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동지방 정신의 영향을 받은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의 흐름속에서 지속적으로 주변 백성들과 접촉을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그들의 문화적인 걸작품들을 맛보게 된다. 그러한 대문명들을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를 해 볼 것이다.
ex)
태양신 아톤에게 바쳐진 이집트 찬가
다음은 위의 제목으로 파라오 아크나톤이 만든 찬미가 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당신은 완전한 모습으로 하늘의 지평선에 나타나셨나이다.
생명의 원천에 자리한 살아 있는 둥근 표면이시여,
당신이 동쪽 지평선에 떠오르실 때,
당신은 당신의 완전함으로 모든 나라들을 채우시나이다.
당신이 서쪽 지평선으로 자취를 감추실 때,
땅은 죽음과 같은 어두움 속에 파묻히나이다.
땅은 고요 속에 잠드나이다.
땅을 만드신 분이 그 지평선에서 쉬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깨어나실 때, 땅은 광채를 받나이다.
태양의 표면이신 당신이 낮 동안 비추어 주실 때,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 두 발로 우뚝 서나이다.
사람들은 팔을 벌려 당신이 나타나심을 경배 드리고
땅 전체는 각자의 일을 시작하나이다.
모든 짐승들은 목초에 만족을 느끼나이다.
나무와 잡초들은 푸르게 물이 오르나이다.
새들은 둥지를 떠나 날아가고
그들의 날개는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배들은 강을 따라 오가나이다.
물고기들은 당신 앞에서 뛰어오르나이다.
당신은 여인들에게서 배란이 이루어지게 하시며
또한 남자들에게서 자손이 만들어지게 하시나이다.
당신이 창조한 이 모든 피조물들, 얼마나 많은지요!
그 피조물들은 인간 앞에서 그 모습을 감추고 있나이다.
오! 어떤 다른 것과도 닮지 않은 유일한 신이시여,
당신은 당신을 위해 인간들을 만드셨나이다.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의 주님이신 당신은
그들을 위해 수고하십니다.
그들을 위해 빛을 비추어 주시는
당신은 내 마음 속에 계시나이다. (A. Barucq의 번역)
1) 이집트의 정신
이것은 이집트라는 국가에 의해서 창출되었다. 이집트 사람은 태양이 비치는 밝은 지방에서 생활했다. 상이한 이름으로 신격화된 태양은 다른 신들과 인간들을 낳는, 신들 중에 으뜸가는 신이다.
나일강은 강물이 범람하여 홍수를 이루기는 하지만 그렇게 강물이 범람하는 것은 항상 정해진 시기에 발생하게 되며, 땅이 비옥해지도록 진흙을 운반해 줄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자연히 이집트인들의 기질도 낙천적이다. 그들의 신들은 선하며 인간들을 지켜준다. 죽은 다음에 새롭고도 빛나는 삶이, 비록 그것이 대부분 인격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신앙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집트인들의 우주의 조직
대기의 신, 슈(Chou)는 자기 딸인 창공, 누트(Nout)를, 아들인 땅, 겝(Geb)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다. (기원전 1100-950 사이의 이집트 파피루스).
기원 전 1,400년경에 씌어진 한 찬미가는 잠들어 있는 인간 모두를 밤새워 지키는 태양신, 아몬(Amon)을 찬양한다. 온갖 신들의 아버지, 그분께 모든 신들은 찬양을 바친다.:
그들은 당신께 아룁니다: ‘ 평화 속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모든 것을 만드시고, 존재들을 형성시키시며
하늘을 높이시고 땅을 낮게 하신,
신들의 아버지 중의 아버지시여,
당신은 우리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계시니,
우리는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2) 메소포타미아 정신
메소포타미아 정신은 전체적으로 볼 때 비관적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때때로 거의 ‘홍수’를 야기시킬 만큼 예고 없이 강물이 범람하는 계곡에 살고 있었는데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아라비아 사막이나 이란의 고원지대로부터는 빈번한 유목민들의 침범이 있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볼 때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신들은 그들끼리 끊임없이 투쟁하는 변덕스러운 신들이다. 인간은 그러한 신들의 분노의 여파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고심하는, 겁에 질린 존재로 표출된다. 신들은 인간에게 죽음을 그 몫으로 주었고(길가메쉬의 서사시) 그들은 거짓이란 재료를 빚어 인간을 만들었다. 죽은 다음에 오는 왕국은 슬픈 것이다. 기쁨이 없는 삶만이 숙명처럼 남아 있는 이곳에 죽은 자들의 망령이 모이게 된다
여기에 신화들에서 발췌한 몇 가지 내용들을 살펴본다면
- 아트라-하시스(Atra-Hasis)
매우 총명한 자의 서사시는 기원 전 1,6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바빌론에서 발견된 수사본에 의해 알려졌다. 1,645줄이나 되는 긴 시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해야만 하는 많은 노동으로 피로에 지친 신들이다. 그들은 일을 시키기 위해 인간을 만들자고 결정한다. 그들은 희생당한 신의 피를 섞어 반죽한 흙으로 인간을 만든다. 그러나 인간들은 숫자가 불어나 여러 가지 잡음을 일으키고 신들을 피곤하게 하며 괴롭히게 된다. 신들은 여러 가지 재앙을 내려 보내고 급기야는 홍수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에아(Ea)신은 인간에게 배를 만들도록, 그리고 가족과 모든 동물들이 쌍을 이루어 그 배에 오르도록 충고해 준다.
- 에누마 엘리쉬(Enouma Elish: 높은 데에서)
이 시 또한 아주 오래된 것이다. 현재까지 전해진 형태로 보자면 이 시는 기원 전 1,100년경에 씌어진 것이다. 아주 초기에는 성(性)을 지닌 근본이 둘이 있었다. 첫째는 연수인 압수(,Apsou)요 둘째는 바다의 짠물인 티아맛(Tiamat: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테흠(심연)속에서 그 이름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다. 이 두 근본으로부터 다른 모든 신들이 생겨난다. 모든 신들이 자기를 괴롭히기 때문에, 티아맛은 그들을 죽이고 싶어하지만 마르둑(Marduk)이 티아맛을 무찌르고, 티아맛을 마치 굴처럼 둘러 쪼개어 그것을 창공으로 만든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반기를 든 신의 피로 인간을 창조한다.
- 길가메쉬(Gilgamesh)-
이 서사시는 아마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타난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이 서사시는 수메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아시리아와 바빌론에서 천년 이상 동안 발전되었던 서사시이다. 이 서사시는 팔레스티나에서 히티트 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그들에 의해 재생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그 시의 형태를 보면 12개의 찬가로 구성되어 있다.
수메르의 영웅인 길가메쉬는 교만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은 그를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다. 신들은 짐승들과 함께 생활하는 거대한 괴물인 엔키두(Enkodou)를 길가메쉬의 라이벌로 내세운다. 여자에 의해 인간으로 변한 엔키두는 갈가메쉬의 친구가 되고, 이 둘은 공훈을 세운다. 그런데 어느 날 엔키두가 죽게 된다. 길가메쉬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불사불멸을 찾아 나서게 된다. 홍수의 영웅이 그에게 생명나무의 비밀을 전해준다. 길가메쉬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뱀이 그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가고, 길가메쉬는 죽음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바빌론인들의 우주의 조직
에누마 엘리쉬라는 시는 남성적 원리인 압수(Apsou)와 여성 원리인 티아맛(Tiamat)으로부터 신들이 탄생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티아맛은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젊은 신들을 패망시키고 싶어한다. 젊은 신들은 마르둑(Mardouk: 바빌론의 신)에게 그 일을 맡긴다. 마르둑은 티아맛과 그에게 동조한 신들을 죽여 버린다. 그러고 나서 마르둑은 티아맛의 몸으로 우주를 만든다:
마르둑은 그가 굴복시킨 신들 위에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다졌으며 그에게 패배한 티아맛을 다시 찾아갔다.
그는 자기의 망치로 티아맛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쳐 깨뜨려 버렸다.
그는(주님은)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시체를 보고 생각 한다:
그는 괴물을 둘로 쪼개어 그것으로 걸작품을 만들고자 한다.
그는 그 괴물을 마치 마른 생선처럼 둘로 쪼개어
한 쪽으로 하늘의 지붕을 만들어
한계를 정하고 지키는 자를 배치하여
물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라는 사명을 내렸다.
우리는 이 신화를 창세기 1장의 이야기와도 비교해 볼 수 있으며 또한 흔히 이집트인들의 조각에서 발견되는 약간 상이한 신화와도 비교할 수 있다.
3) 가나안 정신
가나안의 정신은 현재 시리아의 라스 샤므라(Rash Shamra)인 우가릿(Ugarit) 도시에서 도서관을 발견한 1929년 이후부터 더 잘 알려지게 되
었다. 우가릿의 문명이 최고봉에 이른 것은 기원 전 1,500년경, 즉 성조들의 시대이다.
중심이 되는 신은 엘(El) 이라 불리는데 흔히 황소로 소개된다. 이 종교는 신격화된 자연의 힘을 섬긴다. : 이들은 때때로 “구름을 타고 오시는 자” 라고 불리는 (시편 68,5에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으로 묘사되는 하느님처럼) 바알(Baal), 곧 천둥과 비의 신과, 그의 누이 동생으로 나중에 아스타르테(Astarte)라고 불리는 아낫(Anat)이다 아스타르테는 전쟁과 사랑 그리고 풍요의 여신이다.
이스라엘 왕국 중에서도 특히 사마리아 왕국은 이러한 가나안 종교,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나체의 여신에게 바치는 성적(性的)의식, 그리고 땅과 가축의 풍요다산을 위해 행해지는 의식들로부터 유혹을 받게 된다.
성서적 정신에 대해 우리는 많은 곳에서 발견해 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우리가 이제까지 상기시켰던 다른 정신들로부터, 성서적 정신을 구분하게 하는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셰마 이스라엘(Shema Israel), 아도나이 헤다드(Adonai hedad)!" 즉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시다!“ 이것은 신명기에서 형식화 되는 것으로서(신명 6,5) 백성의 본질적인 신앙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느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백성은 그분께 사랑으로 응답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다음의 도식 〈인간 -의식 - 신 - 인간〉즉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며 다시 인간에게 돌아오는 화살표를 통해 신화적 정신을 표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신을 높은 곳(내세)으로 올려놓은 다음 의식을 통해 신을 움직여, 그 신으로 하여금 인간을 위해 봉사하게 하려고 한다.
성서에 있어서는 그 반대이다. < 하느님 - 인간 - 의식 - 하느님> 이다. 즉 인간을 부르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고,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한다. 출발점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여기에서 의식이란 응답의 표현이 된다. 여기서 두개의 의식이 동일하게 보일지 모르나 의미는 다르다.
가나안에서의 자연에 대한 신화
우가릿((Ugarit)에서 발견된 한 편의 시는 바알과 못(Mot)을 찬양하고 있다. 바알은 천둥과 비의 신이고, 못은 죽음의 신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상기되고 있는 것은 현안 문제로서 비옥함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 점이다: 바알은 비를 가지고 땅을 비옥하게 함으로써 인간들에게 봉사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지하세계의 신 못(Mot)에 의해 삼켜졌다. 물은 땅에 사로잡힌 채로 있을 것인가? 즉 가뭄을 야기시키게 될 그런 처지로 남아 있을 것인가?
시에서 발췌한 이 내용은 바알이 다시 태어날 것이고 비가 다시 내리게 될 것임을 예언하는 지고의 신, 엘(El)의 모습을 보여 준다. 누군가가 엘이 꾸게 될 꿈을 예고 한다:
ex)
“ 전능하신 바알이 살아 계신다면,
땅의 주인이신 왕자가 거기에 계신다면,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자비로운 엘은,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께서는 보시리라, 꿈속에서.
하늘이 기름기 있는 것으로 비를 내리고
급류가 꿀이 되어 흐르는 것을.“
엘(El)은 이런 꿈을 꾸고는 기쁨에 넘친다:
마음이 너그러우신 자비하신 분, 엘은,
피조물들을 만드신 창조주께서는 보시리라, 꿈속에서.
하늘이 기름기 있는 것으로 비를 내리고,
급류가 꿀이 되어 흐르는 것을.
기쁨으로 충만된 자비하신 분, 엘이 외친다:
“가장 전능하신 분, 바알이 살아 계시고,
땅의 주인이신 왕자가 거기 계시기에,
나는 앉을 수 있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
(Caquot-Sznycer의 번역)
우리는 성서에서 젖(혹은 기름)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는 표현 양식을 접하게 된다.(출애 3,8). 우리는 북쪽 왕국에 대해 공부하면서 비옥함에 대한 문제를 다시 접하게 될 것이다. 비옥함을 누구로부터 오는가? 바알로부터? 아니면 하느님으로부터?
역사의 하느님이냐 자연의 신들이냐?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 안에 개입하신 하느님을 믿는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 종의 신분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내신 하느님, 그 하느님께서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사막으로부터 인도하시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해 주셨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정착민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농토와 마을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어떻게 하면 땅의 비옥함과 가축들의 다산성을 얻을 수 있을까? 필요할 때 비를 얻기위해 누구에게 빅어야 할까? 이스라엘은 그러한 필요에 정확히 부응하는 종교를 현지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바알신- 신격화된 천둥과 번개- 아스타르네신-신격화된 성과 다산(가난안의 정신)
역사 안에 개입한 하느님,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살아야만 하지 않겠는가!... 결국 바알신이 보증해 주는 것이 더 확실한 것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문제라고 너무 쉽게 넘겨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바알이란 단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동일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있지만 그러한 신앙이 경제적 필요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연의 힘(은행, 권력...)을 믿고 보증받는 것이 더 확실한 것이 아닐까?
* 참고문헌: 구약성서 길잡이, E. 샤르팡티, 안병철, 성바오로 출판사, 1991, P.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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