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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위기의 철학(2)

마리아 아나빔 2011. 1. 22. 20:00

 

 

 

                                                                        환경위기의 철학

 

Ⅱ. 환경 위기의 정신사적 토대

 

      환경학적 위기는 환경위기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인 인간이 지혜의 이상인 조화의 관계를 부정함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의 합리성이 남긴 특별한 결과로써 생명체를 존재 전체 안에서 분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식과 지식에 비교해 본다면 위축이라는 말을 하게되는 것이며, 또한 목적 합리성과 가치 합리성 사이의 오해로 현대 기술공학 시대의 기초를 이루며 현대사회의 환경학적 위기와 일반적인 방향성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된다.

 

     현대 산업사회의 구조를 좀더 상세하게 분석하기 위하여 현대 과학과 현대 기술, 그리고 자본주의적 경제라는 3가지 요소로 나누어서 고찰해 보면, 이러한 요소는 그의 결합이 산업사회의 구조를 이루고 있고 또한 ‘거대한 구조’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데 이 거대한 구조는 현대 사회의 점점 더 통제하기 힘든 원동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에 인간 문화의 발전을 규정하는 본질 법칙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할 때 특히 관심을 끄는 중심적인 문제는 인간의 자기 이해 즉,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해석에서 나타난 혼란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혼란은 결국 현대 과학과 기술의 자연개념에 스며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위험은 첫 번째 위험과 관련을 맺고 있지만, 더욱 심각한 것으로 현대의 자연철학과 기술이 실제로 근대의 형이상학의 형상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근대의 자연과학과 기술 및 서구의 합리성이 고유한 자기해명을 시도해 온 형이상학을 비판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철학을 새로이 정립하는 작업은 새로운 구조틀의 철학이 지닌 주된 과제로써 첫째는 자연이란 결국 인간적인 구조라는 근대 인식론의 근본사유이며, 둘째로는 근대 인식론의 일차적인 근본 이유를 이끌어온 객관과 주관의 경직된 대립을 중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더불어 새로운 사유의 철학은 첫째, 어떻게 자연에 대한 선험적 인식론이 가능한지를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설명해야 하며, 둘째는 어떻게 인간의 주체성이 모든 자연 세계에 속하면서도 우주 안에서 고유의 툭별한 위치를 누리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 생각으로는 첫 번째의 답은 반성적 논증에 의해 최종적인 근거를 가질 수 있는 객관적 관념론이 바로 여기서 추구하는 철학인 듯하며, 이 객관적 관념론은 실재론의 진리나 또는 주관적 관념론의 진리까지도 개념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이 주관적이며 상호 주관적 정신이 관념론적 영역에 의해 구성된다면, 이러한 체제의 틀에서 정신은 자연을 통해 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객관적 관념론이 철학사의 최종적 위치를 차지 할 뿐만 아니라 근거 이론을 확정짓는 가장 강력한 학설, 즉 인식론적이며 존재론적 이론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 두 번째는 객관적 관념론의 지반 안에서만 가능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부합하는 이론으로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산출되며, 그런 만큼 철저히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나 한편 인간만이 자연의 원리를 통찰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즉 다시 말해서 인간은 전적으로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 즉 자연의 타자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이 지닌 양면성이야말로 자연과 인간 관계를 다루는 모든 이론이 담고 있는 가장 주된 수수께기 이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문제 제기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동시에 이러한 두 가지 관계 유형에 속하며, 그러한 상황이 그 관계를 어렵게 만들며, 인간의 역사 안에서 “포괄하는” 자연 개념에서 “대립하는” 자연 개념으로 발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자연(Physis)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을 포함하는 움직이는 존재 전체였으며, 부분적으로는 관념론적인 근거, 다시 말해 존재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결코 인간을 자연에 대립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대립은 데카르트의 자연 개념에서 생겨난 것으로, 사유의 존재(re cogitans)와 연장의 존재(res extensa) 사이의 이원론적 대립은 근대 자연과학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자연 개념이 변화하게 되었는가를 인간 정신의 역사에서 자연개념을 다섯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는 종(種)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오늘날 가장 적은 인간 영역으로 국한되고 있는 개념으로써 고대문화에서 자연의 이해이다.

 

    고대 문화에서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자연은 신성하고 생명력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은 신화(Mithos)로 둘러 쌓여 있었고, 인간은 제의 의식을 통해 자연과 더불어 존재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려 하였다. 이때 학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기술들은 오르데가 이 가세트(Oryega y Gasset)는 우연의 기술이라 이름하였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화폐경제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며, 인간은 아직 자연의 혈통 공동체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 낼 수 없는 자신의 본래적 주체성을 갖지 못한 채 자연에 순응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일정한 거처에 정주 하게 되면서 고도의 문화가 탄생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변화를 맞게되는데, 즉 수공업이 기술화되고, 과학이 발전되었던 것이다. 천문학과 측량술의 발달, 하지만 과학은 아직 신화와 풀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리스 문화는 그 이전에 형성된 모든 문화와 구별되는 종적인 차이(differentia specifica)는 한 국가의 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이나 계몽의 움직임인 변론술로써 이로 인하여 신화(神話)는 급진적인 비판을 받게 되었고, 모든 것은 로고스(Logos)에 비추어 정당화하려는 사고가 처음으로 세계사에 등장한 것 이였다. 이로써 새로운 형태의 학문이 생겨났는데, 즉 추론적인 학문의 형태와 기본적인 원리에서 연역된 과학의 공리가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수학만이 그리스인들이 학문적 방법을 정립하는데 기여한 유일한 공적이 아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연역적 방법론의 구조에 대한 방법론적 성찰 역시 이와 비슷한 비중의 의미를 지녔다.

 

     고대의 학문은 여러 관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학문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데, 이 두 유형이 갖는 차이를 파악하지 않을 경우에는 무엇 때문에 현대의 학문이 환경학적 위기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지 그 원인을 이해 할 수 없게된다. 첫 번째로 중요한 차이는 고대에는 자연 관찰에 대한 수학의 응용이 고립적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점, 즉 천문학의 영역으로만 제한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한 철학과 물리학의 탈수학화 현대적인 학문의 세계로 다가가는 발전을 이루었지만 현대적 개념에 필적할 만한 성취는 아니다. 둘째는 고대에는 지상의 세계와 초월적 세계 사이의 생활 세계적 차이를 지나칠 정도록 고수하였다는 것셋째로는 당시에는 실험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이 결여되었다는 것(학문과 기술이 본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평행적으로 발전) 네 번째로는 고대 학문에 독특한 색채를 부여하는 학문으로 생물학의 발달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심원하게 연구한 것으로써 목적론적 표상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고대 학문은 명백하게 철학 안에 자기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근대 학문의 시작에도 적용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구제적인 사물 안에서의 보편성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올바르게 사유한 것이 되지만, 이에 반대로 현대의 학문에서는 기능이 실체를 대체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어떤 변수가 갖는 기능적 종속성만 유지된다면 관계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구성 부분들은 임의적으로 대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고대는 수학과 자연과학은 선재적인 존재자를 발견하고 고찰하지만, 이러한 존재자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으로 고대의 학문에서 현대 학문으로의 변화가 중세 시대에 준비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 된다. 또한 중세 학문이 고대 학문에 비해 많은 면에 후퇴했다는 사실도 올바른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5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아르키메데스를 이해 할 수 있는 상황이 이루어졌는데 그 핵심적인 인물이 쿠사누스(Cusanus)이다. 그러나 왜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네 번째 자연 개념으로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인 현대과학의 자연개념을 준비하는가? 헬레니즘 철학의 체계에서 신학은 물리학에 속한 것으로 신 개념을 철저하게 탈신화화 시켰지만, 그리스도교에서 자연은 더 이상 자신에게 유래하는 존재자가 아니라 무한한 창조주와 관련 속에 예속되어 있는 존재의 원리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는 스콜라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본질론을 파괴한 유명론 신학이 특히 중요하며, “14세기에 나타난 갈릴레이의 선구자들”이 유명론에서 정신적 고향을 발견한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 유일신만이 불변하는 자연법칙의 체계에 대한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근대철학 인식론의 주관주의적인 전환 속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데, 즉 중세의 신 중심에서 인간중신으로의 대체이다. 플라톤에 대한 경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수학적 실체의 창조자라는 사고는 쿠사누스”가 처음 제시하였는데, 이러한 사고는 후대에 이르러 두 방향으로 발전되는데 하나는 인간정신의 구성적 성격이 신과의 관련성을 잃게 되었다는 것과 한편으로는 이것은 점차 수학적 실체의 세계뿐 아니라 자연의 경험적 세계도 인간에 의해 구성된 세계로 여겨지는 것인데 이는 바로 자연으로부터 그 자체로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박탈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에 이르러 인간의 본질에 대한 발전이 정점에 이르러 주체성은 세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절대화할 수 있는 것이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신과 자연 그리고 상호 주관적인 세계는 평가 절하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극단적인 것은 타자의 자아를 배제 시켜 버렸다는 점이다. 그럼으로 데카르트의 세계는 오직 신과 자아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존립할 때만 완전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그럼으로 타자는 방법론적으로뿐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현대에 일어나고 있는 자연의 황폐화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 하나는 데카르트적 자연에 대한 학설이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연장의 존재(res extensa)로서 사유의 존재(res cogitans)와 대립되어 존재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연장의 존재와 사유의 존재 사이의 경계가 인간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물리적 자연, 즉 그의 육체 역시 연장의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데카르트는 타인의 주관성 인정하지만 인간적이지 않은 자연에는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견해를 굽히지 않는다. 이러한 반 직관적인 이론이 자연과학의 개선 행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통찰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이론에 따르면 동물 실험에 대한 모든 윤리적 고려는 배제되는 것이 되며, 타자의 내면에 대한 이론적인 난해함은 그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방식으로도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수량화, 수학화 할 수 있는 연장의 존재(res extensa)로 변화시킴으로써 물리학은 범주적인 자연과학이 되었던 것이다. 생물학 또한 이러한 자연과학과 원칙적으로 같은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로써 인간이 그때까지 자연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지적이며 감성적인 관계는 끝나게 되고, 자연은 인간의 타자로써 절대권에 가혹하게 지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어서 바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에서 자연은 그저 주관적 표상의 전체로 축소되었고,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에서는 자연은 물자체와 대립되는 것으로써 다만 우리의 자아에 접근 가능한 것으로써 인간 구조에 대한 성과일 뿐이었으며, 한편 피히테에게 있어서는 그는 칸트의 물자체를 신비스러운 동력으로 수축시킴으로써, 자연은 더욱더 급격하게 탈존재론적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그럼으로 주체성이 배제되어 버린 자연은 필연적으로 탈목적론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반데카르트적인 자연철학은 자연을 주관성과 이론적으로 대립시키지 않고 자연 자체에 고유한 가치를 , 즉 합목적성과 주체성이란 무감각한 형식을 허용하려 시도한다. 이러한 반데카르트적인 자연철학이 고대물리학, 특히 합목적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의 회귀와 연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 것이 된다. 그럼으로 나는 라이프니찌, 쉘링, 헤겔을 의도한다. 라이프니찌는 타자의 내면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으로부터 데카르트와 대립되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또한 그는 모든 존재자에게 이러한 내면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쉘링과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에서 자연은 비록 자신의 비유기체적 형상 안에 활력을 지니지 않지만, 그럼에도 정신- 자체, 즉 비록 장구한 발전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대자연으로 될지언정 그 내적 핵심인 목적(Telos)은 주체성인 그 어떤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과는 별개로 자연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그것은 절대성의 원리성이며, 나아가 그 안에서는 존재자와 선(善)과 미(美)가 하나로 수렴되는 의미 있는 어떤 것이다.

 

      자연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도 현대 자연과학이 거둔 성공에는 이론적으로 철학적 해명이 필요하며, 또한 이러한 실천을 포기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라이프니츠와 헤겔을 재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자연철학은 확실히 그 근본 특성이 경험적 자연과학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근대의 자연과학은 점점 더 자연을 탈목적화하고 탈주체화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과학이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자신의 주권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권 이념은 다른 한편 자연을 인공품의 기술 세계로 새롭게 창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리고 학문적 관심은 이론적이며, 기술적 관심은 실천적이므로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러나고대의 테오리아가 현대의 ‘이론’적 관점과는 분명하게 분리된다는 사실은 또한 정확한 지적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간극의 원인은 바로 근대 인식론이 갖는 구성주의적 자기 이해이다. 즉 실재- 사실- 원리(verum-factum-prinzip)의 심연은 근대의 학문과 기술이 동전의 양면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자연과학과 기술 안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근대적 주체성의 개선 행진은 완고한 변증법 안에서 인간의 가치를 하락시킬 수 있는데, 육제적 존재인 인간은 또한 자연의 일부분으로 자연에 대한 지배는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 타자에 대한 지배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기술의 변증법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기술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으로써, 이 우월함은 인간이 사물을 자연에 속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기술적 도구로 작업화 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기술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만, 또한 새로운 욕구를 산출해 내기 때문에 인간을 다시 구속시킨다. 그리고 현대의 기술은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계속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내면서 무한히 뻗어가려고 한다.(ad infinitism) 물론 현대 기술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이 정신적 세계에서 창조적이지 못하면, 세계와의 관련성은 의인화되고 탈마법화된 자연의 그릇된 측면인 주관성의 이상 발달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대 기술을 움직이는 첫째요인(Primum movens)은 제조 가능성에 대한 망상이다. 이 말은 오직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다. 기술이 야기하는 사회적 부작용들은 외부 세계가 순수한 대상성으로 변화됨으로써 대중지배라는 사회기술공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요인은 현대 산업사회의 거대한 구조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라는 삼각구조로 환원됨으로 과학-기술적 방법들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현대 경제는 고대의 경제보다 우월한 합리성의 단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요인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을 일정한 방식으로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에서조차 극복되지 못한 것으로써,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은 과거의 그 어느 경제 형태보다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자기규정이라는 이상에 접근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세계의 무한주의는 계속될 수 없는데 바로 죽음에 대한 억압 심리는 현대 산업사회의 필수적인 특징이며 대부분 현대인들이 겪는 실존적인 무의미함의 가장 심층적인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사람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취하는 합리적인 행동이란 고작 재산에 대한 축적 정도이다.

 

     경제적 진보이념란 어떤 의미에서 생겨난 것일까? 고대에 있어서 진보라 수직적 차원과 관련된 것으로 삶에 대한 초월적이며 이상적인 세계로의 상승함으로써 보이는 일정한 도덕적 정화에 도달하는 것 이였다. 하지만 근대에는 이 같은 진보를 “수평화”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판단 기준에 대한 믿음의 감소로 사회적 세계에서 수량과 측도로 나타낼수 있는 경제적인 발달로 제한된 국민 총생산의 성장이 한 국가의 진보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준점인 되는 것으로 전략한 것에 있다. 이에 슈미트는 종교- 국가- 경제라는 삼각구조와 병행하여 근대 역사의 다음과 같은 중심 영역들을 제시하고 있다. :

신학, 형이상학, 윤리, 경제는 16,17,18세기와 19세기의 정신적 삶에서 그때 그때마다 중심적인 논점을 형성했는데 하나의 영역에 다른 영역으로 전환될 때는 이전 중심영역이 중립화 될 수 있고 탈 정치화 될 수 있다고 믿게 될 때 이루어지게 되고, 그 방법은 처음에는 신학적 질문이, 형이상학적 질문들이 마침내 윤리적인 질문들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경제 분야에 있어서 발전의 기준에만 합의하게 된다면 이 세 영역에서 반드시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이 같은 믿음이 오류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며 경제체제에 의한 전재의 예에서 보듯이 도덕적 선택은 존재 전체가 파악되지 않을 때에는 자의적으로 남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경제는 도덕을 , 도덕은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은 신학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근대 정치와 정신의 역사에 가장 커다란 오류는 모든 본질적 질문들이 목적 합리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생각했던 헛된 믿음에 있다. 이러한 목적성은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수량화 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화시키면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규정하고 관리하는 것 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데카르트적인 자연과학의 발생과 일치하며, 이것은 대상을 “탈주체화”하는 것이다. 즉 이들은 정신적, 기술적응로 대상을 지배하기 위해 그것을 “객체”로 위축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고전 문헌학은 “객관적 학문”이라는 기계장치의 작은 톱니 바퀴아래 수축되어 버렸다. 하지만 라이프니쯔와 비슷하게 비코는 정신적 학문의 이상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근대의 주체성은 전체 세계를 규정짓는 절대성의 이념을 파괴하고, 자신 외에 그곳에 머무르는 모든 것을 변화시킴으로써 하나의 순수한 대상을 향한 정복의 원정을 개시하는데 이러한 원정의 마지막 결과란 지구의 파멸이며, 이로써 주체성 자각까지 파멸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주체성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표현을 발견한 절대적 존재 자체라면, 또한 성찰 적인 자기 회복만이 이론에 견고함을 부여할 수 있으며, 우리는 자신을 기술 안으로 확장시키는 주체성의 이 엄청나게 급격한 움직임이 발전의 종지부도 아니며, 또한 오류의 길도 아니라는 사실을 희망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인간의 집단적인 노력이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정의와 화해일 뿐 아니라 자연과도 화해를 이루는 세계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인간적인 자연개념들의 발전이 더욱 높은 차원에서 고대의 자연 개념으로 돌아감으로써 그 개념과 종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아울러 새로운 가치들을 만들어내야 하며, 사회와 경제를 주도하는 세력에게 이러한 가치들을 계속 제공하되 그 시기가 가능한 빨라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나오는 말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환경 파괴를 체험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에 둔감한데, 자연철학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이것을 새롭고 심각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는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한 사람으로써 나 자신과 우리가 처한 시대에 대한 본연의 의무 앞에 어떻게 행위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를 고대-중세-근대-데카르트적인 세계관의 올바른 고찰을 통하여 우리가 처한 환경위기의 상황에 대한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또한 이론적이고 해석학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사유의 틀(Paradigm)을 모색해 봄으로써 그 답을 구해보며, 무엇보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왜곡된 모습을 되돌리고 작업을 나 자신 안에서부터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만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합목적성에 따라 각 각의 존재가 살아가는 것이고 더불어 모든 존재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라 확신하게 된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가치관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로써 또한 창조주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이로써의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을 깊게 하게 되며 그렇게 못했던 나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