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신학이란 무엇인가
여성신학이란 여성의 신학(feminine theology)이며 동시에 여성해방신학(feminist theology)이다. 여성의 신학의 주체는 생물학적인 성(sex)으로서의 여성이며, 여성해방신학의 주체는 사회적인 성(gender)으로서의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여성의 경험'이라는 공통의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 여성신학은 기존의 전통적인 남성신학에 대한 대안적인 신학으로서 비판적이면서도 보완적인 신학이다. 그것은 여성의 온전한 인간성 구현을 통한 남녀 인간의 구원을 지향한다.
여성신학이란 여성․해방․신학이란 3요소가 들어있는 여성의 해방을 전제로 하고 있는 신학으로 여기서 여성이란 여성다움이나 여성적인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권익을 위한 페미니즘의 요소가 강하다. 여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페미니스트적 신학이며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남성만의 반조각의 신학이 아닌 남성과 여성의 통전적인 신학을 위해 교회 전통과 신학에 들어있는 성차별을 극복하고 여성의 주체성과 여성의 인간화를 회복하려는 것이 여성신학이다.
(기존의 신학은 남성의 체험을 기반으로 한 것 => 남성중심적 혹은 남성 우월적인 신학 및 교회를 탄생 => 여성 억압이 계속됨.
여성신학은 여성의 체험을 기반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신학하는 것으로 여성해방을 그 목적으로 한다.)
여성신학의 학문적인 방법과 성격
여성신학의 정의는 ‘신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의미와 가치를 여성의 입장에서 성찰하는 것이다’라고 내릴 수 있다. 여성의 입장에서 신을 성찰한다고 할 때 무엇보다 여성의 경험이 성찰의 내용이 된다. 신학함에 있어 여성의 억압받고 있는 상황을 중요시하여 그 상황에서 겪은 여성의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여성의 경험에 비추어 신을 성찰하고 신학의 주제를 성찰하기 때문에 여성신학은 귀납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여성이 억압받는 상황(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억압의 상황)이 여성신학의 장이고 이런 억압된 상황에서의 여성의 억압의 경험과 해방의 경험이 여성신학의 기본자료가 된다.
[김용복] 한국여성신학의 관점에서 본 민중신학
한국여성신학의 관점에서 본 민중신학
여성신학과 민중신학의 대화는 여러 가지 관점과 방법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관점들과 방법들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성신학과 민중신학의 접촉점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필자는 이 접촉점이 민중과 여성이 한국의 역사와 상황에서 겪는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이해에서 주어진다고 본다. 민중신학과 여성신학은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민중신학은 민중현실을 발견함으로써 신학하는 방법과 관점을 새롭게 설정하였다. 민중현실에 대한 경험은 신학자들이 이제까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서구신학의 방법들과 관점들을 의문시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 방법들과 관점들은 민중경험을 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통로를 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여성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성차별의 현실에서 여성이 겪는 억압과 소외의 경험이 여성들에 의해 자각되면서 이제까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어 온 신학에 대한 의혹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 나아가 경험의 맥락에 대한 인식은 한국여성의 경험과 1세계, 혹은 2세계 여성들의 경험을 구별하게 하였고, 1세계나 2세계의 여성신학이나 여성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한국여성의 경험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관점과 방법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의문과 의혹, 경험의 맥락에 대한 강조는 민중신학자들과 여성신학자들로 하여금 민중의 경험과 여성의 경험을 해석하고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나름의 해석학을 발전시키게 한 첫 걸음이었다.
물론 한국상황에서 민중이 겪는 경험의 내용과 여성이 겪는 경험의 내용이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여성을 ぢ민중 중의 민중っ으로 보는 관점도 있지만, 여성이 자동적으로 민중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도 의문이다. 민중여성을 말할 때에도 민중여성을 단순히 민중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민중여성은 한국사회에서 민중이 겪는 고난과 억압, 소외를 경험하지만, 이 경험들은 다시 성차별적 현실과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표출된다. 한국사회의 성차별적인 현실과 그것의 역사적 맥락에서 여성들이 겪어 왔던 고난과 억압과 소외의 경험은 민중신학에서 충분하게 성찰되지 않았다. 그러나 민중의 경험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민중신학의 방법은 여성의 경험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대부분 남성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민중신학이 여성 경험을 신학화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학하는 방법과 관점이 여성신학자로서 여성 경험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데 의미 있는 시사를 던지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여성의 경험과 민중의 경험이 모종의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우선 이 경험의 동질성을 접촉점으로 삼아 민중신학과 여성신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고, 그 다음 여성 경험에 근거하여 여성신학과 민중신학이 앞으로 더 대화를 나누어야 할 주제들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민중의 경험과 여성의 경험
민중신학은 민중경험을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에 놓고 있지만, 정작 민중을 개념적으로 규정하는 일은 삼가하고 있다. 민중은 자신의 현실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생동적인 주체인데, 이 민중을 개념화하면 민중의 생동하는 모습은 포착되지 않고 민중의 실체는 박제화되고 만다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이다. 그리고 민중 바깥에서 민중을 향해 민중을 규정하려고 하는 것은 민중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민중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 발상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이다. 이처럼 민중에 대한 개념규정을 거부하는 민중신학은 민중의 주체성을 중시하고 민중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역동성을 포착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한다.
물론 민중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구체적인 현실관계들을 체현하며 살아간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도외시하고 민중의 어떤 속성을 추상적으로 서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민중을 알고 민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실관계들을 체현하며 살아가는 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민중의 이야기를 그 이야기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민중신학은 적어도 이 두 가지 방법적 절차를 거쳐(이 방법적 절차에 대해서는 후론) 민중현실을 경험하고 그것을 신학화하고자 한다.
민중은 구체적인 현실관계들에서 정치적으로는 억눌리는 자들로, 경제적으로는 수탈당하는 자들로, 사회적으로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자들로, 문화적으로는 아이덴티티를 상실하고 있거나 왜곡당한 자들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주변화된 사람들이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현실관계들 속에서 한(恨)을 품고 살아간다. 한은 쌓인다. 그것은 잊혀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한은 한을 품은 사람에게 쌓이는 것이지만, 그 사람이 그 한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한의 뿌리는 당함이다. 그것은 당한 죄(being sinned against)이다(서남동). 한을 품고 있는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니다. 그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한을 푼다는 것은 이 세상의 죄, 당함의 구조를 깨뜨리는 일과 별개일 수 없다. 한은 속량의 힘을 가지고, 한을 품고 살아가는 민중은 메시야 정치의 실천자가 된다(서남동).
현실관계들 속에서 민중이 살아가는 비참과 고난을 넘어서서 그 속을 깊이 들여다 보면, 그들은 일하는 사람들이고, 일을 통해 가치를 창조하고 세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일을 함으로써 이 세상의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본래의 주인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본래의 주인인 민중을 이 세상의 주변으로 밀어내는 현실이 문제가 되고, 이 현실을 극복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삶과 세상의 주인으로 복귀하는 민중의 힘을 형성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민중신학은 이 힘이 민중 바깥에서 민중에게 선사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 힘은 민중 안에 있다. 그 힘은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끈질긴 민중의 생명력, 나락의 극한에서 그 나락을 뒤집어 하늘을 보는 민중의 생명력에서 우러나온다. 그 힘은 민중으로 하여금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을 통해 서로 연대하게 하는 힘이요(김용복), 자기를 초월하여 공동체를 경험하게 하는 힘이요(안병무), 현실관계들의 모순들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초월하고 무력화하는 힘이다(현영학). 민중신학은 바로 이 민중의 힘을 신뢰하고 있다. 이 신뢰야말로 민중신학의 원점이고, 민중이 역사의 주체요 구원의 주체라는 민중신학의 주장을 힘있게 만드는 근거이다.
80년대의 한국상황에서 민중은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힘으로 등장하였다. 민중은 현실관계들을 변화시키는 과정과 운동 속에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민중을 파악하기 시작하면서 민중에 속하는 자들이 누구인가를 정태적으로,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추구하는 역사의 진보적 이익을 위해 서로 힘을 모으고 연대하면서 다양한 계급,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과제를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다양하게 수행하는 과정이 중요하게 되었다. ぢ나는 민중이 아니다っ, ぢ민중은 나와는 다른 존재다っ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문제는 민중이 추구하는 역사의 과제들을 공유하면서 그 과제들을 수행하는 다양하고도 다원적인 실천방식을 개발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굳게 자리잡게 되었다.
한국여성신학은 최근에 이르러 민중여성의 현실과 그 경험을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으로 설정하면서 민중신학에 특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국여성신학은 해방신학보다 민중신학에 더 큰 친화성을 느끼고 있는데, 그것은 민중의 경험과 민중여성의 경험이 형성되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민중경험의 핵이라고 볼 수 있는 한에 대한 민중신학의 이해는 민중여성의 현실과 그 경험을 적절하게 형상화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민중의 주체성에 대한 강조와 그것의 근거가 되는 민중의 힘에 대한 신뢰는 여성해방의 원천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도전이다.
그런데 민중여성의 현실과 그 경험을 성찰할 때에는 민중여성을 어떻게 인식하여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앞에서 필자는 민중여성은 한국사회에서 민중이 겪는 고난과 억압, 소외를 경험하지만, 이 경험들은 다시 성차별적 현실과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표출된다고 말한 바 있다. 민중여성은 이중적인 표지 아래 있다. 민중여성은 민중으로서는 한국민중의 고난과 해방을 위한 실천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있지만, 여성으로서는 성차별의 모순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민중여성이 민중의 고난을 고스란히 당하고 거기에 더하여 성차별의 고통을 더 당한다는 평면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민중여성은 민중이 당하는 고난의 현실이 성차별적인 현실구조를 매개로 하여 독특하게 재생산되어 나타나는 바로 그러한 성격의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민중여성의 고난은 민중의 고난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민중여성의 경험은 여성 일반의 고난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잘라 말해서, 여성의 현실을 단지 성차별의 표지 아래서만 파악하여 여성의 성차별 경험을 일반화해서는 여성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가부장제 아래서 억눌리고 소외당하는 여성의 경험은 각 계급, 계층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ぢ여성은 민중이다っ 혹은 ぢ여성은 민중 중의 민중이다っ라는 말은 이런 점에서 불투명하다. 가부장제 아래서 여성이 억압과 소외를 당한다는 말은 일반적인 규정에 불과할 뿐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 억압의 현실은 구체적인 현실관계들을 체현하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여성들의 다양한 삶의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상류층 여성의 성차별적 경험과 중류층 혹은 하류층 여성의 성차별적 경험이 동일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민중신학은 한국여성신학으로 하여금 여성의 현실을 그것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성찰하라는 도전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 민중여성의 경험은 민중신학의 철저화를 요구하는 도전이다. 민중여성의 경험이 갖는 이중적인 성격은 인간관계들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공고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남성과 여성의 정치관계로부터 민중의 현실과 그 맥락을 신학적으로 재음미할 것을 요구한다. 김용복은 조선 사회의 역사를 여성 노비의 삶의 이야기로부터 재구성하고,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정신대 여성의 이야기로부터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 바 있는데, 필자는 이 제안을 중시한다. 이 제안은 민중신학을 좀더 철저하게 전개하는 데 필요한 관점이 어느 만큼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중여성의 경험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무관하게 전개되는 민중신학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기울어질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될 것이고, 민중신학의 주제들을 한참 이야기한 끝에 여성문제를 곁다리 삼아 언급하는 것은 불성실한 태도로 간주될 것이다.
80년대 민중신학이 민중을 민중해방의 과정과 운동 속에서 파악한 것은 한국여성신학에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민중여성이 추구하는 여성해방은 민중해방과 인간해방을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 다양하고 다원적인 연대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중여성의 해방을 위한 운동, 민중여성의 고난과 한을 풀어가는 과정은 다양한 계급, 계층의 여성들 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동참을 요구한다.
민중신학과 여성신학의 방법 - 이야기 분석
민중신학은 민중을 이해하기 위해 민중의 이야기에 관심을 집중한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주체성과 역동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민중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민중이 남긴 이야기와 그것의 맥락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김용복). 그것은 또한 민중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규정을 물리치는 중요한 수단이다. 민중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민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것이다. 민중이 스스로 말하는 것을 통해 민중의 고난과 갈망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민중신학이 과거에 민중이 남긴 이야기들이나 그 단편들의 수집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중의 이야기는 규정적이지 않고 서술적이며, 삶의 경험과 직접 맞닿아 있다. 민중은 삶에서 우러나오는 언어, 몸의 언어로 말한다. 민중은 자신의 삶의 경험을 개념화하지 않고 다만 이야기할 뿐이다. 민중의 삶은 구체적인 맥락을 가진다. 민중의 이야기는 맥락화된 이야기이고 그 맥락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이야기, 집단화된 이야기이다. 민중이 남긴 이야기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바로 이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민중의 이야기를 분석할 때 그 이야기에 담긴 민중의 현실에 대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분석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김용복).
민중의 언어는 몸의 언어, 삶의 언어라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언어도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을 지배하는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염될 수 있다.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삶의 경험과 갈망이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와 충돌할 때에는 변형된 형태로 표현될 수도 있고 아예 말하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앞의 것은 은어나 상징, 혹은 지배적인 언어에 동화된 표면언어로 나타나고, 뒤의 것은 이야기의 맥락을 단절시키는 숨은 언어로 나타난다. 역사 속에서 민중이 남긴 이야기들은 전승과정을 거치면서 왜곡되고 굴절되는 사회사적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었다. 이야기들이 문자화되는 경우에 왜곡과 굴절은 특히 심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지배자들이고 민중이 남긴 이야기들은 이들의 지배적인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검열되고 배열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민중이 남긴 이야기의 속알맹이는 새롭게 편집된 이야기의 이면구조에 자리잡거나 화석과 같은 흔적으로만 남을 것이다. 민중신학은 문학사회학적 방법, 이데올로기비판 방법을 활용하여 이야기의 표면구조를 뚫고 들어가 그 이면구조를 드러내고자 하며, 화석처럼 굳어진 이야기의 흔적을 통해 민중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있다(서남동).
민중신학이 이야기 분석을 성서 해석과 교리 해석에 적용함으로써 성서와 교리를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척하였다. ぢ예수 사건과 전승모체에 대한 분석(안병무)은 케리그마 신학의 전제를 무너뜨리고 예수와 민중이 함께 엮어간 원사건을 재구성하고 예수 사건의 통시적, 공시적 맥락을 성찰하는 길을 열었다. 서남동은 민중의 이야기가 케리그마와 교리로 추상화되는 사회사적 과정을 중시하여 계시 사건의 정수를 오늘에 되살리기 위한 ぢ탈신학っ과 ぢ반신학っ의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
이야기 분석에 근거한 민중신학의 방법은 한국여성신학의 방법과 같은 궤도 위에 놓여 있다. 한국여성신학은 민중여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고 민중여성의 이야기와 그 맥락을 성찰하는 해석학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한국여성신학은 여성의 경험, 특히 민중여성의 경험을 성찰할 수 있는 통로를 열지 못하는 신학들의 해석학에 의혹을 품는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표면에 드러나지 않거나 화석과도 같은 흔적으로 남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복원시키기 위해 ぢ탈신학っ과 ぢ반신학っ과 유사한 프로그램이 이미 개발되고 있다. 성서와 교리를 통해 구현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불투명한 폭력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학전통의 영향사를 여성 경험과 여성해방의 실천에 근거하여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도 인식되고 있다. 여성의 경험과 여성해방의 실천에 근거하여 성서를 다시 읽는 것은 성서에 여성해방 이데올로기를 끌고 들어가 그 이데올로기를 성서의 본문에 각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성서에 남아 있는 이야기들의 표면구조를 뚫고 들어가 잊혀지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여성해방적인 경험들을 발견하고 그 맥락을 재구성하여 그 경험에 대한 회상을 통하여 오늘의 여성해방의 실천에 역동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작업은 여성현실에 대한 경험과 해방을 위한 여성의 실천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여성의 이야기는 강요된 침묵의 언어, 숨은 언어인 경우가 많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최근에 일어난 한 사건을 예로 들고 싶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주차장에서 중년의 여성 사업가가 3인의 폭력배에 의해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하고 협박을 당하다가 21시간만에 극적으로 탈출한 사건이 있었다. 3인의 폭력배는 나중에 검거되어 기소당했다. 피해 여성은 경찰과 검찰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진술하였지만, 정작 자신이 당한 성폭행의 사실만은 밝히지 않았다. 그로 인해 심한 우울과 정신착란을 겪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정신과 의사에게도 그 사실을 숨겼다. 정신과적 증상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치료가 될 리는 만무했고, 피해 여성의 증상은 악화되었다. 성폭행 사실을 진술한 것은 법정에서였다. 자신을 폭행한 범인들의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와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검사의 집요한 추궁에 의해 이 여인은 성폭행 사실을 마침내 진술하였고, ぢ다시 강간당하는 듯한ぢ 충격으로 인해 공판정에서 극도의 착란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이 실화는 여성들의 경험이 이야기되지 않고 이야기되더라도 이야기의 맥락을 현저하게 단절시키는 숨은 언어로 가득차 있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유교적인 가치관과 이중적인 성윤리에 포위된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성문화에서 성폭행 사실이 공개되었을 때 가족이나 친척들, 지인들과의 인간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이 현실이 이 여인의 입을 가로 막았다. 요즈음 문제가 되는 정신대 여성들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이들의 이야기만이랴!
한국여성신학은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여성들의 숨은 언어를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한은 쌓이고 삶의 건강성은 파괴되는 데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는 현실, 저 숨은 언어의 현실을 포착하고 이를 성찰하는 방법은 화석의 고고학적 탐구나 이야기의 이면구조를 드러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과제이다. 여성신학적 상상력은 여기서 고도로 발휘되어야 한다. 그 상상력은 여성들이 함께 나누는 동질적인 한의 경험에 터잡은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상상과 몽상일 수 없다. 그리고 여성에게 강요되는 침묵을 깨뜨리고 여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하나의 길은 여성의 고난과 이로 인해 쌓이는 한을 ぢ당한 죄っ(being sinned against)로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성의 해방과 살림을 향하여
민중신학은 민중경험을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서구신학의 이원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전제를 무너뜨린다. 우선 민중신학은 주객도식을 해체하고 고립된 개체성에 근거한 인격주의 대신에 주체와 주체의 상호관계(interconnectedness)를 역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통로를 열고 있다. 그 다음, 민중신학은 머리와 몸, 이성과 감성, 정신과 물질, 남성과 여성,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서 전항보다는 후항을 강조한다. 이것은 머리, 이성, 정신, 남성, 이론이 몸, 감성, 물질, 여성, 실천에 대해 우위를 주장함으로써 삶의 건강성과 힘이 억압되어 온 문명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함축하고 있다. 끝으로 민중신학은 사변의 길, 연역의 길로부터 실천과 귀납의 길로 나아간다. 민중신학의 이와 같은 출발점과 방법의 전이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다양성을 향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한국여성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민중신학의 이 세 가지 입장은 민중신학과 여성신학의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실마리이다. 우선, 한국여성신학은 삼라만상을 고립된 개체로 해체하지 않고 그것을 상호의존, 상호보완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삼라만상의 유기적 연관과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한국여성신학의 인식론은 월경, 임신, 출산, 양육, 살림 등 여성의 가장 기본적인 경험에 터잡은 것이고, 삼라만상의 운동과정을 기(氣)로 설명하는 동양사상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성은 자연의 순환과 재생, 삼라만상의 생명관계를 몸으로 살아간다.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임신과 출산이다. 임신과 출산은 지구의 탄생으로부터 오늘의 생태계에 이르기까지의 생명과정 전체를 재연하는 과정이다. 생명과정은 분열과 통합이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역동적이고 진화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생명과정의 어느 한 부분이 막히거나 맺히면 생명 전체가 죽음에 이른다. 막힘과 단절은 생명의 힘을 죽인다. 생명의 진리는 소통과 맥락관통이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주객도식의 극복과 고립된 개체성에 근거한 인격주의는 생명과정에 대한 여성의 체험과 이에 대한 여성신학적 이해, 그리고 맥락관통으로 총괄되는 기철학적 생명 이해에 의해 보다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 다음, 여성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머리와 몸, 이성과 감성, 정신과 물질, 남성과 여성, 이론과 실천의 양극적 분열과 후항에 대한 전항의 지배는 단순히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화와 이에 따른 계급의 분화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고, 노동 및 계급 분화와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나름의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가부장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파악한다. 가부장제는 남성과 여성을 이원론적으로 분열시키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고정불변의 질서로 고착시킨다. 남성적인 속성과 여성적인 속성도 가부장제에서는 유사선험(quasitranscendental)으로 규정되고, 남성과 여성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이 속성들을 내면화하도록 강제된다. 이성, 합리적 분석, 용기, 대담, 지배 등은 남성적인 가치로 찬양되고, 감성, 정서적 감응, 굴종, 수줍음, 순종이 여성적인 가치로 고착화되고 폄하된다. 가부장제는 인류문명의 특정 단계에서 잠정적으로 나타난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그것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수 없게 만드는 초역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데올로기를 남성과 여성에 내면화시킴으로써 여성지배를 항구화한다. 이런 점에서 몸, 감성, 물질, 여성적인 것, 실천에 대한 강조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가부장제 현실 아래서 이지러진 삶의 건강성과 통전성을 회복하려는 관점을 함축한다. 몸, 감성, 물질, 여성적인 것, 실천에 대한 민중신학의 이해는 여성신학에 의해 더 철저화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필자는 앞으로의 신학형성에서 감성이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감성은 개체성 안에 고립되지 않고 자기자신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개방하고 그것을 접촉하고 그 접촉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살찌우는 과정이다. 따라서 감성은 교통과 맥락관통의 근거이다. 감성은 감응과 수용의 과정이다. 감성은 감응과 수용의 반복과 그 영역의 확대를 통해 무한히 분화되고 세련화된다. 피조물의 고통(로마 8장)을 말하고, 자연과 자매형제로서 교통하고 돌에도 피가 흐르는 것을 감지하는 것도 감성의 탄력성과 자기개방성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주객도식과 인간중심주의로 인해 나타나는 현대의 생태계 위기는 감성의 해방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생명관계의 생태학적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앞으로 형성해야 할 신학은 감성을 강조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감성, 감성경험, 감성관계를 출발점으로 삼아 신학의 내용과 형식을 새롭게 마련하여야 할 줄로 안다. 민중신학과 여성신학은 바로 이와 같은 신학의 형성을 위해 대화의 파트너가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감성도 가부장제 아래서 왜곡된 내용과 형식을 가질 수 있다. 상품관계가 실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부장제적 성차별에 근거한 감성은 포르노화의 경향을 띤다. 감성은 병적인 성욕으로 퇴화되고, 많은 경우 여성들과 남성들은 포르노화된 감성의 노예가 되도록 강요당하고 또 거기에 순치된다. 그것은 감성의 물화이고 진정한 교통의 차단이다. 감성을 통한 생명관계는 송두리째 파괴된다. 우리 시대에 상품관계와 결합된 가부장제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감성을 해방하여 삶의 건강성을 이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끝으로, 연역과 사변으로부터 귀납과 실천으로의 전이는 이제 더 이상 선언일 수 없다. 80년대의 민중신학은 민중해방의 실천에 동참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을 접촉점으로 삼아 현실관계들의 분석과 종합, 대안의 모색, 신학적 근거의 확립을 서로 연관짓는 의욕적인 작업을 수행하였다. 연역의 출발점이 의문시되었고, 실천을 통해 진리를 검증하고자 하였다.
한국여성신학은 실천 위에 보다 굳건히 서야 한다. 민중여성의 현실을 새롭게 발견하고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여성신학 형성의 출발점을 실천적으로 확보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로 새겨도 좋을 것이다. 한국여성신학은 민중여성의 한을 풀어가는 생명운동, 살림운동의 실천경험으로부터 여성신학의 내용과 형식을 가다듬어야 한다. 생명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생명은 현실관계들 너머에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생명은 현실관계들에 의해 이그러지기도 하고 충만해지기도 한다. 생명운동은 생명을 죽이는 현실관계들을 극복하는 일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이 현실관계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생명을 노래하고 생명중심의 사변을 펼치는 것은 생명의 현실에 대한 태만이요 책임회피이다. 민중의 삶을 죽임의 악순환에 휘말리게 하고 민중여성을 한스럽게 하는 현실관계들은 극복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실현과 민족자주화, 민족통일은 생명운동의 한 일환이다. 한국여성의 해방은 그것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생태학적 공동체의 실현까지를 내다보는 한국여성운동은 이 생명운동의 일환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과제, 여성해방의 과제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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