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학과 하느님
가톨릭신학회 월례모임
2004년 5월 22일 (토)
발표 : 오 선 자 선생님
1. 들어가면서
인간이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하느님과의 관계에 비추어서 성찰하는 것을 신학이라고 한다면, 그 성찰의 주체가 누구이고 그 인간 경험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는 신학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신학하는 주체와 상관이 없는 신학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신학은 언제나 남성이 신학의 주체였으며, 여성들의 경험, 느낌, 인식을 제외한 채 남성의 관심과 경험만을 반영한 것이었으므로 여성들에게는 내용이 없는 공허한 신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성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여성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찾아가는 여성신학은 여성들이 그 신학의 주체가 되며, 이제까지의 신학이 남성의 관심과 경험만을 반영한 반쪽의 신학이었음을 밝히고, 신학의 주체가 남성만이 아니라, 이제까지 신학의 주체로 간주되지 않았던 여성, 흑인, 그리고 제3세계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여성신학은 남성들을 배제하는 여성들만의 신학이 아니라, 남성들이 파트너로써 협조해야하는 남. 여 공동의 신학을 지향하며, 이렇게 될 때 지금까지 남성 위주로만 이루어졌던 '반쪽의 신학'이 다른 반쪽의 의미를 되찾아 '온전한 하나의 신학'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고통과 억압을 당하고 있는 성차별적인 억압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여 여성의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여성신학자들은 자신들이 남성과 똑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물음에서 자신들이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신을 남성으로 상징화함으로써 여성들의 소외와 억압을 합리화하고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남성의 여성 지배를 정당화해 왔음을 인식하고, 비판하고 있다. 여성신학자들 중에서 그리스도교의 상징체계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처음 문제를 제기한 댈리는 여성이 가부장적 세계에서 타자로서의 존재가 된 가장 커다란 요인을 신의 남성성으로 보고,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남성 하느님을 거세해야 한다고 까지 주장한다. 여성신학은 종교적 상징과 사회적인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상징을 분석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전통이 하느님의 성이 남성이라는 것을 자명한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지금까지 왜곡된 하느님 이해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종속의 신학이 아닌 동등의 신학을 창출하려고 시도한다.
2. 전통적인 하느님 모습에 대한 여성 신학 비판
2.1. 하느님의 남성성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의 언어는 이스라엘의 가부장적인 구조의 맥락에서 발생하였고, 2천년에 가까운 서양 전통의 남성 중심적인 세계상과 인간상의 맥락에서 규정되었다.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남성적 이미지를 남기는 단어들 (아버지, 주님, 창조주, 왕 등)로 비유되어 사용되었고, 남성의 능동적이고 지배적인 역할을 나타내는 술어가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사용되었다. 아버지인 하느님이 하늘에서 그의 자녀들을 다스리는 것처럼, 사회와 가정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은 신의 섭리에 따르는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가부장제에 의해 계속 합리화된 하느님 아버지의 표상은 차츰 이 사회의 형태를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올바르면서도 적합한 것으로 느껴지도록 구조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기에, 하느님이 남성이라는 생각은 자명하게 느껴지고, 이런 잠재의식 속에서는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Mary Daly는 기독교를 “아버지와 아들의 종교”라고 규명하고, “만약 하느님이 남자라면, 남자가 하느님이 된다”고 하면서 이러한 곡해된 신 개념이 성적 역할구분의 사회화를 견고히 하고 인간화를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른 여성신학자인 류터 또한 하느님의 남성성에 대한 사상이 여성은 신성하지 않지만 남성은 신성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하고, 이런 생각이 하느님-남자-여자라는 상징적 위계질서를 형성하였다고 주장한다. 여성신학자들이 신의 상징에 대해 문제를 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것도 하느님에 관한 유일한 표상으로 간주될 수 없으므로, 남성도 하느님의 형상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어떠한 특별한 우선권도 갖고 있지 않다. 하느님에 관한 언어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며, 다만 유비적이고 은유적일 뿐이다. 하나의 성에서, 그리고 하나의 사회적 상황(지배계급의 상황)에서 도출된 하나의 표상을 하느님에 관한 규범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성과 사회계급을 하느님의 표상에 대한 규범적 소유자이자 땅위에서의 하느님의 대변자로 정당화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상숭배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금속이나 나무에 새긴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은 남성’이라는 우리 머리 속에 새겨진 표상도 그 상징적인 성격이 망각될 때 우상이 되는 것이다.
여성신학자들이, 여성의 열등성과 종속성을 신이 내린 질서로서 강조하고 원죄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전가하는 신학적 내용을 합리화한 “종속의 신학”을 비판하고, 여성의 존엄성과 평등성에 근거하는 “동등의 신학”을 창출할 수 있는 신 이해를 형성하려고 하는 것은, 여성신학의 당연한 과제일 것이다.
2.2. 하느님의 유일신적 초월성
전통적인 하느님 이해에 대한 여성신학의 비판은 하느님의 남성성뿐 아니라 초월적인 유일신적 이해에도 적용된다. 류터는 남성 유일신 사상은 남성적 신 이해를 지닌 종교조직을 통하여 가부장 주의적 지배의 사회 위계질서를 강화해 온 사상이라고 지적한다. 남성 유일신 사상은 신의 성을 따른 남성은 신과 우선적으로 관련되며 여성은 남성을 통하여 이차적으로 관련된다는 의식을 형성하게 하였고, 남성은 현실을 초월한 영적인 존재로, 여성은 열등하고 내재적인 육체적인 존재라는 이원론의 기초를 제공한다. 또한 다양성과 다원성을 억압하는 경향을 촉발하여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 그렇지 못한 이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며, 모든 종류의 파괴성을 야기하는 근원적인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특히 남성 유일신 사상은 신에 대한 여성적 이미지를 배제하여, 여성이 남성에 의하여 지배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구조를 낳게 했으며, 여성에게 정체성을 잃게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남성만이 하느님의 모습을 표준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고, 여성은 자기의 여성성을 부정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이상적인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상에 반영하거나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은 여성에게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게 만들기에 여성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성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지어내신 하느님의 모습이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라고 하여,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거나, 포함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으로 대등한 존재임을 증언하고 있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모상이라면 하느님의 모습과 표상에서 드러나고 인정되어져야만 할 것이다. 또한 논리적으로 보아도 하느님이 절대신이라면, 절대신인 하느님은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 없으므로 남성만 일수는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도 되고, 또 남성. 여성임과 동시에 이 둘을 다 넘어서서 둘 다 아닌 분이기도 한 것이다. 남성유일신 사상은 그리스도교적 신론과 인간론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구체적인 여성의 억압경험에서 출발하는 여성신학자들에게 저 세상에 존재하는 절대적 초월성을 지닌 남성(백인남성)의 모습을 지닌 신은 더 이상 구속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며, 지배와 종속이 아닌 관계성과 사랑의 올바른 신 이해를 형성하려는 것은 여성신학의 중요하고 당면한 과제일 것이다.
3. 여성 신학적 하느님 이해
기독교의 전통적인 하느님이해에 대한 여성신학의 대안은 1)하느님 상징의 남성성이 남성의 권력과 권위를 합법화하는 근거로서 신성화되고 있으므로 하느님의 성을 중성화하거나 양성화하는 것이 요청된다는 것이고 2) 하느님의 성만 바꾸는 것은 그 속에 함축된 성차별주의를 극복하는데 충분치 않으므로 성에 관련된 성서적 이미지와 철학적 개념들 인식론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강남순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대한 여성신학자들의 입장에 따라 성서 주의적, 개혁 주의적, 그리고 급진주의적 또는 혁명 주의적으로 불리는 기독교후기 여성신학자의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3.1. 성서주의적 여성신학자들의 이해
성서와 전통은 본질적으로 성차별주의가 아니라고 여기며, 성서와 전통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여성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가진 신학자들로 트리블, 럿셀을 들 수 있다. 이들에게는 하느님 상징이 남성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며, 이러한 남성적 상징이 지배와 억압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음이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지금까지 간과되었던 성서적 전승(특히 구약)에서 여성적인 모습을 찾거나, 가부장적인 용어로 가려진 하느님상징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냄으로써 성서와 전통이 성차별주의라는 비판으로부터 성서와 전통을 옹호하려 시도한다.
성서 전통에서의 여성적 상징을 제시하고 있는 트리블은 성서가 가부장 문화에서 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성서가 하느님의 출산, 수유, 양육 등의 여성적이며 모성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성서는 성차별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강력한 가부장적 문화에서 형성된 성서에 하느님의 여성적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은 성을 초월한다”는 성서의 근본적인 통찰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성서의 메시지가 본질적으로 해방의 메시지임을 강조하는 신학자인 럿셀은 하느님의 상징이 아버지, 왕과 같은 남성적 상징 이었기에 하느님 해방의 메시지가 가려졌다고 주장하며, 남성적이 아닌 창조자, 구속자, 또는 해방자등의 중성적 요소로 대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신에 대한 인간의 은유(메타포)는 인간이 신에 대하여, 그리고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자신에 대하여 인식하는 방법을 결정하는 중요한 도구이므로 남성적 언어를 대체할 수 있는 “사용가능한 언어”를 찾아 “신의 잃어버린 이름”을 찾고자 한다. 언어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므로 기독교 전통 속에 있는 신에 대한 언어의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하며, 또한 사적이고 영적인 해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2. 개혁주의적 여성신학자들의 이해
성서는 본질적으로 해방의 비전을 가졌으나 성차별주의적인 요소가 스며들었다고 보기에 성서와 전통은 성차별적요소와 비성차별적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비 성차별적 비전에 근거해서 성차별적요소를 거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개혁 주의적 신학자로는 초기의 댈리와 류터를 들 수 있다.
“신이 남성이면, 남성이 신이다”라는 유명한 말로 신 상징의 남성화를 비판하고 있는 댈리는 신이 성을 초월한 분이며, 남성에 속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신학이나 철학적 전통들이 전제하고 있지만, 신에 대한 문제는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상징의 남성성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상징은 상징을 넘어서 어떤 것을 지칭해야 하는데, 신을 아버지라는 상징 안에 가두어 놓아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유한한 남성의 힘을 무한한 것으로 신성화하는 “우상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남성적 상징으로 왜곡된 신의 이미지는 지배, 정복, 억압, 전쟁 등을 정당화하여 생명이 아닌, 죽음을 사랑하는 서구의 가부장적 문화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 온 굳어있는 명사로서의 신일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성을 제외시키는 굳어진 남성명사로 표현되는 하느님대신에, 창조하고, 구원하며, 화해하면서 끊임없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역동적이고 열려있는 “동사로서의 하느님”의 상징을 제시하고 있다. 신의 이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대치하는 것은 여장한 남자와 같이 남자가 여성의 역할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 내주는 것뿐이므로 가부장적 신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댈리는 경고하고 있다.
가부장주의와 기독교 신 개념의 가부장주의적 요소가 지닌 위해적 결과들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여성신학자들 중의 한사람인 류터는 서구사상의 이분법적 구별(초월-내재, 영혼-육체, 인간-자연, 남자-여자 등)이 서열을 만드는 대립적 이원론을 야기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전통에서 여성을 열등한 육체, 자연과 연관시킴으로써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기인함을 비판하고 있다. 류터는 억압구조를 야기하는 이원론을 종교와 사회 안에서 통합시키고, 억압된 사람들의 해방을 막는 장애들을 제거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류터에게는 신 상징의 남성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남성성을 지배와, 여성성을 복종과 일치시키는 대립적 이원론이 문제이므로, “남성 초월적 신을 단지 여성적 내재적 신으로 대치하는 것”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어머니로서의 신적인 이미지는 인간을 언제나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는 “영적인 유아주의”를 형성하고, 남성과 여성의 관습적인 역할을 강조하므로 써 가부장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아 부모로서의 신 개념을 비판한다. 대신에 그녀는 남성과 여성의 경험을 모두 통합하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창조자로서의 신” “위대한 모형”으로서의 신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이원론을 극복하고 이원론적으로 대립된 모든 것들의 조화를 추구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류터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위대한 모형으로써의 통합적인 신의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남성과 여성 모두가 구속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려 한다.
3.3. 급진주의적 여성신학자들의 이해
기독교 전통이 본질적으로 성차별적이므로, 성차별적인 전통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교전통을 창출해야 한다고 보는 급진주의적 여성신학자들로는 스톤(Merlin Stone)과 크라이스트 (Carol Christ)를 들 수 있다. 각기 제시하는 대안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남성적 하느님의 상징을 거부하고 고대 전통 속에 있는 여성신의 자취를 찾아서 여성 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를 형성함으로써 여성들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전자조각술을 전공한 조각가인 스톤은 “하느님이 여자였을 때”라는 책에서 종교가 처음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을 때 하느님은 여자였다고 하며 인류가 여신을 숭배했다는 흔적을 여신상의 조각들을 통하여 설명한다. 그녀에 의하면 이러한 고대의 여신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적인 이미지로 여겨지는 하늘의 여왕, 태양신, 만유의 창조자로 나타나며, 현명하고 용감할 뿐 아니라 강력하고 정의로운 분으로 표현되는 분으로, 오늘날 남성지향적인 종교가 제시하는 여성상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러한 고대 여성신의 상징이 여성의 종속을 강화하고 합리화해 온 가부장적 신앙에서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크라이스트는 “왜 여성들은 여신을 필요로 하나”에서 여성신의 존재가 여성들에게 심리적 정치적 효과를 가진다고 밝히면서, 여성신의 상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여성 신의 상징 속에 함축되어 있는 여성의 힘에 대해 긍정함으로써, 가부장주의에 의하여 형성된 여성의 힘이 열등하고 위험한 것이라는 관점을 버리고, 여성이 자신의 힘이나 다른 여성들의 힘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됨으로, 심리학적 정치적 효과를 가진다고 본다. 2) 기독교 전통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되어 왔던 여성의 몸과 삶의 주기(생리, 출산, 양육 등의 여성 고유의 경험은 여성이 몸, 자연과 세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를 긍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여성들의 경험과 주기들이 부정적이 아니라 창조적인 힘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여성고유의 의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여성들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크라이스트의 이러한 여성 신으로의 전이는 여성을 새로운 각성과 깊은 통찰로, 나아가서 통전적인 삶의 추구가 가능한 세계로 여성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해될 수 있다.
한 사회의 주도적인 종교의 상징들 속에 남성이 우월한 위치에 있을 때는 종교 밖의 사회, 정치생활을 하는데 에서도 그러한 남성우월적인 위치에 대하여 편안함을 느끼듯이, 여성 신을 예배하는 종교가 그 사회의 주도적인 종교일 때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가 남성과 아주 동등하거나 우월하게 여겨지게 된다. 그리스도교 상징에 존재하지 않는 모녀관계의 전승이 여신의 상징에서 표현되고, 여성의 몸과 성(Sexuality)을 긍정하게 하므로, 여성 신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는 여성들에게 여성들의 정체성을 찾게 해주고, 자신의 몸을 부정함으로써 받았던 상처를 치유해주고, 여성의 해방과 구원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성 신학적 시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손상이 가는 위협적인 시도로 느껴질 수도 있으나, 신앙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다양하고 다원적인 모습을 새롭게 조명하고 풍성히 하는데 기여하는 하나의 신학적인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상징이 더 이상 남성적으로만 표현되지 않고, 종교와 사회에서 가부장 주의적 구조가 제거된다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여성의 인간성이 새롭게 드러날 것이고, 호혜적이고, 평등한 개념을 지닌 새로운 하느님의 상징이 창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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