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100(99): 주님은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마리아 아나빔 2012. 9. 2. 20:55

 

 

시편 100(99): 주님은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시편이다. 이 시편은 백성이 전례의 대축일에 성전으로 들어 갈 때 노래한 것 같다. 이 세상 만민 특히 이스라엘을 향하여 주님을 찬미하고, 그 성전에서 먼저 감사하도록 부른다(1-3). 찬미와 감사의 이유는 하느님 자신이 당신 백성에게 나타내신 것, 곧 하느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목자이시라는 것이다(3).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깊으시고, 약속에 충실하시기 때문이다(5).

 

이 시편의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여기에서는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하기 위하여 주님의 집으로 찾아오도록 항상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이미 이스라엘 사람이 주님의 성전을 순례하고 성전에 오르는 것은 언젠가 백성들이 참 하느님께 회개한다는 뜻으로 보았고, 또 모든 사람은 새로운 예루살렘에 모인다고 하는 예언으로 알아들었던 것이다(이사 2, 1-3; 미가 4, 1-2). 히브리인의 전례행사에서 노래한 이 시편은 메시아적 의미가 주어져 있다.

 

지금 교회는 이 시편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한 분이신 참 창조주 또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인정하도록 부르며, 분명히 이 시편의 메시아적, 보편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만을 초점으로 했던 하느님의 자비와 성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셨고, 그리고 우리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당신 교회라고 하는 성전의 문을 거기에 들어오고 싶은 모든 백성에게 여셨던 것이다(4-5).

 

또한 이 시편은 대축일과 연간의 모든 주일의 찬가로 노래할 때는,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띤다. 그것으로써 교회는 성탄에서 공현까지 또 수난에서 부활, 승천까지 그리고 성령강림에 이르기까지 우리 구원의 신비를 환호하는 가운데 축하하고, 부르는 것이다. 매 주일 이 시편을 가지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더 강화하고 전례행사를 통하여, 같은 신비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모든 주일은 전례력의 모든 은총을 포함하고 새롭게 한다. 주일은 거룩한 성전에 모이는 하느님 백성의 집합일이며(4), 환희, 찬미, 감사의 날로(2-4) 하느님의 사랑이 특별한 풍성함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에 부어지는 날이다. 그리고 이 날에는 하느님의 성실이 구약시대의 성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바를 다하시는 것이다(5). 주일에 이루어지는 전례는 우리가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찬미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와 함께 기도하시고, 그리고 성체는 주님께서 당신 교회를 품는 장엄한 감사와 성실과 사랑의 표현이다(4-5). 주일의 전례 행사로써 교회는 하늘의 문에 가까이 간다. 모든 주일은 하느님께 가는 이 세상 나그네길의 이정표로써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면 삼위일체의 신적인 생명에 영원히 참여하며 환희와 찬미와 감사는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끝으로, 찬미는 하느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느님의 이 위대하심을 이정하고, 느끼며, 거기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만큼 거룩한 것이 된다. 그러나 찬미의 기도를 통하여 이번에는 사람이 깨끗하여지고, 자기 자신도 위대해진다. 인간의 위대함이란 자신이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맺어져 있다고 하는 그 관계를 얼마만큼 이해하고, 얼마나 거기에 사느냐에 따라 헤아려진다. 그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또 삶의 기쁨을 찾고, 한없으신 분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자신의 정신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끗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하여 주님께 대한 찬미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알아듣게 된다.

 

Text 안에서(아우구스티누스 주석을 따라서)

 

1절 안에서 이 시편은 감사 시편으로 ‘고백을 위한 시편’이라는 것이 제목이다. 구절은 몇 안 되지만 담겨진 내용은 대단하다. 이 고백을 위한 시편은 주님께 환성을 올리라고 명하며 그렇게 하라고 권유한다. 그 권유는 세상의 한 구석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요, 어떤 한 군데 인간 거처와 집단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 어디에나 축복을 뿌렸음을 아는 까닭에 어디서나 환성을 올리라고 요청한다. 악인들 안에서는 땅이 수런거리고 선인들 안에서는 땅이 환성을 올린다.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을 올려라” 시편의 이 소리는 온 세상이 벌써 들은바 있다. 그러나 아직도 주님께 환성을 올리지 않는 곳에는 반드시 울리게 되리라. 마치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 사이로 펴지는 가운데, 어디에나 축복이 퍼지며, 그 축복은 어디에 도달하든지 불경함을 무너뜨리고 경건함을 세운다. 비록 선인들이 악인들과 섞여 있고, 세상 어디에나 악인들이 있고 세상 어디에나 선인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악인들 안에서는 땅이 수런거리고 선인들 안에서는 땅이 환성을 올린다. 여기서 환성을 올린다하며, 이 시편이 고백과 관련되어 있기에, 마음의 소리와 관련 있는 것으로 알아듣고 마음깊이 환호함을 뜻한다.

 

속된 축제와 종교적 축제의 차이

환호하는 사람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기쁨을 드러내는 소리를 지른다. 환호는 발설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넘치는 마음의 소리이다. 환희 용약하며 즐거움을 맛보는 사람은 말로도 형언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면의 언어를 환호하는 목소리로 폭발시킨다. 우리는 고백하는 가운데 환호하는 것이지 소란 중에 환호하는 것이 아니다. 즉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드러낸다.

 

피조물을 통한 하느님 인식,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사랑

우리는 땅과 바다, 하늘, 그리고 그 안에 가득 찬 모든 것을 보고 그 기원과 원인을 살핀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천사들과 공통된 무엇이 있음에도 그것과 다른 무엇이 있음도 인식하고 구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대로 온 피조계를 관찰한다. 그리고 하늘에도 땅에도 물체적인 것이 있음을 알아차리듯이,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것이 있음도 알아차린다. 어떻든 인간 마음에는 하느님을 뵙는 일이 약속되어 있는데 다만 깨끗한 마음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가까이 가 그분의 비추임을 받고 싶다면 우리 안의 어두움을 불쾌하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 처한 나를 불쾌하게 여겨야 지금 이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의 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의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불의를 마음에서 쫓아낸다면 이로써 우리의 영혼은 조금이나마 하느님 가까이 간다. 원래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내적 인간이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모상대로 재창조되기 때문이다.

 

또한 정말 원수를 피하고 싶거든 원수를 아예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우리는 하느님과 비슷하게 재창조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랑이 원수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그리하여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는 분과 비슷하게 될 것이다. 사물은 눈먼 사람에게나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나 에워 싸여있다. 그러나 눈뜬 사람에게만 보인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존재하시고 어디서나 전체로 계시다. 하느님의 지혜는 우주의 끝까지 강력하게 미칠뿐더러, 만유를 온유하게 배치한다. 그러나 볼 수 있는 마음과 영혼을 가진 이만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찬미 받으실 만한 분이시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들은 그 지으신 것들을 통하여 이성의 눈에 보인다(로마 1, 20참조). 그러므로 창조된 사물들을 통찰하고 경탄하고 그 창조주를 찾아야 한다. 우리 안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증가할수록 우리는 말로하지 못하던 것에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공덕이 아니라 그분께서 베푸시는 자비와 은총 그리고 공덕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성은 이러저러한 것에 아닌 오로지 하느님께 나누고 올려야 한다.

그러므로 온 세상은 주님께 환성을 올려야 한다.

 

사랑에서 우러나는 봉사는 언제나 감미롭다.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섬김이라는 것은 무릇 쓰라림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주님께 하는 종노릇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거기서는 신음도 불평도 분노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속량되었다는 것은 기분 좋기 때문이다. 큰 가문에 종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주님께는 종노릇이 자유롭다 그 이유는 사랑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종이며 자유인이다.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자유인이다.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유인이다. 그러므로 불평하며 섬겨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종은 악인들도 용인해준다.

우리의 기쁨이 완전해지는 것은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이 사멸할 것이 불멸의 것을 입을 때이다(1코린 15, 53 참조). 그때는 기쁨이 완전한 기쁨이 되고 그 때는 환성도 완전한 환성이 되며 그 때는 찬미도 결함 없는 찬미가 된다. 그 때는 사랑도 걸림 없는 사랑이 될 것이며 그때는 삶의 결실도 잃을 걱정이 없는 결실이 되는 삶은 죽음이 없는 삶이 되리라. 물론 여기서도 즐거움이 있다. 장차 올 생명에 대한 희망에서 오는 즐거움인데, 여기서는 그 맛을 미리 보고 거기 가서야 온전히 향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밀알이 가라지와 함께 뒤섞여 있는 한 밀알은 많은 곤란을 겪어야 한다. 지금은 알곡이 쭉정이 사이에 있고 백합이 가시덤불 아시에 있다. 가시덤불은 우리의 행실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것도 그건-너 내 동배, 내 벗, 내 동무, 우리 함께 달콤한 음식을 나누는 그들 사이에서(시편 54, 13-14)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서로 참아줌이 선에 정진함을 보여주는 척도이다.

인내를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면서 평화의 끈으로 영의 일치를 힘써 지키시오(에페, 4, 2-3) “서로 참아 주시오” 우리에게도 남이 참아 주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남이 우리를 참아줄 필요가 없다면 우리가 나머지 사람들을 참아 주어야 한다. 그것도 사랑으로 참아 주어야 한다.

 

어느 생활 신분에도 선인과 악인은 있게 마련이다.

“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둡니다.”(마태 24, 40-42). 선행을 하는 사람, 하느님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 원수도 사랑하는 사람, 아내 외 다른 여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 신앙을 고백하는 데 충실 하는 사람 등, 이러한 사람은 맷돌질 하다 데라 갈 것이다. 여기서 맷돌질을 하는 사람이란 일반인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선량한 그리스도인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어디에 속해서 살아야 할지 스스로 택해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고 영혼의 목자이시다.

“너희는 알아라.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여기서 시편작가가 말하는 의미는 사람들이 하느님이라고 여기지 않는 그런 그리스도를 두고 한 말이다.저 주님은 여러분이 보기에 조롱거리로 삼을 만한 자가 아니던가? 여러분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채찍으로 때려 침을 뱉어 매달았으며 못으로 박았고 창으로 찔렀고 무덤에까지 보초를 세웠다. 하지만 그분은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알아라.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만물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환호할 것이 무엇인가? 그분께서 우리를 만드셨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오만하게 뽐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의 목장의 양떼이로다. 저 모든 양떼가 한 마리아 양이 되었고, 또 목자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신다. 당신 피로 그 양을 되찾아 어깨에 들쳐 메고서 양 우리로 데러 오신다. 이 목자께서는 그 양을 위하여 당당하게 죽음을 맞으러 가시며, 부활하심으로써 그 양을 차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 목장의 양떼이어라”

 

하느님께 꾸준히 고백해야 한다.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고백하면서! 문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고백으로 시작하라 바로 그래서 이 시편이 <고백의 시>이다. 거기서부터 고백하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만들지 않음을. 아울러 만드신 분을 찬미해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 선이 유래이며, 그분에게서 멀어짐으로써 우리 악을 우리 스스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분이 우리의 보호자이심을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분 안뜰로 들어가라” 찬양을 올리며, 그분께 고백하라. 즉 그분의 안뜰로 들어가거든 찬양을 올리며 고백하라는 것이다. 찬양은 곧 찬미이다. 들어 갈 때는 자신을 뉘우쳐라. 그러나 들어가서는 그분을 찬미하라.“내게 열어라 정의의 문을, 그리로 들어가서 나 주님께 고백하리라(시편 117)”

 

주님의 자비와 진리

“그 이름을 찬미 하여라” 우리의 찬미는 식사와 같다. 우리가 찬미하며 할수록 힘을 얻는다. 그리고 찬미하는 대상이 그만큼 감미로워질 것이다. “그 이름을 찬송 하여라, 주님께서는 감미로우시다.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며 그분의 성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세세 대대”란 말은 모든 세대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상의 세대와 천상의 세대이다. 두 세대로 생각해도 좋다. 지상의 세대는 사멸할 자들을 출산하는 세대요 천상의 세대는 영원한 존재들을 출산하는 세대이다. 그런데 그분의 진리(=성실)는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 현세에는 그분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현세에 그분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았던들 다른 시편에서 “진리가 땅에서 돋아나리라.”(시편 84,12)라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진리이신 분께서 친히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마태 28, 20)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 참고문헌:  성 아우구스티노의 찬양시편, C. 보르고뇨/ 성염 옮김, pp. 174-197.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240-241.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 583-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