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입문(2)
집회서의 신학적 주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느님(하느님, 창조, 인간)
벤 시라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같은 한분이시다”(42,21). 벤 시라는 스토아 학파의 표현을 빌려 하느님 “그분은 전부이시다”(42,27)라고 고백하였지만, 이는 스토아 사상에 속하는 ‘범신론적 표현’이 아니라 모든 것의 주님이며 원천이신 하느님을 향한 신앙고백이다. 벤 시라는 헬레니즘 문화에 개방적이면서도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알고 계신 이스라엘의 하느님, 모든 창조물과 구별되시는 하느님에 관한 신학적 사고를 고수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우시고 편협하거나 치우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23,1;36,17).
창조에 관한 벤 시라의 신학사상은 더욱 발전된 변신론을 찾아 볼 수 있다. 욥과 코헬렛은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이성적인 접근을 거부했지만, 벤 시라는 이성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그는 세상과 인류 안에 존재하는 악과 하느님의 선하심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악과 선을 동일선상에서 다루면서 둘 사이의 이성적인 질서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 모든 것에 보상원칙이 적용됨을 가르치면서도, 현실적인 고통과 어려움을 낙관적 사고를 통해 극복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분의 경건한 이들에게는 평탄하지만 무도한 자들에게는 장애가 된다. 하느님은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를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막지 못한다. 모든 인간의 일은 다 그분 앞에서 있고 그분의 눈앞에서 숨겨질 수 없다(39,17-19).
벤 시라의 긍정적인, 낙관적 사고관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도 발전적인 생각을 가져온다. 벤 시라는 15,11-20에서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고 선언한다. 벤 시라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신명기계 사상을 수용하면서도(11,26-28; 신명 7,10; 24,16; 예레 31, 10),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원하는 대로 그의 생각대로 살아가도록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한다(15,14).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 도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주도권을 수용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벤 시라는 인간의 윤리적, 신앙적 책임을 언급하면서 죄와 회개에 대해 가르친다(4, 26;17, 25-29). 그러므로 벤 시라가 가르치는 여러 개념 가운데 가장 부정적인 것은 ‘악’과 ‘죄’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에 빠지게 하는 ‘어리석음’이다(13,8). 어리석은 이는 참을성이 없으며, 그의 화 때문에 기쁨은 사라지고, 깨닫고 묵상할 기회조차 잃는다. 따라서 벤 시라는 제자들에게 화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가르친다(1,22).
1. 주님을 경외하는 삶
집회서의 신학적 주제의 중심은 주님을 경외함이다. 주님은 전부이시기에 경외할 수밖에 없고, 인간의 어떠한 삶보다도 초월해 계시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집회 43, 27).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주님의 존재가치에 승복하는 것이다. 특히 집회서에서 주님의 존재를 창조주로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18,1; 24,8). 또 주님은 다른 경외의 대상을 허락하지 않으시며, 그 어떤 때와 장소에서도 그분께 대한 경외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경외는 인간과 주님 사이에 놓인 당연하고도 유일하며 지속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인간이 가지는 일반적인 두려움이 아닌 주님의 현존에 대한 가치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경외를 다른 말로 하면 칭송 또는 찬미라고 할 수 있다.
집회서는 주님께 대한 경외를 구체적인 ‘율법의 실천’과 동일시한다. “모든 지혜는 하느님을 경외함이니 모든 지혜안에 율법의 실천과 그분의 전능하심에 대한 지식이 들어있다”(19,20). 경외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의지문제이다. 그러기에 집회서는 계속해서 교훈과 지식, 지혜를 배우고 익히라고 초대한다. 문자로서만 율법을 익히기보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삶의 현장 안에서 보고 배우고 생각하는 실천적 율법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세상은 주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온통 쏟아 부어 놓은 곳이다. 비록 그 지혜를 다해아리지는 못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지혜를 구하는 노력이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 된다고 가르친다(51,13-30).
주님을 경외함은 한 개인의 지혜가 충만해지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세상 모든 것을 듣고 보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배우는 것이 주님을 경외하는 이유이자 목적이다. 집회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살아간 인물들을 통해 주님께 대한 경외를 게을리하지 않은 삶의 모델을 제시한다(44,1-50, 29). 또한 온 땅과 온 백성, 그리고 모든 민족의 자리를 주님의 지혜가 내려온 곳이라고 천명한다(24,1-22). 너무나 구체적인 역사 안에 너무나 보편적인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는 집회서는 주님께 대한 경외가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느 삶이든, 어느 시대든 주님은 모두의 하느님이시고(36,1), 모두를 넘어선 분이시다(43,28).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경외는 계속되어야 하고 ‘완전함’이 아니라 ‘추구함’이라는 경외본연의 가치를 드러내야 한다.
ex) 시련 중에서도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태도(2,1-6)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시련이나 고통을 악인에 대한 주님의 징벌로 이해했다. 하지만 저자는 시련이나 고통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한다. 주님께서 “재난”(2,2) 과 “질병과 가난”(2,5)등을 통해 당신을 경외하는 이를 단련시키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때를 잘 대비하여 주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는 이는 시련을 거부하거나 그것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 이겨내야 한다. 그러면서 언제 닥칠지 모를 시련에 대비하여 ‘마음’을 다지고 확고히 다지도록 한다.
“재난”(2,2)은 의인이 겪는 개인적 불행이나 역경을 뜻하기도 하지만 신앙을 위협하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 또는 그 유혹에 빠져 율법과 신앙을 버리는 악한 세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1마카 1,10-15). 저자는 그러한 이방문화의 위협이나 일부 유대인들의 그릇된 모습 때문에 당황하지 말고 주님을 향한 믿음을 확고히 다지라고 가르친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시련을 이겨 낼 수도, 하느님을 경외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하느님께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ㄴ).
“애야”(2,1) ‘아들’ 뜻으로 특히 친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아들아’라고 말할 수 있다.
- 주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2, 7-11)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주신다(2,11).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경외하는 이는 결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도 버림받지도 않는다(2,10). 이것이 바로 주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가 받은 자비는 현세적 성격이 강하다. 현세에서 누리는 지상적 행복과 은총을 가리킨다. 자비(헤세드)는 상호 계약관계에 충실한 태도와 상대에 대한 호의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사랑, 자비, 신의, 충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는 두 가지 은총의 속성은 너그러움과 자비이다.
- 불행한 죄인들(2,12-14).
저자는 주님과 그분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한 이들을 향해 불행을 선포한다. ‘비겁한 마음, 나약한 마음(힘없는 손), 소심한 마음으로 번역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비겁한 마음’과 ‘게으른 손’은 가진 사람을 ‘두 길을 걷는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이는 유다이즘과 헬레니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부 유대인들, 곧 주님의 백성이면서도 주님을 믿지 못하고 다른 데서 도움과 행복을 기대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 길을 걷는 이라는 표현은 주님과 바알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스라엘에게 엘리야가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즉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리는 것이다(1열왕 18,21). 또한 저자는 “인내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한다.
- 주님을 경외하는 삶(2,15-18)
저자는 주님의 경외와 사랑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2,15-16).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삶은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고(2,17) 그분의 가르침(말씀, 길,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2,15-16). 이러한 삶이 바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한 마지막 권고는 주님의 크신 자비를 신뢰하면서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기라는 것이다.
“주님의 자비가 크시니, 사람 속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2사무, 24,14). 하면서 주님께서 집주하시는 징벌을 선택한다. 이처럼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의 자비를 바라며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주님의 손“은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가리키지만(민수 11,23;1사무 7,13) 당신께 불충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을 가리키기도 한다(이사 66,2). 이는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의미하고 그분 손에 내맡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2. 인간의 삶과 지혜(보상과 종말)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 도리라고 가르치는 집회서는 인간의 삶을 다음과 같이 조망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그분의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의 길을 지킨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찾고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의 율법으로 만족한다(집회 2, 15-16). 주님께 대한 경건함과 순종은 인간의 삶 전체에 걸쳐 적용되어야 하고, 바로 이것이 지혜로운 삶이자 주님께 합당한 삶이다.
집회서는 선악의 전통적인 대립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온다. 선은 악의 반대고 생명은 죽음의 반대라고 단언한다(33,14).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과 악함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33, 1).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라 말한다(35,1-2). 종교적인 관점과 세상살이의 관점이 하나로 이어진다. 상선벌악의 전통개념 역시 종교적 삶과 사회적 삶의 교집합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집회서이 생각이다(33,13). 벤 시라는 신명기계 보상개념(상급과 징벌)을 현세적 차원에서 이야기 한다. 선을 행하고 순종하는 이들이 누릴 것들은 현세적 축복과 관련된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넉넉한 살림을 꾸리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는 것 등이다. 예를 들면 의인에게 건강(1,18), 장수(1,12), 자녀, 자녀(25,7), 좋은 혼사(26,3), 행복(26,4), 길이 기억될 이름(37,26;39,11) 등이 상급으로 주어진다.
집회서는 내세에까지 그 축복의 영역을 확장한다. 내세에 대한 축복이라는 관점은 히브리 사상 안에서 원래 없었다.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 내세사상이고(2미카 7,9; 다니 12, 2-3), 마카베오 항쟁을 촉발시켰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가 내세에 대한 희망을 더욱 강하게 했다. “반드시 살아날 것”(집회서 48,11)이라고 희망하는 말마디에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집회서의 염원을 엿볼 수 있다. 죽어서나 살아서나 오직 선함과 율법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는 데 이유가 있는데 주님께 대한 경외의 삶이 인간의 삶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을 때 가장 충실히 살 것을 집회서는 주문한다.
코헬렛은 죽음 때문에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지만(코헬 3,19) 벤 시라는 죽는 날이 지나온 삶의 가치를 드러내 주는 보상의 날이라고 가르친다(1,13). 비록 벤 시라가 죽음 이후의 보상개념을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악인은 의인보다 훨씬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면서(10,16-13), 악인과 의인의 운명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유대교 전승 안에서는 내세 개념을 찾아 볼 수 없지만 17,17ㄴ과 48ㅡ11ㄴ의 그리스 역본(Gr I)에는 내세에서의 보상개념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아마 다니엘서(다니 12,1-2)와 마카베오 하권(2,7)의 내세관에서 영향 받은 듯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리스어 역본(Gr. II).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더욱이 시리아어 역본에서는 “영원한 생명”(1,12ㄴ, 20; 3,1ㄴ;48,11ㄴ)이라는 표현이 덧붙여져 있다. 집회서의 메시아 사상은 36,1-22에 나오는데 비록 ‘메시아’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지만 지상적 차원에서의 메시아 시대를 희망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고민과 두려움은 죽음의 날과 연결된다(40,1-11; 41,1-4). 그래서 결론적으로 두 가지 삶을 제안한다. 계명을 지키고 죄를 짓지 말라는 것(7,36-8,7; 28,6)과 슬픔에 잠겨 의기소침하지 말고 주어진 것을 열심히 즐기라는 것이다(14,11-16). 집회서가 제안하는 인간 삶의 참된 방향은 황망한 죽음의 두려움에 싸여 있지 말고 죽음의 때를 생각해서 더욱더 기쁘게 살면서 계명에 충실하여 행복을 얻어 누리는 것이다.
ex) 지혜의 찬미(24, 1-22)
집회서는 창조와 이스라엘의 구원역사의 관점에서 저자가 이해한 지혜에 관한 신학사상을 담고 있다. 저자는 지혜를 의인화하고 하느님과 공동체를 이룬 존재로 소개한다.
- 지혜를 찬미하는 장소(24, 1-2)
지혜가 자신을 찬미하는 장소는 세속, 자신의 백성 가운데(24,1), 지극히 높으신 분의 모임에서(24,2), 자신의 군대 앞에서(24,2)이다. 이는 지혜가 하느님의 천상 어전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곧 하늘과 땅의 모든 곳에서 자신을 찬미하고 자랑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세 장소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예루살렘 성전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지극히 높은 신분의 모임‘은 천상 어전회의 일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집에 모임 예배 공동체 이스라엘을 가리킬 수도 있다. 지혜의 장소가 하늘과 땅, 천상과 지상처럼 소개된 이유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특히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지혜를 통해 하느님을 뜻을 알고 그분께서 제시하신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지혜의 선포는 창조 세계 안에서 때와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울려 펴져야 한다는 말이다.
지혜는 또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성 시온의 거룩한 천막 안에 자리 잡고 하느님을 섬기며 이스라엘을 위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한다(24, 10-12). 지혜는 “거룩한 천막”(24,10) 곧 광야의 만남의 천막에서부터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 직분을 수행하였으며, 이 때문에 시온의 성전에 안식처를 마련하고 같은 사명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24,13-18)고 자랑한다.
- 지혜의 기원과 거처(24, 3-6)
“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에서 나와”(24,3)라는 말은 지혜가 창조주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안개처럼 땅을 덮었다”(24,3)라는 말은 창조 때 심연 위에 감돌던 하느님의 영과 지혜가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창세 1,1-3). 안개는 구름(호미클레)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시야가 흐린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또한 이집트 탈출 사건 때의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으로 안개처럼 땅을 덮은 지혜도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한다고 풀이 할 수 있다. 하느님에게서 기원한 지혜의 현존이 우주를 풍요롭게 하고 생명을 지니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높은 하늘에 거처를 정하고(천막을 짓고) 구름기둥 위에 내 자리를 정했다.”(24,4)라는 말씀은 지혜의 자리가 곧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자리라는 뜻이다. 땅을 덮었다는 것의 의미는 지혜의 지배권을 강조하는 말로 지혜를 통해서만 생명과 번성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암시이다.
이스라엘과 지혜(24, 7-12)
지혜는 하느님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리 잡았으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권으로 소개한다. 라삐전승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율법을 만들어 모든 민족에게 주셨지만 오직 이스라엘만이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한다(신명 33,2). 그러나 집회서의 저자는 율법과 지혜를 동일시하면서(24,23) 지혜는 모든 민족에게 주어지지 않고 하느님의 명에 의해 이스라엘 안에만 자리 잡았다고 가르친다(24, 7-8). 지혜가 한 처음 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그분께서 창조하셨고(24,9)라는 말은, 지혜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느님의 영원성 안에서 창조된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지혜는 끝이 없는 존재, 영원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는(24,9) 존재이다.
지혜의 본성과 위대함(24, 13-18)
성경에서 지혜는 여러 지명과 식물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자신의 본성과 위대함을 자랑한다. 지혜가 지역적으로는 레바논과 헤르몬 산(24, 13-14)에서 동쪽으로는 엔 게디(24,14)과 서쪽(해안 지방의 평원: 24,14)으로 확산되어 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곧 지혜가 이스라엘 땅 전역으로 자신의 권능과 역할을 넓혀갔다는 의미이다.
지혜는 또 지명과 식물 이름이 쌍을 이루어 지혜의 본성과 위대함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준다. “레바논의 향백나무”(24,13)는 지혜의 영광(이사 35, 2참조), “헤르몬 산의 삼나무”(24,13) 이는 향백나무, 송백나무, 방백나무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활력이 넘치는 생명력(50,10; 2열왕 19,23; 에제 31,8), "엔 게디의 야자나무”(24, 14)는 올곧음을 (시편 92,13 참조)상징한다. 지혜는 축제의 기쁨을 상징하는 “에리코의 장미”(24,14), 평화와 축복의 상징인 “평원의 싱싱한 올리브 나무”와 “플라타너스”(24,14) 같은 존재다. 여러 가지 향나무와 향기(24,15)는 지혜의 전례적인 역할을 부각시켜준다(탈출 30,23). 지혜의 전례적 행위는 “천막 안에서”라는 표현을 토대로 전례 장소를 ‘성전’에 국한시킬 수 있지만 24,13-14이나 24,16이하는 팔레스티나 전 지역과 이 하느님의 성소이며, 지혜가 하느님을 섬기며 이스라엘을 위한 사제직을 수행하는 장소이다.
지혜의 폭 넓은 성장적인 모습은 테레빈(상수리, 향엽나무) 나무처럼 가지를 사방에“(24,16) 뻗었다는 말은 지혜의 거룩함이 이스라엘 땅을 가득 채웠다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이 나무를 신성시 했다(창세 35,4;여호 24,26). 또 유배이후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테레빈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나온 ”거룩한 씨“라고 생각하였다(에즈 9,2; 이사 6,13).
“포도 순”과 “꽃”(24,17)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한다. 그러나 집회서의 저자는 지혜를 풍성한 포도원의 포도나무에 비유하며 지혜가 맺는 달콤한 열매가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이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자 한다. 상수리 나무와 포도나무가 지혜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바뀐 이유는 지혜가 바로 이스라엘을 상속으로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갖추어야 할 사랑과 경외심과 지식과 거룩함의 본성이 지혜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 지혜를 향한 초대(24, 19-22)
지혜의 자기 찬미는 독자들에게 자신을 향해 나오도록 초대한다. 지혜가 독자들에게 먹으라고 초대하는 열매는 하느님의선물인 지혜자신이다(24,21). 지혜가 사람들에게 먹으라고 내주는 열매도 집회서 저자가 수집하여 수록한 지혜의 가르침 전부를 의미한다. 지혜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지혜를 기억하고 차지한다는 뜻이다(24,20). 율법을 되새기며 자신의 삶을 되도록 차지하는 것을 뜻한다. 지혜는 하느님께 향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영적양식이며, 하느님의 은총과 복 안에서 살게 해주기 때문에 꿀보다도 더 단맛으로 인생을 즐겁게 해준다. 지혜는 자신을 먹고 마시는 이들이 더욱 배고프고 목마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24,21). 달콤하고 행복한 삶이 양식인 지혜를 맛 본이들은 더욱 지혜를 열망하게 될 것이다. 후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집회서의 가르침을 완성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인간은 ‘수치와 죄’(24,22)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지혜를 먹고 마셔야 했다. 지혜를 맛봄으로써 얻는 새로운 배고픔과 목마름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질 참된 양식과 음료를 향한 열망으로 나아간다.
집회서 저가가 소개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서 창조의 힘을 지녔으며(24,3), 창조된 세계의 지배자로서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영(창세 6,3)과 같은 존재이다. 지혜는 하늘에 거처를 정하고, 하느님의 현존으로 창조의 힘과 세상의 권능을 지녔다. 이렇게 소개된 지혜는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육화된 말씀’ 곧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거처하게 하신 지혜는 육화하시어 이스라엘 가운데 자리 잡으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지혜와 말씀은 우리의 참된 음료이다. 지혜는 자기를 먹고 마시라고 초대한다. 지혜가 주는 음료는 세상의 어떤 양식보다 달콤하며 그것을 취하는 사람에게 생기와 기쁨을 준다. 또 이 지혜는 당신의 몸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 56-57). 구약성경의 풍성한 음식과 음료가 차려진 잔치는 하느님의 구원이다. 결론적으로 지혜가 마련한 잔치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잔치이며, 지혜가 사람들에게 먹으라고 재누는 양식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받아 마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예표한다.
3.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
집회서가 쓰일 당시에는 헬레니즘이 영향 아래 신들과의 관계 안에 놓인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그리고 그 인간이 신들과 함께 있음에도 왜 악을 저지르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수많은 논쟁이 있었다. 집회서는 이러한 논쟁에 대답을 던져준다. 먼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천명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존재로서 주님이 만드셨다는 것이다(집회 15,4).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졌고, 창조주의 의해 다스림의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 범주는 훌륭한 것이었다(39,16-17).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하기도 한다.
인간은 왜 악을 선택하는가? 집회서는 인간의 탐욕에서 그 답을 찾는다. 탐욕은 죽음이고 건강을 해치며, 절제는 생명을 연장해서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한다(31,20;37,31). 어떻게 보면 모든 악은 욕망의 분출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기주의적인 모습에서 탈피하면 마음이 행복해지고 진정으로 자신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30,25), “마음이 밝은 이” 는 그리스말 사본과 히브리말 사본에 따라 ‘행복한 마음 어진 마음, 훌륭한 마음’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악을 피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지의 절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가증하다. 자신의 삶을 해치는 것에 대해 신중한 태도는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소중함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다. 우리의 눈이, 우리의 귀를 통해 아무렇게나 보고 듣지 않도록 의식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적합한 태도이다. 해여 나쁜 길로 나아가거나 악에 젖어들더라도 집회서는 주님의 자비를 통해 회개와 경건함의 삶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사실 인간은 먼지와 재로 대변되는 나약한 존재다(18,8-10). 주님의 자비는 나약한 인간이 참된 지혜의 삶으로 되돌아오도록 이끄는 목자와 같다. 집회서은 마지막은 다시 한번 우리를 지혜로 초대한다. 갈증에 목말라하는 삶이 되지 않고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이 되도록 우리를 지혜로 이끈다. 우리 삶이 악의 멍에에 짓눌러 노예의 삶으로 전락하지 않고 지금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 기쁘게 즐겁게 되도록 부추긴다.
※ 참고문헌
1. 성경 읽기 안내 구약2, 성서와 함께, PP. 59.
2. 시서와 지혜서, 박병규, 바오로 딸, PP.231-273.
3. 시서와 지혜서, 김정훈, 바오로 딸, PP.2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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