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27(26):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의 기도

마리아 아나빔 2011. 9. 13. 11:37

 

                                

                                      시편 27(26):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의 기도

 

 

들어가면서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 것인가? 이 시편은 신뢰에 찬 기도다. 불의하게 고발당한 시편작가가 성전의 법전에 호소한다.

 

    시편 27은 상당히 다른 두 가지 감정에서 생긴 두 기도로써 성립된다. 첫째 기도는 기쁨과 빛의 분위기에서 솟아나온 신뢰의 아름다운 노래이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힘이시며, 시편 작가는 그것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다. 여기에 있다면 어떤 적에 대해서도 어떤 싸움 가운데 있을지라도 절대로 틀림없이 보호를 받는다. 즉 주님 곁에 있으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시편 작가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하나 “살아 있는 한 계속 주님의 집에 살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며 그 성전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실제로 주님은 성전에서 신자에 대하여 보호를 주시고, 적에게 대항할 힘을 주시고, 그것에 대하여 작가는 성전 안에서 아무런 근심 없이 주님께 기쁨의 제물을 바칠 수가 있다.

 

  둘째 기도는 적에게 쫓기며 그 성전에서 주님의 얼굴을 찾고자 하는 사람의 청원과 탄식이다. 부모가 자신을 버릴지라도 하느님은 자신을 거두어 주시기를 간청한다. 기원은 온갖 시련을 이기게 한 신앙에 대한 칭찬으로 끝난다. “야훼를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야훼를 기다려라”(11-14).

 

그러나 이 시편의 두 가지 기도에 공통된 주제는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한없는 신뢰이다. 그것은 또 모든 것을 들어서 하느님과 오실 메시아를 향하고 있는 이스라엘 전역사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Text 안에서

 

1-3: 하느님 및 당신 계획에 대한 신뢰는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당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어러운 상황에 의젓하게 대처하도록 힘과 용기를 준다.

4-6: 성전은 하느님의 집인 동시에 당신 백성의집이기도 하다. 성전은 정의와 평화가 깃드는 성스런 공간이다. 이 공간은 오늘날 하느님의 계획에 몸바치고 있는 공동체들 자체다.

7-14: 아침 일찍 심판이 내려지기 전, 시편작가는 두려운 밤을 체험한다. 그의 운명은 오로지 하느님께 달려 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버렸다. 그런데도 그는 사제의 말에 힘을 얻어 희망을 굳게 간직한다.

 

- 2정: 직역하면 “내 살을 먹으려고”로, 파멸시킴을 뜻한다.

- 4절: “야훼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며” 히브리어로 아름다우심은 “인자하심, 아름다움, 자비”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원수들에 대해서 우세함과 승리를 뜻한다.

- 8절: 본래 성서에서는 주께 의향을 묻는 것을 말했으나(2사무 21,1), 후에는 “하느님을 알고 그분 앞에서 살며 충실히 섬긴다”라는 뜻으로 쓰게 되었다.

- 나팔소리가 동반되는 전례적(감사) 환호와 함께 드려지는 번제이다.

 

 

1. 성 아우구시노는, 이 시편에는 우리의 비참한 외침과 우리의 괴로움에 대한 탄식의 소리가 울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자비가 깊으신 주님께서는 성령에 의하여, 이 말씀을 가르치시어, 우리를 위로하고자 하셨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안에 사심으로써 주께서는 이 말씀을 노래하는 우리 소리를 쓰시어 아버지께 우리를 간청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자비와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으로써 우리 탄식의 외침은 하느님께까지 이르렀다.(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주해 26,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어둠에서 빛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인류의 머리로서 당신께서 언제나 누리고 있는 것 곧 아버지의 집에 사시고 그 단맛을 맛보시는 것을 우리를 위해서도 청하신다(4). 지금 곧이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통하여 아버지와 당신과 일치할 가능성을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악에서 지켜 주시고(5-6), 가장 무서운 적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당신 부활 때와 같이 우리들도 머리를 든다고 하는 기쁨을 나누어 주신다.(6)

 

    수난절의 전례는 이 시의 둘째 기원을 그리스도의 소리로 듣는다. 거짓증인이 부정하게 그리스도를 고소하기 위하여 일어섰 때(마태 26, 59-60; 마르 14, 55-56),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적에게 맡기지 않도록 원하셨고, 주께 희망을 거시고 죽은 후, 살아있는 사람의 땅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볼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으셨다(13).

 

 

2. 초대 교회에서는 이 시편을 이사야의 예언(이사 65,13)의 실현으로서 새로 세례를 받을 사람에게 자주 외우게 하였다.

 

     세례를 받는 것은 실로 “야훼께서 나의 빛, 나의 구원”(1)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세례는 이 시에 나타나 있는 소망을 실현한다. 세례 받은 사람은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에페 2,19)이 된다. 신자는 교회에 살며 미사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또 모든 신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승리를 의미하는 찬미의 제물을 바칠 수 있다.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은 신앙이라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고, 주님의 얼굴을 찾아 구하며(8) 그리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보다 큰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할 수 있다(10). 끝으로 신자는 어느 날엔가 살아있는 사람의 땅에서(13), 이 세상의 어둠 가운데서 찾고 구한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있으리라.

 

또한 교회는 예수님의 기도에 격려되어 시편 27로써 직접 그리스도를 항해 기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빛이며 구원이며 생명과 힘이시다. 그러니까 적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회개한 자의 소리를 가지고 교회는 사순절 초에 그들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고 그리고 화해하여 그 우정의 단맛을 맛보도록 기도한다.

 

신자를 위하여 교회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삼위일체와 더욱 더 밀접하게 일치하도록 청한다. 전례는 이 시편의 기도가 나타내고 있는 하느님과 일치라는 이상을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보는 것이다.

 

     지상에서 보내는 교회의 생활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얼굴의 끊임없는 탐색이다.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새롭게 하는 교회의 시련과 박해 안에 있어서도 교회의 탐색을 인도하고 격려하신다. 신앙은 또 성서를 통하여 또 전례 행사를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 위에 그리스도의 얼굴을 분별하도록 격려하고 돕는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주로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얼굴은 그 수난과 죽음의 얼굴, 곧 시달린 사람,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이시다. 그렇지만 교회의 종말의 소망은 지복직관이다. 그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3. 이 시편의 첫째 기도에 나타나 있는 신뢰, 안심, 밝음, 기쁨의 감정, 또 둘째 기도에 있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가져다 주는 위로의 감정은 성령강림 후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의 열매이다(갈라 5,22; 1데살 1,6; 로마 14,17).

 

     성 바오로는 이 시편의 첫 세 구절에 있는 사상을 부연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다?...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 31-32, 35, 37)

 

  우리는 이 시편의 말씀에서 영적 적에 대하여 싸우기 위한 힘, 하느님의 은총 안에 살기 위한 용기, 또 그리스도께 사랑받는 자로서 지니는 기쁨을 얻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해설판 공동번역 성서, 일과놀이, 1995, p.950-952.

                당신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87-118.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80-83.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217-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