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줍기(창세기)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마리아 아나빔 2010. 12. 21. 16:04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야곱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분위기’의 급변화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들이 평온하게 진행되는데 반해서

야곱에게 있어서는 투쟁이 변함없는 주제가 되고 있다.

야곱은 형 에사오와 투쟁, 외삼촌 라반,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사람들과 투쟁을 벌인다.

 

문학상의 이 같은 변화와 더불어 또 다른 변화도 눈에 띄는데

하느님께서 야곱과 상대하시고 야곱도 하느님께 응답을 하지만,

그 방법들이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났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축복을 받은 것은 그의 복종 때문이었다.(창세 15, 6; 22, 17-18)

 아브라함이 자녀문제를 두고 앞장서서 해결책들을 제시했을 때

하느님은 그런 제안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 안에서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한편 야곱에게 오면 우리는 자신의 재주에 의지하는

 인간의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하게 된다.

 야곱은 기도를 하지만 그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 위한

 어떤 기적이나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야곱은 스스로 머리를 짜서 자신의 어려운 궁지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러한 모습 안에서 우리는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인간을 만난다.

 아브라함에게서 발견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의 재주를 축복해 주시리라 믿는

야곱이라는 인물로 인해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재주를 풍성히 축복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Text를 통하여

하느님과 신앙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간략이 소개하였듯이,

우리는 아브라함이란 인물을 통한 하느님의 모습과 야곱을 통한 하느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인물을 통하여 성경의 하느님의 모습은 균형을 이루고

하느님의 부르심의 여정을 따라가는 인간의 모습

또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당신의 친히 부르신 사람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시기도 하지만,

또한 그에게 당신의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탄원하고 애원하는 이

또한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약속’이라면

야곱에게 요구하신 것은 ‘축복’이다.

이것은 두 개의 커다란 신학적 주제가 된다.

 

또한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우리는 초월적인 하느님의 모습과 내재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 모습에서는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시고 초월적이신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당신 친히 인간의 시간과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다.

전지 전능하신 분 시.공을 초월하여 내재하시는 하느님께서 손수 인간의 역사 속으로,

한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어 인간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매순간 표징을 보여주시며 그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고

그의 모든 삶에 말씀을 건네 오신다.

그리고 처음으로 초월적인 존재자로부터 프로포즈을 받은 인간은

그분의 말씀에 오롯한 마음으로 순종하며 그를 온전히 따른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언제나 먼저 이니셔티브를 취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스스로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 계약을 인간이 지키든 말든 당신 스스로 지키겠다고 하시며

인간에 대한 엄청난 사랑을 보여주시기도 하신다.

이것을 기도에 비유해본다면 인간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하느님이 영혼에게 다가오시고 그와 합일을 이끌어 가시며 그에게 당신을 드러내주시는

<관상기도>와 같을 지도 모르겠다.

 

반면 야곱의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는

 하느님의 내재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깊은 곳에 거처하시고,

그가 창조한 피조물의 모든 것을 축복하시며

그와  언제나 함께 존재하시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는 하느님의 전능과 징표 보다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피조물에게 주셨던 모든 것들,

그의 성격, 개성, 육체, 능력 심지어

그에 속한 모든 것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신다.

이곳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도 하지만,

그 스스로 질문하고 따지고,

싸움까지 벌리기도 하며 자신이 지닌 능력과 재주를 발휘하여

하느님의 축복까지 얻어낸다.

이곳에서 하느님은 초월적인 면보다 인간에게 내려와

그와 동등하게 겨루고 대화하고 함께 그 어려움을 타진하며 그를 인도하신다.

그는 그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하느님이 그에게 주신

내면의 무의식의 세계(꿈)를 통하여 통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이니셔티브를 먼저 취하시는 쪽은 어쯤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것 또한 기도에 비유해 본다면

 이것은 인간의 감성과 의지와 지성을 모두 사용해서

하느님과 합일에 이르러는 ‘묵상기도’에 해당될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신앙인의 두 가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다.

아브라함의 모습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의 여정에

 오롯이 믿음으로 순종하며 따라가는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고,

반면 야곱의 모습 안에서는

언제나 인간이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가는데 있어서

하느님께 여쭙고, 대화하고, 하소연하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하며 축복을 호소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이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에 모두 다 필요했듯이

지금 신앙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모두가 조화롭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성사의 은총에 비유한다면,

사효성’과 ‘인효성’에 비유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방법은 인간이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모두에게

햇빛처럼 쏟아주시기도 하고,

그리고 특별히 온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준비한 사람에게

더 많은 그분의 은총이 다가오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참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

우리 신앙의 믿음을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아브라함과 야곱을 통한 그들의 하느님을 만나 보면서-

 

                    마리아 아나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