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 9-10):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터이다./ 노아의 후손들

마리아 아나빔 2010. 8. 4. 10:24

성서나눔16 - 창세 9(1-29)-10(1-32)

             - 내가 무지개를 구름사이에 둘 터이다./ 노안의 후손들 -                                         

 

 

 

 

들어가기 전에

 

   이 부분은 제관계 사료(9,1-17)와 야훼계 사료(9, 18-27)로 엮어져 있어 두 저자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두 문헌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그 만큼 우리에게 풍부한 내용을 전해 주려는 최종 편집자의 의도를 엿 볼 수 있다.

제관계 저자의 창조기사에서 하느님은 이미 인간에게 부여하셨던, 자식을 낳고 번성하라는 명령과 짐승에 대한 지배권(창세 1,28)을 새로이 부여하신다. 즉 하느님은 인간의 폭력과 사나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에게 축복을 내리신다. 그리고 이미 죄와 뗄 수 없게 되어 버린 인간의 처지를 아시고 당신이 손수 창조의 질서를 조정하심으로써 그에 대처하신다. 인간에게 식물만을 먹이로 주셨던(창세 1,29) 당신의 계획을 조정하시어 육식을 허용하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살생이 인간 생명까지 번져서는 안 된다. 인간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은 양보될 수 없을뿐더러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동태복수법(창세 9,6)을 허용하시면서 까지 이를 엄격히 수호하신다. 이는 저자가 강조한 바와 같이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인 것이다.(창세 1,27)

   야훼계 저자는 홍수 후에도 여전히 죄를 범하는 노아의 아들들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파고 든 죄의 깊이를 다시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죄와 폭력에도 하느님은 끝없는 자비를 베푸시며 인내하시는 분이심을 보게 될 것이다.

 

 

- Text 안에서-

 

 

- 하느님은 노아의 번제를 받으시고 혼자 하시던 말씀을 이제 노아와 그의 아들들과의 계약을 통하여 명시적으로 표현하신다. 이 계약을 맺으시기 전에 하느님은 먼저 노아와 아들들에게 축복과 약속을 내려 주신다. 이때의 말씀 안에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반향되고 있다. 곧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고 하느님의 대리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의 영역은 이제 보다 넓어져 그이 후손들이 땅에 가득히 불어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 길 짐승과 바닷고기까지 모두 그를 두려워한다.

 

- 하느님의 축복이란 생명의 번성을 위한 것이다. 생명을 더욱 힘차게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이제 하느님은 채소와 곡식뿐 아니라 동물까지도 인간에게 양식으로 내어 주신다. 그런데 여기서도 에덴동산에서의 첫 인간들에게처럼 지켜야 할 안전수칙이 주어진다. 온 세상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 홍수의 직접적인 원인이 인간 사회에 만연된 폭력에 있었던 만큼, 인간은 짐승에게도 자기 동료에게도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피는 피를 부르는 법, 피를 보는 일은 절대로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다.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는데, 짐승과 동료 인간을 함부로 취급하여 그 피를 흘리게 하는 자, 곧 그들이 생명을 해치는 자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따지겠다고 하신다. 특히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자는 반드시 피를 보리라는 말씀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사제계 전승에서 중요한 것이며, 이 생명과 피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레위 17, 11.14에도 나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모든 생명을 관장하신다. 그러므로 다른 이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된다.

 

- 하느님의 축복과 약속의 말씀에 이어 그분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과 계약을 맺으신다. 계약은 노아의 의사를 묻지 않으시고 하느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체결하시지만 노아 편에서 조금도 손해될 것은 없다. 계약에 앞서 노아에게 주셨던 축복과 약속도 일방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에 짐승들이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에제 34,25;호세2,20도 참조할 수 있다. 또한 성서의 다른 구절들은 인간과 짐승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요엘 1,18)

사제계 본문의 신학에서하느님에 의해서 세워진 각각의 계약이, 그분의 보이지 않는 구원행동을 가시적으로 상기시키는 감각적 징표(성사- Sacramentum))를 갖추고 있다.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인류를 위한 무지개, 민족들 사이에서 선택된 아브라함을 위한 할례(창세 17), 시나이에서 모세가 성소를 건립했을 때의 죄의 용서를 위한 아론의 지팡이 등이다.(민수 17,25)

 

- 하느님은 이제 홍수로 인류를 대량학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 대목을 세상 끝날 때 있을 공심판과 연결시켜 하느님께서 물로는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했으니 다가올 최후심판은 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해석한다. 물과 불은 원래 통한다. 이 해석을 더 발전시켜 우리 세대의 대량학살의 주범인 각종 핵무기를 불로 보고 핵전쟁으로 인한 지구의 종말을 하느님의 불의 심판으로 예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노아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에서 이런 생각을 이끌어 내는 건 무리이다.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으리라”는 말씀은 앞에서 노아의 번제를 받으시면서 혼자 하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없애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재확인해 주고 있다. 곧 물로든 불로든 다시는 전처럼 온갖 산 것들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다. 동시에 이 말씀은 나도 폭력을 쓰지 않겠으니 너희도 폭력에서 손을 떼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 계약의 내용은 이처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일방적인 구원의지를 전달하고 있다. 하느님은 계약의 증인으로 무지개를 내세우신다. 비 온 뒤에 구름 사이에 나타나는 무지개를 증인으로 내세우심으로써 비와 연결된 대참사를 생각하시고 하느님은 몇 번이고 반복하여 “홍수로 다시는 숨쉬는 모든 것을 멸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실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인간은 비 온 뒤의 아름다운 무지개로 하느님의 여리고 고운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이어지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의 이야기는 10장에 나오는 홍수 이후의 인류의 족보를 준비시키고 있다. 이 족보는 주로 사제계 문헌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류의 단일성과 그 단일성 안에서의 단위 족속들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한편 노아와 세 아들의 이야기는 성조사에 있어서 핵심적 주제들 중의 하나인 선택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 홍수에서 구원을 받은 노아는 포도원을 가꾸는 첫 농군이 된다. 하루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 천막 안에서 잠이 들었다. 저자는 노아의 만취에 대해서 윤리적 해석을 붙이지 않고 묘사하고 있다. 만취로 인한 품위와 명예의 상실은 성서에서 노아의 경우에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두 번째 예인, 롯의 경우보다는 훨씬 가벼운 것이다. 롯의 만취는 근친상간으로까지 이어지는 심각한 실수였다. 여기서는 노아의 만취가 우연한 사건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야기의 초첨은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효심이 결핍되어 아버지로부터 마땅한 축복과 유산을 물려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함은 벌거벗고 주무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치부를 가려 드릴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형제 셈과 야벳에게 가서 이야기한다. 함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두 형제는 겉옷을 집어 들고 얼굴을 돌림 채 뒷걸음질로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 벗은 몸을 덮어 드린다. 노아는 나중에 술이 깨어난 후 이 사실을 알고 세 아들을 불러 자신을 웃음거리로 취급한 함에게 저주를, 자신의 실추된 명예와 체면을 보호하려 했던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내려준다.

   이 부분(18-27)은 기본적으로 홍수 이후에 발전된 세 종족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이야기에서 저자(야훼계)는 자신의 창조기사(2,25)에다 도입했던 “알몸”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간다. 죄를 범하기 전에 사람이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다는 것은 자신의 피조물로서의 본질을 선한 것으로 받아들었다는 표시가 된다. 그러나 죄가 존재하고 부조화가 도래함으로써 알몸은 다른 차원을 지니게 된다. 이제는 알몸을 옷(무화과 나뭇잎,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가죽옷)으로 대처해야 된다. 노아는 “셈의 하느님, 야훼는 찬양받으실 분,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9,26)라고 말한다. 즉 야훼의 이름을 불러 셈을 축복함으로써 셈과 그 후손이 하느님과 각별한 친분을 누리고 하느님의 특별한 안배를 받도록 한 것이다. 사실 셈에게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선민과 마침내 메시아가 나왔던 것이다.

 

 

 

   함은 자손만대에 걸쳐 저주를 받게 되었다. 가나안은 팔레스티나의 옛 지명이다. 가나안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정

 때에 셈의 후손들인 히브리인들에게 굴복하고, 멸망하여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다윗과 솔로몬 왕 시절에 가나안 사람들을 종처럼 부린 상황을 기원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족의 분포도로 보아 함 족은 에집트를, 셈 족은 팔레스티나와 메소포타미아 지방, 야벳은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차지한다(16-12세기). 가나안 족을 함 족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 할 당시 이 일대가 함 족의 근거지인 에집트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성서저자가 함을 가나안과 연결하고 있다. 야벳은 후손들이 번창하고 셈의 자손들과 평화로이 섞여 살아라는 축복을 받는다. 이리하여 노아의 이야기막을 내린다. 그러나 여기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한 가닥 노선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시는 친분이 셈의 후손을 통해 계승된다는 것이다. 야훼계 전승과 사제계 전승은 당시 알려진 민족들을 셈과 함과 야벳 세 집단에 연결시킨다. 이렇게 해서 세상의 이 모든 종족들이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창세 12,3)

 

   그러므로 노아와 하느님 사이의 계약과 노아와 세 아들의 이야기는 모두 생명에 대한 존경을 가르치고 있다. 인간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은 양보될 수 없을뿐더러 무조건적이시다. 이는 저자가 강조한 바와 같이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인 것이다.(창세 1,27)

   결론적으로 노아의 이야기 안에서도 성서저자들이 어지러운 세상의 요구들을 위대한 조화라는 이상에다 연결시키기 위해 조정이 필요해진 상황은 바로 죄 때문이며 죄는 하나의 실재이며, 하느님은 뉘우침과 연민으로 창조의 질서를 조정하심으로써 이 실재에 대처해 나가시기로 작정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만련” 이라고 한탄하시면서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고, “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으리라고”고 다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에서 전능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의 약하고 부드러운 마음은 다름 아닌 자비와 사랑의 증거임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하느님의 행위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는 이 사랑 때문에 그분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계약의 표시로 무지개를 주신다.

   그렇다고 우리는 안심하고 죄를 짓고 죄의 상황을 방관해도 된다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작 뇌우치고 한탄해야 하는 쪽은 하느님이 아니고 인간이며, 다시는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저주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창조가 아니고 인간의 죄이다. 또한 계약의 표를 보고 기억해야 하는 일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라기보다 하느님의 그 아파하신 마음의 자비를 생각하고 다시는 죄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지 않겠다는 인간의 약속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의 세계 안에서 죄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63-66.

                   구약성서 입문, 안토니오 지를란다/ 성염, 바오로 딸, 1996, p.168.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57-63.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4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