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제사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나타난 kenosis
창세기 22장 안에서
우리는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는 아브라함의 신앙적 태도'와 '십자가상 위에서 성부의 뜻과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의 뜻과 그 분의 믿음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는
<Kenosis적인 신앙적 태도>를 지닌 두 인물을 만났 수 있다.
매우 부드럽고 정교하며 느린 동작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사악의 제사'이야기 속에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희생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아들에 대한 애듯한 연민과 애정 그와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그의 무조건적인 순명의 마음이
희비극으로 엇갈리는 아브라함을 볼 수 있다.
성서저자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억제하고 간결한 문체로 처리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깊은 고뇌에 빨려들어가게 이끌고 있다.
어째튼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다시 가져가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명령 앞에
선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는 Kenosis적 마음과 자세로 하느님 앞에 서고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실존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적 자세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되고
하느님은 그를 둘로 없는 '당신의 벗'삼으시고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당신의 계약의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주시며, 이로인해 아브라함은 성서의 전통 안에서 신앙을 따라 '순종하는 의인의 전형'이 된다.
이제 십자가 상 위에 높이 메달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놓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자.
사도 바울로와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이사악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사랑하는 외아들을 번제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을 성부로 보았다.
이사악이 번제물을 사는 장작을 운반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셨다.
또 양이 이사악 대신 제물이 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속죄를 위한 번제의 어린양 곧 제물이 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의 중재로 자기 외아들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게 되었지만,
성부 하느님께서는 아들의 참혹한 죽음을 실제로 목격하신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전혀 모르는 이사악과 달리 예수님은 아바지의 뜻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그 뜻에 절대복종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신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바쳐지는 이사악이 되는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한 아브라함도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을 목격할 수 있다.
즉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성부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인간의 죄를 대신 하는 속죄의 번제로 받쳐지는 아들의 희생을 감수하신다.
아니 당신의 그토록 사랑하시는 외아들을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죽이신다.
반면
하느님 성부와 인간을 그토록 사랑한 그리스도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기꺼이 자신을 속죄의 어린양으로 성부 하느님께 바치신다.
우리는 이 안에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모습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이 <사랑> 이심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 십자가상 위의 죽음 앞에 선
그리스도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온전한 자기 비움(Kenosis)마음과 태도를 만나게 된다.
성부와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았다다는 철저한 고독 안에서 조차
그 '버림받음'이 '사랑'으로 승화되고
'고독'이 타인을 위한 철저히 자신을 주는 'Kenosis'로 변화됨을 보게 된다.
이것이 참된 사랑의 모습이고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고
참된 하느님의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아끼지 않고 바치려는 아브라함과 그의 마음 만을 받아들이시고
그의 소중한 아들의 생명을 다시 되돌려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뜻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친 그리스도를
하느님은 삼일 만에 다시 살려서 당신의 영광의 옥좌 오른편에 앉게 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다스릴 주권을 주신다.
우리는 여기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오가는 가장 아름다운 친교,
성부 하느님과 그의 외아들 그리스도 안에 오가는 가장 아름다운 친교를 또한 만나게 된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것이 바로 참 사랑이고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Kenosis이며
이 Kenosis가 바로 신앙인들이 하느님에 앞에 갖게 되는 피조물로서
그리고 신앙으로서의 마음과 태도라 생각하게 된다.
창세기 22장,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를 묵상하면서...
- 마리아 아나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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