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과 기도
시편은 전체적으로 기도다. 물론 엄격한 의미의 기도가 아닌 시편들도 있다. 그러나 시편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시편 전체가 결국에 가서는 하느님께 향한 말씀이 된다. 그래서 시편을 이해함은 시편을 자기의 기도로 만듦이다. 시편을 가지고 진정으로 기도할 때 비로소 시편을 이해해나갈 수 있게 된다.
“눈물과 함께 빵을 먹는 자가 아니고서는 생의 맛을 모른다.”고 독일의 문호 괴테가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시편과 기도의 관계에도 간접적으로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시편이 나의 기도가 될 때 나는 비로소 시편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시편 집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이때 시편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시편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시편은 우리가 진실 되게 기도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기도하는 법을 배움에 대해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란 단순히 가슴에 있는 것을 내 비우는 것이 아니라, 꽉 찬 마음, 또는 텅 빈 마음과 함께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찾고 하느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시편을 들고 기도할 때 시편은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곧 내가 단순히 읽거나 봉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도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면, 전혀 낯선 언어와 문화와 인종과 사람들의 이야기, 때로는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표현들(울부짖음,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공포, 원수들을 향한 다듬어지지 않은 거의 원시적인 언어들 등등) 또는 시편의 내용상 불평의 여지가 있음도 사실이다(너무 현세적, 너무 국수적, 윤리와 종교심성이 아직 덜 성숙해 있음 등).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첫째, 시편은 본디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문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내포하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불변의 것들이 있다. 그들이나 우리나 동일한 하느님 앞에 선 같은 인간들이다. 이러한 공통분모 위에서 볼 때 둘 사이의 차이는 결코 크지 않다. 둘째, 시편은 시(詩)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시적인 표현들에 유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시편은 첫째,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집중적으로 확대해서 인간을 드러내 보인다. 시편에서 인간의 고찰은 그 깊은 뿌리까지 다다른다. 둘째, 인간은 하느님과 직접적인 대면에서 그분께 대하여 근원적이고 철저한 결단을 내려야하며, 시편은 이러한 ‘마지막’결단을 내린 사람이 하느님께 드리는 말씀이다. 셋째, 감사시편과 탄원시편에서는 고통과 고난, 삶과 죽음이 문제다. 하느님께서도 지금 여기에서 이 문제에 대한 최종적 결단을 내리시고 행동하셔야 한다. 특히 탄원시편은, 다음이나 내세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지금 이 종말론적 행동을 요구한다.
시편 안에서 하느님의 ‘복수’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구약의 하느님은 복수의 하느님, 신약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주장된 바 있다. 그러나 맞지 않는 말이다. 하느님께선 구약에서도 사랑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심판자시다. 심판의 성격이 배제된 사랑의 신학은 하느님을 일방적이고 나약한 하느님으로 만든다. 구원은 하느님의 인격적인 판단을 통해서 주어지며, 이 판단은 동시에 심판이다. 하느님의 ‘복수’라는 것은 이 심판의 부정적인 면이다. 심판과 구원은 한 동전의 두 면과 같다.
시편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유혹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시편의 원수와 나의 적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시편을 나의 적에 대한 기도로 사용할 수 없다(예: 109 참조). 시편 집에 엄밀한 의미에서 ‘저주시편’은 없다. 곧, 다른 사람을 저주하기 위한 목적으로 씌어진 시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시편에는 저주와 비슷한 말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저주의 말들은 심판자 하느님께 대한 간청의 한 변형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항상 현실적인 삶의 영역, 구체적인 삶에서 나오는 감정 그대로의 목소리임을 생각해야 한다. 기도가 자기의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펼치는 것이라면 이러한 현실을 도외시해서는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표현이 이상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기도를 통해서 이 것들도 기도자와 함께 순화, 정화되는 것이다.
시편을 가지고 기도할 때 두 번째 유혹은 이른바 ‘걸림돌’로 여겨지는 부분, 특히 원수들에 대한 과격한 언어들 없애거나 부드럽게 만들고 싶어 하는 생각이다. 시편의 이러한 과격한 언어는 결국에 가서는 죄와 악에 대한 미움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움 뒤에는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그리고 취향과 상황에 맞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취사선택이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의 구미에 맞지 않는 구절들이라도 그대로 놔두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을 배워나가야 한다. 설사 지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후에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함께 그대로 두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하느님의 말씀에 맞추어나가야 한다. 그 반대, 곧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에 맞추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서는 일부분만이 아니라 전체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없다. 하느님께선 시편에서도 그 전체를 통해서 우리와 대화하고 싶어 하신다. 시편은 하느님과의 만남에 기초를 둔 하나의 대화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역시 시편으로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만난다. 시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하고, 시편을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한다. 이것이 시편에 나타나는 만남의 성사적 성격이다. 역사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성사적 행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재현하고, 이 재현되는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 뵙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편 영송은 근본적으로 성체성사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시편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만나는 것이다.
시편을 가지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 자신을 시편작가와 동일화해나가야 한다. 물론 여기에 따른 심리적 어려움도 있다. 내 자신을 시편작가와 동일화하기 위해선 나의 좁은 세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시편작가는 자기의 생각만이 아니라, 자기의 감정과 정서, 그리고 자기 자신 전체를 전하고자 한다. 탄원시편을 기도하면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겪지 않았던 고통의 문제에 간접적으로 직면한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서 나는 나의 밖에 있는 고통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고통을 겪는 시편작가의 정서, 감정 등을 내 안에서도 일깨우게 된다. 이로써 고통 받는 사람 전체가 나에게 부각되고, 고통 받는 이의 인격이 나의 인격 안으로 들어온다. 또한 기도의 연대성을 통해서 시편작가로 대표되는 고통 받는 이들과 나 자신이 동일화를 이루어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밟아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시적 언어다. 시적 언어의 중심은 거기에 사용되는 이미지, 은유, 상징 등이다. 이 은유 또는 상징적 언어가 주는 이미지는 시공을 초월한 그 무엇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시적 언어의 특성과 장점 뒤에는 물론 언어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언어 자체가 불완전한 의사 전달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편으로 기도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시야와 전망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한다. 우리 속에 잠재해 있지만 흔히 간과하며 살고 있는 것들에 눈을 돌리고 시편작가와 함께 우리 자신을 하느님 앞에 세워야 한다. 나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내 생애, 나의 존재 전체를 하느님 앞에 세워야 한다. 이것이 시편 기도에서 요구되는 내적 전망의 확대다.
시편으로 기도할 때 이런 내적 전망의 확대만이 아니라, 우리의 외적 시야와 외적 전망의 확대가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시편의 공동체성이라 할 수 있다. 이 공동체성은 세 가지 측면에서 드러난다.
첫째, 시편작가들 자신이 항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기도드렸다. 감사-찬양시편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기도, 곧 개인 탄원시편에서도 거의 항상 공동체성이 드러난다. 시편의 기도자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대표자로서(설사 제도적인 대표가 아니더라도) 이 공동체를 항상 염두에 두면서 기도했다. 악인들의 행복과 자신의 불행 속에서 시편작가는 신앙의 위기에 처했다. 정의의 하느님, 심판의 하느님께서 진정 역사하고 계신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하느님을 믿고 거기에 따라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지, 헛된 일인지 회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 유혹에 대한 첫째 보루가 하느님의 강렬한 실존 체험이 아니라, 바로 “당신 아들들의 모임”, 곧 신앙 공동체와의 연대의식이었다. 신앙의 형제들을 배반하는 것이 되겠기에 신앙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이렇듯 시편들이 공동체로부터, 공동체와 더불어, 공동체를 위한 기도였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편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을 나타낸다면, 이 인간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존재일 수 없다. 인간은 그 개인의 가장 깊은 뿌리에서부터 공동체적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선 이스라엘이라는 한 공동체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성성 전체를 통틀어 개인을 위한 개인의 부르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을 부르심은 예외 없이 공동체를 위한 부르심이다.
시편은 이렇게 그 형성 단계에서 이미 공동체적이다. 그리고 시편은 동시에 역사적으로 항상 공동체의 기도였다. 역사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시편의 기도로써 이른바 ‘성인의 통공’이 이루어진다. 비록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있지만 같은 시편으로 같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께는 시공의 차이가 없다. 그래서 시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한다. 시편은 결국 예수의 기도다. 이 기도의 절정이 십자가상에서 시편 22으 첫머리를 부르짖으면서 드린 기도라 할 수 있다. 이 밖에서도 직간접으로 다수의 시편들을 여러 번 인용하신다. 시편의 기도자는, 신약성서와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볼 때, 바로 예수라 할 수 있다. 이 예수께서 인류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 공동체를 위해 전 인류와의 연대성 속에서 모든 인간의 고통을 짊어지고 기도드리셨다고 할 수 있다. 신약의 공동체가 시편으로 기도드린다거나, 성무일도를 바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은 시편의 그리스도론적 이해와 그리스도론적 기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다. 시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또한 거의 2000년을 이어오는 교회 공동체와 함께 기도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공동체와 함께 이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시편을 가지고 기도함으로써 이렇게 종적인 공동체성이 드러난다. 동시에 횡적인 공동체성과 연대성 속에서 기도해야 한다. 비록 자신은 어려움을 모르고, 고통을 겪지 않더라도 다른 형제자매들, 그리고 온 인류의 고통에 동참하고 함께 나누며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 역시 예수와 같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기도는 종교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기도에서 사랑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 신심은 그리스도적이 될 수 없다. 곧, 기도는 사랑의 기도, 남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한다. 그것이 간청의 기도든, 감사의 기도든 마찬가지다. 남을 위한 기도만이 아니라, 남과 함께 드리는 찬미가 시편집의 원 의도임을 우리는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시편집은 전체적으로 찬미가집이다. 찬미가에서 공동체성이 거의 완벽하게 드러난다. 시편집의 맺음말이라고 할 수 있는 시편 150편에서도 이를 뚜렷이 볼 수 있다. 이 마지막 시편은 모든 존재가 다 같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다. 이렇게 우리는 역사적으로 모든 이들과 함께, 그리고 현재의 모든 이들과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모든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찬미 찬송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시편은 공동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곧 형성 단계의 공동체성, 역사적(종적) 공동체성, 그리고 현재적(횡적) 공동체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동체성 안에서 시편을 가지고 기도드려야 할 것이다. 내가 시편을 가지고 하느님께 기도드릴 때 나는 시간적 역사적 존재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시편은 인간의 기도면서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시편은 그래서 우리 기도의 영원한 원천이다. 넘쳐흐르는 영원한 샘물이다. 샘물을 함께 마신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이 샘물에서 물을 마실 때, 시편은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우리 자신의 기도, 우리의 하느님과의 대화가 되어나갈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하느님과 공동체를 이루는 도구다. 결국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이며, 하느님을 닮아가는 여정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스스로 거룩하게 행동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한다”(레위 11,44)고 하신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활성시키는 긴 여정이다. 이 길 위에 여러 기도들이 있다.
- 당신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299-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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