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나눔

창세기(26,1-33) 이사악과 아비멜렉

마리아 아나빔 2011. 1. 3. 14:57

 

 

                                     성서나눔 29- 이사악과 아비멜렉(창세 26장)

 

            들어가면서

   이사악은 자기 고유한 역사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창세기 가운데 조상 이사악에 대해 독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 장 뿐이다. 그러나 이사악이 농사를 지었다는 것(12-14)을 빼면 이 장의 내용은 이미 아브라함에 대하여 한 이야기와 거의 같다. 보통 아브라함 때의 사건과 줄거리가 잘 맞는 곳은 저자가 편집을 할 때에 전승에 덧붙였다고 본다. 야훼전승이 이 장의 기본이 되어 있는 듯하다. 이 중에서 적어도 7-11절(레베카가 아름답고 아이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은 논리상 25장 21절에 선행된다. 마지막 34,35절에 에사오가 가나안의 여자를 맞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제전승에 따른 것이다.

 

 

Text 안에서

 

창세 26, 1-14: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

 

- 흉년 때문에 비옥한 지방에 피난 가서 미인계를 쓰려다 발각되어 오히려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창세기에 세 번씩이나 나온다. 12장에서 아브라함은 흉년을 피하여 비옥한 에집트 땅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으로 속였다가 에집트 왕에게 질책을 들었고, 20장에서는 아브라함이 그랄 지방으로 피난을 가서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누이동생으로 속였다가 꾸지람을 들었다고 되어 있다. 두 번다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책략 때문에 가정의 파탄을 겪게 될 위험과 두 사람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될 위험이 있었지만 하느님의 극적인 중재로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전한다.

 

- 여기서는 아사악이 아비멜렉의 지방 그랄에서 겪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아비멜렉을 불레셋 사람들의 왕이라 내세우는데 이는 시대착오적인 기록이다. 성조 시대에 불레셋인들은 아직 팔레스티나에 들어오지 않았다. 팔레스티나의 주민들이 흉년에 에집트로 양식을 구하러 가는 일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특히 가나안 남쪽 네겝 지방은 메마른 광야나 사막 지내여서 가뭄이 극심하다. 자연 비옥한 나일 강을 중심으로 풍부한 곡식을 거둬들이는 에집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 12장에서와는 달리 하느님은 이사악에게 에집트로 가지 말고 그랄로 가라고 하신다. 그랄은 팔레스티나 남부 브엘세바와 지금 팔레스티나 회교도들이 이스라엘 정부와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가자 지역 사이의 어느 중간 지대로 추정된다. 그랄로 내려가라는 명령과 함께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도 아브라함에게 내려주신 것과 똑같은 약속과 축복을 주신다. 이사악에게 이렇게 약속과 축복이 내려지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성실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내 말을 따라 내가 지키라고 일러 준 나의 계명과 규정과 훈계를 성심껏 지킨 덕이다”는 표현은 율법과 규율의 준수를 강조했던 신명기 저자의 편집 활동에 의해 첨부된 것으로 보인다.

 

- 아브라함처럼 이사악도 그랄에서 자기 아내 레베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인다. 본분에는 이사악이 아내 레베카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곳 사람들이 그녀를 차지하려고 자기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했다고 설명하지만 이미 20년을 기다려 쌍둥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이 중년부인의 아름다움이 처녀 때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20년이 넘도록 조강지처로 살아온 부인을 희생시킬 것을 작정할 만큼 이사악은 비굴하고 비겁해져 있다. 누가 만일 레베카의 정조를 빼앗는 일이라도 생기면 이사악은 레베카를 끝까지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하느님께서 그런 파탄을 미리 막으시고 중재하셨기 망정이지 아브라함도 그의 아들도 인간적인 비열함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한편 남존여비사상의 폐단을 철저히 젖어 있는 것 같다.

 

- 아들의 태도에 배해 그랄의 왕 아비멜렉의 태도는 매우 고상하고 점잖다. 아비멜렉은 우연히 이사악이 레베카를 애무하는 것을 보고 이사악을 불러 꾸짖는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경우와는 달리 여기서는 레베카를 범하려 하는 가상적인 인물이 왕이 아니라 백성 중의 어느 누구로 되어 있다. 아비멜렉은 어떤 개인의 범죄가 백성 전체에 멸망을 가져올까 두려워한다. 분명 이사악과 레베카를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비멜렉 왕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사악이나 아내를 건드리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겠다고 엄하게 경고하면서 둘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준다.

 

- 이사악이 점점 더 큰 부자가 되어가자 이를 시기하는 불레셋 사람들이 많아졌고 마침내 그랄에서 쫓겨나게 된다. 아내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배척을 당할 줄 알았는데 아내로 인해서 부와 번영을 얻게 되었고 오히려 엉뚱하게 안정과 행복을 보장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재산 때문에 쫓겨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알팍한 계산과 하느님의 지혜는 서로 전혀 상반된 결과를 낳는 수가 많다.

 

- 에집트와 그랄에서의 아브라함의 태도와 그랄에서의 이사악의 태도는 우리 각자의 모습을 깊이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불리한 경우엔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 고이 간직해야 할 가치조차 헌신짝처럼 팽개치는 비겁함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하와를 고발해떤 아담의 모든 후예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지는 않은지... 이사악의 그랄에서의 피난 시절이야기는 인간의 비열한 속성과, 한번 맺으신 약속과 맹세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이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창세 26, 15-33: 내가 너와 함께 있다.

 

- 그랄에서 불레셋 사람들에게 쫓겨난 이사악은 가까운 와디 그랄, 곧 물 없는 그랄 골짜기에서 다시 유목민 생활을 시작했다. 유목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물이다. 이 우물을 둘러싸고 목숨을 건 전투가 곧잘 벌어지곤 했다. 고대 유목민들은 우물을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생각했다. 우물로 가는 길, 우물의 이름들은 조상대대로 비밀리에 전수되었고 우물에 대한 소유권은 후손에게 양도할 수 있었다. 우물은 흙으로 메꾸어 버리기도 했다. 그랄 골짜기에 천막을 친 이사악은 선친이 파놓은 우물들이 불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메꿔진 것을 알고는 다시 파서 사용하였다. 그리고 유목민이었던 성조들은 많은 우물을 팠다. 창세기에는 씌어 있지 않지만, 시카르의 <야곱의 우물>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살게 할 물>을 가르치셨다(요한 4,1이하 참조).

 

- 선친이 파놓은 우물들을 가지고는 부족했던지 이사악은 종들을 시켜 우물을 더 파도록 한다. 아마도 아브라함 때보다 훨씬 많은 가축과 사람들이 이사악에게 속했던 것 같다. 새로 판 우물들 중에서 처음 두 개는 그랄의 목자들이 저희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싸움을 걸어 오는 바람에 부정적인 이름이 붙여졌다. 어섹이라는 이름은 ‘분쟁’이라는 뜻이 있고 시트나라는 이름은 ‘반대’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세 번째 우물을 팠을 때는 불레셋 목자들이 싸움을 걸어 오지 않아서 ‘넓은 공간’이라는 긍정적인 뜻을 지닌 르호붓이라는 이름이 이 우물에 붙여졌다. 이사악은 이 우물의 이름에 걸맞게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 앞을 활짝 열어 주셔서 우리도 이 땅에서 번성하게 되었다.”고 외치면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 르호붓이라는 이 우물은 현재 브엘세바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와디 루헤베로 추정된다. 르호붓과 루헤베가 자음이 같기 때문이다.

 

- 이사악은 그랄 골짜기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브엘세바에 도착한다. 이곳에 도착한 날 밤 이사악은 하느님을 만나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제 아비 아브라함의 하느님”으로 소개한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한번 맺은 계약을 결코 저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의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시기 위하여 이 표현을 되풀이 하신다. 말하자면 이사악이 축복을 받는 이유는 그이 선친 아브라함 덕분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은 나중에 베델에서 야곱에게도 나타나시어 하실 것이다. 이사악은 하느님이 나타나신 그 장소에 제단을 쌓는다. 하느님의 발현과 제단 건립은 성소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를 이룬다.

 

- 이사악의 종들은 이 장소에 또 다른 우물을 파기 시작한다. 아비멜렉과의 화평조약이 성공적으로 끝마쳐졌을 때 이 우물에서 물줄기가 터져 나온다. 그리고 이사악은 이 우물을 세바라고 이름지었는데 ‘맹세’라는 뜻도 있고 ‘일곱’이라는 뜻도 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 또는 ‘야곱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창세기 21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주고 아비멜렉에게서 이 우물을 소유권을 영구적으로 인정받은 데에서 이런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고 밝힌다.

 

- 이사악이 브엘세바에 머물고 있는 동안 아비멜렉이 참모 아후삿과 군사령관 비골을 대동하고 방문해 온다. 이것은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로서의 방문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사악에겐 커다란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동등한 지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 미루어 아비멜렉은 분명히 이사악을 자신과 동등한 신분의 소유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란 근동지방의 습관에서는 높은 지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아비멜렉과 맺은 조약은 이사악 집안이 크게 번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 이사악은 자신을 최대의 경의를 갖추어 방문한 아비멜렉과 그의 일행에게 마음에 맺힌 불만을 털어 놓는다. “내가 미워서 쫓아 낼 때는 언제고 왜 나를 찾아오셨습니까?”하고 퉁명스럽게 묻는다. 아비멜렉은 “주께서 그대와 함께 계신다는 걸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평화조약을 맺으러 왔다”고 털어 놓는다. 아마도 이사악이 그랄에서 쫓겨난 후에도 계속해서 번영하는 걸 보고, 구체적으로는 사막 한복판에서 파는 우물마다 샘줄기가 콸콸 터져나오는 걸 보고 탄복하게 된 것 같다. 이사악은 과거를 잊고 아비멜렉과 그 일행에게 주안상을 걸게 차려 내와 함께 먹고 마신 다음, 그 이튿날 불가침평화조약을 맺는다. 이렇듯 조약과 식사는 항상 따라다니는데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우정을 함께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표시이다.

 

- 이 이야기의 핵심적 메시지는 비록 이사악이 아비멜렉처럼 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하느님이 함께 해주시는 덕분에 이방인의 왕으로부터 왕 대접을 받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조상들을 모신 덕분에 이스라엘 민족도 주변의 수많은 이방민족들로부터 왕적인 신분과 명예를 인정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 때에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보다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의 저자를 포함하여 성서의 저자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특권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기네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신 덕분에 생겨난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하느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하는 사람이면 이사악 처럼 어떤 고난도 헤쳐나 갈 용기를 가지며 어떤 권력 앞에서도 이사악처럼 당당살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132-139.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98-100.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283-287.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7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