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
(A Man whose hope is in the Lord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도움으로 삼는 이
자기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
그분은 하늘과 땅을,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다“
- 시편 146, 5-6.ㄱ절 에서 -
시편은 이스라엘이 살아왔고, 그들의 하느님과 세상 안에서
그들의 고유한 상황에서 깨달은 것들 가운데 본질적인 것을 기도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을 읽으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또 인간을 위하여 섭리하시는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시편 146은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할렐루야!”로 끝나는 찬양시편이다. 또 이 시편 150까지 다섯 편의 시편이 한 그룹으로 형성되어 시편집 전체를 끝맺는 “종결할렐”라 칭한다. 자신의 영혼을 향한 찬양의 권유로 시작하여 오직 주님께 의탁하는 가난한 이들의 무리인 ‘시온’ 공동체 앞에서 찬양한다.
찬양의 주된 골자는 덧없이 사라져갈 인간(Adam), 세상의 제후들에게 희망을 두지 말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계속 존속시키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호소한다. 그분은 당신께 피신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시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목소리 없는’이들을 돌보시는 분이다.
시편을 기도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시편집은 그들에게 기댈 곳을 사람에게 찾지 말라고 한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힘을 가진 제후들조차도 “구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느님”께 신뢰하라고 조언한다. 시편저자의 이러한 시각은 유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대조와 차이점에 대한 이해와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린 유한성을 지닌 인간에게, 지나가는 현세의 것들에 모든 것을 걸고 살 때가 많다. 마치 이곳이 영원한 곳이듯이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어느 날엔가 무너질 장막집이다. 그런데 시편의 저자들은 유한성을 지닌 이 세상에 이미 영원성을 맛보고, 나그네처럼 현세를 살았던 사람들이라 생각된다.
시편에서 복된 이들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복된 것은 눈에 보이는 그렇지 못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희망을 둔 이들이다. 또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들에 더 높은 가치를 둔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의 삶은 세상을 거슬러 가는 이들이며, 자신들의 도움이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의 사람들이다. 또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시며, 현제도 지속적으로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으로 사랑의 창조사업을 계속하시는 분에 대한 신뢰이다. 무엇보다 고아와 과부 그리고 떠돌이를 보호해주시고, 그들의 인권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어찌 아쉬울 것 없는 부자들이 하느님을 찾겠는가? 오직 마음이 가난한 이들과 인생의 여정에서 영육으로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이 찾는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들에게 기꺼이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구원의 바위가 되어 주신다.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믿음의 주인공들 모두 ‘희망으로 구원된 이들’입니다(교황 베네딕도 16세). 개인주의, 소비주의, 물질주의 사조 앞에, 그 어느 때보다 생명과 사랑, 정의와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 어쯤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 바로 희망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참된 생명이시며, 사랑이시고, 구원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둔 사람으로 살아감으로 참 행복을 맛보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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