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0(29): 개인 감사시편
들어가면서
시편 30(29)은 생명이 걸린 위험에서 구원된 감사의 마음을 노래한 시편이다. 시편작가의 생명은 무덤 가까이까지 가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음에서 구하셨다. 그래서 시편작가는 “야훼께 믿음 깊은 자들”인 자신의 친척과 벗을 자신과 함께 하느님께 감사하도록 부른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그의 진노는 잠시뿐이고 그 어지심은 영원하시니,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
시편 작가는 시편의 제2부에서 자신의 몸에 일어난 것을 설명한다. 행운이었을 때 우쭐하여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시련을 만나서 힘이 쇠하고 헤매었다(6-7). 그래서 하느님께만 신뢰를 가져야함을 알게 되고, 죽음에서 구원받도록 그분의 자비에 의지하였다(8-10). 주님께서는 작가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다. 그래서 그는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고 싶다(11-12).
Text 안에서
시편 30편을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여러 가지 대립관계 및 전환 내지 변화를 볼 수 있다. 먼저 장소의 이동 안에서, 한쪽은 저승과 구렁 등 땅 밑으로 생각되는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는 이동을 말하고, 다른 한쪽은 이러한 죽음의 서계에서 들어올려지는, 곧 되살려지는 이동을 그리고 있다.
하느님의 진노 또는 의노는 한때나 하느님의 호의는 영원하다. 저녁 또는 밤은 상징적으로 어둠의 시간, 고통과 불행의 시간을 나타낸다. 그러나 동시에 아침을 향한 시간이며 여명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 아침은 빛의 시간이며 구원의 시간이다. 시편작가는 이 구원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고 한다.
이러한 기도자의 상태는 한쪽은 슬픔(울음, 비탄, 자루옷)이고 다른 쪽은 기쁨(환호, 춤, 기쁨)이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옮아간다. 하느님의 진노는 인간에게 고통과 고난을, 그리고 그분의 호의와 자비는 인간의 구원과 행복을 의미한다.
소리에 있어서, 이 둘은 대구법적 표현이다.(잠잠하지 않으리이다/ 찬송하리라) 곧 침묵하지 않음과 찬미함은 서로 동의어다. 동시에 침묵과 찬미는 반의어다. 고통의 시간은 침묵의 시간이며, 고통의 소리는 침묵의 소리다. 반면에 찬미의 시간은 노래의 시간이며, 찬미의 소리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나 하느님께나 본연의 소리이다.
이 외에 동사들에서도 대립관계를 볼 수 있는데,(부르짖다/ 찬미노래부르다, 간청하다/찬송하다, 듣다, 불쌍히 여기다/ 노래하다, 구원자가 되다/ 찬송하다) 이 대립되는 동사들의 두 그룹은 시편 기도자의 행동과 그가 하느님께 드린 청을 말한다. 이 둘의 중간에 자리하여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시키고 변화시킨 것은 하느님의 행동이다.(원수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다. 낫게 하다. 건지다. 살리다. 그리고 12절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다. 자루옷을 풀다. 기쁨으로 띠두르다 등.)
원초적 대립: 죽음과 삶
이렇게 시편 30편은 여러 가지 대립관계 및 그들의 극적인 변화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여러 가지 대립관계를 포괄하는 원초적인 대립은 죽음과 삶이다. 죽음의 영역이고 다른 쪽은 삶의 영역이다.
이 시편에서 ‘죽다’ 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직접 쓰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어로 표현되어 있다. 즉 저승-구렁-피-구렁이로 떨어지다-먼지 등. 죽음이란 숨이 멎는 순간, 또는 뇌의 작동이 그친 그 순간에 비로소 시작되는 상태가 아니다. 죽음은 생명과 공존한다. 공존하면서 생명의 적대 세력으로 생명을 위협한다. 죽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못살게 하는 힘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시편 작가가 죽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의 힘에 휘말려 있었다. 죽음의 세력 밑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죽음의 세력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 중의 하나가 아픔 또는 병이다.
그렇다면 시편작가는 병을 앓다가 나음을 받았는가?(“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께 애원하자,/ 당신께서 저를 낫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단순이 질병만 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또한 ‘병’은 병자의 몸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선 종교적 차원이 있다. 고대인들은 병을 다분히 병자가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병자=죄인’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만일 병자 자신이 병을 앓을 만큼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주위 사람들의 ‘유죄 판결’과 병자 자신의 ‘무죄 주장’으로 인해 커다란 갈등이 유발될 수도 있다. 병은 사회적 차원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영위해왔던 환경으로부터 격리되어 혼자 있게 됨으로써 때로는 육체적 고통보다 심리적, 정신적 고통이 더 크기도 하다.
어쨌든 시인은 이제 하느님의 개입으로 온전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이 생명의 표지, 표식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찬송이다. 이 말을 거꾸로 한다면 죽음과 죽음이 세계에서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개념 중의 하나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생각이 그들을 괴롭혔다. 죽은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죽음이 하느님께도 이익될 게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시편작가는 고통 중에 이렇게 부르짖기도 했던 것이다.: 저의 피가 무슨 이득이 있나이까, 제가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이? 먼지가 당신을 찬송할 수 있으며 당신의 진실을 알릴 수 있나이까?(10절).
삶의 근원이신 하느님
이러한 죽음에서 삶으로의 전환을 이루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이 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시편작가는 자기 고통의 근본적 원인도 하느님이시라고 생각한다.
“ 제가 평안할 때 말했나이다.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 주님, 당신 호의로 저를 튼튼한 산성에 세우셨나이다. 당신께서 얼굴을 감추시자 저는 겁에 질렀나이다.”(7-8)
여기에서도 하느님께서 얼굴을 마주하실 때 사람에게는 구원이고, 하느님께서 얼굴을 돌리실 때 사람에게는 불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하여야 할 바는 이 또한 인간 쪽에서의 생각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 얼굴을 돌리셨기 때문에 자신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드물기는 하나, 하느님께서 당신 얼굴을 감추시라는 청을 하기도 한다. 예로서 시편 51,11을 들 수 있다.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감추시고 저의 모든 죄를 지워주소서.”
다시 하느님의 역할로 돌아가서, 탄원시편에서 갖는 원수들의 역할이 미미한 것이다. 이 말은 원수들이 시편작가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원수들이 기도자의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들은 기도자에게 온갖 나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근 것의 뿌리에서 볼 때, 곧 하느님과 관계에서 볼 때, 그들이 역할이란 결국 하찮을 수밖에 없다. 감사시편에서 갖는 그들의 역할은 더욱더 그러하다. 시편 30에서는 그들에 대해서 2절 3행에서 단 한 마디를 할 뿐이다.
기도자-하느님-원수의 삼각관계에서 주축이 하느님과 시인의 관계라는 것은 탄원시편과 마찬가지로 감사시편에서도 해당된다. 이 하느님과 기도자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능동자, 절대적인 행동자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주인이신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응답: 찬미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은 찬미와 찬송이다. 이것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근본적인 자세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리이다”(13절 2행). 시편집에서 ‘영원히’와 같은 시간 부사가 쓰이는 것은 대부분 찬미를 위해서이다. 이는 객관적인 시간으로서 영원이 아니다. 찬미 주체가 시간으로서 영원이다. 계속해서 살아 있는 한 끝없이 하느님께 찬송드리겠다는 말이다.
예) “당신의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리이다. 당신 이름으로 제 두 손을 들어올리리이다.”
찬미의 공동체
끝으로 찬미는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적 일이다. “주님께 찬미노래 불러라, 그분께 충실한 이들이여/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 하여라” 설령 처음에는 개인적인 일이었을지라도 결국에는 공동체적인 일이 된다. 그리고 개인적인 일일지라도 특히 감사와 찬미에는 복음 선포적인 성격이 항상 들어 있다. 감사드리고 찬미 드리는 일은 항상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전하고 선포하겠다는 말, 공동체와 함께 감사드리고 찬미 드리겠다는 말이 되풀이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때로는 모든 사람들이, 더 나아가서 온 세상을 부르면서 함께 감사와 찬미 드리자는 말이 자주 나온다.
구약성서의 종교에는 개인주의 또는 공동체와는 별도의 외톨이가 아니라 언제나 공동체의 구성 요원으로서 한 개인이었다. 예를 들면 구약성서에서 소명을 받은 이들은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하여 불리움을 받았다. 모세, 판관들, 예언자들, 임금들이 그러했고, 신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시편작가들 또한 탄원시편에서 감사시편에서건 항상 자기들의 공동체(크게는 이스라엘 공동체, 작게는 신앙 공동체)를 의식하면서, 그 공동체의 대표자로서(비록 제도적 대표가 아니더라도) 공동체와의 일치 속에서 탄원하였고 감사드렸으며 찬미 드렸다.
또 다른 Text의 해석 안에서
- 이 시편의 제목(“성전 봉헌가, 다윗의 노래”)에서 보면 이스라엘을 재건된 성전의 봉헌을 이 기도로써 축하하였다. 그 때에는 이 시편은 포로로 잡혀 흩어지고 전멸에 가까웠던 이스라엘 백성의 부흥을 위한,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였다.
- 교부들과 전례의 전통을 일치하여 이 시편은 그리스도 부활의 예언을 보고, 따라서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신 후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대한 감사로 간주하고 있다.
전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신다. “주여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야훼, 나의 하느님, 살려달라 외치는 내 소리를 들으시고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 주셨습니다. 아훼여, 내 목숨 지하에서 건져 주시고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자들 중에 살려 주셨습니다.”
성토요일의 저녁이 눈물로 저물었다고 하면 부활의 아침은 기쁨의 외침으로 시작되었다(5).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슬픔을 감사의 노래로 바꾸어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입으신 인간성의 덧없음을 풀으시고 불멸의 생명의 기쁨을 입혀주셨다.(성 아우구스티노 주석)
- 죽음으로부터 구원 받은 사람의 기도인 이 시편은 그리스도의 기도라고 볼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속죄를 가져다주기 위해서 우리의 약하고 덧없는 육체를 취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신비체인 교회가 기도한다고 교부들은 가르친다. 실제로 우리 모두 아담을 통하여 자신이 힘을 우쭐거리고 교만의 희생자가 되었다(6). 우리는 공포에 해매고(7). 그리고 죄는 우리에게 올가미를 씌웠다. “낙원에서 정의의 태양이 옷을 입으셨다.”
그러나 이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우러 오셨다. “그분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약한 자가 되셨다. 약한 자인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그리고 사람을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하여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 중재자가 되셨다(아우구스티노 시편주해 30: 6-12).
지금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교회가 기도한다. 그리고 이 시편의 제목에 구태여 구애받지 않는다면, 이 감사의 노래는 정녕 그리스도라고 하는 기초 위에 선 하느님의 새로운 성전의 봉헌을 기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편의 기도를 가지고 교회는 사순절을 시작한다. 부활로 가는 영적 나그네길의 첫발을 디딤에 있어서, 교회는 이 시의 말씀에 나그네의 종점을 바라본다.
“야훼여, 나를 건져 주셨사오니 높이 받들어 올립니다.
원수들이 나를 보고 깔깔대지 못하게 되었사옵니다.
야훼, 나의 하느님, 살려달라 외치는 내 소리를 들으시고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 주셨습니다.”
“야훼여, 이 애원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
야훼여, 부디 도와주소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를 악의 힘에 이기게 하시고, 그리고 되살아나신 주님과 함께 저승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인류를 죽음에서 해방하신다(2-3).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눈물을 영원한 생명의 기쁨으로 바꾸고, 슬픔을 감사의 노래에, 덧없는 생명을 불멸의 생명으로 바꾸신다(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되살아나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굳히고, 도우심과 은총을 얻는 것이다(8-10).
그래서 우리는 시편작가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진노는 잠시뿐이고 그 어지심은 영원하시니”(5)라고. 현세는 저녁노을과 같아서 눈물에 찬 것이지만, 그러나 새로운 일몰이 없는 날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그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록 21;4).
처녀 마리아는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은총의 이 날 속에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무원죄의 축일의 전례는 성모의입으로 이렇게 말하게 한다. “야훼여, 나를 건져 주셨사오니 높이 받을어 올립니다. 원수들이 나를 보고 깔깔대지 못하게 되었사옵니다”(1)
- 그러나 시편작가가 체험하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자신의 경험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흔히 있는 일이다.
우리는 재산과 건강의 은혜를 입고하는 일마다 성공하면 흔히 자신만만하여 우쭐거린다. 이리하여 하느님께 대한 신회는 약해지고 현명함을 잃고 때로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야고보 서간에서 말하듯 “당신들은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일, 저런 일을 해 보겠다고’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지금 허영에 들떠서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담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야고보 4, 15-16).
이러한 때에는 우리에게도 이 시편 작가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주께서는 그 얼굴을 감추신다. 곧 시련이라든가 병, 파산 혹은 죄가, 덮히고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무지와 만나 방황한다(7). 주님께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두시는 것은 사랑 때문이며, 우리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주께서는 또 얼굴을 나타내시고, 이 시편이 노래하고 있는 기쁨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다. 참으로 하느님이 없는 생명에는 기쁨이 없다.
시편 작가와 함께 우리는 생애에 일어나는 여러 가시 시현의 참뜻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히브 12,6)” 드시지만 한편 “그의 진노는 잠시뿐이고 그 어지심은 영원하시기”(5) 때문이다.
※ 참고문헌: 당신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P.155-167.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87-89.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227-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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