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빈센트의 향기를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성빈센트 드뽈의 관점을 중심으로)II

마리아 아나빔 2010. 7. 28. 15:14

 

제2장 빈센트 드뽈의 삶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영성생활, 윤리생활 그리고 인간 생활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묵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고, 닮아서 그분의 인격에 일치하여 성숙된 인간이 되는 인격의 완성에 그 목표가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바라보는 관점도 사람마다 다양하며 그 인격으로 다가가는 방법도 제각기 다르다. 또한 한 인격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형성되는데 미치는 삶의 요소들도 매우 다양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빈센트 드뽈이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또한 아주 독창적인 것으로써 그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삶의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삶을 향한 여정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가 살았던 삶의 자리와 그가 행한 하느님 사업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1. 시대적 배경

 

    한 시대의 역사가 성인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쩌면 빈센트 드뽈에게 가장 적합한 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빈센트 드뽈(1581-1660)이 살았던 16-17세기 프랑스의 시대적 상황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과 인간의 존엄성이 요청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빈센트 드뽈이 태어난 1581년 무렵, 프랑스에는 ‘종교전쟁’이라 불리는 내란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위그노 전쟁(1562- 1598), 30년 전쟁(1635-1648), 프롱드 내란(1648-1653) 등이 있었다. 따라서 질병과 기아, 매우 심각한 흉작과 물가폭등으로 어려운 시기가 계속 되었다. 1580년에서 1590년 사이에는 흑사병이 재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국가납세의 요구가 맞물린 재난의 국면 속에 사람들의 어려움은 이루말 할 수 없었다. 이에 1594-1595년에는 프랑스의 여러 곳에서 농민봉기가 있었다.

    빈센트 드뽈은 프롱드 내란 때 노르망디에서 발생된 페스트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과 빈민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시내로 도망쳐온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보호해 주었다. 또한 내란의 중재를 위해서 여왕과 마자랭을 찾아가서 간언하였으며, 교황에게 내란을 잠재우기 위한 평화를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한편 이 무렵 유럽 전역에는 얀세니즘(1585-1638)이 유포되었다. 빈센트 드뽈은 이에 대항하여 영적으로 신자들의 신심생활을 위한 영적교육과 신앙을 위해 사제양성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빈센트 드뽈이 살았던 17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은 최악의 상태였다. 특히 봉건체제의 신분사회에 의한 불평등과 족들의 사치스러움에 따른 세금의 과중과 그 폐단은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수많은 고아들, 병자들, 부랑자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등 가난한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또한 페스트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들은 의료해택도 없이 비위생적인 상황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었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 안에서 자행되는 사람들의 야만적 행위들은 인간적 품위를 상실하게 하였다. 특히 프롱드 내란으로 많은 백성들이 약탈을 당하고, 피해를 입고, 포악한 군인들에 의한 강탈로 옹색한 생활을 하였다. 그 가운데 가난과 기근은 그 비참함을 더 가중시켰다.

    가톨릭교회의 상황 역시 부패된 상황으로서 고위 성직자들의 권력의 남용이 성행하였다. 성직자들은 제대로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로 서품이 되었기에 사죄경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신부들이 많았다. 따라서 일반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반면 그 당시에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개혁정신이 유럽 전 지역에 걸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신의 일차적 개혁은 성직자들의 성화와 각 교구에 신학교 교육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빈센트 드뽈은 이 정신에 발맞추어 성직자들의 성화를 위한 교육과 사제양성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2.2. 출생과 교육

 

    빈센트 드뽈은 프랑스 전역에 걸쳐 혼란한 시기였던 1581년 4월 24일 프랑스 남서부 랑드(Landes)지방의 닥스(Dax)시 푸이(Pouy)에서 가난한 농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장 드 뽈(Jean de Paul)과 어머니 베르트랑드 드 모라(Bertrande de Moras) 사이의 6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돼지, 소, 양 등의 가축을 돌보며 가난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알면서 성장하였다. 특히 신심이 깊었던 어머니의 모습을 통하여 소박한 시골 처녀들의 삶의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가난한 시골의 삶의 자리를 통하여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단순함으로 일관된 성실한 삶의 자세를 배웠다. 특히 자연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는 법과 자연의 결실에 의존하는 존재로서 겸손함과 보이지 않는 것에 투신할 수 있는 식별력 등 대지가 주는 선덕(善德)을 몸으로 익힐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삶의 자리는 훗날 그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 사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게 하는데 있어 밑바탕이 되었다.

    빈센트 드뽈은 매우 영특하였다. 그래서 12살 때 닥스에 있는 코르들리에(Cordeliers)회 수도원에서 공부를 하였다. 한 때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그 지방의 유지인 드 코메(M. de Comet)의 도움으로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596년 12월 20일 비다슈(Bidache)교회에서 타르브(Tarbes)교구의 주교로부터 삭발례를 받고 하급 성직자의 성품을 받았다. 그 후 툴루즈 대학에서 신학을 더 깊이 공부한 다음 1598년 차부제와 부제로 서품되었다. 2년 후인 1600년 9월 23일 생줄리앙(Saint-Julian) 성(城)의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뷔제(Buzet) 성(城)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속의 작은 성당에서 첫 미사를 올렸다. 이 무렵 그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서품을 받은 후, 드 코메는 빈센트 드뽈을 튈(Tulle) 본당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미 로마 성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사람이 있었기에 툴루즈(Toulouse)로 돌아와 신학공부를 계속하여 1604년 신학사(bachelier en théologie)가 되었다. 그리하여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명제집(Sententiae)」을 강의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1605년에서 1607년 사이에 그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터어키 포로가 되어 모로코 근처에서 노예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인 신빙성은 적다. 노예생활에서 풀러난 그는 로마로 갔다가 프랑스왕 앙리 4세(Henri Ⅳ)의 밀사가 되어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파리에 돌아온 빈센트 드뽈은 쌩 제르맹(Saint Germain) 자선 병원에서 멀지 않는 곳에 동향(同鄕)인 랑드 지방의 소르의 판사인 베르트랑 뒬루와 함께 방을 같이 쓰게 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누명이 밝혀질 6개월 동안 침묵으로 인내롭게 잘 참아 견디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굳은 신앙심을 보여주는 하느님 체험이 되었다. 훗날 그는 이 사건을 두고 ‘가장 무서운 시련’ ‘불과 같은 시련’이라고 고백하였다.

    빈센트 드뽈은 1610년 파리 궁전의 전속 사제로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여왕의 빈민 구제 담당 사제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애덕 사업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사업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영적이고 물적인 ‘아버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2.3. 하느님 사업

 

    빈센트 드뽈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 사업에로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필립 엠마누엘 드 공디(Philippe-Emmanuel de Gondi) 가문에 있을 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의 첫 본당인 사띠용 레 동브(Câtillon-les-Dombes)의 본당 신부로 있을 때 현실적으로 구체화 되었다. 그것은 ‘애덕 동지회’(Confraternities of Charity)라는 남자 평신도들의 단체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도와주기 위하여 만어졌다. 따라서 이 단체는 본당을 중심으로 긴급하게 요청되는 가난한 이들을 영적 육적으로 돌보아 주게 된다. 그리고 이 단체는 평신도 여성들로 구성된 ‘애덕 부인회’(Ladies of Charity)라는 단체와 함께 활동하게 되며,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게 되는 기원이 되었다. 또한 19세기 앙토안느-프레드릭 오자남(Antonie-Fredric Ozanam)이 세운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Society of St. Vincent de Paul)의 평신도 활동 단체의 출발점이 된다.

    빈센트 드뽈은 샤띠용 레 동브에서 시작된 애덕회가 여러 곳에 설립됨에 따라서 이들에 대한 재교육과 제반 사항을 전달해 줄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루이즈 드 마리약(St. Louise de Marillac)과 함께 활동하게 된다. 특히 애덕 부인들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 때문에 봉사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병자들을 간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 할 수 있는 시골 처녀들로 이루어진 회가 만들어진다. 그 회가 바로 ‘사랑의 딸회’(Daughter of Charity)이다. 이들은 오로지 주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가난한 자의 종’이 그들의 신분이었다.

    또한 빈센트 드뽈은 가난한 이들의 영혼을 돌보아 주는 ‘전교회’(Congregation of the Mission))라는 단체도 만들었다. 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후계자들을 조직적으로 양성하고 교육하며 규칙적으로 전교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이들은 시골의 가난한 이들에게 설교를 하며 병원이나 감옥, 군선이나 누추한 집을 찾아가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하였다. 또한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 폴란드, 바르바리, 마다가스카르 등지에 까지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무엇보다도 빈센트 드뽈은 성직자들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성화하기 위한 성직자 개혁에 큰 관심을 갖고 헌신하였다. 이것은 그가 영혼들의 구원과 성화를 위하여 성직자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은 젊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절감하였기에, 성직에 필요한 목자로서의 영성과 성찬예식의 기초에 관한 학습과정을 위한 신학교를 창설하였다. 또한 생 나자르(Saint Lazare)에는 서품자들을 위한 묵상회, 화요회, 성직자들을 위한 피정연수회와 평생교육 프로그램과 같은 피정사업을 일으켜 성직자들의 성화와 심신 수련을 통한 많은 영혼들을 구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고아구제사업, 죄수들과 노예들을 위한 사업, 질병과 전쟁으로 인한 부랑자들의 구제사업 등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한 많은 하느님 사업을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