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나눔 47:창세기 49-50장: 야곱의 축복과 장례식
들어가면서
이 장은 야훼계 본문으로 이스라엘 지파의 운명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사악의 축복이 야곱 자신과 에사오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과 비슷하다.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내려준 마지막 축복은 시로 되어 있는데 축복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이름을 이어받은 이스라엘 12부족들에 대한 신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신탁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계시로 미래의 일을 꿰뚫어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축복의 저자는 야훼스트로서 다윗 가문을 배출시킨 유다의 출중함과 계속되는 기근에서 야곱 집안을 살려 냈던 요셉의 특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야곱은 이집트 땅에서 십칠 년을 살고 죽을 때가 다가오자, 요셉의 두 아들 에프라임과 므나쎄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고 두 번에 걸쳐 축복한다. 그 중에서도 아우인 에프라임이 더 크게 되리라고 축복하여, 형제의 관계를 뒤집는다. 이는 에프라임 지파가 장차 북이스라엘의 중심 지파가 될 것임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이어 야곱은 하느님께서 “너희를 다시 조상들의 땅으로 데려가 주실 것”(48,21)이라며, 이집트 탈출 사건을 거듭 예고한다. 그리고 나서 열두 아들을 차례로 축복하는데, 그 내용은 왕정시대 이후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뒤늦게 열두 지파에 합류한 것 같은 유다지파가 왕조를 이루고 큰 번영을 누린다고 길게 축복받는다. 마찬가지로 요셉 지파도 강하게 되고 큰 복을 받는다고 길게 언급된다.
야곱이 막펠라 동굴에 묻으라고 유언한 뒤 숨지자, 요셉은 칠십 일 동안 장례준비를 한 다음 가나안으로 안장한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베푼 용서를 믿지 못하고 여전히 보복을 두려워하며 “종”이라 자칭하는 형들에게 다시금 용서의 뜻을 분명히 밝히며 “형님”으로 대우한다. 요셉은 “형님들이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저질러진 것은 ‘악과 잘못과 죄악’이지만, 그것을 자신의 덕으로 용서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하심에 힘입어 용서했기 때문이다. 보복은 하느님의 몫인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과 종이 아닌, 한 형제로서 함께 산 요셉은 삼 대를 보고 이상적인 수명인 백십 년을 산 다음 죽는다. 그도 “하느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50,25)이라고 유언하여 하느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이집트 탈출 사건을 연결한다(15,13-16). 이집트는 그들이 영구적으로 살 약속의 땅이 아님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히브리 성경에서 창세기의 마지막 단어는 “이집트(베 미츠라임)”이다.
Text 안에서
창세 49, 1-18: 야곱의 아들들아 모여와 들어라
야곱은 죽기 전에 자식들을 모두 부른다. 축복은 보통 두 가지 기회에 주어진다. 하나는 자식들이 먼 길을 떠날 때, 다른 하나는 이 대목에서처럼 죽음의 침상에서 남은 후손들에게 주어진다. 야곱은 첫 아들 르우벤(남보다 뛰어나다)에 대해서 우선 “너는 내 맏아들, 내 힘, 내 정력의 첫 열매리”고 긍정적인 평가를 한 후, “너무 우쭐대고 세차다”고 배척한다. 르우벤이 배척받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야곱의 소실 빌하를 범하였기 때문이다(35, 21-22). 르우벤의 넘쳐 흐르는 과잉된 힘과 활기를 찬양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억제하지 못하고 파멸의 원인이 된다. 곧 빌하와의 근친상간 때문에 맏아들의 권리를 잃는다. 구약성서에서 르우벤 부족에 대한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들의 동복 여동생 디나를 겁탈했다 해서 세겜의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순위로 말하면, 시므온 다음은 레위가 상속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난폭하기 때문에 재배권을 받지 못한다. 호전적 정신을 싫어하는 야곱의 심정과 민족 감정이 나타난다. 야곱은 이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들을 폭력의 편에 선 자들로 몰아 부친다. 거기에 대한 벌로 시므온 부족은 후에 남왕국 유다 부족에 흡수되었으며, 레위 부족은 다른 지파들과는 달리 한 평의 땅도 가지지 못했다가 나중에서야 사제 지파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신명 33, 8-11).
- 이어지는 유다(고백하다/찬양한다) 지파에 대한 야곱의 유언은 유다 부족이 전 부족을 통치했던 다윗 왕 시절에 나온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야휘스트가 이용한 전승이 대부분 이미 왕정 시대 이전에 생겨난 것으로 보아 판관 시대에 불레셋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그 용맹을 유감없이 드러냈던 유다 부족을 칭송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에게 지배권이 넘어가고 그는 모든 짐승의 왕 “사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유다 부족에 대한 신탁은 다윗 왕과 연결된 메시아 시대의 희망을 동반하고 있다. “유다 너는 네 형제들의 찬양을 받으리라”는 말은 ‘너는 네 이름이 뜻하는바 그대로 형제들이 너를 찬양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창세기의 저자는 유다를 ‘그들이 너를 찬양할 것이다’라는 뜻의 동사 ‘요다’와 연결시켜 말장난을 하고 있다. 유다는 형제들로부터 그의 용감성에 대하여 찬양을 받지만 그 이상의 자세한 사정은 야곱의 신탁에서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어 유다는 사자와 비교가 되고 있는데 무서운 힘의 소유자를 사자로 비유하는 일은 성서에서 종종 있다(민수 23,24; 24,9).
- 그 다음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고 지휘봉(고대의 왕들은 왕좌에 앉아 있을 때 지팡이를 무릎 사이에 세워서 잡고 있었다.)이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와 “참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분이 와서 만백성이 그에게 순종하리라”는 표현은 비록 메시아라는 이름이 언급되진 않지만 그 분위기로 보아서 메시아 시대에 대한 희망과 예고를 암시한다. 유다 부족은 다윗왕의 통치 때에 최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유다 부족에서 난 다윗왕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지배할 것이며 그의 후손 가운데 만백성에게 순종을 받을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신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이 이어지는 포도나무의 포도주, 그리고 새끼나귀와 우유는 메시아 시대의 축복으로 인한 풍요로움과 혜택을 가리킨다. “포도나무에 나귀를 예사로 매어 놓고 고급 포도나무에 새끼나귀를 예사로 매어 두리라”는 표현은 포도농사가 하도 잘되어서 동물들이 그것을 따먹는 일이 발생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나귀로 하여금 마음껏 포도를 따먹도록 포도나무에 매어 놓는다는 것이다. 나귀는 전통적으로 메시아 임금님이 타고 오실 짐승으로 해석된다(즈가 9,9). “포도주로 옷을 빨고 포도의 붉은 즙으로 겉옷까지 빨리라”는 표현도 축복의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포도즙이 너무 풍부하여서 흙먼지에 뒤덮인 더러운 겉옷을 그 포도액으로 빨 정도라는 것이다. 옷을 빨 때 허비하는 물의 엄청난 양을 생각하면 이 표현이 상징하는 풍요로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눈은 포도주로 상기되고 이은 우유로 희어지라”는 표현은 축복받은 자의 빼어남과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이 유명한 구절들은 직접적으로 다윗 시대의 유다 지파에게 해당되는 신탁이지만,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따라 다윗 왕을 메시아의 원조로 볼 때 메시아 시대의 풍요로움을 노래하는 것으로 해석 해 오고 있다.
- 즈불룬은 지리적인 개념으로 해석되고 있다. 페니키아와 가르멜산 사이의 해안지방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즈불룬이 실제로 해변가에 살며 해상무역을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심쩍다. 오히려 이싸갈과 납달리 사이에서 살던 내륙 지방의 주민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여호 19,10-16). 판관기에 의하면 즈불론 부족은 바다에서 장사하는 일에만 골몰하며 부족들의 단합에 무관심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판관 5,17).
- 이싸갈은 힘센 나귀로 비유되고 있다. 나귀는 힘은 세지만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짐승이다. 게다가 게으르기까지 하다. 그래서 개척정신을 가지고 자유롭고 진취적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대신 오히려 요르단 강 북서 지방에 주저앉아 가나안 사람들에게 강제사역을 당하게 된다.
- 단은 유다처럼 힘이 세지는 못하지만 그 지략과 용맹에 있어서는 결코 다른 부족들에 뒤지지 않는다. 단에 대해서도 저자는 말장난을 하는데 ‘정의를 실천하다’ ‘심판’ 이라는 뜻의 야딘과 어근이 같다. 곧 단은 자신은 원수들에게 정의의 벌을 내리는 데 있어서 뱀이 자기보다 덩치가 큰 말이나 말 탄 사람을 물어 죽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은 부족으로 대우를 받지 못할 정도록 작은 도시 하나만 가지고 살았지만 승리에는 강했다.
“주님이시여, 나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는 필경사나 독자가 삽입해 넣은 구절로서 시편 중간에 끼워져 있는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다.
자식들에 대한 야곱의 축복 또는 예언을 보면 그가 자식들의 모든 과거와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 49, 19-33: 나를 네 선조들 옆에 묵어다오
이 성서 말씀은 앞 과에 이어 야곱이 죽기 전에 열두 아들들에게 남겨 준 예언과 축복의 말이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즈불룬, 이싸갈, 단에 대한 야곱의 신탁을 해설하였다. 이번에는 요셉을 위시하여 나머지 다섯 아들에 대한 신탁을 듣고 야곱의 마지막 유언을 살펴보자. 앞 과는 유다를 위한 야곱의 축복과 예언이 가장 장엄하게 소개되었고, 이 과에서는 요셉을 위한 축복과 예언이 강조되고 있다.
- 갓이라는 이름은 습격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데 실제로 요르단 강 동쪽에 자리 잡은 갓 지파는 동쪽과 남쪽에서 끊임없이 공격을 당했다(신명 33, 20-21). 용감한 가드족(역대상 12,9.15)은, 유목민족들이 트란스요르단 지방의 자기 영토를 동쪽에서 침입해올 때 그냥 지키지만 않고 나아가 공격했다.
- 아셀 지파는 갈멜 산과 페니키아 사이의 해변가에 자리 잡았는데 이 지역은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지중해변의 기름진 땅) 중의 하나이다(신명 33,24). “왕에게 진상하리라”는 표현은 아셀지파가 자기네 지역의 가나안 왕들을 섬겼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판관 1,32).
- 납달리 부족은 산악 지대에 살면서 재빠르게 이동하며 살았기 때문에 야곱으로부터 그 신속한 기동성에 대한 칭찬을 받았다.
- 요셉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그의 두 아들의 이름 밑에 형성된 에브라임 부족과 므나쎄 부족은 북왕국의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앞에서 우리는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나쎄를 야곱의 아들들과 같은 항렬에 올려 세운 사실을 기억한다. 야곱은 요셉과 그 후손에게 가장 풍요로운 축복을 내려준다.
“샘가에 늘어진 열매가 주렁주렁한 가지, 담장 너머 뻗어가는 가지”라는 표현은 요셉의 번영을 가리킨다. 요셉의 원수들이 아무리 그를 공격하더라도 그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요셉의 승리는 야곱의 강하신 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네 아비의 하느님, 그에게 복을 내리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하신 일이다. 이어 요셉에게 내린 여러 가지 복은 농업과 관계된 복이다. 첫째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땅에서 솟는 지하수, 둘째 가축과 인간의 풍성한 출산, 셋째 산과 언덕들에서 흘러내리는 축복들이다. 마지막 세 번째 축복은 산과 언덕에 살로 있는 신이 축복을 내려준다고 믿는 우가릿 신화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 시 전체 배경은 가나안적 색채가 짙다. 가나안의 소 숭배를 연상하지 못하게 이절에서 “소”를 “가지”로 바꾸었을지 모른다. 이 가나안인의 소 숭배는 후에 이스라엘 사람에게도 옮겨졌다. 신명기 33장 17절의 경우처럼 요셉의 아들 므나쎄, 특히 에브라임의 힘과 수의 강대함을 말한다.
- 마지막으로 베냐민에 대한 신탁에서 그를 “약탈하는 늑대”로 비유한 것은 이 부족이 호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여호 5,14; 판관 3,15-30). 성서에서 이 대목 이외에는 늑대가 긍정적으로 묘사된 적이 없다.
- 베냐민에 대한 야곱의 축복을 끝으로 열두 아들에 대한 그의 신탁이 모두 끝난다. 야곱의 신탁은 비록 그의 열두 아들들에게 죽기 전 축복의 형식으로 주어졌지만, 그 내용은 결국 신명기 33장에 나오는 모세의 축복과 판관기 5장에 나오는 드보라의 노래처럼 이스라엘의 부족전승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세 부족전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승인 드보라의 노래엔 가나안 정복에 가담한 즈불룬과 납달리 지파들을 찬양하고 이 정복에 가담하지 않은 르우벤, 아셀, 단 지파들을 비난하는 대목이 실려 있다. 모세의 축복은 후대에 발전된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경신례적 색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에 반해 야곱의 축복은 각 부족의 특성을 동물과 식물 및 자연환경의 특징에 비유하여 설명하면서 다분히 세속적인 업적을 바탕으로 부족들의 각기 다른 역사적 삶을 평가한다.
- 12지파에 대한 야곱의 신탁을 저자는 “이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인데 그들의 아버지는 이렇게 그들 하나하나에게 알맞은 복을 빌어 주었다”고 평가한다. 야곱은 아들들에 대한 축복을 끝내고서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야곱은 자신의 임종을 선친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야곱이 언급한 막벨라 동굴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사서 자신의 아내 사라를 안장시킨 곳이고 그 자신도 거기에 묻혔으며 야곱의 선친 이사악도 묻힌 곳이다. 창세기의 저자는 처음으로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와 야곱의 아내 레아가 여기 묻혔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야곱은 말을 마치고 아들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침상에 바로 누워 마지막 숨을 거둔다. 실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그였다. 그는 스스로 파라오 앞에서 고백했듯이 마침내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조상들의 땅으로 떠났다.
- 쌍둥이 중 동생으로 태어났고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 이사악으로부터 총애를 못 받은 불리한 삶의 조건을 안고서 야곱은 온갖 지혜와 성실한 노력으로써 자신에게 닥치는 온갖 역경을 헤쳐 나갔다. 특히 역경 중에서 언제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찾고 거기에 의존하면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풀어 나갔다. 일찍이 이사악으로부터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채긴 했지만 그 때문에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타향살이를 감수해야 했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의 생애는 축복과 장자권을 빼앗긴 에사오보다 훨씬 더 험난한 생활로 이어졌다. 임종시에도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진 이집트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한마디로 완전한 순례자였다.
창세 50: 하느님께서 너희를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다
이 장은 야훼계와 엘로힘 그리고 사제계 전승이 섞여 있다. 이 장의 전반은 야곱의 장례식을 이야기하고, 후반은 요셉의 전기의 결말이며, 저기 전체의 기초가 되어 있는 주제, 곧 “하느님의 섭리”가 강조되었다.
요셉은 죽은 아버지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운다. 죽은 시신에 입을 맞추며 슬퍼하는 장면은 성서에서 매우 드물게 나온다. 요셉은 야곱의 시체를 이집트의 장례풍습에 따라 미이라로 만든다. 이집트인들은 영혼의 미래의 안식처로 죽은 몸을 보존하려고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었다. 어떤 문헌에 따르면, 썩지 않게 방부처리를 하여 미이라를 만드는 데는 30일에서 70일이 걸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서 저자는 이와 같은 이집트 풍습에 아무런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집트 장례풍습 덕분에 야곱의 시체는 무사히 팔레스티나로 옮겨지게 되었다. 썩지 않게 하는 풍습은 근동의 유목민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통치자의 지위에 있던 요셉은 그런 영광을 누렸다.
- 요셉은 파라오에게 아버지가 자신에게 시킨 맹세의 내용을 보고하면서 아버지를 가나안에 장사 지낼 수 있도록 잠깐 이집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허락을 주십사고 청한다. 파라오가 쾌히 승낙하자 이집트의 문무백관들과 요셉의 온 집안과 그 형제들과 야곱의 집안이 모두 요셉을 따라 나선다. 이 화려한 장례 행렬은 몇 세기 뒤에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다 도망가게 될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 이 장례 행렬을 두고 요르단 강 건너편 고렌 아닷(타작마당) 주민들은 “이집트인들이 중대한 상사를 당했나 보다”하고 촌평했다. 여기서 이곳 지명이 아벨미스라임, 곧 ‘이집트인들의 애곱 행렬’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므레의 막벨라 동굴이 요르단 강 건너에 있다든가 그 동굴에 무덤을 파놓았다는 이야기는 이 대목에서만 나온다. 아마도 저자가 이용한 독립된 전승의 흔적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일반적으로 칠일 동안 곡을 하였다.
-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후 형제들은 서로 모여 요셉이 자기네들에게 당한 온갖 억울함을 보복하려 하지 않을까 염려한다. 형제들은 처음으로 요셉의 용서를 공식적으로 청하는데 아버지의 당부말씀을 곁들인다. “형들이 악으로 한 일이건 어떻게 마음을 잘못 먹고 한 일이건 못할 짓 한 것을 용서해 주어라. 네 아비를 돌보시던 하느님의 종들이 비록 악의에 찬 일을 했지만 용서해 주어라.” 야곱이 이와 똑같은 말을 했는지 아니면 중간에서 형제들이 덧붙였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인용해 가면서 요셉에게 용서를 청하는 형들의 진정으로 뉘우치는 마음이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을 형제들에게 드러냈을 때처럼 운다. 아직도 형들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가?
- 형들도 울며 ‘우리를 종으로 삼아 다오’하고 비굴하게 청한다. 요셉은 그들의 잘못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형들의 잘못 뒤에 높은 분의 뜻이 숨겨져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형들의 과오를 심판할 자격도 처벌할 도 없음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형들의 잘못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방향으로 바꾸어 놓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형들뿐만 아니라 형의 자식들까지도 잘 돌봐 주겠다고 약속한다.
- 존경받는 노년과 후손의 번영은 구약성서의 축복설화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요셉이 죽을 때의 나이 백십세는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나이, 천수를 누리는 나이였다. 야곱이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나쎄를 양자로 삼아 자기 아들들 항렬에 올려 놓았듯이 요셉도 므나쎄의 아들 마길이 낳은 아이들을 자기 무릎에 받아 양자로 삼았다. 요셉은 모든 친척과 후손들을 모아 놓고 “나는 이제 죽을 터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어 이 땅에서 이끌어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땅으로 올라가게 하실 것이다”고 예언한다. 요셉의 이 말은 몇 세기 뒤에 올 히브리인들의 출애급 사건에 대한 신탁이다.
- 마지막으로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의 시신도 약속의 땅에 옮겨 주도록 요청한다. 그의 요청은 형제들의 후손들에 의해서 수행될 것이다(여호 24,32). 약속의 땅으로 가서 묻히시길 기다리는 요셉의 시신은, 마침내 이루어질 이집트 탈출의 표가 되었다. 성조들의 이야기는 이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 곧 약속된 땅 팔레스타니를 향해 열린 희망 속에서 끝난다.
창세기는 천지창조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성조들의 이야기가 끝나기까지 인간의 구원을 갈망하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방적인 초대를 거절하거나 받아들이는 인간이 펼치는 대드라마의 기록이다. 이 드라마는 수많은 신화와 설화와 민담, 상징과 표상과 시어들을 통하여 인간과 하느님에 관한 영원불변의 진리들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 안에서 인류의 선행과 죄악, 용기와 좌절, 희망과 절망, 순례와 방황의 발자취를 만나며 이런 복잡한 인간사들에 민감하게 반응해 오시고 인간의 모든 것을 당신 안에 귀결시키고 완성시키심으로써 총체적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만난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296-308.
창세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197-207.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구약성서 주해집, 페데리코 바르바로, 크리스찬
출판사,1986, p.419-431.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85-86.
오경, 성서와 함께, 영원한도움 성서연구소 편저, 2006,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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