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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위기의 철학

마리아 아나빔 2011. 1. 22. 19:47

 

 

 

                                                                      환경위기의 철학

 

 

                                                                                                                                    마리아 아나빔

 

들어가는 말

 

       오늘날 인류는 환경위기에 처해있는데, 이 같은 상황에서 발전이나 진보란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한 이런 한 위기를 발달시킨 인간의 사고는 그릇된 것이므로 나아가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함을 비토리오 회슬레는 호소하고 있다. “비토리오 회슬레”는 1960년 밀라노에서 태어났으며, 형이상학과 윤리학, 정치철학에 대한 저서들과 논문들을 발표하였고, 『환경위기의 철학』은 1990년 모스크바에 있는 구 소련의 학술원에서 가진 다섯 번의 강연으로 그는 정치, 경제적 조치들만으로도 결코 환경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으며, 근대 학문의 대부분의 영역에 형성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즉 가치 체계와 범주(paradigm)의 전환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지적하며, 나아가 그는 환경적- 사회적인 시장 경제를 이룩하기 위한 구체적인 규범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럼으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환경위기에 처한 인류의 심각성에 깊이 자각의 마음을 가지며, 나름대로 그 대안을 모색하여 보고픈 마음으로 이 글을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

 

 

 

   머리말

 

      수많은 학문들이 환경위기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불어 환경학적 문제에 대하여 철학이 내릴 수 있는 휼륭한 답은 철학은 이 문제에 관련된 개별과학들에 자리를 양보하고, 오로지 자신의 전통적 분야에 몰두하는 것이 휼륭한 해결책인 것 같다. 물론 환경위기의 철학은 지금까지는 한번도 철학의 전통적 분야에 속하지 않았던 영역이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역사철학적 고찰이 필요한데 이러한 정돈 작업은 환경학적 위기에 대한 숙고 없이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 된다. 1989년 가을이래 환경학적 위기에 대한 성찰은 회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환경학적 파멸은 아주 근접한 미래에 우리를 노리고 있는 숙명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경적 파멸에 대한 확신이 사람들의 의식 안에 자리잡게 되었지만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쉽게 무감각해지는 것이며, 더구나 집단적으로 광란적인 쾌락주의와 지성인 집단의 나약한 냉소주의가 만연은 환경위기 의식을 저하시키는 것이 되며 이것은 철학의 영역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함은 마찬가지이다. 철학은 진리에 관한 것이고, 도덕률의 소리를 지각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인간은 독특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철학은 이러한 운명에 직면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것은 철학의 본분에 대한 무관심이며 배반이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이 어떤 절대적인 것을 파악하려는 유한한 존재로의 시도로써 어두운 미래에 보이는 “인간 조건”에 실재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앎을 포기해 버린다면 인간의 본질에는 오직 파멸의 가능성의 그림자만을 드리울 뿐이다. 따라서 환경위기의 철학은 인간문화에 대한 역사철학의 틀 속에서 그 위치를 설정해야 할 것이다.

 

       환경위기는 19세기이래 더욱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해 온 경제적이며 기술적인 것이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기술과 경제에 대한 철학 없이 환경적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기술적인 사고의 행렬 뒤에는 근대 형이상학의 프로그램과 관련된 결정적인 정신적 방향의 전환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데, 특히 이러한 관점을 인식하게 된 것은 “하이데거”에 의한 불멸의 업적이다. 그리고 환경위기의 철학은 이론적인 부분은 물론 실천적인 영역들과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를 넘어 이러한 관점을 확장시킨 것은 “한스 요나스(H문 Jonas)”의 불명의 공로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환경위기에 대한 실천적 철학에서는 윤리적 질문들 뿐 아니라 정치, 철학적인 질문들도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개인 윤리적 원리들만으로는 환경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정치철학적인 일관성을 유지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 정치적 규범들에 의해서만 환경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환경위기가 특정한 가치와 범주로 방향 지워진 노선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 가치와 범주는 수정 없이 결정적인 변화를 이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러한 범주 변화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근대 철학과 근대 학문의 대부분 영역에서 정립된 것과 다르게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데카르트를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 철학으로 회귀하거나, 혹은 구약성서의 신(神) 개념을 회복하려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럼으로 이성의 자율성을 자연의 독자적인 가치와 연결 지으려 노력하는 자연철학이 우리 시대의 가장 절실한 요구인 것처럼 보인다.

      환경학은 인간이 살아가는 다양한 자연적인 집들 중에서 공간적으로 가장 큰집인 지구를 조망한다. 지구는 오늘날 자연적이며 문화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인간은 이상적인 집이란 관점에서 바라 볼 때 가장 포괄적인 것은 존재 전체이며, 그것은 바로 철학의 대상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Ⅰ. 정치의 새로운 구조틀로서의 환경학

 

       인간의 신념에 대한 구조의 틀은 전체 사회구조의 붕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정치적 구조의 변화는 현실 제도의 붕괴로 이어지고, 이러한 붕괴에는 어떤 웅장한 해방 적인 요소가 깃들여 있다. 그럼으로 붕괴된 사유구조에서 벗어나 사유의 억압에서 해방된 성숙한 정신은 이것이 엄청난 의미임을 충분히 깨닫게 되며, 문화전체가 이러한 과정에 기인하게 될 때 공동체험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유구조의 붕괴는 적시에 이러한 붕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그 구조에 매어있는 이들에게 정신적 타격을 주거나 손상을 입히게 된다. 따라서 과거의 원리를 포기하지 못하면 새로운 것을 읽어내는 것에는 더욱더 더디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붕괴된 체계 안에서 행해졌던 의사 소통의 현상학을 다루는 것이 이 강연의 과제는 아니지만 이러한 원리 위에 자신을 정립해 가는 합목적성에 관한 것이 그 내용이다. 철학에 있어서도 한 체제의 붕괴와 새로운 체제 정립 사이의 과도기란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된다. 또한 사회적, 정치적 위험들이 포함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때 합의와 폭력은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는 안정성의 요인이 된다. 그럼으로 합의가 커지면 커질수록 폭력은 줄어들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데,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폭력과 혁명으로, 그리고 때로는 반혁명으로까지 구조 틀의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한 체제가 붕괴되었지만 새로운 체제는 정립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서 안식처를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상황은 2차 세계대전 중이나 또는 전후에 스탈린식 제국주의 체제에 희생이 되었던 국가들 안에 살펴볼 때, 그들이 이후 다른 서방 국가들과 같은 길을 걷기를 원하는 세력이 힘을 얻게 된다 할지라도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를 우려 할 수가 있겠다. 첫째로, 민족의 자긍심의 장기간 동안의 단절인데 이것은 혁명과정에 비롯된 것이지만, 여기서 애국심만이 개별적인 관심들을 공동체적인 관심으로 드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공동체적으로 고양된 관심 없이는 현재의 심각한 위험들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서구 사회를 모방하려는 태도이다. 여기서 모방하려는 욕구는 이해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욕구 때문에 다른 모든 가치들이 희생될 수 있다는 우려가 생기게 되며, 이것은 또한 자신의 고유한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인데 이 일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 충족시킬 수 없는 욕구에 종속될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중대한 도덕적 폐해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여기서 위기를 거론하는 결정적인 관점으로는 서구적인 생활 수준을 보편화시킨다는 것은 지구를 환경적으로 완전히 파괴시키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구의 모든 제 1세계의 주민들처럼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쓰레기를 만들어내며, 대기 중에 유해 물질을 퍼뜨린다면, 우리를 현기증에 빠지게 만드는 파멸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구환경자원전제에 대한 보고서>에서 잘 알 수 가 있다. 물론 이 보고서에서 문제의 복잡성에 대한 분석과 세계의 기후, 식량 상태의 발전과 환경 부담에 대한 분석에서 불가피하게 여러 결점들을 보이고 있지만. 인구의 증가. 대기의 온난화, 유독한 화학물질의 수중 증가, 대지의 무식, 오존층의 감소, 식량의 감소, 생물 종의 감소 등은 환경학적 파멸이라는 상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기본 주장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으로 환경학적 질문이 가까운 장래에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이 질문은 지금까지의 현대문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구조틀(Modern-Paradigm) 붕괴를 초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국가들이 계획 경제로 서구적 사회체계를 수정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가 되다는 것이다. 모든 갈등이 그러하듯이 동-서의 갈등 역시 하나의 공통적인 토대를 전제하고 있는데, 이러한 토대란 인간 사회의 다른 모든 기본적 체계에 대한 “경제의 우선권”이라 할 수 있다.

 

  환경 위기가 진정 21세기의 운명이라면, 그 노선에 대해 합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이러한 목표가 의미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경제가 금세기 문화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지배적인 체제라는 것은 의심의 의지가 없지만, 역사상 어떤 시기에도 이러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막론하고 오늘날의 국가는 경제적 문제에 당면하고 있는데, 정치와 경제의 관계가 고대에는 오늘날과 전적으로 달랐다고 할 수 있겠다. 아테네의 도시국가들은 사회 정책적인 성격이 미약했으며, 훨씬 약한 경제적 책임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후 중세를 지나 근대의 역사 안에서 국가는 중세가 해체되면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며, 또한 국가가 교회와 분리되면서 비로소 교회의 후견 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에 속할 때만이 국가 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19세기까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6-17세기 유럽에서 있었던 전쟁들 안에서도 대부분의 전쟁들은 모두가 종교상의 문제와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에서 잘 알 수 있으며, 그 결과가 바로 종교의 탈정치화, 신앙의 탈정치화로 정리할 수 있다.

 

   국가의 이성은 이제 종교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구조틀의 변화가 야기한 중요한 결과의 또 하나는 이제 <친구-원수- 축의 변화>를 확고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유럽 정치의 새로운 구조틀은 민족이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 정치의 관점에서도 민족의 상속자가 되었으며, 이제 국내 정치의 목표가 종교적 동질성이 아니라 민족적 동일성이 된 것이고, 전쟁은 처음으로 민족간의 전쟁이 되었던 것이다. 칼 슈미트가 “중립화와 탈정치화의 시대”에 대한 자신의 유명한 논문에서 “지배자에 따라 국가가 결정된다.”라는 명제를 “지배자에 따라서 경제가 결정된다.”라는 면제로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1920년(年) 그리고 정치를 민족에 의해 규정하는 이 관점은 오늘날까지도 극복되지 않고 있고, 경제적 측면들의 역할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그리하여 19세 후반 이래의 국가들은 시장경제로 규정되어 오게 되었다. 그럼으로 이러한 정치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20세기의 국내 정치는 물론 대외 정치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발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동일한 구조틀 안에 머물러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고전적인 자유주의 국가는 물론 사회국가와 사회주의 국가들도 나의 역사철학적 의미에서는 경제라는 구조틀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가장 골치 아픈 것은 도덕적, 정치적 문제이다. 사유재산에 있어서도 사회적 의무를 지워야 한다는 견해는 개체적 주관성이 상호 주관성으로 이행된 철학의 거대한 구조틀 변화와 맞물러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은 첫째 현대 국가들의 국제적인 공격성을 강화시켰으며, 둘째는 현대의 환경 위기를 초래한 근본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자국민의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이로써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현대 국가는 대외적으로는 약탈정책을 강요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민의 요구가 무절제할 정도록 커진다면 국가적 사회국가는 이러한 요구를 진정시키는데 필요한 조치를 그 저항이 가망 경미한 곳에서 취할 것인데 그 하나가 자연이며(근대법철학에서 자연은 일반 적으로 권리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있음.), 다른 하나는 사회적 법치국가의 원리를 미처 수용하지 못한 국가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이 조만 간에 현실적인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라 점이다. “푸른 지구”의 환경학적 파괴와 제 3세계의 파멸적인 상황은 그 자체로는 풀기 어렵게 서로 얽혀있는 문제이다. 이것이 경제라는 구조 틀에 속박되어 있는 현대 정치의 “ 국가 사회주의적” 심층구조가 지니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환경학적 위기는 지금까지의 구조틀을 해체시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구조틀의 문턱에 서 있는데, 즉, 경제라는 구조틀은 환경의 구조틀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 환경정책연구소의 소장인 “에른스트-울리히 폰 바이체커”가 그이 뛰어난 저서인<지구정치>에서 전개하고 있는 논제이다. 그리고 이 책은 21세기가 환경의 세기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휼륭한 정치는 우리의 생활 세계의 자연적인 토대를 범지구적으로 지켜 가는 것이며, 휼륭한 정치란 더 이상 경제를 양적으로 발전시키거나, 무의미한 욕구의 충족으로써 자국민의 문화적, 언어적 정체성을 추구하지만, 종교와 신앙의 동질성을 관철시키려는 정치는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구조의 틀 변화 안에서 친구-적의 관계로의 이행에서 머지 않아 환경학적 문제가 새로운 전쟁의 동기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러한 주요한 모순들이 외교정치에서는 환경을 구하기 위하여 누가 무엇을 행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가라는 질문의 쟁점을 다룬다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서유럽 지성인들에게 “좌익”과 “우익” “반동적”, “보수적”, “진보적”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이것들은 구조틀의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술어가 어떤 인간이나 운동에 적용되는 그 구제 적인 경우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의 목적에 대한, 또는 적어도 역사가 발전하는 방향에 대한 분명한 이념을 가져야 한다.

경제적 사고의 구조틀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소비를 증가시키려 하는 것이 진보적인 일지겠지만, 환경학의 구조틀에서 이러한 태도는 일정한 조건에서는 보수적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는 환경의 건강 상태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좌익과 우익의 여러 다양한 정신적 정치적인 흐름을 살펴보고, 이러한 구조틀 변화가 어째서 “좌익”과 “우익”이라는 구분과는 일치하지 않는지를 제시한다면

 

       일단 두 개의 개념은 극도로 불분명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데 노장보수주의자들은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할 것이며, 하버마스는 한슨 요나스도 이러한 범주에 넣으며, 이들은 현대의 주체성의 요구에서 실체적인 존재를 구해내고자 할 것이다. 그들은 좌익의 성찰 문화는 물론 현대의 산업사회가 이룩한 업적에서도 이러한 요구들을 인식하고 있는데, 이들에게는 하이데거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게몽 소장 보수주의자들은 니체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은 계몽주의의 이념과 보수적 윤리의 이념을 거부한다. 또한 이들은 공격적일 정도록 민족주의적이고 반 논리적인, 그야말로 신화적인 사고에 쉽게 빠져드는 특징을 갖고 있다. 노장진보주의자들은 계몽주의 전통에 속해 있으며,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속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보편적인 이념들을 옹호하고 환경학적 위기가 그들의 주요 관심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취해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이념들은 구체화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소장 진보주의자들은 이들은 대부분 탈현대주의자들에 속하며, 객관적인 진리와 가치와 믿음을 단연코 거부해버리기 때문에 합리적 비판을 제시할 능력이거의 없으며, 이들의 이념을 특징짓는 것은 정신적인 혼돈과 지적인 오만, 그리고 책임을 망각한 냉소주의의 자의적인 혼합일 뿐이다. 그리고 끝으로 또 하나의 고유한 집단으로는 명백하게 새로운 구조틀로 작업하며, 환경학적인 현실 정치를 옹호하는 이들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노장 보수주의자들과 노장 진보주의자들 안에 그들의 자연스러운 연 합자들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제시한 4가지의 유형은 경제적 구조틀과 환경학적 구조틀 사이의 현대적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으로, 어느 정도 제한이 따르기는 하지만 여기서 제시된 유형은 어렵지 않게 구조틀 변화에 따른 모든 상황으로 일반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환경학적 위기에 대한 가능성은 전통에로 회귀하려는 태도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경우는 위와 달리 실존적으로는 진지하게 의도를 가긴 것이지만 반동적인 태도이며,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과제를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다. 카토 유티센시스가 이러한 행동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이것은 개인 보다 전체에 미칠 경우 더욱 위험해지는데 몇몇 끔찍한 보기들에서 알 수 있다. ( 마르크스주의, 반유다주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러시아 리투아니아) 하지만 미래가 암울하다 해도 새로운 구조틀이 그 윤곽만이라도 인식될 수 있다면 찬란한 과거로 되돌아감으로써 인류에게 새로운 활력을 제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활력은 새로운 구틀의 건설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전통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자는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없기에, 환경 세기가 요청하는 새로운 정신적 구조틀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전통에 담겨진 정신적 자산을 이용할 때만이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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