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나눔 28- 창세 25(19-34): 에사오는 자기의 상속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들어가면서
지금부터는 창세기 25장 19-36장 20절 끝까지의 이사악과 야곱의 이야기를 다루겠다. 이 기록들은 기록으로 남겨져서 영감받은 책의 일부가 되기 이전에도 틀림없이 수 세기 동안 존재해 왔을 여러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야기들은 십중팔구 입에서 입으로 전수되어 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기록으로 정착되면서 일정한 순서로 배열되었고, 야곱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일관성 있는 줄거리를 형성하여 편집하게 되었다.
이야기의 초점은 야곱과 하느님과의 세 차례 만남에 맞추어져 있는데, 야곱이 아내를 얻으려고 하란으로 가던 도중 베델에서 꿈을 꿀 때(28, 16-22)와 하란에서 아내들을 데리고 돌아오던 중 야뽁 나루에서 하느님과 씨름을 할 때(32, 23-33) 그리고 베델에서 두 번째로 하느님을 만날 때(35, 9-13) 가 곧 그것이다. 이 세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야곱과 에사오 및 야곱과 라반에 관한 일련의 이야기들에 조화있게 엮어져 있다. 야곱 이야기들 가운데 그 나머지는 창세기 끝부분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와 함께 짜여져 있다. 야곱은 에집트에서 죽었으나 그의 뼈는 약속의 땅으로 옮겨와 아브라함이 무덤을 만들려고 사 두었던 들에 묻혔다.(창세 50, 12-13 참조)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야곱 이야기로 넘거가면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분위기’의 급변화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들이 평온하게 진행되는데 반해서 야곱에게 있어서는 투쟁이 변함없는 주제가 되고 있다. 야곱은 형 에사오와 투쟁 혹 외삼촌 라반과 투쟁하며,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사람들과 투쟁을 벌인다.
문학상의 이 같은 변화와 더불어 또 다른 변화도 눈에 띄는데 하느님께서 야곱과 상대하시고 야곱도 하느님께 응답을 하지만, 그 방법들이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났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축복을 받은 것은 그의 복종 때문이었다.(창세 15, 6; 22, 17-18) 아브라함이 자녀문제를 두고 앞장서서 해결책들을 제시했을 때 하느님은 그런 제안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은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본이다. 그러나 야곱에게 오면 우리는 자신의 재주에 의지하는 인간의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하게 된다. 야곱은 기도를 하지만 그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 위한 어떤 기적이나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은 일어나지 않는다. 야곱은 스스로 머리를 짜서 궁지를 벗어나야 했다.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인간 아브라함에게서 발견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재주를 축복해 주시리라 믿는 야곱이라는 인물로 인해 균형을 이루게 되는데,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재주를 풍성히 축복해 주신다
Text 안에서
크투라의 후손(25: 1-6)
25장 1-18절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끝난다. 여기엔 각종 전승이 기술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사용되었던 다른 전승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저자는 아브라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써서 남기려고 한 모양이다. 세바와 드단은 10장 7절에서는 함계의 구스의 자손인데, 여기서는 셈계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있다. 더욱이 세바는 10장 28절에서는 욕단의 아들, 여기서는 욕산의 아들이다. 세바는 솔로몬을 방문하였던 ‘세바의 영왕’이란 이름의 기원이다.(열왕 상 10, 1-10) 대강 2-4절과 13-15절의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과 그 동쪽 및 남쪽에 사는 아라비아인과의 관계를 보여 준다. 대체로 크투라의 자손은 아라비아의 남부와 서부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은 북부를 차지하고 있다. 크투라의 여섯 명의 아들 가운데, 미디안은 잘 알려진 사람이다. 이 이름은 후의 요셉전기에도, 또 모세의 양아버지의 나라 이름에서도 나온다.
여기에 아브라함이 첩을 얻었다고 썼는데 그것은 그의 성격에도 맞지 않고(15장), 시대의 차례로서도 맞지 않는다. 이 곳의 편집자는 아라비아의 어느 민족과 이스라엘인의 성조들을 연결시키는 문헌을 입수하고, 아브라함의 위대함을 찬양할 양으로 여기에 써 넣었을 것이다.
1) 크투라의 후손은 저마다 종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성서에 자주 나오는 미디안 족은 아카바만과 시나이산의 광야 사이에 살고 있었다.(출애 2,15)
2) 세바와 드단은 10장 7절에 함의 아들 라아마의 아들로 나와 있으며, 남부지방에 살고 있었다. 세바의 문명은 남 아라비아에서 발전하였는데, 다른 문헌으로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죽음(25: 7-11)
7-10절은 23장 20절에서 끊었졌던 사제전승의 계속일 것이다. 아브라함의 죽음과 앞 장의 사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24장 후반과 16, 17절 후반, 18절에서 참조할 수 있다. 사제전승에서는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죽을 때, 집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가족 묘지에 매장되었으며, 하늘 나라 선조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으로 의미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브라함의 죽음 안에서 죽은 자는 황천에서 살고 있다는 신앙, 영혼 불멸의 신앙을 엿 볼 수 있다.
이스마엘의 후손(25: 12-18)
이스마엘의 후손은 아라비아 반도 북부민족, 즉 북 아라비아에 살던 열 두 부족을 가리킨다. 그 중 “느바욧”은 28장 9절, 36장 3절, 이사야 60장 7절에서도 나온다. 뒤에 등장하는 느바디아족은 아마도 그의 자손일 것이다. 느바디아족의 수도는 남 트란스 요르단의 베드란이다. 그 왕 아레타스 4세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의봇 아버지이며, 사도 바울로가 다마스커스에서 도망칠 당시 그 곳을 다스리고 있었다. 여기에 이름을 든 것은 17장 20절의 약속의 실현을 쓸 뿐 아니라, 창세기의 한 분기점을 쓰기 위한 것이다. 곧 이스마엘의 부족은 여기서 처리를 하고, 이제는 성서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에사오와 야곱(25: 19-34)
이 text는 19-20, 26b절은 사제전승이고 그 외의 대부분은 대충 이 장 끝까지 야훼전승을 따랐다. 이사악의 족보는 열로 나눈 창세기의 제 8부의 부분으로 이 곳부터 35장 29절에 걸쳐 있다. 그러나 이 역사의 내용은 바로 데라 집안의 역사를 말하지만 거의 아브라함의 사적 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거의 이사악과 야곱에 관한 이야긴 것이다.
이사악과 야곱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야곱이다. 이사악은 야곱을 위해 조연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사악에 대한 독립된 이야기는 26장에만 나오고 나머지 기록에서는 항상 야곱에 관한 일들이 주관심사로 등장한다. 약속에 대한 언급도 심심치 않게 나오지만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약속이라기보다는 축복이다.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야곱과 에사오의 갈등도 결국은 이사악의 축복 때문에 일어난다.
- 야곱의 도망과 귀환이 이야기의 주요 부분을 다 차지하는데 이 부분에 두 가지 갈등이 소개되고 있다. 야곱과 라반의 갈등, 그리고 레아와 라헬의 갈등이다. 이것은 독립된 이사악전승과 더불어 이야기의 서론 부분에 해당된다. 이 대목의 배경은 다윗 왕 시절에 이스라엘이 남쪽의 에돔족을 지배했던 정치적 상황이다. 이것은 특히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 아내 레베카가 임신하였는데, 라는 의미는 레베카는 선대의 사라나 며느리 라헬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돌계집이다. 이 같은 시험 뒤에 태어나는 아들은 하느님이 점지해 주신 아들로 본다. 삼손, 사무엘,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이사악은 나이 사십에 레베카와 결혼하고 쌍둥이 두 아들을 육십에 낳았다. 이 애들의 탄생을 위해서 이사악은 20년 동안이나 주님께 빌었다. 레베카가 20년 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이 아이들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이 쌍둥이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운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어디 살겠는가?” 하고 불평하는데 자기 자신이 못살겠다는 것인지 뱃속의 꼬마들이 못 살겠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둘 다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임신 중에 벌써 어머니는 아이들의 갈등에 휘말려 든다.
- 레베카는 뱃속의 요란한 움직임을 불안하게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하느님이 계실 곳으로 추정되는 성스러운 곳에 가서 뱃속에 애들이 싸우는 이유를 묻는데, 이런 신탁은 성조 시대에는 없었다. 후대의 종교적 풍습을 앞당겨 묘사하고 있다. 하느님은 명백하게 이유를 밝혀 주신다. 히브리 원문에서 이 신탁은 시로 되어 있는데 두 아이의 싸움을 서로 갈라져 싸우는 두 민족의 정치적 갈등에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준다. 태안의 야곱과 에사오의 싸움은, 후에 있을 이스라엘인과 에돔인의 싸움의 전조이다. 태어날 때 야곱이 에사오의 뒤꿈치를 잡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에사오를 밀어내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타나낸다. 이 일에 관련지어 그의 이름을 붙였다. 야곱은 에사오로부터 맏아들의 권리를 샀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 그 야심을 이루었다. 에돔인은 다윗 시대부터 여호람 시대까지 그 오랜 기간 이스라엘 사람에게 복종하여, 이 두 민족에 관한 예언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신탁에서는 이스라엘의 일반적 관습과는 반대로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고 되어 있다. 이 대목을 기록한 사람들은 솔로몬 왕궁의 서기관들이 야휘스트들이다. 그들은 이미 말한 대로 동생 솔로몬이 형 압살롬을 제치고 왕권을 차지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야곱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아벨과 요셉의 경우도 만찬가지이다.
- 저자는 두 아이의 이름을 소개하는데 말장난을 하고 있다. 에사오는 살결이 붉고 털이 많다고 소개된다. 살결이 붉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붉다’는 뜻의 아돔이라는 형용사와 연관이 있다. 에돔은 붉은 땅이라는 뜻이다. 에사오는 살결이 붉고 에사오에게 탄생된 에돔 족은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털투성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세일’인데 에돔 땅에 있는 세일이라는 이름의 산악 지대와 연결된다. 서양에 퍼져 있는 붉은 피부와 붉은 머리에 대한 편견도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붉은 머리의 아이들은 거치고 고집이 세다고들 여긴다. 중세의 미술 작품에서 유다는 보통 붉은 머리털을 지닌 남자로 묘사된다.
- 한편 야곱은 ‘발꿈치를 붙잡은 자’라는 뜻이 아켑이라는 히브리 단어와 자음이 같다. 그런데 원래 야곱이라는 이름은 다른 근동 문헌에서 ‘하느님께서 보호하실지어다’라는 뜻의 고유명사로 등장하는데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는 야곱의 처지를 가리키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두 아이가 자라 에사오는 사냥꾼이 되고 야곱은 천막에 머물러 살았다고 되어 있는데, 형에 대해 우월한 위치를 점령한 야곱을 목축업자로 소개한 것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수렵에 대한 목축업의 우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이어지는 불콩죽 이야기에서 이 우위성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 여기서 붉은 죽을 먹고 싶어 안달하는 에사오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에사오라는 이름의 어원을 다시 한 번 밝힌다. 이야기 안에서 에사오는 경솔한 소년으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 야곱은 교활하고 머리회전이 재빠른 소년으로 소개되고 있다. 힘이 세지만 너무 조심성이 없는 에사오가 육감적인 사람이라면 몸은 허약하나 더 예민한 야곱은 정신적인 사람이다. 에시오가 죽 한 그릇을 청하자 야곱은 상속권을 달라고 요구한다. 나아가 다시는 상속권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얻어낸다. 야곱은 철저한 계산속에서 에사오의 장자권을 탈취한다. 이어지는 에사오의 행동은 그가 얼마나 경솔하게 행동했는지를 돋보이게 된다. 저자는 에사오가 “맹세하고 상속권을 팔아넘기고 불콩죽을 받아서 먹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고 연속적으로 묘사한 후 이야기의 결론으로 “에사오는 자기의 상속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밝히고 있다.
- 이스라엘의 적 에돔 사람은 버릇없고 육적이며, 어리석고 충동적이어서, 한때의 물질적 이익 때문에 가장 중요한 권리를 파는 자라라는 것이 그들의 조상 에사오란 인물을 통해 야유로 묘사되었다. 또 에사오는 칼로 세상을 살았고(27:40), 흉악하며 집념이 강하고, 가나안 사람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36,2)고 기록되어 있다. 야곱은 이와 정반대이다. 따라서 그가 장자의 상속권을 교묘하게 가로챘으나 비난만 할 수 없는 정당성도 있다. 이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 재산상속의 경우, 다른 사람의 2배를 받고(신명 21,17), 또 그 밖의 특권도 받는다. 이 권리가 보다 더 자격이 있는 다른 아들에게 넘어간다는 다른 예도 있다(역상 5,1-2). 사도 바울로는 로마서 9장 10-13절에서 야곱과 에사오의 관계 및 21-23절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에사오를 히브리 12장 15-17절에 불경스러운 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에사오의 경솔한 태도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선천적으로 받은 생명을 비롯하여 재능이나 건강과 같은 귀중한 선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보잘 것 없는 가치와 맞바꾸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128-131.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98-100.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277-282.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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