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나눔 31: 창세 28, 1-22: 야곱이 베텔에서 꿈을 꾸다.
들어가는 말
야곱이 베텔에서 꿈에 하느님을 뵙는 이 기사은 거의 엘로힘 전승이며, 야훼전승(13-16, 19a) 과 약간의 가필(19b, 21b)로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이 여기와서 근처에다 제단을 쌓았다는 이중 기사(1,: 8.13, 3-4)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성소의 창립자는 야곱이라고 말한다. 후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베텔이 유명한 것은 이 성소 때문이다. 또한 지상생활에 있어서 사람은 천사의 도움을 받으며,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사귈 수 있다는 진리 및 하느님께서 직접 배려해 주신다는 것이, 이 기사에 설명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12절을 당신 자신에게 부합시켰다. 곧 “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요한 1,51). 이것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신성한 “하늘”과 “사람의 아들”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뜻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문”(요한 10,9) 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여기 상응하는 것은 17절의 “하늘의 문”이다.
천성적으로 자신의 문제들을 힘의 과시로 해결하려 하는 경향이 있던 에사오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축복을 훔쳐낸 야곱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야곱은 하란으로 떠나감으로써 죽음을 모면하지만 몇 해가 흐른 뒤 돌아오게 될 때 에사오의 위협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된다.
하느님의 약속을 이어받아야 할 야곱은 혈혈단신 장래에 대한 전망도 없이 친척들 가운데 아내를 구하고자 하란으로 가던 도중에 꿈을 통하여 하느님의 보호를 약속받는다. 즉 야곱은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약속들이 자신에게 전수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사다리’가 나타난다. 이것은 오늘날의 사다리와는 다른 것으로, 고대 어떤 신전(지구랏, Ziggutat)에서 발견되는 돌계단 같은 것이었다. 이 사다리는 신들이 거처한다고 생각되던 신전 맨 꼭대기 성소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많은 교부들은 이 ‘사다리’를 하느님의 섭리의 상징으로 보았다. 또 그 중에는 하늘과 땅과의 참된 층계인 ‘그리스도 갱생의 전표’라고 본 교부들고 있었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묘하게도 카인을 제쳐 두고 아벨을 선택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형을 제쳐 두고 아우를 편드시어 야곱을 선택하신다. 야곱은 비록 교활한 사기꾼이지만 아브라함에게 부여되었고 이사악에게서 갱신 되었던 그 약속들을 전수받는다. 여기에서도 야곱이 그 자신만을 위해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강조된다. 그와 그의 후손들은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축복이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야곱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실현되게 될 하느님과 인류와의 결합이 사다리(층계)로 상징되고 있다. 천사들이 야곱과 그의 자손들에게 내려와 하느님의 명령을 전하고 인간의 응답을 하느님께 전하기 위해 다시 올라 갈 것이다 (이 같은 표상이 예수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을 알려면 요한복음 1장 51절을 보라). 이 이야기는 베텔과 선조 야곱과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후에 건립된 베텔 성소의 기원을 설명해 주고 있기도 하다. 베텔은 북왕국의 역사 거의 전반에 걸쳐 주요 성소가 되게 된다.
Text 안에서
창세 28, 1-9 : 에사오가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하다.
- 에사오와 야곱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을 유보했던 야휘스트와 달리, 사제계 문헌에서는 에사오가 헷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끌어들인 것을 비난하고 있다. 그래서 27장의 야휘스트 문헌에서는 에사오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총각으로 아버지 이사악의 집에서 야곱과 함께 사는 걸로 되어 있는 것이다. 사제계문헌이 다시 시작되는 27장의 마지막 46절에서 레베카는 이사악에게 헷 여자 며느리들이 보기 싫어 죽겠다고 불평하면서 야곱의 아내는 동족에게서 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한다. 이사악은 그의 아내의 말에 동조하며 야곱을 불러 복을 빌어 주면서 “너는 아예 가나안 여자에게 장가들지 말고 바딴아람의 브두엘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라반 아저씨의 딸 하나를 아내로 삼아라.”라고 분부한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의 신부감을 고르기 위해 자기의 충직한 종 하나를 브두엘의 집안에 파견시키는 것과 똑같은 경우이다.
- 여기서 야곱은 야휘스트 문헌에서와 달리 에사오에게 쫓겨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분부를 받잡고 그의 축복 속에서 당당하게 떠난다. 이사악도 아직은 눈이 어둡거나 나이가 많아 분별력이 시원찮은 노인이 아니다. 야곱을 떠나보내면서 베풀어 주는 이사악의 축복도 죽을 때 불어 넣는, 본인 자신의 생명력을 포함한 축복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약속을 포함한 축복이다. 곧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과 축복이 야곱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 약속과 축복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아 후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유산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바딴아람은 이미 25장 20절에서 라반이 머물고 있는 장소로 소개되어 있는데 아람의 밭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지역은 24장 10절의 두 강 사이의 아람이라는 뜻의 아람 나하라임과 같은 곳으로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메소포타미아 상부 지역을 가리킨다.
- 또한 이 사제계 문헌에서 에사오는 경쟁자가 아니라 야곱이 보여 주는 모범을 따라 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아내가 이미 둘이 있었는데도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또다시 맞아들이고 있다. 야곱이 어머니의 친척 가운데 아내감을 고르기 위해 떠났는데, 에사오는 아버지의 친척 가운데서 아내감을 고른 것이다. 하지만 에사오는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정식 상속자가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야휘스트 문헌에 의하면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있는 것이지만 사제계 문헌에 의하면 그 이유가 에사오의 윤리적인 결점, 즉 이방인 여자들과의 불미스러운 결혼에 있다.
-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자유로운 구원의지에 절대적으로 승복하는 한편 그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비록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손들에게 전달되는 약속과 축복의 정식 상속자로서 야곱을 선택하시지만, 에사오 역시 야곱 못지않게 후손들이 그에게서 불어나고, 비옥하지는 못하나마 팔레스티나 남쪽의 상당히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지 않는가! 하느님의 선택은 결코 배타적이지 않다. 야곱을 선택하셨다고 해서 에사오를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다.
창세 28, 10-22: 주님께서 여기 계셨는데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이 이야기는 짧지만 여러 가지 요소가 집약되어 있다. 이러한 마지막 형태를 갖추게 되기까지 상당한 세월이 흘렀던 것 같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을 친밀하신 분으로 소개하는 야훼스트와 그분을 꿈으로 나타나는 분으로 소개하는 엘로히스트의 합작품으로 보인다. 우선 이야기의 형성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첫째, 이 이야기는 원래 거룩한 장소, 곧 성소의 기원을 밝히려는 목적에서 기록된 것 같다.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베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가나안 농경민들이 섬기던 한 풍산신의 이름인 동시에(창세 1,13 기원전 5세기 엘레핀틴 파피루스), 그 신에게 예배를 드리던 성소였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엘(EL) 신을 야훼와 동일시하면서 베델 신앙은 자연스럽게 야훼 신상에 흡수되었다. 둘째, 야훼스트가 성소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이 이야기를 야곱의 여행담과 연결시키고 여기에 성조들에게 주어지는 전형적인 약속과 축복을 삽입시켰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야곱의 서원이 첨부되었을 것이다. 야곱은 하느님께서 무사한 귀향을 보장해 주신다면 자신이 세운 석상을 바탕으로 성소를 꾸미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약한다.
- 구약성서 저자들은 이 베텔 성소에 대하여 두 가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창세기 저자들은 베텔을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으며, 여로보암 1세는 베텔을 북왕국의 중심적 성소로 만들지만(1열왕 12-13장), 예언자들과 후기 역사가들은 베텔을 불결하고 추악한 장소로 여긴다.(아모 3, 14; 4,4;,4,4; 호세 4,14; 10,5 참조: 2 열왕 23,15). 판관기 1장 22절-25절에 의하면 베텔은 요셉 지파 곧 에브라임 부족에 의해서 가나안의 지배로부터 이스라엘의 지배로 옮겨오게 된다.
- 본 이야기로 들어가면,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과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해 떠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상부 지역에 위치한 하란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살던 곳이고 야곱의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는 천리가 넘는 먼 여행길이다. 아브라함은 이 길을 따라 베텔로 왔는데 이제 그의 손자 야곱은 이 길을 따라 하란으로 가고 있다. 해가 지자 야곱은 근처의 돌을 배개 삼아 노천에 잠자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야곱은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의 꿈을 꾸는데 이 층계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이 층계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되는 지구라트들처럼 하늘과 땅을 잇는 연결점이다. 원래 하느님은 하늘과 같이 접근될 수 없는 영역에 머물러 계시는데 지상의 인간이 그분에게 도달하기 위해 이런 층계가 필요한 것이다. 천사들이 이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한다는 묘사도 하늘과의 접촉을 의미한다. 그들은 천상궁전의 사신들로서 하느님의 아들들과 동일시되기도 하는데, 야곱이 꾼 천사들에 관한 꿈의 의미는 하느님과 지상에 사는 피조물 사이의 교류를 말한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꿈을 통해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시키는 엘로히스트의 기록으로 보인다.
- 그러다 갑자기 천사들과 층계가 사라지고 하느님이 야곱에게 직접 말씀하시는데 이 대목은 야휘스트의 기록이다. 하느님은 야곱에게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라고 소개한 후 조상들에게 했던 약속, 곧 후손과 땅과, 후손들을 통해 지상의 모든 사라들에게 내리시는 축복에 대한 약속을 다시 갱신하신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한번 하신 약속을 결코 잊지 않고 계신다.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갱신 중 특이한 것은 야곱에게 이 약속에 대한 개별적인 보장을 해주시는 것과 그의 안전한 귀환을 확인시켜 주는 부분이다. 하느님은 이 약속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야곱과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다.
-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하느님이 이런 장소에도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여기서 다시 엘로히스트의 기록이 이어지는데, 두려움은 엘로히스트 문헌에서 강조되는 표현으로 하느님의 영역에 대한 인간의 정상적인 반응을 말한다. 야곱은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하고 외친다. 하느님의 집은 그분의 처소를 가리키고 하늘문은 앞에서 언급한 하늘에 닿는 층계처럼 하늘과 땅을 잇는 연결점을 의미한다.
-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난 야곱은 자기 머리맡에 놓인 ‘돌’을 세워 석상을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는다. 이 돌은 가나안인의 종
교에 자주 나오는 가늘고 긴 돌이다.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하느님과 연결시켜 생각하고 이 돌기둥을 베텔(하느님의 집)이라 불렀다. 야곱에게는 하느님의 개입을 기념하는 일이었다.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는 미신을 피하기 위하여 돌기둥을 세우지 못하게 금하였다(레위기 26:1; 신명기 16:21) 이 대목은 주변 민족의 경신례에 비교적 관대했던 야훼스트의 기록이다. 야곱의 행동은 구약성서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예외적인 행위로 보인다. 그 속에 초자연적인 힘이 숨겨진 것으로 생각하여 바위를 섬기는 풍습은 고대 세계의 보편적인 종교예식이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가나안 사람들은 돌기둥을 섬기는 풍습을 보존해 왔는데, 성서의 저자들은 대부분 돌기둥 숭상을 배척했다(호세 10, 1-2; 미가 5, 12; 신명 7,5). 더구나 돌기둥에 기름을 발라 성별해 낸다는 것도 이스라엘의 종교관습에 어긋난다. 이런 모순들은 원래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숭배의 장소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 신앙의 장소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야곱은 이 장소에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의 베텔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데, 이 이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원래 가나안의 신과 그 신을 숭배하던 장소의 이름이었다. 루즈는 아몬드 나무를 말하는데 아마도 베텔 성소 부근에 이 나무가 자라고 있었지 않나 싶다.
- 야곱이 서원하는 대목에서 다시 엘로히스트 문헌이 계속된다. 서원의 내용은 무사귀환을 허락해 주시면 석상을 바탕으로 성소를 짓고 십일조(아브라함처럼, 창세 14, 20절)를 바치겠다는 것인데 앞의 야훼스트 문헌에서 이미 하느님은 야곱의 여행길에 함께 동행하여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 이 대목의 저자 엘로히스트는 아마 하느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서원을 통하여 다시 한번 하느님의 보호를 얻어 내겠다는 야곱의 마음을 반영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집에서 앙심을 품은 형으로부터 도피하여 하란까지 길고 험난한 길을 가야하는 야곱의 절박하고 불안한 심정을 극적으로 드러내려고 했던 게 아니가 생각된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151-160.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98-100.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295-298.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 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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