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나눔30 (창세 27장): 야곱이 에사오의 복을 가로채다
들어가면서
창세 27장 1-45절의 야훼계 이야기는 사제계 요소들로 이루어진 틀 속에 자리하고 있다. 매우 사실적이며 섬세한 심리묘사를 내포한 이 일화는 선조들의 사회와 같은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도,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길에서는 여인들이 중요한 구실을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임금으로 책봉될 때 바쎄바가 한 역할을 이해하는데 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기사 전체가 참으로 잘 짜여 있기 때문에, 그 출처는 야훼전승뿐이라고 한 학설도 있다. 원래 이 전승에서는, 야곱이 취한 수단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문제삼지 않았다. 오리혀 그의 영리함이 그 주제로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듯이, 레베카와 야곱이 “하느님의 섭리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취한 수단은 시인 할 수 없다. 둘 다 책략이 드러날 경우,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자청할 줄 알고 있다. 또 이사악도 야곱이 한 일을 속임수로 보았다. 에사오가 야곱을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특히, 이사악은 그 결과가 하느님 뜻에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느님은 에사오보다 야곱을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하셨다. 하느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일을 통하여 섭리를 실현시키셨을 것이다. 이런 뜻에서 이야기 전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신비”에 싸여 있다. 이것은 다윗 시대 이스라엘 사람이 에돔을 다스렸던 것 및 그리스도도 교회에 있어서 이방인이 유다인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던 일의 전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서 저자는 레베카와 야곱의 속임수를 길게 말하고 있으나, 이 사실에 찬성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윤리적으로 불완전한 이 시대에, 그런 속임수조차도 하느님의 섭리 실현에 이용되는 것을 알려준다. 이 사건 후 야곱에게 있어서 잘못을 기워 갚는 생활이 시작되고, 레베카도 사랑하는 아들과 생이별하게 된다. 이사악은 늙은이였기 때문에 동정할 점이 없지 않으나, 에사오에 대한 편애로, 벌을 받은 셈이다.
Text 안에서
창세 27, 1-26: 죽기 전에 정성을 쏟아 너에게 복을 빌어 주리라
-이 이야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작중 인물들에 대한 윤리적인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곱이 한 일이 윤리적으로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가려내는 데 치중하다 보면 이야기의 근본 내용에 접근하기 어렵게 된다. 이야기의 저자도 야곱과 에사오와 리브가와 이사악의 행동들에 대해 어떠한 윤리적 판단도 내리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야기를 있는 그래도 진행시켜 가고 있을 뿐이다.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야곱의 파렴치한 행위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 앞에서는 불콩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탈취하고 이번에는 아버지의 축복까지 가로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느님의 축복이 이런 사기꾼에게 넘어가게 되는지 이 이야기를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어 왔다. 여기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의 저 유명한 해석이 나왔다. 그는 야곱에게 주어진 축복은 야곱의 거짓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비를 통해서였다고 주장한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처럼 하느님은 무엇을 또는 누구를 선택하실 때 당신의 온전한 자유의사에 따르신다는 것이다. 형 에사오가 아니라 야곱을 선택하시어 그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시는 것도 그분의 신비스러운 계획에 의한 것이다. 하느님의 이 자유로운 선택은 어느 누구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인간의 착한 행동이나 악한 행동도 이 선택 앞에서는 무력하다.
- 창세기의 저자는 갑자기 세월을 비약시킨다. 이사악이 몹시 늙어, 죽을 때가 가까웠다고 전한다. 노인이 되어 눈이 어두워졌으니 회복불가능한, 실제적으로는 장님이 된 셈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저자는 맛본다, 만진다, 듣는다, 느낀다, 냄새를 맡는다 등의 감각적인 동사를 자주 쓰고 있다. 눈이 어두워졌다는 표현은 뒤따라오는 야곱의 속임수의 전제가 되고 있다. 이야기의 짜임새가 매우 정교하다. 이사악은 자기가 사랑하는 큰 아들 에사오를 불러 “네가 죽기 전에 너에게 축복을 빌어 주겠으니 화살통과 활을 메고 산에 가서 짐승을 잡아와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해달라”고 분부한다. 축복은 일반적으로 죽을 때나 이별할 때 주어진다. 특히 죽을 때 주어지는 축복은 생명력과 관련이 있다. 축복하는 사람은 축복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력을 축복하는 사람에게 준다. 그래서 이 축복은 되물릴 수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없다. 오직 그 사람이 죽을 때 자기 자식에게 다시 줄 수 있을 뿐이다. 이 경우 큰 아들이 일반적으로 우선권을 갖게 마련이다.
- 축복을 하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취해야 하는 이유는 사라져가는 기운을 마지막으로 회복하여 자신의 생명력을 최대한을 생생하게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사악은 자기가 사랑하는 큰 아들을 축복의 상속자로 내정한 후 아내와 작은 아들에게 알리지 않고 필요한 일을 은밀히 지시한다. 레베카 역시 자신이 사랑하는 야곱 위에 그 축복이 드리워지게 하고 싶었다. 이제나 저제나 이사악 입에서 결정적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레베카에게 이사악과 에사오의 내통이 발각되지 않을 리가 없다. 따라서 레베카의 엿듣기는 우연한 것 아니고 고의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레베카는 재빨리 야곱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사악의 축복을 가로챌 계획을 설명한다. 야곱은 “아버님이 저를 만져 보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반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어머니의 계획에 동조하고 있다. 레베카는 일이 잘못되어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는 경우엔 자기가 그것을 대신 받겠다고 야곱을 안심시킨다. 그러자 야곱은 전혀 주저함 없이 계획을 옮기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계획의 주동자는 어디까지나 어머니 레베카이다. 그녀 역시 교활한 라반의 누이동생이기에 교활한 면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이 끌어온 염소 새끼를 잡아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염소 가죽을 벗겨 야곱의 손과 목에 둘러준다. 그리고 에사오의 옷을 입혀 준다. 나중에 이 옷에 배인 에사오의 몸냄새를 맡고 이사악은 의심 없이 야곱에게 축복을 내려 주게 된다.
- 이어지는 이사악과 야곱 사이의 대화는 이야기에서 가장 긴장된 분위기를 배경으로 깔며 오가고 있다. 앞못보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축복을 청하는 아들이 분명 에사오인가 확인하기 위하여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만져 보고, 냄새를 맡아 본다. 첫 번째 의심스러운 사실은 음식이 너무 빨리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에사오야,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잡아 왔느냐?” 야곱은 어머니로부터 전혀 이런 식의 질문에 대한 대책을 듣지 못했지만 임기웅변으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다. “아버님의 하느님께서 짐승을 금방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원칙적으로 이런 술책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속임수를 쓰고 있기 때문에 신성모독에 해당되지만 저자는 윤리적인 판단을 전혀 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엮어 나간다. 이사악은 “네가 정말 에사오인지 만져 보아야겠다.” 하면서 야곱에게 가까이 오라고 한다. 두 번째 관문이다. 이에 대한 준비는 리브가가 철저히 해 놓았다. 염소 가죽이 덮여진 야곱의 손을 만지며 이사악은 아직도 의심을 풀지 못하여 재차 묻는다. “네가 틀림없는 내 아들 에사오냐?” 아버지의 다짐에 야곱은 “예 그렇습니다.”고 대답한다. 이사악은 청각보다 촉각에 더 의지하여 의심을 풀고 야곱이 바치는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신 후 “가까이 와서 나에게 입을 맞추어 다오”라고 한다. 입맞춤은 식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마지막으로 이사악은 야곱이 입고 있는 옷에서 에사오의 몸냄새를 맡고 의심없이 야곱에게 복을 빌어 준다. 청각 이외에는 야곱을 의심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
- 야곱이 형 에사오의 장자권을 탈취한 데 이어 축복마저도 가로챈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 작품의 저자처럼 우리 역시 윤리적인 판단을 보류하기로 하자.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들 가운데는 인간의 지성이나 윤리를 뛰어넘는 계획들이 얼마든지 있다.(ex: 성모영보, 세례자 요한의 탄생 ete) 자신의 지성적인 판단, 윤리적인 판단을 최상의 것으로, 최선의 것으로 생각하다 보면 하느님의 속 깊은 계획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창세 27, 27-40: 그 복은 어쩔 수 없이 그의 것이다.
- 이사악은 축복을 내리기 전에 야곱과 입을 맞춘다. 입맞춤을 통하여 숨과 숨이 연결됨으로써 생명력이 전달된다. 축복은 원래 4
단계를 거쳐 전달된다. 첫째, 축복받을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고 둘째, 식사를 하며, 셋째, 포옹이나 입맞춤과 같은 신체적 접촉을 하고, 마침내 축복의 말이 주어진다. 야곱에게 기원된 축복은 농경민들을 위한 축복이다. 그에게서 풍기는 냄새도 사냥을 위한 산내음이 아니라 농사를 위한 들내음이다. 수렵보다는 목축이, 목축보다는 농업이 생활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했던 후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견해가 이 축복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유목민들인 성조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졌던 약속은 편안하게 농사를 짓고 정착할 수 있는 땅이었다.
- 첫 번째 축복인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기는 우가릿 신화에서 풍산신 바알의 애인 아낫이 목욕할 때 물 대신 이것으로 몸을 씻었다는 혼합물이다. 하늘에서 내린 이슬비는 비가 귀한 팔레스티나의 여름 동안 작물, 특히 포도재배에 절대 필요한 것이 된다. 이슬과 기름기는 에사오에게 내린 축복에서는 사라질 것이다. 두 번째 축복은 에사오 또는 에돔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하는데 에돔족(넓은 의미에서는 이스라엘은 물론 에돔,이스마엘인 , 모압인 , 암몬인을 포함한다)을 점령하여 다스리고 있었던 다윗 시대의 정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나아가 뭇백성이나 뭇족속들이라는 복수형의 표현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뿐 아니라 여러 민족들 위에 군림하리라는 축복도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복을 빌어 주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말은 야곱에 대한 저주를 미리 막기 위한 안전장치를 포함하는 축복이다. 그리고 여기서 축복은 농업과 정치와 관련된다. 따라서 야곱 개인의 생애보다도 오히려 그 자손 이스라엘인의 장래의 영광을 의미한다.
- 이어지는 에사오와 이사악의 대화는 울분과 비통한 분위기 속에 이루어진다. 이사악의 부들부들 떠는 모습, 에사오의 흐느낌, 그리고 또 다른 축복을 빌어 달라는 애절한 호소가 이 대목의 비극적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킨다. 그러나 이사악이 야곱에게 내린 축복은 다시는 취소될 수도, 반복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미 이사악에게서 야곱에게 넘어간 생명력은 다시 원상복구되어 원임자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사악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비로소 깨닫고 몸을 부들부들 떨지만 그렇다고 야곱에 대한 축복을 거두지는 않는다. 이사악이 이 부당한 일이 야곱의 속임수 대문에 일어났다고 하자 에사오는 동생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다. ‘발꿈치를 잡은 자’ 또는 ‘대신 들어앉는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 동생인 그가 형인 자기의 권리를 두 번씩이나 가로채 장자권과 축복을 빼앗아 갔다고 울분을 떠트린다. 장자권은 히브리 말로 ‘배코라’라고 하고, 축복은 ‘베라카’라고 하는데 비슷한 발음을 가지고 이야기의 저자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
- 에사오는 세 번씩이나 아버지에게 축복을 달라고 청한다. 에사오의 슬픔과 울분을 이해하면서도 이사악은 축복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분명히 밝힌다. 이사악이 에사오의 세 번째 하소연 뒤엔 침묵을 지키는데 에사오가 드디어 통곡한다. 에사오의 통곡소리에 마음이 안 되었던지 입을 열어 에사오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사악의 말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깝다. 여기서 이사악의 말은 에돔 족의 운명을 예언하고 있다. 에사오의 후손들이 살 에돔 땅은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지 않는 척박한 땅이 될 것이다. “ 칼만이 너의 밥줄이 되리라”는 표현은 에돔이 사막을 건너는 대상들을 약탈하여 먹고 살리라는 말이다. 에사오는 아우를 섬겨야 하지만 다행히 스스로의 힘을 길러 멍에를 목에서 벗겨 낼 것이라고 한다. 에돔은 다윗 왕 시절에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으나 열왕기 하권 8장에 기록된 대로 기원전 9세기 경에 남부 왕국 유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
- 이사악의 축복을 이스라엘 민족과 에돔 민족의 정치적 예속 관계에 연결시켜 두 민족의 기원과 운명을 설명하는 이 이야기는 종교적인 축복이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고대 근동인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사냥을 위주로 살아가던 원시적인 생활 형태가 목축생활 바뀌고 다시 농업 생활로 바뀌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축복이 언제나 미래지향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에사오로 대표되는 낡은 질서에 매달리게 되면 하느님의 축복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기득권에만 집착하여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언제나 퇴보할 수밖에 없다.
- 에사오는 출생을 통해 주어진 장자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이사악의 축복이 자신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방심했다가 동생 야곱에게 당했다. 이와 반면 날 때부터 동생으로 정해진 야곱은 장자권이 없는데다 설상가상으로 가정 안에서 절대권을 행사하고 있는 아버지 이사악의 사랑도 받지 못한 상태여서 에사오에 비해 몹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쓴 적극적인 행동과 지략을 통하여 장자권도 얻어내고 아버지의 최후 축복도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파렴치한 속임수를 쓴 탓에 아버지의 경악과 에사오의 분노를 자아내게 되고 급기야 집안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그 이후에 야곱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앞으로 한참 더 살펴보겠지만, 어떻든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언제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주어진 삶을 미래지향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 한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한 민족의 운명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에 주저앉아 낡은 질서에 집착하고 미래에 대한 지평을 열지 못하는 민족은 희망이 없다.
창세 27, 41-46: 한꺼번에 너희 두 형제를 잃고서 어떻게 살겠느냐?
- 야곱이 형 에사오의 장자권에 이어 아버지의 축복까지 가로채자 에사오는 야곱을 미워하여 마침내 살해하려는 결심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동생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이 결심을 실행에 옮기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장례식은 일주일이 걸리니까 성격이 급한 에사오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8일째가 되는 날에 살해 계획을 수행할 판이었다.
- 레베카는 자기가 꾸민 일로 사태가 야곱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만큼 절박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닫고 다시 한 번 자신이 편애하는 아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이 계획은 아들의 목숨을 구하는 데 성공적인 것이었지만 레베카 자신을 위해서는 비극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녀 생전에 다시는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야곱이 떠난 후 귀향하기까지는 무려 20여 년이 걸렸고, 그 땐 이미 레베카는 세상을 떠난 후였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인 사실이 발각되어 축복 대신 저주를 받으면 얻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저주를 자기가 받겠다고 했던 레베카는 자신의 말대로 이사악에게서 직접 저주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속임술책에 대한 대가를 혼자서 톡톡히 받게 된 것이다.
- 레베카가 야곱의 피신 장소로 자기 오빠 라반의 집을 택한다. 야곱을 떠나보내면서 레베카는 “한꺼번에 너희 두 형제를 잃고서야 내가 어떻게 살겠느냐!”라고 탄식한다. 에사오가 야곱을 죽이면, 이들의 친척들이 형제를 살인한 에사오를 추출하거나 피의 복수를 자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바로 여기까지가 야휘스트 작품이고 이후부터는 사제계 문헌이 이어진다. 이 사제계 문헌은 앞의 26장 34절-35절과 연결되는데, 거기에는 에사오가 사십 세 된던 해에 헷 사람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았다고 되어 있다. 저자는 이 여자들 때문에 이사악과 레베카가 마음이 몹시 상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구절은 유배 시대에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고 우상숭배를 막기 위하여 타민족과의 결혼을 금했던 사제들의 정신을 잘 반영해 주는 대목이다. 남의 나라 땅에서 살고 있는 까닭에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제도적으로 금지시킬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사제들은 유다 가정에 이방인들의 딸을 들이지 않도록 권고한다. 그리고 문헌을 통하여 이런 잡혼의 금지가 성조의 역사 안에 이미 뿌리내려져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140-151.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14-118.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289-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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