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서의 '종(하시드)'
" 주님,
귀를 기울이시어 제게 응답하소서.
가려나고 불쌍한 이 몸입니다.
제 영혼을 지켜 주소서
당신께 충실한 이 몸입니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는
이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으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리니
주님, 당신 종의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 시편 86(85) 1-4 -
이 시편에서 시편작가는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는
이유로 자기가 하느님께 충실함을 말씀드린다(2절 2행).
여기에 쓰이는 히브리말 ‘하시드’(복수 하시딤)는
주님께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을 뜻하면서,
다음에 나오는 “종”고 통하는 명칭이다.
시편작가는 자신을 하느님의 종으로 부름으로써
자기가 하느님과 주종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
주종관계’라는 말은 항상 일반적인 관계, 주인은 자신만을 위하고,
종은 주인만을 위해야 하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관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주종관계는 근본적으로 서로를 위하는 관계로,
종은 주인에게 충실해야 하고,
주인은 주인대로 종의 생활과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종은 일종의 명예직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처럼
어떤 자유인이 다른 사람에게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상대가 누구인가이다.
상대가 높은 사람이면 종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높은 사람 앞에서 마땅한 겸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높은 사람의 종으로서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임금에게 신하들이 자신을 종이라 부르고,
기도자들도 하느님께 자신을 종이라 고백한다.
종의 고백은 시편에 자주 나온다.
문맥에 따라서,
특히 탄원시편에서 기도자가 하느님께 청원을 드리면서
자신을 그분의 종으로 고백하는 것은 고백과 동시에
하느님께 주인으로서의 의무를 채우시라는 간접적인 간청도 하게 된다
(시편 79편/ 시나이 산의 계약도 이런 서로의 의무가 포함된 주종관계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충실해야 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경우는 신앙고백이 됨과 동시에
하느님께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셔야 하는 의무도 상기시켜드리는 것이 된다.
이러한 공동고백이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에게도 적용되어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으로도 쓰이게 된다.
이러한 고백으로 시편의 기도자는
자신이 하느님께 소속되어 있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기도자를 보호하셔야 함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2절의 마지막 단어인 ‘신뢰하다’라는 동사는
시편의 영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뢰는 종으로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께 대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 중의 하나다.
동시에, 그 이면에는 신뢰하는 사람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그분께서 자기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확신이 있다.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기본적인 간청들 중의 하나가
불쌍히 여겨주십사는 간청이다(3절 1행).
인간이 자기의 처지를 깨닫고 하느님 앞에 설 때
도대체가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자연히 하느님께 불쌍히 여겨주시라는 청원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시편 51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않다.> (요한 13, 16절)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때문이다.>
(요한15,15)
<종>의 개념에 대해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더 풍요롭고 참되게 하여주신다.
그것은 참된 종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즉 참된 종은 타인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닌 섬김과 봉사에 있음을 말씀하신다.
더불어 당신의 제자들을
이제는 <종>에서 <벗>으로 상승시킨다.
<벗>이란 개념 안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과 충실성이 들어있다.
인간을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끌어올리시는 것이다.
즉 창조당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었던
원죄를 짓기 전의 첫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를 다시 돌려주신다.
그렇다고 <종>과 <벗>의 개념이 서로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어떤 경우에는 나를 창조하신 창조자에 대해서
종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다하며,
또한 예수님과 친구처럼 친밀하게 지낼 수도 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제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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