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길잡이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입문

마리아 아나빔 2014. 3. 14. 11:41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입문

 

 

I. 입문

 

 

1. 책의 이름

 

 

에즈라기 ․ 느헤미야기는 바빌론으로 유배되었던 유다인들이 폐르시아 치하에서 1차로 귀환할 때(기원전 538)부터 유다 총독 느헤미야의 두 번째 임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들의 이름은 이 시대에 활약했던 대표적 두 인물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다.

 

에즈라기 ․ 느헤미야기는 원래 히브리 성경과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한 권이었는데, 라틴어 성경(불가타역: 성예로니모 번역)에서 두 권으로 분리되었다. 15세기 이후 히브리 성경에서도 둘로 구분하였다.

 

 

2. 저자, 집필 연대

 

에즈라기․ 느헤미야기의 저자는 역대기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세 권에 쓰인 어휘와 문체, 기본사상 등이 유사(율법, 성전, 제의중시와 시온신학)할 뿐 아니라 에즈라기가 역대기의 끝부분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역대기 편찬자가 집필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제의와 성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상당한 식견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레위지파의 사람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400년경까지의 내용을 취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후인 기원전 4세기 중엽이나 말경에 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3. 구조

 

제1부(에즈 1-6장): 귀환과 새 성전의 건축

제2부(에즈 7-10장): 에즈라의 귀환과 개혁

제3부(느헤 1-7장): 예루살렘 성벽 재건

제4부(느헤 8-10장): 율법의 낭독과 참회

제5부(느헤 11-13장): 느헤미야의 개혁

 

 

3. 시대 배경

 

에즈라기․ 느헤미야기는 유배 이후 폐르시아 시대, 즉 키루스가 등장한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출현할 때까지 팔레스티나에 살던 유다인들의 상황을 알려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기원전 539년에 바빌로니아 제국을 함락시킨 폐르시아 황제 키루스가, 이듬해에 유배민들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 복구사업을 명하는 칙령을 반포한다. 이로써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다. 유배민들이 귀환하면서 유다 땅에는 네 분류의 사람들이 공존하게 되어 갖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바빌론 귀환 후 유다 땅을 둘러싼 네 부류의 사람들>

 

 

1) 유배에서 돌아온 귀환민

     종교적 열정과 희망을 갖고 귀국

    조국의 비참한 현실

 

 

2) 본토에 남아 있던 유다인

     우상 숭배와 혼합종교

     재산권 문제와 분열과 미움

 

 

3) 유다 지방의 이방인 주민

      야훼 신앙에 충실성 여부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4) 해외 디아스포라 유다인

      귀환길이 마련되어야 하고

      조국과 연결되기를 희망

 

 

 

 

II. 내용

 

 

1. 귀환과 새 성전의 건축(에즈 1-6장)

 

 

유다인들은 유배라는 뼈저린 체험을 통해 자기들의 몰락이 주님께 불충했던 결과임을 깨닫고 죄스런 과거의 생활을 청사하면서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렸다.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제2이사야, 에제키엘 등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시리라고 예언하여 그 기대를 고조 시켰으며, 유다인들은 귀환과 성전 재건공사를 허락하는 황제의 칙령을 자기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당시 약속에 충실하신 주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앙과 충실성을 드러내는 표지이며,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결속시킨다는 의미에서 가장 먼저 착수해야 할 과제였다. 역대기계 사가는 모든 일이 “율법에 쓰인 대로”(3,4)행해져야 하며, 제단도 원래의 터전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2. 에즈라의 귀환과 개혁(에즈 7-10장)

 

 

역대기계 사가는 에즈라를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자로 제시한다. 그는 약 오천 명의 동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에즈라는 하느님의 법과 폐르시아 임금의 법에 따라서 사법 질서를 바로잡고, 예루살렘과 유다의 종교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또 그는 유다인 종교의 고유한 핵심인 율법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사명을 받았다.

 

에즈라는 유다 땅에 신정을 확립하거나 율법의 절대적 유효성을 입증하기보다, 사마리아를 포함한 열두지파로 이스라엘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의 통혼을 끊는 개혁작업부터 시작한다.

 

 

3. 예루살렘 성벽 재건(느헤 1-7장)

 

 

느헤미야는 폐르시아에서 형제 하나니에게서 예루살렘이 버려진 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슬피 울고 탄식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드린 지 4개월(카슬레우 달(1,1) -니산 달(2,1) 만에 느헤미야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 성벽 재건에 필요한 목재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웃 주님들이 집요하게 공사를 방해한다.

 

 

1) 외부의 어려움: 이웃 관료들의 방해공작

 

유다에 대하여 아스톳인들, 아라비아 사람(게셈), 암몬(토비야), 호론 사람(산발랏) 등이 방해한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장애를 물리치고 52일 만에 성벽 복구공사를 완성한다.

 

 

2) 내부의 어려움

 

밖의 곤경이 해결되자마자 내부 문제가 심각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면서 문제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집중되었다. 고통당하는 백성의 외침소리를 들은 느헤미야는 동포를 착취하는 자들을 엄하게 꾸짖고, 수탈한 제물을 돌려줄 것을 서약하게 하여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도록 한다(5,10-13).

 

ex) 굶주림, 빚, 식량부족- 가정파탄

       재산을 저당잡힘 - 형제애 없음

       자식을 종으로 팜 - 고리대금업

 

 

4. 율법의 낭독과 참회(느헤 8-10장)

 

 

성벽을 완공하여 안정된 생활 기반이 조성되자,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생활을 크게 혁신한다. 그는 먼저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법전을 듣는 일부터 시작한다. 에즈라가 특별히 마련된 나무 연단에 올라가 아침부터 한낮까지 법전을 읽어 주었고, 레위인들은 그 옆에 서서 백성들이 읽은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해 주었다. 다음날 백성은 율법의 지시에 따라 초막절을 지낸다. 이스라엘은 새해 첫 달인 7월(양력 9-10월) 초하루를 주님께 바쳐진 거룩한 날로,10일은 죄를 벗는 날로 여겼고, 15일부터 일주일간을 초막절 절기로 지냈다.

 

 

5. 느헤미야의 개혁(느헤 11-13장)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예전부터 공동체를 괴롭히는 골칫거리를 파악하고, 타협과 붕괴로부터 공동체를 구할 수 있는 조치를 단호하게 취한다.

 

 

 

III. 신학적 이해

 

 

1. 성전 복구

 

성전의 증축이나 변화, 그리고 기물들 종종 유다 통치자들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 보통 신명기계사가의 시각을 통하여 우리는 성전에 들여온 이방 종교의 요소는 혼합종교 행위이며 야훼께 대한 불충실로 당연하게 보고 있지만, 임금들은 그것을 외국 세력을 견제하는 종교 정치적 전략으로 택했다. 따라서 키루스의 칙령에 의한 성전 건립은 유다민들에게 정치적 자치권의 수단을 복구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ex) 아하즈는 다마스쿠스를 방문하여 그곳에 있는 제단 모형을 정확하게 본떠 새 제단을 만들어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에세르 3세의 비위를 맞추려했다.

므나쎄는 성전과 그 안 뜰에 야훼 종교과 무관한 다양한 것들을 만들었다.

신명기계 저자는 솔로몬의 레바논의 수풀궁의 전리품과 보수들은 왕궁이나 비품의 약탈로 묘사하기 보다는 정치적 형세의 소멸로 기록한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다인 문화를 뿌리채 뽑고 헬레니즘 문화로 대신하려고 유다인생활의 핵심인 성전에 올림푸스의 제우스 신상을 배치하였다. 이 잔혹한 종교-정치적 행동으로 마카베오 항쟁이 반발하였고 성공적이었다.

 

 

2. 에즈라의 율법서

 

에즈라 이야기는 그가 회중 앞에서 율법을 봉독하는 것으로 결론짓는데(느헤 8장), 에즈라가 이 책을 썼는지 편집했는지 성경은 아무것도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대는 애 율법이(에즈 7,6; 느헤 8,1;13)에서 모세의 율법서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에즈라-느헤미야기 본문은 이 율법이 오경이었다고 제안하고 있다. 많은 현대 학자들이 이 견해에 동의하였다. 정경에서는 느헤미야의 위치는 에즈라 이후나 혹은 동시대로 추정한다. 그러나 언제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판명된 율법이 분실되었을 리가 없으며, 현재의 정경에 틀림없이 포한되어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따라서 느헤미야는 신명기(15,15)와 레위(레위 23,33-43)를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따라서 율법서를 신명기적 요소로만 또는 사제계 요소로만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에즈라기-느헤미야기가 어떻든 이 율법서의 범위에 대해 뚜렷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정체에 대한 견해는 오경의 형성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느헤 8,1; 에즈7,14))를 오경 전체의 마지막 편집으로 본다. 또 유다인으로 개종한 외국인들이 오경을 수용한 것은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 훨씬 후에 성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에즈라가 모세 율법에 대한 새로운 전면적인 법전 편찬을 공포하기 전에 혼종결혼자들에 대한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는 가정은 가능성이 낮다.

 

 

3.  신앙 수호를 위한 혼종결혼 반대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다른 종교, 다른 종족 간의 혼인을 반대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외부인들이 정치적 위치를 강화하려고 그것을 이용한다는데 기인한다. 혼인 개역가로서 느헤미야는 “법률은 그것으로 자유를 방해받는 사람을 위해 적용되어야 한다”라는 기이한 소리에 명문화되어 있는 인간의 자유의 심오한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선한 법의 허점은 항상 사악한 이들에 의해 오용될 것이지만,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은 결국 점진적으로 철저한 법률주의를 낳게 된다.

 

 

에즈라의 개혁에도 역시 느헤미야의 개혁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사제요 율법학자로서 에즈라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혼종결혼에 대한 반대는, 사실 성경에서 혼종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는 야훼신앙을 반대하는 정치적 분규를 내포하는 결혼들만을 배제하는 동기와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탈출 34,16;신명 7,3). 그리고 신명 21,13은 명백히 영향력이나 종교적 권리가 없는 적대적 외국인들과의 결혼은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요셉, 모세, 그리고 다윗이 외국인 아내를 두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면 솔로몬과 아합의 예에서 우리는 금지된 혼종결혼이란 단지 우상숭배에 가까운 경우를 제공한 자들에게만 해당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종교적 계약이든 자기 보호적 또는 구심적 성격으로 인해 바깥 집단에서 결혼 배우자를 찾는 것에 대해 그만큼 적대적이다. 그러나 종교적 확신의 원심적 또는 확산적인 성격은 결혼동맹을 가장 강렬한 장치로 본다.

 

 

 

 

 

※ 참고문헌: 성경읽기 안내 구약1, 성서와 함께,2007, pp.167-172.

                   역사서 2, 성서사십주간 진정판, 성서와 함께 2007, pp. 8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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