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길잡이

모세오경 V(창세기 2)

마리아 아나빔 2010. 10. 14. 18:59

 

 

                                                                 모세오경V(창세기)

 

 

7. 창세기의 역사성 문제

 

   성경은 모든 것이 진실이고 진리만을 담고 있어야 하는데, 반면 많은 모순과 혼란을 우리에게 주어 우리를 당황스럽게도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읽을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책이 150억 년 된 지구에 대한 ‘과학 보고서’나 ‘역사 보고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신학 보고서’라는 점이다.

   ‘계시’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열어 보여주는 것이고 창세기 역시 바로 그런 신학적 의도 하에 저술된 책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실존 인물인지, 바벨 탑이 있었던 곳이 어디인지, 카인과 아벨 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지, 등 ‘역사성’과 관련된 질문들은 창세기를 이해하는 데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질문들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어떤 사실을 반증하기 위해 저술된 과학적 혹은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 하느님을 더 잘 소개하기 위해 저술된 신학 보고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차이는 더 이상 ‘갈등’ 혹은 ‘대립’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실 성경의 저자들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의 사실적 정보, 혹은 그에 대한 기록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았다. 성경에 에덴에 대한 이야기를 , 혹은 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제작된 책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주인공으로 제시하는 신학적 기록이며, 이러한 하느님을 계시할 목적으로 저술되었기에, 그 이외의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은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단언 할 수 있다. 부차적인 내용들이 모순되거나 충돌되어 때때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있겠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 즉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인간에게 전달하겠다는 신학적 방향에는 결코 모순이나 혼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자이시고 창조주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신 분에 대하여 언제나 일관적이고 통일된 고백을 전하고 있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고백 할 수 있는 것이다.

 

 

8. 편집연대

 

   창세기의 토대를 형성하는 구전 전승이 어느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적어도 벨하우젠의 문헌가설에 따르면, 야훼계 문헌이 처음 시작되던 시기는 솔로몬 시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화의 시작 단계’를 창세기 ‘제작의 시작’으로 여기기는 어렵다. 엄밀한 의미에서 창세기 제작의 시작은 이야기의 내용이 처음 형성되어 회자되기 시작하면서 구전되던 시기부터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이 이야기들에 대한 성문화의 필요성이 급격히 대두된 것이 유배 중이던 기원전 6세기 무렵 이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상실하고 비극적 불행을 마주하고 있던 유배 시기의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대안과 전망으로, 그들의 기원과 선조들, 그리고 하느님이 그들에게 주셨던 축복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창세기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9. 창세기에 등장하는 여러 문학 형태

 

   창세기에 대한 현대적 의미의 비평 연구은 헤르만 궁켈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의 <창세기>, 주석과 <창세기의 전설>은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명저가 되는데, 이 책에서 양식비평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창세기가 ‘사가( Saga)’라는 문학 양식의 집합체임을 주장하였다.

   궁켈에 의하면, 성조사를 형성하는 ‘사가’들은 역사와 자연의 기원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을 제공한다. 여기에는 개별 인간과 연관된 사가들이 있고, 민족의 기원(암몬 민족의 기원)에 대한 것이 있으며, 지명(베텔)에 대한 것도 있다. 그런데 이후의 학자들은 ‘사가’의 정확한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 많은 논쟁을 거쳐왔다. ‘사가’란 ‘민담’, ‘무용담’, ‘전설’ 등의 의미를 가지는데, 이 용어가 창세기에 적용될 때 제시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이를 규명하는데집중했던 것이다. 폰 라이트는 ‘전설’과 ‘사가’가 서로 다른 형식임을 주장하였다. 전자가 보다 종교적 배겨응ㄹ 가지고 있다면, 후자는 보편적이고 민중적인 성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984년 스컬리온은 위에서 제시된 용어들 간의 의미 구분에 대한 정리를 시도한다. 그에 의하면 ‘다양한 길이’를 가진 이야기 단위들이 존재하는데, 그 내용과 분량에 따라 ‘전설(legend)’, ‘일대기(cycle)’ ‘단편소설(novella)’로 구별할 수 있다.

 

 

10. 고대 근동 신화와의 관계성

 

   성경의 창조 이야기와 홍수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신화들과 놀랄 만큼 유사한 부분들을 공유하고 있다. 특별히 홍수 이야기는 창조 이야기보다 근동의 신화들에 더 근접한 내용들을 드러낸다.

 

1) 창조설화: 에누마 엘리쉬

   9세기 중엽 니네베에서 고대 바빌론의 창조 설화가 수록된 고대 전승이 발견되었는데, 아카디아어로 기록된 ‘에누마 엘리쉬’라는 문헌이었다. 기원전 7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전승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는데, 그 이유는 이 전승의 시작이 창세기의 시작과 동일한 “한 처음에...”였다는데 있었다.

2) 홍수설화: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와 길가메시 서사시

   ‘홍수 이야기’는 고대 근동 지역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보편적 이야기로서, 여러 언어로 전승화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사실 홍수 이야기는 이스라엘과는 특별한 관련성이 없는 내용이라고 해야 한다. 홍수라는 자연재해는 물이 귀했던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흔하게 발생하지 않는 사건이었고,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물은 축복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후 차이에도 불구하고 홍수 이야기가 성경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이 전승들의기원이 되는 이야기가 바빌론 유배 중의 이스라엘 안에 도입되었음을 증명한다.

 

 

11. 신학적 주제

 

1) 창조주 하느님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알게 되었던 하느님의 모습은 이집트 탈출을 통해 알게 되었던 ‘구원자로서의 하느님’, ‘해방자로서의 하느님’이었다. 그러나 창세기는 그 하느님이 ‘성조들의 하느님’이시고, 또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시는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신학적으로 전개한다. 특별히 창세기는 계보구절이라는 특벼한 문장을 통해, 아브라함을 아담의 후손으로 소급시킴으로써, 창조 때부터 존재한 유일한 민족이 이스라엘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감추어져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느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들의 고통과 가난, 억압에서 구원하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의 신화를 통해, 풍산과 관련된 신 바알을 만나게 되고, 바빌론 유배 시에는 바빌론의 창조 신화(에누마 엘리쉬)를 접하면서 세상의 여러 창조신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신화들의 내용은 이스라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야훼 역시 창조신임을 고백하는 신학적 작업에 착수하게 되고, 세상의 기원에 대하여 언급하는 고대 근동의 여러 전통들을 적용시키면서 자신들의 창조 설화를 신화화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를 에집트 탈출 이야기보다 앞선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시간적 배열의 타당성까지 도모하였다.

창세기의 첫 구절 즉 ‘한 처음에 창조하셨다.’ 이 말 안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신앙 고백은 바로 그분께서 온 세상의 창조주라는, 바로 이 단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2) 모든 것을 좋게 만들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실 때 가장 최상의 상태로 만드셨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생을 고해로 보는 불교적 관점과는 매우 다른 ‘긍정적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처음 창조되었을 때 나의 삶, 운명, 조건들은 내게 가장 적절한 상태였다는 것이 창세기가 제시하는 출발점이다.

   창세기는 모든 창조 이후에 “보시니 좋았다”라는 평가를 반복함으로써 모든 것이 혼돈스럽고 뒤섞여 있지만 끝내는 ‘보시니 좋은 것’을 이끌어 내시는 축복과 사랑의 하느님을 강조한다. 이러한 고백은 창세기가 집대성되던 유배라는 시기를 배역으로 하여 이해될 수 있는데, 이 표현은 유다인의 역사 중 가장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그 혼란의 시대를 극복하고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창조는 매 순간, 지금, 이 자리에서도 일어남을 인식하는 것이다.

   창조사건의 절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인간창조’이다. 고대 근동의 창조신화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인간 창조는 인간이 신들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창세기에 제시되어 있는 인간의 창조는 이와 정반대의 시각을 드러낸다. 인간의 창조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 위한 것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대 근동과 그리스-로마 신화들은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하지만 창세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음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모습이 어떠한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단언함으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위상을 더없이 드높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창세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존재이며 그분과 비슷한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에 그에 상응하는 존엄과 품위를 가졌음을 강조한다.

 

3) 약속: 땅과 민족

   ‘땅에 대한 약속’과 ‘민족의 번성’이라는 창세기의 명백한 주제는 땅을 잃고 흩어져 살게된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땅과 민족을 완전히 상실한 고통의 시기를 살았던 유배 중의 독자들에게 ‘자손을 낳아 번성하고 땅을 차지하라.’는 창세시의 약속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 바로 ‘땅’과 ‘민족’임을 상기시키고, 그들이 다시 그 ‘땅’에 돌아가 새로운 삶을 이룰 수 있음을 희망하게 한다. 민족에 대한 의식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더 이상 국가도, 임금도, 정부도 없던, 그래서 민족 전체가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던 그들에게 창세기는 그들이 언젠가는 큰 민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함으로써 희망을 불어넣어 준다.

   흥미로운 것은 ‘하늘의 별처럼 맣은 인구’라는 표현과 이에 대한 강조가 ‘불임’이었던 족장 부인들(사라, 레베카, 라헬 등) ‘임신’을 통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씨가 마를 수도 있는 민족이었지만 그들이 하느님을 신실하게 믿기만 한다면 결코 사라지지 않을 민족이 되리라고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참고문헌: 모세오경, 김혜윤, 2005, p 9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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