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예언서 입문2
제2이사야 : 40-55장, 바빌론 유배 시대 말기에 제자에 의해 쓰임
<인물>
이사야 40-55장을 선포한 예언자는 기원전 6세기 중반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유다인이다. 대 예언자 이사야의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이는 그를 편의상 제2이사야라고 부른다. 제2이사야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흥을 자아내게 하는 필력을 지닌, 성경 문학상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다. 네 차례 제시되는 ‘주님의 종의 노래’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격조 높은 서정을 유지하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마련하실 위대한 일들을 현재 유배자들이 완고하게 외면하고 있는 사실에 부닥칠 때에는 그지없이 슬퍼했다. 그는 실망한 백성에게 용기를 주며, 창조주 하느님의 능력과 유일성, 절대 주권에 대한 신앙을 일으켰다.
<시대배경>
제2이사야서는 기원전 550-539년의 바빌로니아 유배생활을 배경으로 한다. 제2이사야는 그 시대에 좌절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나큰 희망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했다. 제2이사야는 고대 근동의 패권이 바빌로니아에서 폐르시아로 옮아가리라고 예고하면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의 출현을 예언한다(45,1). 또한 다윗 왕조가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유배생활의 고통스러운 체험을 이야기한다.
폐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기원전 550년에 메디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기원전 540년에 루드 왕국, 기원전 539년에 바빌로니아를 점령한다. 그런 다음 키루스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온 타민족들의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하는데, 유대인들도 그 대상이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유다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꿈을 실현하게 된다.
<내용>
1) 40,1-44,23: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
제2이사야는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유배중인 이스라엘을 위로하면서 야훼만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느님이시라고 강조한다. 이집트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주님께서 이제 바빌론에서도 구원(제2의 탈출기)해 주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2) 44, 24-48, 22: 창조주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
야훼만이 하느님이시고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며 온 세계의 주님이시라고 밝힌다.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역사의 주재자로서 이방인 임금 키루스를 도구로 삼아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이스라엘에 구원을 베푼다. 예언자는 미래의 주인이신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께 의탁하도록 위로하고, 확신을 심어준다.
3) 49,1-55,13: 주님의 종의 노래
‘주님의 종’의 노래는 주님의 구원을 수행할 종의 모습을 밝힌다. 주님의 종의 노래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깊은 사랑을 드러난다. 주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넷째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한다.
- 첫째 노래(42,1-9)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 둘째 노래(49, 1-7)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관이 드러나리라”
- 셋째 노래(50, 4-9)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 넷째 노래(52,13-53, 12)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매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질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신학사상>
1) 하느님
제2이사야도 하느님을 초월적 거룩함을 지닌 분으로 선포한다. 야훼는 거룩하시고 다른 어떤 존재도 그분과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분이시다. 이러한 신학사상은 내가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내가 하느님, 나 같은 이가 없다는 선포에서 잘 드러난다.
야훼의 초월적 거룩함은 그분의 영원성을 드러내는 표현에서 잘 나타나는데, 제2이사야는 야훼를 “영원하신 하느님”(40,28), “시작이고 마지막”(41,4)이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야훼 이외에는 다른 신이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선포한다(43,10참조).
세상을 창조하신 야훼 하느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세상을 재창조하시고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이시다. 야훼는 정의로우신 분으로서 당신이 뽑으신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주신 구원약속에 언제나 충실한 분이시다. 그 때문에 야훼는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어 그들에게 당신 자신의 영광을 선물하는 하느님이시다(44,23).
제2이사야는 초월적인 거룩함을 지니신 야훼께서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인,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며 해방자이시라는 믿음을 토대로 유배자들을 위로하고(40,2) 그들의 마음에서 온갖 두려움을 몰아낸다(41,10,13-14).
2) 새로운 탈출(새로운 창조)
제2이사야 선포하는 구원은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탈출보다 더 경이로운 사건이다. 즉 ‘새로운 탈출’이라는 불리는 이 구원사건은 바빌로니아에서 나옴- 광야를 지나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창조주이신 야훼께서 이루신 재창조 또는 ‘새로운 창조’ 행위로써 야훼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세상의 주인이며 역사의 주도자이시라고 선포한다. 또한 모든 것이 야훼에게서 기인하였다는 것을 강조한다.(43, 1.7.15; 46,7). 새로운 탈출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야훼의 영광 안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탈출은 미래에 있을 또 다른 탈출(완전히 새로운 창조)을 통하여 완성될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지막 완성을 이루게 될 것이다(2코린 5,17).
3) 주님의 종
주님의 종은 충실하게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선포하고, 지상에 그분의 가르침(법)을 전한다(42, 1-9)). 주님의 종은 온화한 통치방법으로 모든 민족이 주님의 판결을 받아들이도록 이끌 사명과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이끌 사명을 받은 키루스의 승리를 노래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첫째노래). 둘째 노래는 주님의 종은 명백하게 이스라엘을 지칭하지만, 개인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란 존재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주님께서 선택하신 어떤 사람을 의미한다(49, 1-7).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는 주님께 대한 굳은 신뢰 가운데 모든 고난과 박해를 이겨내는 어떤 사람이 주님의 종이라고 불린다(50,4-11). 넷째 노래는 주님의 종은 시련과 불의한 재판으로 인해 죽어야할 운명을 지닌 어떤 사람이다. 무고한 주님의 종의 죽음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는 사건이다. 그의 대속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을 걷게 된다(52, 13-53,12).
<중심주제와 메시지: 구원선포>
제2이사야서는 첫 장부터 위로와 구원을 선포한다(40,1). 전체적 흐름에서도 유배의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귀향(41,17-20)과 예루살렘의 번영을 선포한다. 하느님의 처벌에서 오는 고통은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정화시키는 도구가 된다. 특히 고난을 겪는 주님의 종을 통한 구원 선포가 주목할 부분이다.(42,1-9; 49,1-7; 50,4-11).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오는 것은 새로운 탈출이다. 새 출애굽으로 옛 체험을 더없이 강하게 상기시키며, 그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약속을 이룰 수 있는 구원자이신 주님은 바로 창조주 하느님이시기에, 그런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계시다고 이야기 한다.
제3이사야서: 56-66장,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 정리됨
<인물>
제3이사야는 유배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느님은 이방인이든 유다인이든 구별 없이 모두 구원하시고자 한다고 강조한다. 제3이사야서는 기원전 537-510년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누가 썼는지, 제2이사야서의 필자와 동일 인물인지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다만 제3이사야서의 내용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시대배경>
제3이사야서는 바빌로니아 유배이후(기원전 538)부터 에즈라와 느혜미야 시대(기원전 5세 중엽)이전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다양한 체험을 한 여러 구성원이 함께 모여 살게 되자, 토지 분배와 주님 예배 형식의 차이 등 각종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된다. 제3이사야서는 유배에서 귀환한 직후(기원전 538-520)에 주된 활동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귀환자들은 하까이와 즈카르야 예언자의 격려를 받으면서 성전 재건에 온 힘을 기울여 기원전 515년에 완성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본문의 신탁 내용에 따르면, 아직 성전이 완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제3이사야는 다양한 그룹에게 신탁을 전한다. 곧 귀환자들과 유배생활을 하지 않은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인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야훼를 믿는 이방인: 56,3-8)이다. 이들 그룹 사이에 긴장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사이의 대립이나 불목은 57, 3-21; 58,3-10; 59,3-5; 66,6.14-17에 잘 나타난다.
<구분과 내용>
56-58장: 새 공동체(공동체에서 수용하는 사람의 조건)
59,1-15: 비탄의 기도
59,16-21: 구원이 예루살렘 위고 펼쳐지고 정의를 위해 주님께서 오심
60-62장: 예언자가 전하는 기쁜 소식의 수신인-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
63,1-6: 복수의 날에 개입하시는 주님
63,7-64,11: 자비를 구하는 기도
65-66장: 구원받는 공동체(역사를 초월한 그곳에 구원이 온다)
1) 56,1-62,12: 위로와 경고의 노래
제3이사야는 실의에 빠져 있는 백성을 위로하며 새 희망을 안겨 준다.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사회정의를 이루라고 촉구한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56,1). 그리고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참된 단식과 안식에 대하여 일러주며,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라고 촉구한다.
2) 63,1-66,24: 새 하늘 새 땅의 노래
하느님의 백성이 받게 될 미래의 영광에 대한 중요하고 아름다운 예언의 말씀이 선포된다. 주 하느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찬란히 빛나고, 뭇 나라도 그 영광을 찬미하며, 새 세계는 기쁨이 충만하고, 모든 적개심과 악이 사라져 첫 창조 때의 낙원이 이룩되리라는 예언이다. 새 창조에 대한 예언자의 희망은 하느님에게만 의존하고 살아야 한다는 신앙의 표현이다.
<신학사상>
1) 하느님
야훼는 “드높고 뛰어나신 분,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60,9), 하늘에 거하시는 분이”시다(63,15). 야훼는 영원하시며, 모성적 사랑과 연민(Compassion)의 정이 넘치는 분(63,7-9)인 동시에 부성적 사랑도 가득한 분이시다. 이런 사랑과 연민은 특히 자신을 낮추는 이, 슬퍼하는 이, 뉘우치는 이들에게 집중된다. 동시에 죄인들에게 진노하시는 분이시며, 그분이 오시는 날, 어떤 죄인도 그분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63,1-6;66,15-17). 그러나 자비가 충만한 그분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죄를 잊으신다.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며 구원약속을 틀림없이 실현하는 분이시다.
2) 보편적 구원
보편적 구원에 관한 신학사상은 책 서두(56,3-7)와 맺은 부분(66, 18s-21)에서 볼 수 있다. 구원선포는 재건된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야훼 하느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알고 그분께 이스라엘과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백성에게 해당된다.
이방인은 신명기의 율법에 따라 ‘하느님 백성’에서 제외된 사람이다(신명 23,2-5). 그러나 이제 야훼께서 원하시는 것, 좋아하시는 일을 행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삶만으로도, 누구든지 하느님 백성으로 불릴 자격이 주어진다(56,3-5). 또한 야훼께서는 먼 곳에서 당신을 향하여 나아오는 이들을 레위인과 사제로 삼으실 것이다(66, 21).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바칠 예물을 들고 예루살렘에 찾아와 하느님의 사제가 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할 것이라는 예언(61,5-6)은 하느님의 구원이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적으로 적용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모두가 한분이신 하느님 야훼의 구원을 차별 없이 입게 될 것이다. 다만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역사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것, 곧 이스라엘은 하느님 ‘구원의 맏아들’이며, 예루살렘은 그 구원이 만방으로 펼쳐질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중심주제와 메시지: 구원의 기쁜 소식>
제3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고(56,9-12;57,3-13; 59,1-8), 구원을 선포하는 등 대부분 제1이사야서와 제2이사야서가 다룰 주제를 반복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재건과 관련된 선포는(57,14-21; 58,12) 제3이사야서가 앞의 두 이사야서와는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3이사야서에서는 새 공동체가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그 존재가 선포된다고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축복이 가득하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65,17-18).
<세밀한 독서>
제2이사야(52,13-53,12)
- “보라 나의 종을” : 하느님께서 당신 종의 ‘낮아지고 높아짐’에 대해 말씀하신다. 주님의 종에게 일어난 극(낮아짐/ 사람의 몰골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짐)과 극(높아짐)의 모습은 이제껏 ‘알려지지 않는 것’이며, 이 때문에 수많은 민족과 임금이 주님의 종 앞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사람의 몰골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모습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종은 더없이 존귀해지는 들어 올림을 받게 된다.
- “가난과 멸시” :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자라났다고 소개한다(53,2). ‘새순’과 ‘뿌리’의 이미지는 이사야서 11,1-4의 ‘메시아 파견 약속’에서도 나타난다. ex)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따라서 ‘주님의 종’의 넷째의 노래가 말하는 이종은 다름아닌 ‘메시아’이다. 그러나 주님의 종, 곧 메시아는 영광도 힘도 권능도 지니지 못한 가난한 존재(메마른 땅의 뿌리)이다. 그래서 주님의 종은 사람들에게 전혀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요, 멸시와 배척의 대상이다. 그 이유는 그가 ‘고통과 병고’에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고통과 병고”: 고통과 병고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징벌을 상징한다. 그런데 메시아는 하느님의 은총과 무관한 사람으로, 아니 하느님의 징벌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으로 비쳤기에 사람들은 주님의 종을 천대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대한다. 그러나 ‘우리’라고 소개된 그룹(예언자를 대표하는 공동체와 개인)은, 종의 고통과 병고가 자신들의 악행과 죄악을 대신하여 당한 징벌이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종을 통하여 죄와 징벌에 대한 엄한 율법 기준이 무너진다. 하느님은 ‘우리’라는 공동체가 범한 죄악의 대가를 종에게 지우셨다. 이로써 하느님은 공동체에 파멸 대신 ‘평화’,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간 양떼’의 비유는 죄의 대가로 유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을 묘사하고 위해서 사용한 표현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에게 죄악을 지우시고 징벌하셨기에 공동체는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백성은 ‘종이 낮아지고 높아짐’으로써 그것을 깨닫게 된다.
- “죽음과 묻힘”(53,7-9) : ‘학대받고’(53,7)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당한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탈출 3,7-1). 종은 학대받고 천대받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인다. “도살장에 끌러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있는 어미야”의 이미지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가 당한 심판과 징벌을 강조할 뿐 아니라 ‘길 잃고 흩어진 양떼’로 비유된 백성과 연대관계에 있음을 암시한다.
- “주님의 뜻”(53,10-11) : 공동체는 종에게 ‘후손과 장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후손을 보고 오래 살고’라는 표현은 종의 죽음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공동체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므로 이 표현은 공동체를 향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죽고 묻힌 종이 ‘후손을 보고 오래 살 것’이라는 말씀은 그의 구속공노로 인해 하느님 백성과 인류가 풍요로운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백성과 인류가 저지른 죄에 대한용서와 새로 얻은 생명이 바로 종이 예지한 자기 고난의 끝이며 결과이다.
- “의로운 종에 대한 하느님의 증언”(53, 11-12) : 하느님의 종의 무죄를 선언하고 ‘죄인들을 위한 중개자’로서 종의 대속 죽음이 그가 연대해 있는 백성을 의롭게 하였다고 선언한다. 종이 나누어 받을 ‘몫과 전리품’은(53,12)은 종의 죽음으로 되찾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곧 종의 대속 죽음으로 의로워지고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 모든 이가 종의 ‘몫이며 전리품’이다.
제2이사야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기존 사고방식에서 ‘참’인 것처럼 받아들인 정의의 기준을 무너뜨린다. 철저한 상선벌악을 통한 정의 실천이 아니라, 의인이 징벌을 받고 악인이 상을 받는 전도된 정의 개념을 가르치고 있다(53,4-12), 제2이사야는 이런 ‘전도된 정의’를 주도하는 장본인이 하느님이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말하는 전도된 정의는 죄인을 용서하고 살리기 위해 그 죄에 대한 징벌을 절대적인 의인, 곧 메시아에게 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은 한낱 숨결일 뿐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 없이는 스스로의 허물과 죄를 씻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은 무조건 ‘없던 일로 여기고 덮어두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허물과 죄악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본래 당신이 창조하셨고 또 바라시는 모습으로 만들어 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징벌을 당하면서도 파멸되지 않는 존재, 곧 메시아를 속죄 제물로 선택하신 것이다.
제2이사야가 예고한 그 메시아가 바로 절대적 의인이면서도 인류의 죗값으로 죽고 묻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물으시고 징벌하시는 분이시지만, 그 징벌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인간을 위해 당신 종 메시아(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삼으셨으며, 그의 속죄를 통하여 인간이 의롭게 되고 생명을 얻게 하는 전도된 정의를 계획하고 실현하는 분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구원에 최종목적을 두고 있고, 인간 구원을 위해 계획하고 섭리하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정의 실현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3이사야(61,1-11)
- “기름부음받은이의 사명” : 선포자가 1인칭으로 묘사된 이 부분은 제3이사야가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특히 제2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와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제3이사야의 사명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이 사명을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영을 선물로 주셨다(61,1). 예언자가 하느님의 영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은 민수기 24,2 과 사무엘기 하권 23,2에서도 확인된다.
기름 붓는 예식은 왕정시대에는 임금과 대사제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제3이사야는 자신이 다윗처럼 예언자적 왕직을 받은 인물임을 말하기 위해서 기름 붓은 예식을 언급했다. 하느님께서 영을 주심은 ‘말씀’의 선포에 있다. 모세가 하느님의 영을 받은 것 자체를 예언직 수여와 결부하여 이해한다. 따라서 제3이사야는 자신이 하느님의 영의 능력으로 그분의 말씀을 선포할 사명과 권한(예언자적 왕직)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또 하나의 내용은 그 소식에 담기 내용을 실현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예수님께서도 제3이사야가 선포한 사명이 당신 자신을 두고 한 예언이며, 당신이 말씀과 행적을 통해 실현되었다고 풀이해주신다(루카 4,18-19).
메시아에게 주어진 사명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아나빔은 ‘억압된’, ‘고통을 겪는’, ‘비천한’이라는 뜻을 지닌 ‘아브나’의 형용사의 복수이다. 아브나는 신앙적 차원에서는 ‘겸손한’, ‘온유한’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아나빔은 어떠한 고통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며,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메시아는 그들의 믿음대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실현해 주는 사명을 받았다.
- “마음이 부서진 이들”이라는 표현도 “가난한 이들”이라는 표현과 비슷하다. ‘부서진’이란 스스로 또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억압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며 탄식하는 이들이다(시편 34,19). 따라서 메시아는 내외적으로 고통 속에서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백성을 치유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 “잡혀간 이들”과 “갇힌 이들”은 유배지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키거나 유배에서 돌아왔다고 해도 계속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귀환민들을 가리킨다. 메시아의 사명은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고 실현한다. ‘해방을 선포하다’는 희년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해방’은 히브리어에서는 모든 의무에서 면제된 상태를 뜻한다. 희년 50년 마다 경제적 이유로 종이 된 이들에게 종의 의무와 채무의 면제를 선포한다. 이리하여 모든 것은 본래 하느님께서 처음 질서지어 주신 대로 모두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치워져 해방이 실현된다. 메시아는 또한 하느님 백성이 그분의 땅에서 그분과의 본래의 관례를 회복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방을 선포하고 실현한다.
이러한 메시아의 사명이 실현되는 때가 바로 “주님의 은혜의 해‘이며, ”하느님의 응보의 날“이다. 주님의 은혜의 해는 안식년(레위 25,1-7)이나 희년(레위 25,8-22)을 떠올리게 한다. 주님의 은혜의 해 특징 역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모든 억압과 고통에서 이끌어 내시어 형제애와 자유의 삶을 회복시켜 주는데 있다. 메시아의 해방 선포다 곧 위로이며, 해방의 실현이 기쁨이고 축제이기 때문이다(61, 2-3). 이는 하느님의 백성의 상태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참회와 애도의 상징인 재를 뒤집어 쓴 삶이 행복한 삶으로 뒤바뀐다. 따라서 하느님 백성은 슬픔을 떨려 버리고 축제의 기쁨을 상징하는 기름을 바르고,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찬양의 옷)‘을 입고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 메시아 시대의 재건과 하느님 백성(61,3-6)
이스라엘의 변화된 모습에 이방민족들은 두 가지 특별한 호칭으로 부른다. 하나는 하느님 백성을 울창하고 생명력 풍부한 참나무에 비유한다. 하느님 백성은 정의의 참나무라 불릴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구원개입은 그분의 영광(절대적 권능과 힘)드러내는 계시사건이므로 구원된 백성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야훼께서 심으신 나무’라고 불리게 된다. 메시아 시대는 이스라엘의 땅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폐허가 된 도시가 농토가 재건되고 농업과 목축업이 다시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민족과 기쁜 소식의 수혜자가 되어 해방의 시대를 맞겠지만,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 때문에 그들보다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제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로 백성들에게 봉헌물을 받아 살아가듯이,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과의 계약이 주는 특별한 사명을 실현하는 그 대가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 하느님의 구원약속(영원한 계약)과 그 동기(61, 7-9.11)
하느님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국토를 되찾고 그곳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함으로써 파괴와 유배로 인해 겪은 치욕과 수모를 벗겨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의 동기는 하느님께서 공정을 사랑하시고, 불의한 수탈을 미워하신다는 데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억압받고 치욕과 수모를 겪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보복하시고, 이스라엘이 당하는 치욕과 수탈을 보상해 주고자 한다. 더불어 구원이 영구적인 것임을 확신시켜주시기 위해 영원한 계약을 맺어주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느님이 맺어주시는 영원한 계약으로 이스라엘은 민족들 사이에 알려지고 주님께 복을 받은 종족임이 알려질 것이다. 이 민족들은 이스라엘을 통해 그들에게 복을 주신 하느님을 알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통ㅎ여 당신의 정의(구원)을 드러내시고 당신을 향한 찬미가 울려 펴지게 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이스라엘을 “정의의 나무, 당신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라고 소개한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활동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개입과 보살핌과 이끄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돋아나고 자라고 열매 맺는 것)임을 말해준다.
끝으로 하느님의 구원약속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은 혼인에 비유하며,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구원과 ‘영원한 계약’이 자신들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사건으로 찬미한다(61, 10).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계약은 사무엘 하권과 이사야서에서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왕조와 관련되어 있고, 예레미야서는 제3이사야서처럼 새로운 구원의 시대와 관련 있다. 따라서 구약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계약은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왕조의 실현 사건인 동시에 어떤 인간적인 힘이나 악의 세력도 파기 시킬 수 없는 최종적인 구원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제3이사야가 예고한 구원도 최종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모든 민족 가운데 하느님의 맏배인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실현되는 구원이며, 영구한 효력을 발휘하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이 구원 효력을 위해서 “영원한 계약‘을 맺어주시겠다고 하신다. 즉 노아와 계약, 아브라함과 계약, 시나이 계약을 완성하는 계약이며 구원왕국의 영원성을 보증하는 계약이다. 그리고 이 계약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완성하신다(마태 26, 28).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계약의 중개자이시며(히브 9,15), 영원한 계약의 피를 흘려 양들을 위한 참된 목자가 되셨다고 증언한다(히브 13, 20).
※ 참고문헌: 성경읽기 안내 구약2(성서사십주간), 성서와 함께, pp.69-77.
예언서, 김정훈, 바오로 딸, 2006, pp.4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