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23,1-24,12): 욥의 불평
욥의 답변 (23장)
오늘도 나의 탄식은 쓰디쓰고 신음을 막는 내 손은 무겁기만 하구려.
아, 그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기만 하면 그분의 거처까지 찾아가련마는.
그분 앞에 소송물을 펼쳐 놓고 내 입을 변론으로 가득 채우련마는.
그분께서 나에게 어떤 답변을 하시는지 알아듣고
그분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련마는. 그분께서는 그 큰 힘으로 나와 대결하시려나?
아니, 나에게 관심이라도 두기만 하신다면. 그러면 올곧은 이는 그분과 소송할 수 있고
나는 내 재판관에게서 영원히 풀려나련마는. 그런데 동녘으로 가도 그분께서는 계시지 않고
서녘으로 가도 그분을 찾아낼 수가 없구려. 북녘에서 일하시나 하건만 눈에 뜨이지 않으시고
남녘으로 방향을 바꾸셨나 하건만 뵈올 수가 없구려. 그분께서는 내 길을 알고 계시니 나를 시금해 보시면 내가 순금으로 나오련마는.(2-10절)
욥의 항변 (24장)
• 주님의 날은 어디 있는가?(1-12절) :사회적 불의는 만연한데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성읍에서는 사람들이 신음하고 치명상을 입은 이들이 도움을 빌건만 하느님께서는 이 부당함에 관심도 두지 않으시는구려.(12절)
• 이들은 빛의 적이 된 자들, 광명의 길에 익숙하지도 않고 그 행로에 머무르지도 않는다네.(13절)
인간의 weakness or brokenness는 자아를 상실하게 만드는가?
Text 안에서
이제 엘리파즈의 담론을 뒤로한 채, 욥의 관점에서 인간의 고통과 불행에 대해 조명해 보자. 사실 엘리파즈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하느님께 다가서서 그분의 치유를 받으라는 것이다. 엘리파즈는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 그분과 화해하여 평화를 되찾게. 그러면 자네에게 행복이 찾아올 것일세”(욥 22,21). 그러나 욥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욥에게 하느님은 ‘접근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23, 3참조). 또한 욥에게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시다. 이 무서움은 욥이 악해서, 잘못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욥이 그분의 계명을 지켰고 그분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음에도 그를 소스라치게 했기 때문이다(23, 10-17).
욥은 공동체 안에서 소외된 이들을 언급하면서, 소외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불의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24, 1-12). 엘리파즈는 시련과 고통이 들이닥치는 것은 악함 때문이라고 했지만, 욥은 자신의 시련과 고통을 불의에 의한 희생으로 여긴다. 이 희생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불의 때문이다. 욥은 하느님이 이 불의를 못 본 체하신다고 생각한다(24, 12).
욥이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것은 올곧은 이는 하느님과 소송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23, 7ㄱ). 그런데 하느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이 무엇을 결정하실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욥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욥은 두렵다는 것이다. 적어도 욥에게는 정의로운 하느님이 존재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올곧은 욥이, 흠 없는 욥이 참아 나서는데도 나타나시지 않고, 욥의 고통뿐 아니라 고아, 과부, 가난한 이들의 아픔 또한 외면하고 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24, 3-4).
그래서 욥은 지속적으로 다음과 같은 태도를 견지한다. “결국은 마찬가지! 그래서 내 말인즉 흠이 없건 탓이 있건 그분께서는 멸하신다네! 재앙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불러일으켜도 그분께서는 무죄한 이들의 절망을 비웃으신다네”(9, 22-23). 이에 대해 욥의 또 다른 친구 초파르는 욥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제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자네를 거슬러 당신 입술을 여시어 자네에게 지혜의 비밀을 알려주신다면!”(11, 5-6r) 이에 욥은 이렇게 대꾸한다. “입 다물고 나를 놓아두게나, 내가 말 좀하게. 내게 무슨 일이든 일어나라지. 나는 내 몸을 내 이로 물어 나르고 내 목숨을 내 손바닥에 내놓을 것이네, 그분께서 나를 죽이려 하신다면 나는 가망이 없네. 다만 그분 앞에서 내 길을 변호하고 싶을 뿐”(13, 13-15).
23장에 이르러 욥은 힘이 빠진다.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이 나타나지 않으신 까닭이다. 욥은 자신의 말이 조금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해 한탄하기 시작한다. 듣지도 보지도 않으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뿐이다. 욥의 하느님은 ‘옳지 않은’ 하느님이고, ‘파멸’의 하느님이고, ‘무관심한’ 하느님이실 뿐이다. 엘리파즈는 이런 욥에 대해 이렇게 평가할 것이다. “자네의 악이 크지 않은가? 자네의 죄악에 끝이 없지 않은가?(22, 5). 엘리파에게 욥은 악인일 뿐이다.
하느님을 향한 욥의 태도는 신성모독에 가까울 정도다. 그러나 그에게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다. 유일하신 붕이기에 그분만이 결정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그래서 매달릴 분도 유일하게 하느님밖에 없다. 시편은 말한다. “당신 앞에서 저에게 승소 판결이 내려지게 하소서. 당신 눈으로 올바른 것을 보아주소서. 당신께서 제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중에도 캐어 보시며 저를 달구어 보셔도 부정을 찾지 못하시리이다”(시편 17, 2-3).
욥이 하느님을 애타게 찾는 것은 자신을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오시라는 호소이다. 사실 하느님은 고아들의 아버지이고 과부들의 보호자이시며 의인들의 버팀목이시다(8편 참조). 자신의 의로움을 알아주고 자신의 시련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을 욥은 역설적이게도 ‘없음’이라고 말한다. 이 ‘없음’은 ‘없음’이 아니라 ‘있음’의 강렬한 외침이다. 하느님은 분명히 약자들의 보호자이신데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니 하느님이 어서 나타나시리라는 것이다. 엘리파즈의 말대로 하느님과 화해해서 평화를 되찾고 그로 인해 행복을 얻어 누리려 해도(욥 22, 21 참조) 그것은 한낱 머릿속의 가르침일 뿐, 그 가르침은 욥의 현실에는 전혀 와 닿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 일뿐이다. 욥에겐 하느님과의 대면이 가장 중요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하느님이다.
욥기의 마지막에 가서 욥은 비로소 하느님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다(42,5) 그토록 하느님을 찾아 헤맸던 욥은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이른 감이 있지만, 욥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느님을 찾는 여정의 책이라 할 수 있다. 고통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온 것이냐를 묻기 전에 참된 하느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묻는 것이 욥기를 읽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고통스런 삶의 신앙의 증거를 위한 도구이자 하느님께 다라서는 꽤 까다로운 길이 된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창세 22장), 또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요한 10, 17-18; 루카 22, 42 참조).
참고자료: 시서와 지혜서(구약성경의 이해), 박병규, 바오로딸, 2014, pp. 97-99.
주석성경(구약), 한국천주교주교회, pp. 1517-1519.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 욥기 주해서, 크리스챤, pp.379-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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