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노아처럼 폭력에 가담하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걸으면서(거닐다를 직역하신 이는 인생길을 걷는 것, 곧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데 이 표헌을 후기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다’로 해석함) 그분의 뜻을 존중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의 차지인 것이다.
※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55-58.
구약성서 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 성염, 바오로 딸, 1996, p.167-168.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4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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