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문학과 잠언서(코헬렛·욥기)

욥기(42, 1-17): 욥의 화해

마리아 아나빔 2014. 11. 30. 15:27

 

 

 

 

                                             욥기(42, 1-17): 욥의 화해

 

 

들어가면서

 

욥기의 마지막 장은 책 전체의 결론으로써, 고통의 문제를 넘어 하느님에 대한 참된 앎과 인간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하여 하느님 섭리 안에 숨겨져 있는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준다. 즉 욥이 무엇 때문에 그것들을 ‘신비로운 하느님의 섭리’로 남겨두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새기는 일이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42, 1-6)은 하느님과 대면한 욥의 고백, 둘째 부분(42, 7-9)은 욥의 세 친구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셋째 부분(42, 10-17)은 욥이 모든 것을 회복하는 이야기다.

 

욥기의 마지막을 장식할 내용은 ‘화해’와 관련된다. 욥은 친구들과 화해하고 하느님과도 화해한다. 그전에 해결할 일이 있다. 하느님이 욥의 친구들에게 역정을 내신다. 그들이 하느님께 올바른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42, 7),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그들이 한 말은 틀렸다기보다 거만한 것이다. 상선벌악이라는 전통적 개념으로 하느님이 하실 일을 미리 재단하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욥의 상활을 지켜보면서 그를 의롭지 않은 사람이라 심판했고, 그의 고통을 죄의 결과라 치부했다. 이런 그들에게 욥은 제대로 말했다. “자네들은 거짓을 꾸며내는 자들, 모두 돌팔이 의사들일세.”(13,4). 욥의 친구들에게 욥의 고통은 처절한 현실의 사건이 아니었고 머릿속에서만 논의하는 토론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현실 속에 아파하고 울부짖는 욥에게는 친구들의 이런저런 훈계가 ‘비현실’의 거짓으로만 여겨졌다.

 

반면에 하느님은 욥이 올바른 것을 말했다고 하신다(42,8). ‘올바르다’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확실함(쿤)’을 가리킨다. 올바른 것은 계속되는 욥의 확고한 호소에서 비롯된다. 친구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 하느님께 확고히 매달렸고, 자신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과 이야기하고자 끈질기게 애원했다. 욥의 호소는 이미 듣고 배워온 전통적 개념에 달려 있지 않았다. 하느님만을 찾아 나서는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하느님께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욥에겐 거짓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내뱉었으니 말이다. 하느님 눈에는 바로 이런 사람이 올바른 이, 의인이다(시편 5,9). 하느님이 보시기엔 ‘대체 하느님이 어디 계시느냐?’ 따지듯 묻는 욥의 태도가 올바른 것이었다.

 

하느님의 분노는 욥의 기도로 사그라진다. 사실 구약의 전통 안에서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늘 있었다(시편 35,12-14; 109, 4-5; 탈출 23, 4-5). 그리고 이런 기도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하느님의 일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욥의 친구들, 또 그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욥의 모습에서 우리는 욥기의 친구들, 또 그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욥의 모습에서 우리는 욥기의 끝이 ‘화해’로 마무리됨을 본다. 욥의 친구들이 바치는 수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42,8)는 화해의 구체적인 상징이다(레위 1,3-5; 욥 1,5).

 

화해의 결과 욥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다시 돌아온다. 욥의 재산이 예전보다 많아지고 자녀는 더욱 풍성해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욥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순수하게 하느님의 결정으로 욥에게 행복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잿더미 속에 앉아있던 욥(2,8)이 다시 가족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덕택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을 떠올리게 된다. 죄 없음에도 온갖 죄의 멍에를 짊어진 야훼의 종, 그는 온전히 하느님에 의해 삶을 빛을 얻어 만났다(이사 53,11-12).

새롭게 시작된 욥의 운명은 먼저 ‘음식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다. 음식의 나눔은 계약의 재설정을 떠올리게 한다. 서로 먹을 것을 나누면서 지난 시간을 지금의 시간 안으로 불러온다. 그리고 서로를 보듬고 위로한다. “은전 하나와 금 고리 하나”가 위로의 상징이다(욥 42,11; 창세 24,47;탈출 32, 2; 이사 3,21).

 

계약의 재설정은 ‘관계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비단 하느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형제, 자매, 그리고 옛 친구들과의 관계 회복에서 말이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회복이었다. 욥이 당한 고통과 불행은 여전히 신비로 남는다. 그러면서도 욥기의 끝은 ‘해피엔딩’이다. 욥기의 목적은 본디 고통과 불행의 원인과 이유를 찾는 게 아니었다. 욥기는 욥의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시험하는 데서 시작되었고, 그 시험의 과정이 고통과 불행이었으며, 하느님과의 화해로 막을 내린다. 화해의 자리에서 예전의 하느님이 아니라 새롭게 깨닫게 된 하느님, 새로운 관계 안에서 새로운 다른 무엇을 더 많이 주시는 하느님을 욥은 얻어 만났다. 어쨌거나 욥은 ‘수를 다하고’ 죽었다. ‘수를 다했다’는 말은 삶을 완전히 채웠다는 말이다(창세 25,8; 35, 29). 욥의 삶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느님이 직접 채워주신 하느님의 자리였다.

 

 

Text 안에서

 

하느님 체험과 고백(42, 1-6)

 

하느님은 당신의 초월성과 권능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신다(38, 1-40, 2; 40,6-41, 26). 하지만 욥의 말에서 하느님의 물음과 관련된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욥은 다만 자신의 무지와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앎을 고백할 뿐이다. 폭풍 속에서 발현하신 하느님께서 욥에게 당신의 초월성과 권능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해서 물으셨는데, 히브리 본문 동사는 ‘알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야다’를 사용했다(38, 4). 욥은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하느님께 대답한다. “저는 알았습니다.”(42, 2)라는 히브리 동사 ‘야다’는 일반적으로 체험을 통해 얻은 앎을 지칭하는데, 무엇인가에 대한 확신을 피력하기 위해 사용된다(시편 20, 7; 41, 12). 욥은 자신의 신앙적 확신을 고백하기 위해서 이 동사를 사용한다. 즉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42,2)이라고 고백한다. 19장 25에서도 욥은 하느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확신하며 이 동사를 사용했는데, 이 경우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하느님의 침묵과 부재 상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42, 2에서는 하느님의 절대 권능과 초월성을 고백하는 신앙적 의도가 엿보인다. 욥은 지금까지 자신의 불행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섭리가 불합리하고 공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앎(26,4)이 단편적이고 편협했으며,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가 인간의 지력을 넘어서는 것임을 깨닫고 고백한다. ‘어떠한 계획’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메짐마’가 구약성경의 다른 곳(예레 23,20; 30, 24; 51,11)등에서 처럼 죄인들을 징벌하기 위한 하느님의 개입 행위를 가리킨다고 풀이한다.

 

욥은 자신과 같은 의인이 고통 받는 것은 부당하다며 하느님의 개입과 섭리의 문제를 제기했고, 세 친구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적용시켜 고통은 죄에 대한 징벌로 주장했다. 그러나 욥은 하느님과 대면한 이후 모순처럼 느껴지던 세상 질서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에 의해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42, 2은 욥이 자신의 고통을 죄에 대한 징벌로 인정하기보다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해 왔던 하느님 계획과 섭리의 완전성과 절대적 효력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고 받아들였음을 고백하는 뜻으로 풀이해야 한다.

 

욥은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는 너무나 신비스러워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고백한다(42,3). 하느님은 욥에게 창조주이신 당신의 초월성과 권능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다(38,4-39, 30; 40, 8-41,6). 이 말씀은 욥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잘 알고 있다고 판단하고 논쟁의 대상으로 삼았던 하느님의 계획과 정의가 실제로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것이었으며, 그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지껄였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욥은 자신이 여전히 하느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지 상태에 있지만, 예전과 달리 고통을 비롯하여 세상의 질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었음을 고백한다(42, 2-4).

 

욥은 38, 3과 40, 7의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한번 인용하면서(42,4) 하느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그분의 깨우쳐 주심이 필요하다고 고백한다. 욥이 겪은 시련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를 깨우쳐 주시기 위한 하느님의 계시 사건은 하느님의 심오한 섭리를 느끼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욥이 고백하듯(42, 5) 하느님에 관한 앎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욥을 신앙적으로 성숙하게 해준다. 욥은 자신의 이성을 넘어서는 신비스러운 일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또 비록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심오한 뜻이 새겨져 있으며, 모든 것이 그분의 섭리에 의해 계획대로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욥은 세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계시 사건을 통해 성숙해짐으로써 올바른 람을 얻고 참된 신앙을 갖게 된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욥은 존재자체가 변화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이전에도 욥은 하느님 가까이 다가가는 삶을 살았고, 하느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불렀다(19, 25). 이 때문에 욥은 시련의 고통 중에서도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뵙고자 그토록 열망했다(19,26-27). 이러한 욥의 희망과 기다림은 하느님과 만남을 통해 실현되었고, 그의 완전무결함과 올바름을 증거 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생명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게 된다(시편 11,7).

 

욥의 인식과 존재의 변화가 42, 6절에 잘 나타난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않아 참회합니다.” 욥의 대답을 결론짓는 이 말을 그가 죄인임을 확정하는 의미로, 참회했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해석한다면 욥의 완전무결함(1,8)을 인정하고 그를 신뢰하신 하느님의 판단이 잘못되었고, 사탄의 평가(1,10-11; 2, 4-5)가 옳았다는 말이 된다. 욥은 하느님께 반항하였지만 그것 때문에 하느님의 징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본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를 어리석다고 하시면서 욥은 당신에 대해 언제나 올바른 것을 말하였다고 평가하셨다(42, 7-8).

 

따라서 이 구절은 하느님과의 직접 대면을 통해 얻은 욥의 평화로운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단지 욥이 후회한 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에 대해 지각없이 지껄인 자신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즉 먼지와 잿더미 위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통해하던 마음과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 친구에 대한 하느님의 판결(42, 7-9)

 

하느님께서 욥의 편에서 모든 상황을 역전시켜 주시고, 욥과 세 친구의 시비를 판결해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세 친구가 욥처럼 항구한 믿음과 신뢰 안에서 당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시면서 욥의 말이 옳았다고 증언하신다(42, 7-8).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 어디에도 그들을 징벌하시는 판결을 찾아볼 수 엇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욥이 자녀들을 위해 중개자 역할을 했던 것처럼 욥의 중개를 통하여 번제물을 바치게 하신다. 그들의 죄를 물으시는 대신 용서와 자비를 베푸신다. 욥의 이러한 역할을 1,8과 41,7-8에 나오는 “나의 종”이라는 호칭과 연결해 보면, 하느님의 올바른 관계에 있는 완전무결한 욥이 그분의 종으로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사야서 52, 13-53,12에 소개된 ‘주님의 종’처럼 고통을 겪은 의인 욥은 하느님의 구원섭리 안에서 죄인들을 위한 중개자 역할을 부여 받은 것이다.

 

“내가 그의 기도을 들어주어”(41,8)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내가 그의 얼굴을 들어주어”이다. 얼굴 또는 고개를 든다는 것은 승리를 상징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42,8은 하느님께서 직접 욥이 세 친구와의 논쟁에서 승리했다고 판결해 주셨다는 의미이다.

 

욥의 회복(42, 10-17)

 

하느님께서 불행하고 미천한 처지에 놓인 욥의 상황을 급변시켜 주신다. 이로써 욥은 시련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누리게 된다. 저자는 “욥이 제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드리자, 주님께서는 그의 운명을 되돌리셨다. 주님께서는 욥이 전에 소유하였던 것을 갑절로 더해 주셨다.”(42,10)라고 전한다. 하느님께서 욥의 상황을 급변시킨 이유가 그가 하느님께 대해 올바르게 말하고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전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의인(주님의 종)의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욥의 급변한 상황은 형제자매들과 옛 친구들의 방문을 통해 묘사된다(42,11). 욥이 불행을 겪는 동안 그를 위로한 이가 아무도 없었지만, 이제는 친척과 친구들이 찾아와 “주님께서 그에게 들이닥치게 하셨던 모든 불행에 대하여 그를 동정하고 위로하며, 저다마 은전 하나와 금 고리 하나를 그에게 주었다(42,11). 친척과 친구들의 방문(2, 11-13)과 병행하는 것으로, 욥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욥의 불행은 사탄의 계략에 의해 시작되었고,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일시적으로 허락하신 권한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지만 어 이상 사탄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볼 수 없다. 이로써 저자는 사탄의 계략이 완전히 실패했으며, 하느님과 욥의 관계 안에서 사탄이 차지 할 자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욥의 재산이 갑절로 늘어났다는 것(42,10.12)과 완벽한 숫자의 아들(7명)과 딸(3명)을 다시 얻었다는 것(42,13)은 하느님께서 욥의 상황을 뒤바꿰 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세 딸의 이름은 각각 비둘기(여성의 미를 상징: 아가 2,14)라는 의미의 여미마, 계수나무(향료 재료)라는 의미의 크치아, 눈 화장(품을 담은) 뿔이라는 의미의 케렌 하푹이다(42, 14). 세 이름 모두 여성의 미와 미용과 관련이 있다. 이는 욥의 딸들이 시련 이전의 딸들 훨씬 육체적이고 지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복을 받은 욥의 딸들은 다른 여인들과 구별된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아들들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고 딸들의 이름만 나와 있는지 알 수 없다. 욥의 딸들에게도 아들들과 같은 유산을 물려준다(42,15). 아들이 없는 경우에나 가능했던 예외적인 유산 분배 관습이다. 이는 여성의 지위가 높게 평가되었던 고대 족장 사회의 관습을 반영하는 것일 수 도 있지만, 욥이 받은 복이 그의 후손들에게도 차별 없이 전해졌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욥은 “그 뒤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 대에 걸쳐 자식과 손자들을 보았다”(42,16). 칠십인역에 따르면 욥은 ‘그 뒤 백칠십 년을 살았고 이백사십팔 세에 죽었다. 시편 90,10에 인생살이를 ’칠십 년‘이라고 표현한 것과 비교하면 욥은 다른 이들보다 세 배(숫자 3은 완전, 충만을 상징)가 넘는 수를 누리는 복을 받았으며, 사 대(숫자 4는 지상적인 차원에서 완전함을 상징)의 자손들을 보는 복을 누렸다. 그 만큼 욥이 하느님께 충만한 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을 알고 변화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절대 권능과 초월성을 인정하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올바로 판단하며,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참고자료: 시서와 지혜서(구약성경의 이해), 박병규, 바오로딸, 2014, pp. 105-108.

              시서와 지혜서, 김정훈, 바오로 딸, 2007, pp. 62-77.

              주석성경(구약), 한국천주교주교회, pp. 1470-1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