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 9-16/ 창세 4, 17-24/ 창세 5, 1-32”
도입기도: 시편
TEXT에 대한 연구
1)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느님은 아담의 범죄 때처럼 범죄 현장에 즉각 나타나시어 책임을 추궁하신다.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는 하느님의 질문은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 자신의 분수와 한계와 책임을 묻는 말씀이었지만 여기서“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다른 형제에 대해 가져야 할 의무와 책임을 추궁하는 말씀이다. 죽은 동생 아벨에 대한 하느님의 추궁에 카인은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댔던 아담의 소극적인 자세와는 달리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며 거칠게 항의한다. 그것은 아직도 질투로 인한 분노가 가라않지 않았고 편파적으로 제물을 받아주신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이항의 안에 도사리고 있다.
2) 하느님은 카인에게 억울하게 죽은 아벨의 피가 땅에 떨어지자 땅이 그 피의 원성을 듣고 소출을 내주지 않기로 했다고 말씀하신다. 곧 아벨의 피를 마신 땅이 카인에게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고 카인으로 하여금 그 위에서 방황하게 함으로써 이 형제살인자에 대한 형벌의 도구가 되고 있다.
3) 낙원 이야기에서처럼 여기서도 ‘땅’이라는 주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땅은 본시 하느님의 축복을 박은 영역인데 아담의 범죄로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 데 이어 카인의 살인죄로 이제는 아예 곡식을 내주지 않게 되었다. 소출을 내주지 않는 땅에서 카인은 더 이상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방랑의 길을 떠난다. 물과 식량이 부족한 사막에서 홀로 방황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었을 것이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형제살인죄를 지은 사람은 부족으로부터 추방되어 사막에서 방황하도록 버려두었다.
4) 카인은 떠돌아다니다 놋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놋은 가상의 지명인데 히브리어로 ‘떠돌아다니다’는 뜻의 나닷(nadad) 동사와 연결된다. 카인이 떠돌아다니다 정착하게 된 곳이라는 뜻이다. 카인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더 이상 뵈옵지 못하고 세상을 방황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보면 형제살인자라고 하여 복수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이처럼 카인의 죄와 형벌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서 카인은 하느님께 처절하게 하소연한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카인은 울부짖음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가족들로부터 추방되고 나아가 하느님의 보호마저 끊겨 버린 카인에게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손을 대려 할 것이다.
5) 땅에서 울부짖는 아벨의 피에 응답하셨던 하느님은 이제 형제살인의 벌로 정처없고 위험천만한 방랑의 길을 떠나며 벌의 무게에 짓눌린 카인의 울부짖음에도 못 들은 체하지 않고 응답을 주신다. 하느님은 카인을 안심시키며 그에게 그의 구속자, 히브리 말로 고엘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고엘 풍습은 고대의 씨족이나 부족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당한 힘없는 사람을 위해 가까운 친척 중에 힘 있는 사람이 보호자로 나서는 것을 말한다. 고엘은 피해자를 대신하여 복수해 주고 이편에서 잘못하여 노예로 팔려갈 처지에 놓이면 몸값을 지불하기도 한다. 피보호자가 빚에 쪼들려 밭을 처분해야 할 경우엔 고엘이 그 밭을 사두었다가 원임자가 갚을 능력이 생기면 되팔고, 능력이 없다하더라도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째의 희년엔 자동적으로 밭 임자나 그의 상속자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 희망 때문에 밭을 처분한 사람이라도 그가 속한 씨족이나 부족을 떠나지 않게 된다. 이 고엘 제도는 씨족이나 부족 내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좋은 법이었다.
6) 하느님은 기꺼이 카인의 고엘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카인의 이마에 표를 찍어주시는데 이 표는 그가 살인자라는 고발과 수치의 표시가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시이다.
카인이 출생 시에 그의 어머니 하와는 “주님의 도움으로 아들을 얻게 되었구나”라고 했는데, 이 하느님의 도움은 카인이 성장하여 죄를 범하고 벌을 받게 된 이후에도 계속이어 진다. 하느님은 살인자 카인의 고엘이 되어 주심으로써 피의 복수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을 막으신다. 생명과 구원으로 인류를 이끄시겠다는 하느님의 의지는 형제살인이라는 끔찍한 죄로 방해를 받지만 근본적으로 취소될 수는 없다. 하느님은 인간이 동료의 생명에 손상을 입혔을 때 반드시 책임을 추궁하시지만 그렇다고 인간 상호간의 피의 복수로 인하여 또 다른 생명이 단절되는 것도 바라지 않으신다.
* 참고문헌: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창세기 해설서), 정태현, 생활성서사, 1990, P.43-45.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 생활성서사, 1987, p.41-42.
'창세기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 6,1-4 : 거인족의 출현 (0) | 2010.06.29 |
---|---|
창세 4, 17-24:카인의 자손/ 5, 1-32: 아담의 자손 (0) | 2010.06.17 |
창세 3,20-24: 동산에서의 추방 (0) | 2010.06.17 |
창세기 3, 14-19: 선고 (0) | 2010.06.17 |
창세 3, 8-9; 15: 하느님의 재판 (0) | 2010.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