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33(32): 하느님의 창조력과 섭리

마리아 아나빔 2011. 11. 24. 12:01

 

 

 

                                               시편 33(32): 하느님의 창조력과 섭리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하느님의 창조력(전능)과 섭리를 기리는 시편이다. 그러면서 악기의 반주로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바치라고 옳은 사람들에게 권한다. 깨끗한 마음을 가진 옳은 사람은 성실하고 정의로우신 좋은 분이신 하느님께 가장 합당하게 노래할 수 있다고 말한다(1-5).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것은 그분의 전능한 말씀으로 하늘을 만드시고 그분의 입김으로 하늘의 군세를 형성하시고 바다와 대양의 물을 뭉치셨기 때문이다(6-7).

 

    땅에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계획을 지니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껶으시며 사람의 역사를 지도하시는 주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가장 사랑을 받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복을 기린다(8-12). 주님께서는 이 세상 만민을 아시고(全知)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며 저마다 한 인간의 행적을 유의하신다(13-15).

 

   왕과 용사들은 자기네의 세력을 의지하지만, 실제로 구원과 승리를 주시는 이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지켜주시고, 죽음에서 구해 내시고 기근 때에 살려내신다(16-19). 이런 고찰을 하고나서 시편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새롭게 하는 이스라엘의 기도로 끝난다(20-22). 이 시편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하느님의 온갖 개입의 암시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시편의 편집시기를 결정할 수 없다.

 

 

Text 안에서

 

이 시편에 대한 Text 연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석을 따라본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가 하느님을 마음에 들어 한다.

 

   이 시편은 첫 머리부터 주님 안에 환호하라고 타이른다. 시편에는 “같은 다윗의 시”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다윗의 거룩한 집안에 드는 사람들이라면 그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 마땅하고 그가 하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주님 안에서 환호해야함이 마땅하다.

 

   시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 환호 하여라” 악인들은 이 세상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고 세상이 끝나고 나면 그들의 즐거움도 끝을 고할 것이다. 그 대신 의인들은 주님 안에 즐거워한다. 주님은 영원히 계시고 그들의 즐거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환호하자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전혀 없는 분은 주님뿐이시지만,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그토록 많을 수가 없는 분이 또한 주님이심을 전제해야 한다. 즉 하느님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맞서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하심보다는 자기 뜻하는 바를 먼저 이루고자 하는 자들은, 하느님을 꺾어서 자기 뜻에 따르시게 만들려고 하며, 자기 뜻을 바로잡아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의인들아, 주님 안에 환호 하여라!”는 말에서 “올바른 이들에게는 찬양이 어울리도다”라는 말씀을 덧붙인 것이다. 주님 안에 환호하자면 찬양으로 하여야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 마음에 드시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주님의 마음에 들고자 찬양을 드리는 연고이다.

 

   이러한 마음은 일단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가 다른 것임을 깨닫고 인식하고 나면 자기 뜻보다는 선하신 분의 뜻을 앞세우고, 약한 인생의 뜻보다는 전능하신 분의 뜻을 앞세우고, 약한 인생의 뜻보다는 전능하신 분의 듯을 앞세우며, 하느님 뜻을 자기 뜻에 앞세우기에 이른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성을 취하시고, 우리에게 귀감을 주시며, 어떻게 살지 가르치시고, 그렇게 살 힘을 주시는 가운데 당신의 의지와 우리의 의지가 어떠해야 하는지 전형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과 다른 것을 바랄 수도 있다. 이것은 인간적 나약함, 인간적 허약함에서 용납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비뚤어지면 일이 그대 마음에 들어야만 하느님을 찬미하고 일이 그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느님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이들에게 찬양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인생이 순조로울 때만 하느님을 찬양하고 역경에는 하지 않는다면 어찌 “언제나” 찬양하리라는 말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순조로운 상황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비록 자기를 벌하실 때에도 하느님에게서 아버지를 알아 뵙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치 욥처럼 역경에서도 하느님을 찬양하고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이렇게 하심이 주님의 마음에 드나니, 다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기 1,21)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올바른 사람들에게는 찬양이 어울리며, 어느 때에는 하느님을 찬양했다가 때때로 하느님을 저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

 

   의인들과 올바른 이들은 아무도 “내가 무슨 의인인가?” 혹은 “언제나 나는 의인이 될까? 라고 자조해서는 안 된다. 즉 낙담해서도 안 되고 자신을 두고 절망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단지 사람이며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신 분은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사람이 되시었고, 또 가급적 많은 자녀들이 영원한 유산을 차지하게 하시려고 외아들이 피를 흘리셨다. 따라서 현세적인 나약함 때문에 자신들을 비하시키게 되거든, 얼마나 비싼 값을 치르고 속량되었는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로도 말하고 있다(로마 1,17).

 

    따라서 “의인들아, 주님 안에 환호 하여라!” 이 말뜻은 다음과 같다. “신도들이여, 주님 안에 환호 하여라!” 신앙으로 말미암아 의인은 살기 때문이다. “올바른 이들에게는 찬양이 어울리도다.” 그러니 순조로울 때에도 역경 중에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법을 배우라. 사람마다 버릇처럼 입에 올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라는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법을 배우라. 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라

 

“비파로 주님을 찬송하며 열 줄 수금으로 그분께 찬미 노래 불러라.” 시편작가가 켜라는 악기는 사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하느님, 제가 당신께 드린 찬미의 서원이 내 안에 있사오니, 이를 당신께 갚아 드리이다.”(시편 55,12) 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수금과 비파의 차이가 있다. 즉 이 두 악기 사이의 다른 점을 찾아내고 두 악기로 상징된 인간 행동의 다른 점을 보며 우리의 삶에서 구현해내야 할 다른 면을 발견하는 데 있다. 비파라는 악기는 북처럼 통나무 밑을 판 것으로, 아래에 울림통이 처져 있고 위에다 줄을 매어놓은 것으로, 손으로 타면 소리가 난다. 줄을 타서 소리를 내는 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울림통이 떨리는 소리를 받아서 보다 어우러지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반면 십현수금은 위에 울림통이 있다. 이것이 두 악기의 다른 점이다. 우리는 비파를 탈 때 하느님을 찬송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또한 십현금 수금으로는 그분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라는 분부를 받았다. “십현의 비파로”라는 말은 이 시편에는 안 나올뿐더러 내 말이 틀리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십현의 수금이라는 말은 시편의 여러 구절에 나오지만 그 대신 십현 의 비파라는 말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지상생활을 하면서 순경과 역경을 만나게 되고 두 경우 모두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세의 순경은 우리가 건강할 때, 재산이 넉넉할 때, 자신감 있고 평온할 때, 곡식과 열매를 넉넉하게 거둘 때, 등 이것들을 두고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배은 망덕하다. 그 대신 역경은 인류의 연약함 때문에, 인간이 아랫부분에서 유래하며, 고통 중에, 질병 중에, 곤핍 중에, 환난 중에, 유혹 중에 역경을 느낀다. 그래도 비파를 타는 자는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를 바칠 것이다. 그것들이 아래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오히려 지혜가 아니면 다스리고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경을 만나더라도 태평하게 비파를 타야한다.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를 바치면서 마음의 심경의 가락을 울려 노래를 불러야 한다. 아랫부분에서 신묘한 소리를 울려내는 비파처럼 이렇게 외쳐야 한다.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 할지라!”

 

정의에 입각한 참다운 사랑

 

   정의는 무엇인가? 정의에도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죄벌이 겁을 줌은 사실이다. 그래도 정의는 아름다운 형상이 있고, 사람의 눈이 정의를 찾아 헤매게 만들며,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불타오르게 만든다. 정의를 위하여 순교자들은 세상을 무시하고 자기 피를 흘렸다. 세상 모든 것을 저버리면서까지 사랑하던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랑하라.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차가워지고 굳어진다. 그렇지만 마음의 눈이 찾는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그러나 정의가 칭송 받으면서 정신을 불타오르게 만드는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이러한 사랑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이다. 심안으로 보는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런 기쁨을 주시는 주님께 기도하고 사랑하라. 주님께서는 감미로움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그 열매를 내어 주리라.

하느님의 지혜가 지니는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 하느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눈에 드는 모든 사물이 아름다워진다. 그러나 지혜 자체를 보고 끌어안으려면 마음이 정화되어야 한다. 이 지혜가 우리를 아름답게 꾸며 우리가 지혜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해준다. 정의에 입각한 참다운 사랑은 위로부터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분께 노래하라, 새로운 노래를.” 아직도 묵은 노래가 있다면 내버리라! 우리는 새 노래를 알고 있다. 새 사람, 새 계약, 새 노래! 묵은 인간들에게는 새 노래가 어울리지 않는다. 새사람만 새 노래를 배우며, 은총의 힘으로 묵은 것에서 벗어나 새로워진 사람들, 이미 새로운 계약(하늘나라)에 속하는 사람들만이 이 노래를 배운다. 우리의 모든 사랑이 하늘 나라를 향하여 오르고 우리의 새로운 노래도 그리고 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부른다. 그리고 어떻게 노래할 것인가는 각자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분께 노래하라 서툰 가락을 낼 것이 아니다. 고운 가락으로 노래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누가 흠 없는 노래를 잘 할 것인가? 도리어 그분이 우리에게 노래 가락을 불러주시는 듯하다. 하느님께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환성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일이다. 마음으로 노래하는 바를 깨닫기는 하지만 말로 형언하지는 못함을 가리킨다. 즉 노래가사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뿌듯해지고 나면, 그 기쁨을 노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연고로 가사의 뜻은 더 이상 헤아리지 않고서 그냥 환성을 지르고 그 소리에 젖어든다. 본래 환성이라는 것은 형언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에 터뜨려내는 소리라 하겠다. 이것은 말로 피력하지 못하는 무엇이다. 그러기에 불가형언하신 하느님께 어울리는 소리이다. 하느님 앞에 입을 다물 수 없다. 그래서 무한한 기쁨을 넘어 하느님께 환성과 함께 고운 가락을 내어 라고 한다.

 

하느님은 성실하시다.

 

“주님 말씀은 바르고 그분의 행적은 모두 진실하다.” 즉 그분의 행적은 믿음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행적은 믿음에 근거해야 한다. 그래서 의인은 신앙으로 산다. 또한 사랑으로 행동하는 신앙은 중요하다.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진정 우리는 “믿는 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느님도 믿음으로 사는 것인가? 그러나 그 분은 신의가 있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련을 당하도록 묵인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시련과 함께 그것을 견디어 낼 방도도 마련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신의와 인간의 신실함을 구분해야 한다. 신실한 인간이란 하느님의 언약하신 바를 믿는 사람이다. 신실하신 하느님이란 인간에게 언약하신 바를 이루시고 베푸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신실하신 채무자이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채무자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무엇을 꾸어드렸다는 말은 아니다. 실상 우리가 하느님께 바쳐드릴 만한 것들도 모두 하느님께 받았고, 우리가 어느 모로든 선한 점이 있다면 오로지 그분에게서 유래한 까닭이다. 우리가 즐겨 누리는 선도 그분에게서 말미암는다.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

 

“그분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는 분” 하느님이 그렇게 하시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자비와 심판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지금이 자비의 때이고 심판의 때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하느님을 등지고 가는 자들을 부르시고, 돌이키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용서하시며, 죄인들이 뉘우치기까지 인내로이 기다려주시는 때인 까닭이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순간, 하느님은 과거사는 잊어버리시고 장래 일만 약속하신다. 하느님은 수고하고 당신께 부르짖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저버리지 않으신다. 희생제사로 바칠 제물을 당신이 마련하시고 선사하시며, 당신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떼 필요한 수단을 당신이 베풀어 주신다. 그러므로 자비가 베풀어지는 위대한 시간이 헛되이 지나가게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비와 심판이 하느님 안에서 어느 모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 둘은 대개 상반된 것처럼 보여서, 자비로운 사람은 심판을 개의치 않는 듯하고 심판이 엄한 사람은 자비를 잊어버리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느님은 전능하셔서 자비 속에서 심판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심판에서도 자비를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 여러분은 회개한 사람이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동등하게 취급당하는 일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하느님은 자비 속에도 심판을 품고 계신다. 또한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5)라고 말씀하실 대상자들에게는 심판하시는 가운데도 자비가 있을 것이다.

사도서간에 실제로 이런 말이 나온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그러니까 저 심판에는 자비도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심판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자비는 분명 죄를 용서하심에 있고, 영원한 생명을 베푸심에 있다. 하지만 또한 거기에 심판이 있다. “남을 용서하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자비 속에 또한 심판이 있지 않다면, 주님은 다음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여러분이 심판하는 그대로 여러분도 심판받을 것입니다.“(마태 7,2)

 

주님의 자비

 

“주님의 자애가 땅에 가득하네.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그분의 입김으로 모든 군대가 만들어 졌네.” 여기서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만들어 졌네.”는 뒷 구절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굳어졌도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주님의 말씀은 올바르고, 그분의 행적은 모두 믿음에 있기 때문이로다.” 주님은 무엇을 언약하시면 반드시 주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채무자가 되신 이상, 우리는 억척스럽게 받아내는 채권자가 되어야 한다. “그분의 행적은 모두 믿음에 있도다.”라는 말씀에 뒤이어 “그분께선 자비와 심판을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자비를 사랑하시는 분은 또한 불쌍히 여기시며, 불쌍하게 여기시는 분이 무엇을 약속하시고 안 주시겠는가? 약속 않고도 무엇을 주실 분이시다.

 

    바로 그래서 주님은 어느 종에겐가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이자와 함께 그 돈을 되찾았을 것이다.”(루가 19,23) 다른 구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입니다.”(요한 8,15;12,48) 이 말은 듣기 싫은 사람은, 주님이 자기한테 아무것도 따지지 못하시리라는 듯이, 변명하려 들지 말 것이다. 본인에게 베풀어주셨음에도 받아들이기 싫어했기 때문에 주님은 똑같이 따지실 것이다. 받지 못하는 것과 받기 싫어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행적은 모두 믿음에 있으며, 그분은 자비와 심판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야만 셈을 하러 주님이 오실 때에 빈손으로 맞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와 셈을 따지시고 계산이 맞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받아들여야 한다. 졸다가, 삶을 헛되이 보내다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자비를 어디에서 받고 어디로 가야하는가? 이것은 방금 노래한 “주님의 자애가 땅에 가득하네.”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곳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주님의 말씀이 침묵하고 있는 곳과 구원이 이르지 않는 곳은 어디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곡식은 가득하다. 저 풍족함과 충만함은 우리 스스로 접근하도록 기다려 온 것이며,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에도 우리에게 접근 해온 것이다. 그러므로 만민이 자리 잡고 사는 그곳으로 이 진리가 선포되었다. 그래서 “그 날에 뭇 민족들이 모두 저희의 고장에서 야훼를 예배하리라.”(스바 2,11)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다.

 

“주님의 자애가 땅에 가득하도다.” 그러면 하늘은 어떻게 되는가? 비참이 없는 곳에는 자비도 소용없다. 인간 비참이 땅에 가득하고, 주님의 자애가 또한 땅에 가득하다. 그러나 비참하든 행복하든 간에 만물은 주님을 필요로 한다. 주님 없이는 비참한 사물이 고양되지 못하고 행복한 사물은 지탱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라고 묻지 말아야 한다. 하늘도 주님을 필요로 한다. 즉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만들어졌도다.” 하늘은 혼자서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저절로 굳어진 것도 아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그분의 입김으로 그 모든 능력이 만들어졌도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으며, 오로지 주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 “그분의 입김으로” 일부가 아닌 “모든 군대”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업적을 볼 수 있다.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기운은 성령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하늘이 그분의 입기운으로 굳어졌고, 주님의 말씀이신 분으로 인해서 그 모든 능력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능력이 생겨났다는 말이나 굳어졌다는 말이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은 성자와 성령이 이루시고, 그분의 말씀이요, 그분의 입기운 되시는 분은 바로 성부이시다. 이렇듯 삼위일체 하느님은 유일무이하신 하느님이시다. 흠숭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이 하느님을 흠숭하며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사람은 어디서나 이 하느님을 흠숭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등진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등진 사람들을 하느님이 부르시며, (비록 당신을 버렸지만)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주님의 자애가 땅에 가득하도다.” 라는 말씀이 있고 난 다음, 땅이 어떻게 해서 주님의 자애로 가득하냐고 질문할 수 있다. 이에 먼저 사도들이 보내졌다. (시편 18,2) 사도들은 온갖 언어들을 한꺼번에 말하였다.(성령 강림체험 안에서) 그래서 그들은 그 음성과 언어를 보내신 분을 가리켜 보인다. 그들은 주님이 죽음을 목격했고, 죄의 용서가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리가고 예언하였다.

 

박해와 징벌에서 오는 유익

 

    이 일은 실제로 이루어 졌다. 사도들이 파견 받았고 그들은 많은 핍박을 당했다. 사도들은 진리를 전하는데 많은 고난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듣는데 고난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의 수고가 무익한 것은 아니다.

“그분께서는 제방으로 모으듯 바닷물을 한데 모으시고...” 오늘날 바다의 짠물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감히 그리스도인들을 대항하여 날뛰지는 못하고, 그저 남몰래 혼자서 웅얼거리는 소리를 낼 따름이다. 그러니 교회로서는 자기 길을 갈 것이요 자기 걸음을 계속할 것이다. 길은 만들어졌고 우리의 행로는 황제가 안전을 보장해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업의 길을 가면된다. 바닷물이 가죽자루에 갇혔다고 우리가 상상도 못한 유혹의 압력을 당할 때에는 주님이 교육의 목적으로 그렇게 하심을 깨닫도록 하자. 환난을 당할 땐 이런 열성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바닷물이 가죽자루에 담기듯이 갇혀 있는 시대에도 하느님께는, 우리에게 교정이 필요할 때에, 우리를 교정하시는 수단이 없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대양의 곳집”은 바로 하느님의 비밀창도이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아시고 적합한 시기에 무엇을 말씀하셔야 할지, 어떤 방도로 하셔야 할지 아신다. 우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대양을 창고에다 가두어넣으시는 하느님이시라면, 하늘의 창고에 관하여 우리를 가르칠실 수단 또한 갖추고 계시다. 그러나 주님의 자애가 가득할지라도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 바닷물을 가죽자루에 담듯이 모으시고 대양을 창고에다 넣으시는 분인 까닭이다. 주님 대신 다른 사물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두려워할 분은 원수도 악마도 아닌 오직 하느님이시다. 왜냐하면 온 피조물이 하느님께 속해있고, 정작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분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악의는 남을 해치고자 욕심을 스스로 지닐 수 있겠지만,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것을 발휘할 권한을 못 갖는다. 어떠한 권한도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로마 13,1: 요한 19,11). 악마조차도 하느님이 허락하실 때만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악마가 권한을 지닌 것이 아니라 허락하신 분이 권을 가진 것이다 (욥기, 21).

성경의 가르침 또한 주님 외에는 그 누구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다.

 

“주님께서 민족들의 결의를 껶으시고...” 지금은 군주들이 사악한 짓을 그만두고 선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도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앞가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표로 달고 다닌다. 그들의 왕관에 박힌 그 어느 보석보다 고귀한 표로 십자가를 달고 다닌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오직 하느님이 하신 업적이다.

“주님의 결의는 영원히, 그 분 마음의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 ‘주님의 결의’를 언급하고 ‘그분의 마음의 계획’을 말한다. 먼저 “영원하며” 다음 “대대로 이어진다.” 말을 강조함을 뜻을 강조함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무엇을 궁리하시지는 않는다. 그분의 말씀은 재빠르게 지쳐나가신다. 단일하신 말씀, 만유를 당신 안에 포용하시는 말씀께 생각의 여유가 따로 없다. 하느님의 계획이나 생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우리가 알아듣게 하기 위함이다. 주님의 결의와 계획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성자를 보내심이다(에폐 1,4). 영원하다는 주님의 결의는 바로 이것을 말하며, 대대로 이어지는 그분의 마음의 계획들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민족들인 술렁거리며 노골적으로 날뛰고 잔혹하게 굴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마치 가죽자루에 담기듯이 한 데 모아져 있기 때문에 우리를 오염시키려 애쓴다. 전에는 과감하게 행동할 자유가 있었다.

 

사람을 보다 낫게 만드는 것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이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지 않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행복은 모두가 좋아한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조차도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악한 사람이 되려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조차 행복해지기를 바라서 그 일을 한다. 배가 고파서 곤궁해서 그런 짓을 한다. 불행하지 않으려고 악한 짓을 하는데, 악한 짓을 함으로써 더 불행해진다. 따라서 불행을 벗어버리려고, 또는 행복을 얻으려고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거나 악한 일을 한다. 그래서 반드시 행복해지기 바란다. 악하게 살면서 선하게 살면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악을 행하면서 행복해지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돈으로 금과 은으로, 토지와 전답으로, 저택과 노예로, 세속과 영화로 등등 잠시적이고 덧없는 영예로 행복해지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지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지녀야 행복해지는 찾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못한 것을 위해 안달하면서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 보다 더 나은 존재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존재가 된다.

 

사람을 보다 낫게 만드시는 이는 하느님

 

   이제 하늘과 땅을 살펴보라! 저 아름다운 지상 물체들, 그것만으로 우리가 행복해지기 바랄만큼 우리의 마음에 썩 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정작 찾는 바는 우리 영혼 안에 있다. 우리가 만일 행복해지고 싶다면 보다 휼륭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영혼과 육체가 있다면 영혼이 더 휼륭한 것이기에,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을 통해서 보다 휼륭한 것이 되고, 영혼이 의로우면 육체도 훗날 불멸하는 영혼이 된다. 영혼의 조명을 통해서 육체는 부패하지 않는 공을 입는다. 즉 휼륭한 부분 덕분에 보다 열등한 부분이 구원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영혼보다 하찮은 것을 추구하여 불행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모상이 있다. 인간의 정신이 이 모상을 간직하고 있다. 영혼은 이 모상을 받았것만 죄에 기울어짐으로써 모상을 퇴색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모상을 형성해 내신분이 모상을 재형성하시러 몸소 오셨다. 실상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이 모상이 새겨진 것도 말씀을 통해서였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정신을 다시 새롭게 하여 여러분의 모습을 바꾸시오(로마 12,1). 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보다 휼륭한 것을 추구하는 일만 남았다. 영혼보다 휼륭한 것이란, 하느님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느님이외의 다른 사물에서 찾을 수 없다.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은 우리보다 휼륭하시다. 그러므로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신 백성은 행복하다. 그분은 우리의 유산이요, 재산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원해야 한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자는 행복하다.

 

    하느님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시여ㅕ, 우리를 차지하소서!”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사 26,13). 하느님은 소유하시면서 소유 당하신다. 그분이 우리를 소유하심은 행복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소유당하심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소유하고 우리는 그분을 소유한다. 우리는 그분을 흠숭하고 그분은 우리를 보살피신다.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으로 흠숭하며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땅처럼 보살피시고 가꾸신다(요한 15, 5) 그러므로 백성은 하느님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행복하고, 하느님이 유업으로 고르신 백성은 자기를 소유하신 하느님 때문에 행복하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살피시며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신다.”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저 민족의 모든 성원들, 저 유업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들 모두가 하느님의 유업이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당신을 내가 보았다”(요한 1, 48). 이렇듯 하느님은 사람의 아들에게 딸린 모든 이들을 바라보신다.

 

“당신 머무시는 곳에서 굽어보신다.” 당신이 마련하신 처소에서, 사도들을 통해서 우리를 보셨고 진리를 설교하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보셨으며 우리한테 보내신 천사들을 통해서 우리를 보셨다. 이 모든 존재들이 하느님의 집이요 이 모든 존대들이 하느님의 처소이기도 한 까닭이다. 이 모든 존재들이 하늘을 이루고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머무시는 곳에서 모든 사람들, 바로 당신의 사람들,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복된 민족들을 굽어보신다. 당신의 유업으로 선택한 백성은 바고 그들이다. 그들은 온 땅에 펴져 있기에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을 굽어보신다.

 

“그들의 마음을 다 빚으시고,” 이것은 하느님은 당신의 은총의 손길로, 당신 자애의 손길로 마음을 빚으셨고 우리 마음을 조형하셨다. 하나씩 빚으셨고, 통일을 깨뜨리지 않으신 채로 우리에게 각각의 마음을 주셨다. 모든 지체가 각각 형성되었고 또 모든 지체가 각각 할 일이 있으면서도 몸의 통일을 이루어 사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몸에서도 각각의 인간들은, 각각의 지체들처럼 자기 고유한 선물을 향유한다(1고린 12, 29-30. 8-9).

“그들의 모든 행위를 헤아리시는 분이시다.” “헤아리신 다는 것”은 더욱 은밀하게, 더욱 내밀하게 보신다는 뜻이다. 헤아림은 내밀한 시선을 말한다. 이것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보시는 분이시로다.” 라고 하는 말보다 하느님의 행위를 더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은 남의 행위를 볼 때에 그가 수행하는 신체 동작을 통해 보지만, 하느님은 마음을 들여다보신다. 그분은 내면을 들여다보시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행위를 헤아리신다.”고 하였다.

“ 병력이 많다고 임금이 승리하지 못하며 근력이 세다고 용사가 제 몸을 살리지 못하네.” 이 말의 의미는 하느님이 우리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만한자는 가기한테 뭐가 있다는 듯이, 자기 스스로에서 오는 무엇이 있다는 듯이 하느님께 고개를 쳐드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는 근력이 세다고 구제되지 않는다. 잘 생기고 혈기왕성하고 대단히 빨리 달리는 기마라 할지라도 그대를 구원하지 못한다. 오직 하느님의 보우하시만이 구원을 약속할 수 있다. 오직 하느님이 구원을 원하셨다면 구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공적으로도 아니고 병력으로도 아니며 근력으로도 아니고 기마로도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의 자애로 구원을 이룬다.

 

우리는 지금 기근 중에 있다.

 

“그들의 목숨을 죽음에서 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굶주릴 때 그들을 살리기 위함이라네.” 부패할 사물의 기근에서도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가 불멸하는 존재가 된 다음에 어찌 우리를 충족시켜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기근 때에 살고 있는 만큼 참을성을 지녀야 하고 끝까지 항구해야 한다.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시는데, 그것을 그들의 목숨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시고 그들을 굶주릴 때 살리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은 인내로이 주님께 희망을 걸고 언약하신바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도움, 우리의 방패이시기에 싸움 중에 폭염 중에 우리를 가려주시고 버려두시지 않는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저희 위에 당신의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은 우리한테 모든 일을 감행토록 권유하셨고, 희망의 기쁨을 우리한테 채워주셨으며,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누구한테 또 무엇만을 신뢰해야 하는지 가리켜 보이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분의 자애가 있을 것이다. 저희가 그분께 바라던 그 공덕으로 말이다.

 

사해동포 사상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을 우리는 자신에게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에게 쏟도록 권유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량없는 주님의 자애와 사랑을 사람들에게 보일 때이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이다.

 

 

나오면서

 

   교회 안에 사는 우리는 새로운 창조이며, 말씀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그 자비 깊으신 사랑으로 채워지는 땅이다. 주님은 심오한 진리를 현실화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과 그분의 구원계획을 알고 있다. 그것을 우리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고 굶주릴 때 살리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실현된다. 그래서 교회는 이스라엘의 이 시편을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보고, 전례에서는 자주 하느님께 당신 백성으로 뽑혔다고 하는 행복을 나타낸다.

 

    주님의 눈은 당신의 교회와 당신의 사랑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신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 마음은 기쁨,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가 기다리고 바라는 것처럼 우리를 감싸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내린 은혜 때문에 교회는 하느님을 찬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찬양하고 기리기를 가르치신다. 이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교회는 아버지를 찬양하고 기리는 의인들의 집회이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까닭은 성체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 하늘에 오르는 그 완전한 끊임없는 찬미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도 벌써 교회의 소리가 울리고 있다. 성 요한은 하늘에서 의인들의 새로운 노래를 들었다(묵시록 5,9)

 

    창조와 역사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이 시편은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닿는 계시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게도 위대하시고 강력하신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사람의 모든 자녀를 보시고, 사람의 마음을 빚어 주시고 그의 모든 하는 일을 지켜보고 계신다. 한없이 높으신 분이시지만 어떠한 사람은 발걸음도 받쳐 주신다.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밀접한 분이시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의 전능에 의뢰하고, 거기에서 깊은 기쁨의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모든 괴로움에 대한 위로가 있다.

 

 

 

 

 

※ 참고문헌: 성 아우구스티노의 찬양시편,C. 보르고뇨/ 성염, 바오로 딸, 1995, p.29-77.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94-95.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241-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