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103(102)편: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다

마리아 아나빔 2012. 9. 17. 21:24

 

 

 

                                시편 103(102)편: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다

 

들어가면서

 

1. 이 시편은 시편작가가 오묘한 우주를 예언자의 눈을 가지고 하느님을 바라보는 찬양시편이다. 우주의 뒤에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며 다채로운 것들에게 질서정연한 풍부한 존재를 주시는 분의 현존을 발견한다. 이 시편에는 창조가 하느님의 손에서 나온 그 순간의 빛에 가득한 신선함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현존은 어디에나 계시고, 그분의 활동은 강하게 또 원활하게 우주의 모든 면에 고루 펴져 있고 하느님의 활동 아래 우주는 악기처럼 진동한다. 그리고 그 켜는 음절은 보편의 조화를 만들기 위하여 거듭되거나 교차된다.

 

시편작가는 우주의 이 노래를 자신의 지혜와 마음에 모으고 감사의 의식적인 노래로 바꾼다. 이 시편엔 사람에 대한 암시가 잠시 나올 뿐이지만, 사람을 초점으로 여기기 충분하다. 이 세계 안에 있는 인간의 현존은 왕 또는 중재자로서의 존재이다. 사람은 우주에 있어서 하느님을 가장 충실하게 닮은 존재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세상에 있는 하느님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로 정의 된다면, 다른 피조물은 사람과의 관계로 정의된다. 그리고 이 시편은 주님을 찬미하라는 초대로 시작된다.

 

피조물은 시편작가에게 숭고한 시의 환상에 싸여서, 시편작가의 눈앞에 차례로 떠오르고, 거기에 피조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고 시인의 시어로 그것이 묘사된다. 빛은 하느님의 두루마기로(2) 이어 하늘, 구름, 바람, 천둥이 나타난다(2-4). 거기에 땅과 거기에 있는 산들, 골짜기들이 나타난다(5-9). 그리고 땅을 기름지게하고, 동물과 사람에게 양식을 주시고, 새들의 보금자리가 될 나무들을 자라게 할 비와 강이다(10-18). 그러고 나서 휴식과 일할 때를 알리고, 이 세상 온갖 생활과 활동을 규제하는 계절, 낮과 밤의 교체,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위대하신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19-23). 그리고 그의 눈앞에 광대한 대양이 펼쳐진다. 거기에 생명의 온갖 양식이 서식하고, 사람은 백성과 백성을 연결하여, 거기에 길을 만든다(24-26).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나온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께로부터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계속 받는다. 만일 하느님의 입김이 없었다면 모든 것은 멸망한다. 하느님의 입김은 우주에 있어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근원이시다(27-30). 지혜와 소망의 샘인 사람의 영혼도 하느님의 입김이시다. 시편작가는 하느님께서 창조를 끝냈을 때처럼, 하느님이 손수 하신 일을 항상 기뻐할 수 있도록 소망하며 시를 마무리한다. 자기편에서 하느님의 기쁨을 발견하고, 그리고 이 기쁨을 찬미로써 나타내고자 한다. 이렇게 깊은 지혜로 행하신 하느님의 일을 불경과 사악으로 더럽히는 사람들은 사라지길 바란다(31-35).

 

2. 신약의 계시는 창조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깊게 한다. 계시는 창조의 기초와 그 구원과 완성이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은 당신의 본질과 형상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요 하느님의 본질을 간직하신 분이다. 인간이 죄를 지은 후,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에게 완전한 본질을 주시고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키신다. 예언자들이 알린 속죄는 새로운 창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한없는 사랑을 가지시고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그것을 당신의 신비를 위하여 쓰신다. 그리스도께로 빛을 받아 창조계는 새로운 투영을 띠고, 은총의 초자연적 세계의 표가 되어 본연의 사명을 찾게 된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에게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삶의 신비에 참여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이 세상 사물은 영원한 생명의 샘이 되었다. 세례의 물, 성체의 빵과 포도주 그리고 성유와 발삼이 그러하다.

 

3. 교회의 전례는 성사의 신비를 나타내기 위하여 창조계에서 크게 말을 빌려 창조계를 존중하였던 것이다. 창조계는 계시의 첫 번째 책이다. 두 번째 책은 성경이다. 이곳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의 첫째 창조의 의미로 다시 한번 발견하도록 죄인인 인간을 도와주시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자연의 사물이 여러 가지 형태로 그리스도라는 한분의 현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원형으로 돌아간다.

 

교회는 성경의 빛 속에서 피조물을 바라고보 그들 가운데 전례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가까이 가기 위한 수단을 찾아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생명의 양식이며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이시며 힘을 주시는 빵이시다. 그리스도의 영은 인류의 얼굴을 기쁨으로 빛나게 하는 기름이시다. 우주의 아름다운 광채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며,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나는 아름다움과 빛의 반영과 상징이다. 그 빛 속에서 모든 것의 모습은 변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활동은 자연계 안에서보다는 초자연계에 그분의 전능과 지혜, 그분의 사랑과 섭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세계에서 하느님께서 성령의 입김을 가지시고, 항상 모든 것을 살리시고, 새롭게 하신다. 성령은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을 성전삼아 그 안에 거처하시고 그 안에서 기도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거 하신다. 성령은 교회의 온전한 진리에로 인도하시고, 교류와 봉사로 일치시키시며 교계 제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은혜로써 교회를 가르치고 지도하시며 당신 활동의 결실로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신다. 그래서 이 시편은 성령강림축일에 적용된다.

 

교회는 이 거룩한 시를 자신의 전례에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지닌 지혜를 가지고 이 시의 뜻을 이해하고, 또 이해하기를 바라며,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서나 주님의 깊은 사랑의 현존을 나타나 있는 우애 안에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속성을 인정하고 그들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우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새로운 발견은 하나의 계시이지만,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하나의 탄핵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우주와의 만남에는 인간의 기본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그 태도는 바로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다. 이것이 있다면 인간은 창조계에서 살아 있는 물질적, 기술적 진보의 수단을 얻을 수 있는 동시에, 거기에서는 또한 창조주께 대한 믿음과 사랑과 감사, 또 자신에 대한 내부적인 깨끗함을 발견할 수 있다.

 

Text 안에서

 

상대적으로 긴 시편 103편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1절과 2절, 그리고 22절 3행이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는 사실이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로 시작하고 마친다. 3-5절은 하느님의 구원 업적, 곧 시편작가에 대한 하느님의 선행에 대해서 말한다. 6-19절도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 ‘인간’ 자체에 대한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 자신의 속성들에 대해서 노래한다. 15-16절에서 시편작가는 인생과 인간의 무상함을 읊고 있지만 이 역시 앞의 14절이 명확히 있듯이 하느님과의 관계 아래서이다.

 

1-2절: 찬미 1

 

시편 103편은 “내영혼아”하고 시편작가가 지신을 부름으로써 시작한다. 영혼(네페쉬)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사물, 사건 또는 인간의 총체적으로 보고 전체를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시편 86, 2에서도 다룬 것으로 ‘영혼’은 목구멍(호흡기관과 식도), 목(목구멍이 있는 부분 전체), 열망과 욕구(목이 타는 듯한 열망이나 욕구), 영혼 또는 정신(열망, 욕구 및 모든 감정의 주체로서의 영혼 또는 정신), 목숨과 생명(숨 넘어가가. 숨지다의 뜻으로 생명과 관계됨), 인격체 자신, 그래서 나, 너의 대명사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내영혼아”라고 함은 이러한 모든 명을 통합한 총칭으로서 ‘나’를 뜻한다. 시편 1절 2행에서 “내 안의 모든 것들”이라고 부른다. 특히 생명의 자리, 감정과 사고 등의 자리를 말한다.

 

시편작가는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대한 찬양에로 부르고 있다. 흔히 찬양시편에서는 다른 주체들을 찬미에로 권고한다. 이 시편에서는 자신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할 개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다시 한번 같은 말로 자신을 하느님께 대한 찬미에로 부른다. 이러한 찬미는 지속성을 가지는 것으로써, 지속적인 기억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흔히 잊어버리는 인간의 속성에 대하여 자신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구체적인 은혜로운 일들이다. 아주 구체적인 감사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3-5절: 찬미의 근거 1

 

감사시편과 찬양시편의 차이점은 감사시편은 자신이 경험한 하느님의 구원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시편이다. 그래서 회상, 곧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과거로 이야기하는 형태가 그 기본적인 구성 요인이다. 반면 찬양시편은 하느님의 구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시편이다. 과거 형태가 아닌 현재 형태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재적 묘사는 개념적, 철학적, 또는 신학적으로 고찰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하느님의 구체적인 업적으로부터 밝혀진 하느님의 존재와 특성을 일반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결국 감사시편과 찬양시편은 둘 다 하느님의 구원과 구원을 위한 그분의 존재를 노래함으로써, 이 두 종류의 시편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감사시편을 찬양시편이라하고 그 반대로 말하기도 한다. 하나는 과거에 일어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하느님께, 그리고 회중에게 보고하고 이야기함으로써 하느님을 찬양하는 시편을 말한다. 그리고 후자는 하느님의 이러한 개별적인 구원 행위, 더 중요하게는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서술함으로써 그분을 찬양하는 시편이다.

시편작가가 하느님께 찬미와 찬양을 드려야 하는 이유로(3)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신다는 사실이다. 죄와 병, 이 둘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아픔이라 할 수 있다. 시편작가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체험까지 포함하여, 자신의 과거 경험을 토대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을 제거해주시는 분이시라고 일반적으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죄와 병이 깊은 관련 아래 놓여 있음을 뜻한다. 고대인들, 더 좁게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고통과 고난, 특히 병을 죄의 결과 내지는 그에 대한 벌로 여겼다. 많은 경우,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써 그 죄는 필연적으로 그 범죄자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어떤 외적인 작용 없이 죄 자체가 죄인 주위에 파멸의 세력권을 형성함으로써, 죄를 범한 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파멸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구약성경에서 이러한 생각은 학자들 사이에 많은 토론이 있어왔다. 애초에는 이스라엘도 주변 문화권에서와 같이, ‘악행은 불행, 선행은 행복’이라는 등식이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원시적이고 마술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결국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따라서 고차원적으로 순환된다. 곧 악행-불행과 선행-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는 하는데, 이등식이 가능하도록 하는 힘은 인간 외적인 요인의 작용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느님 외적인 요인의 작용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고, 또 당신 스스로 그렇게 작용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기계적으로 마치 저울로 재듯이 행동하는 기계는 아니시다. 기계적인 인과응보는 구약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이것은 구약성경 시대의 후대에 들어오면서 상당한 문제가 된다(욥기와 전도서). 구약성경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척도로 잴 수 없는 하느님, 그리고 인간의 생각과 다른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의 역사 안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주된 생각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개입의 결과로서 시편작가는 자기의 죄에 대한용서와 병에 대한 치유를 노래한다.

 

죄와 병, 그리고 이것들에서의 구원은 결국 죽음과 삶의 문제다. 3절에 이어 4절에서도 시편작가는 자기를 죽음에서 구해내셔서 살게 해주시는 하느님을 노래한다. “구렁”은 우리말의 ‘죽음의 구렁텅이’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죽음의 세계를 말한다. 이것은 죽었었음을 뜻하지 않고 죽음 직전까지 다다랐었음을, 죽음의 세계와 죽음의 절대적 영향권 안에 거의 빠졌었음을 의미한다.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출된 기도자에게 하느님의 자애와 자비(hesed)라는 관이 씌워진다. 이것은 계약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성으로써 근본적으로 시나이 산의 계약을 말하고, 이 계약을 통하여 하느님께선 위하시는 분, 구원을 베푸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러한 계약과 약속에 대한 성실성은 내적으로만 머물러 있는 성격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출되는 특성을 지닌다. 성질만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오는 구체적인 결과까지도 내포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흔히 ‘은총’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4절에서 시편작가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주시는 분”이라는 특별한 표현을 쓴다. 자애와 자비는 하느님의 덕성을 말한다. 이 덕성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의 동적, 활동적 속성을 말한다. 그래서 위의 표현은 하느님과 시편작가의 관계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속성인 성실과 자비에 따라 시편작가에게 베푸시는 구체적 은혜들을 말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마치 대관식 때 임금에게 왕관을 씌워주듯이 하느님께서 시편작가에게 당신의 성실과 자비의 관을 씌우신다고 말한다. 이렇듯 궁월에서 쓰였던 언어를 보통사람이 빌려왔다손 치더라도, 일반인에게 임금 전용 언어를 적용했다는 의미에서 놀라운 평등사상과 민주주의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관식을 해야, 곧 왕관을 써야 비로소 정식으로 임금이 되듯이, 4절의 말씀은 인간이 하느님의 은혜를 입을 때 비로소 참다운 인간, 죽음의 세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참 생명을 누리는 인간이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서의 그분에 의한 생명을 시편작가는 5절에서 읊고 있다. “그분께서 네 한평생을 복으로 채우시어, 네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지는 도다.” ‘복’은 ‘좋은 것’, 구체적인 선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생명의 표지이고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성실과 자비의 결실이다. 이 결실을 구약성경은 바로 이 세상이 누리는 것으로 여겼다.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진다는 상징은 이사 40, 29-31에서 더 뚜렷이 볼 수 있다. 날개를 자주 저어야 하는 다른 새들과는 달리 어려움 없이 하늘로 속아 오르고, 더 높이 날고, 뿐만 아니라 자주 쉬는 다른 새들과는 달리 별로 쉬는 것 같지 않는 새가 바로 독소리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독수리를 청준과 젊음 그리고 힘의 상징으로 내세운다. 물론 소도 특히 바산이라는 지방의 황소도 힘의 상징으로 쓰이지만, 경쾌함, 가벼움 등은 독수로 더 잘 표현된다.

 

6-19절: 찬미의 근거 2

 

시편작가는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어떠한 분이신지를 서술했다. 이제 세 번째 부분 ‘찬미의 근거 2’에서는 보다 일반적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어떠한 분이신가를 묘사한다.

 

그 첫째가 억눌린 이들에게 정의를 실천하시고 공의를 베푸시는 하느님이시다. 6절의 “정의”는 본디 히브리말에서 복수형이다. 정의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의 하나로, 명사형에 형용사, 동사 형태까지 합쳐 5백 번 이상 나온다. 구약성경의 정의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정의를 다분히 그리스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해왔고, 이러한 이해가 본디 이스라엘인들의 이해에서 멀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로마를 근원으로 하는 서양의 전통적인 정의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는 ‘각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바를 주고자 하는 항구한 의지’ 라는 정의에서 출발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정의가 나오는데 첫째, 법률적 정의이다. 이는 개인의 사회 또는 공동체에 대한 법적인 정의, 또는 법에 따른 올바른 관계를 도모하는 정의로서 개인이 공동체 또는 공공의 복지를 위하여 규범이나 법칙을 존중하는 것이다. 둘째, 교환적 또는 보상적 정의이다. 이는 개인의 개인에 대한 법적인 관계 또는 올바른 관계를 도모하는 정의로서 사회 또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법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귀속하는 것을 인정하고 부여하는 정의이다. 이러한 정의에 위배되는 것이 절도, 강도, 사기, 불의한 훼손 등이다. 셋째, 분배적 정의이다. 이는 사회 또는 공동체의 개인에 대한 법적인 관계 또는 올바른 관계를 도모하는 정의로, 사회 또는 공동체가 그 구성원에 대하여 그 지위와 능력에 알맞은 부담과 의무, 그리고 명예와 이익의 분배를 지키는 정의다. 이 정의는 20세기에 와서 노동문제와 관련하여 제기된 정의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의를 중시한다. 어떤 이상적 원칙이나 법적인 것이 아니라,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연상과 연하, 그리고 벗들 사이의 의로써 관계의 충실을 뜻한다. 특히 유교의 인과관계는 중요시되었고, 구체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정의에 대한 이해가 ‘관계’라는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근래에 와서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관계에서 출발함이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구체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이러한 인간관계, 이 관계로 형성되는 공동체가 중요하였다. 이는 당시의 생활방식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유목민은 물론이고 농경민도 항상 낯선 사람과 낯선 동물의 위협 속에 살아야 했다. 가족 또는 씨족 공동체란,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이러한 외적인 위험에서 서로를 보호하고, 생활의 수단을 공동으로 마련하는 집단이다. 그래서 공동체 밖으로 나감은, 그것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곧바로 위험에의 직면과 생존 수단을 결핍을 의미하게 된다. 극적으로 표현하면 공동체 밖은 죽음이다. 정의란 바로 이러한 공동체 안의 ‘관계의 충실함’, ‘이 관계에 충실히 행동함’, ‘이 관계에의 충실성’, ‘충실한 행동이 가져다주는 결실(구원)’등을 뜻한다. 곧 구체적인 관계를 축으로 하여 생성되는 여러 가지 면들을 총체적으로 ‘정의’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정의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시편 103편에서 “주님께서 정의를 실천하시고”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인간과의 관계, 더 구체적으로 억눌린 사람들과의 관계에 상응하여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충실한 행동들을 실천에 옮기심을 뜻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억압받는 이들에게 구원을 베푸심이다. 이 낱말은 때로 법규, 율법으로도 번역되는, 법적인 용어이다. 따라서 재판을 하다의 뜻으로 판관만의 행동이 아니라 임금의 통치권 행사 전체를 뜻하고 또 이른바 ‘민중재판’등을 말한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공의’는 오늘날과 같이 전문화된 법체제에서 보다도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재판-판결-법-각자에게 해당되는 권리, 의무/ 통치-구체적 통치의지/ 통치력-법조문들/ 법에 따른 통치-율법들/ 의로운 통치이다.

 

그러므로 공의는 하느님의 정의고 공의로운 통치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억눌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 저변층, 소외 계층을 이루는 사람들이다. 시편작가는 바로 이러한 이들의 하느님으로 야훼하느님을 내세운다. 이것은 구약성경 곳곳에 강조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느님을 그들의 역사 안에서 경험으로써 그러한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의 길들은 모세에게,/당신의 업적들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리셨도다.” 당신의 길들은 동양적 표현으로는 ‘당신의 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행동방식과 이에 따른 구체적 행위들을 뜻한다. “당신의 업적들”은 하느님의 어떤 객관적인 행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구원의 업적들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역사적 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구체적인 행동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다. 이러한 계시는 역사적으로 모세와 함께 시작한다. 7절은 말씀은 이스라엘의 근본을 이루는 이집트 탈출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8절은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시며 자애가 넘치는 분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죄를 지음으로써 정당하게 하느님의 분노를 사게 되었을 때에도 그분께서는 자비하신 분으로서 벌을 주시는데 더디시다는 것이다. 분노는 인간 쪽에서 본 하느님의 벌이다.

 

9절에서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따지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따지다’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법 생활에서 나온 동사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민사소송’을 거는 것으로 표현된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재판관으로 하여금 시지를 가리고 나에게는 보상을, 잘못한 이에게는 벌을 주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송은 하나의 과정이다. 곧 사건이 일어날 때부터 판결이 내려져 이에 따른 보상과 벌을 이행될 때까지의 과정이다.

 

9절의 두 번째 표현인 “끝까지 따지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도다”는 피해자의 심리를 하느님께 적용시킨 것이다. 또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처럼 자식이 잘못했을 때 부모가 화를 오래 품지 않고 곧바로 풀어 용서를 베풂과 같이 하느님께서도 그러하시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이러한 자비와 용서를 9절에서 이어 10절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9-10절은 잘못한 인간에게 끝까지 그 잘못을 추궁하여 그 죄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과 같지 않으심을, 기계적인 정의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심을 강조한다.

 

11절과 12절에서는 몇 지 비유로써 ‘높음’과 ‘강함’의 비유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 색다른 비유들이지만, 이 비유의 의도 중의 하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그분의 자애 사이의 관계가 땅과 하늘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 여기서 땅은 절대적인 수용자이다. 땅은 하늘로부터 빛과 물을 받는다. 곧 생명을 받는다. 12절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용서를, 11절의 ‘높음’에 이어, ‘멂’의 비유를 써서 그리고 있다. 죄의 용서에 대한 다른 예시로는 죄를 씻어냄으로써 죄인이 눈보다 더 희어진다는 비유다. 여기 시편 103,12에서는 죄를 멀리 치워버리신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11-12절에서는 종과 횡의 장소적 범주를 사용한다. 종은 하늘과 땅이고, 횡은 해 뜨는 곳과 해지는 곳이다. 이들은 종과 횡의 극들이다. 이 말씀으로 시편작가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이렇게 무한히 높고 무한히 넓음을 나타낸다.

 

13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아비와 자식의 비유로써 그 절정을 이룬다. 여기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불행하게도 자주 ‘탕자의 비유’로 잘못 불리는 루가 15장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된다. 이 비유에서도 그 중심은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머니의 사랑이 더 지극한데...?’라는 의아함이 일어날 수 있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한 경우가 많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중요한 예로 이사 66,13과 이사 49, 14-15를 들 수 있다. 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어머니의 젖먹이에 대한 사랑보다도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비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정의와 공의, 그리고 자애와 자비에 있다. 그리고 이차적 이유는 인간의 조건 자체 안에 있다고 14-16절은 말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자비로우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의 나약함과 무상함에 있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불쌍하고 힘없는 자식에게 사랑이 더 간다.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선 14절은 창세 2,7을 연상시킨다. ‘티끌로 빚어져 다시 티끌로 돌아가는 인간’이기에 하느님께서는 더 큰 자비를 베푸신다. 이와 비슷한 논거를 집회 18, 8-14절에서도 볼 수 있다.

 

15-16절은 인생의 무상함을 읊은 것이다. 여기서 바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바람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서쪽과 남쪽 사이에 있는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는데, 그 바람은 매우 무덥고 건조하다. 이 바람이 불면 꽃도 금방 시들어버린다. 결국 인생 또한 바람 앞의 꽃처럼 무상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무상한 인간이기에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실 수밖에 없다. 무상한 인간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자비가 내린다. 이것이 인간을 진흙덩어리 이상의 존재로 만든다.

 

정의와 자애는 이미 언급한 대로 하느님의 속성이다. 17절에 묘사된 인간의 무상함과 허무함을 배경으로 하여 하느님의 영원불변한 자애와 정의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내리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받을 준비가 된 이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베푸신다. 인간은 자기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채워야 한다. 그리고 17절에는 하느님의 경외가 다시 말해지고 있다. 이 경외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임이다.

 

18절은 하느님께 대한 이 근본적인 자세는 그분과의 계약을 지키고 여기서 나오는 법규 또는 규정을 지킴으로써 구체화한다. “계약과 규정”이 대구법으로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 계약은 가장핵심적인 요소이다. 계약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것이다. ‘야훼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 된다.’ 이렇게 되면 쌍방이 지켜야 할 바가 그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하느님의 의무는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의무는 그들의 하느님이신 야훼님께 충실함이다. 이 충실성은 구체적으로 시대가 흐름에 따라 십계명과 율법들로 발달한다. 물론 발달의 씨앗은 십계명의 제일 계명이다. 여기에서 ‘계약을 지키다’라는 표현이 나오고, ‘규정을 실천하다’라는 표현 역시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상당히 긴 19절에는 새로운 주제가 도입된다. 하느님께서 임금이시라는 것이다. 그분께서 첫째, 온 우주의 임금이시다. 그 옥좌는 하늘에 있고 그 왕권은 온 세상을 덮는다. 둘째, 억압받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계약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정의와 사랑을 베푸시고 펼치시는 임금으로서의 하느님이시다.

 

20-22절: 찬미 2

 

자기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편작가는 여러 존재들을 하느님께 대한 찬양으로 부르고 있다. 그분의 천사들/ 그분 말씀을 실천하는 힘센 용사들(20절)/ 그분의 모든 군대들/ 그분 뜻을 실천하는 신하들(21절)/ 그분의 모든 업적들(22절) 이다. 20-21절이 말하는 존재들은 종교사적으로 긴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야훼님께서 우주의 임금이시기에 이 임금님의 뜻과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이 있음을 나타낸다. 22절의 “업적들”은 하느님 피조물 전체를 뜻한다.

 

하느님의 왕국의 모든 장소에서 그분의 찬미하라는 22절 2행의 말은 모든 존재, 곧 하느님의 왕권 밑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말씀이다. 우주적 찬미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시편 103편은 그 첫 머리에 나왔던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 하여라”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말은 같지만 뉘앙스는 처음과 전혀 다르다. 시인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전 우주 앞에 서서 하느님을 찬양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편작가가 자신을 다른 모든 존재들보다 앞선 존재로 생각한다는 말은 아니다. 천상의 존재들, 지상의 모든 존재가 시편작가의 하느님께 대한 찬양의 동지들인 것이다.

 

끝으로 이 시편 안에서 하느님의 속성을 살펴보자 먼저 자애와 자비(4절)/ 정의 와 공의(6절)/ 자비로우심과 너그러우심 그리고 분노에 더디심과 자애(8절)/ 자애(11절)/ 가엾이 여기심(13절)/ 자애와 정의(17절) 이 밖에도 하느님의 여러 구원 행위들이 말해진다.

 

위의 열거한 것들 중에서, 거의 처음과 마지막에 “정의”가 나오고, 그 사이에 “자애”가 네 번 나온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혜(여러 가지 덕성들)’을 시편작가는 영원히, 장소적으로 상하좌우의 네 극과 같이(11-12) 높고 넓은 것으로 노래한다. 이에 반하여 인간의 죄에 대해서도 여러 번 언급한다. 모든 잘못/ 네 모든 아픔(3절)/ 우리 죄와 우리 잘못(10절)/ 우리의 허물(12절)이다. 죄에 대해서 말함은 이를 고찰하거나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러한 하느님의 속성, 곧 은혜들을 시편작가는 철학적 신학적인 사고의 결과로 알아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하느님과의 계약 공동체의 역사적 체험(7절), 그리고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겪었던 체험*3-5절)을 토대로 알아낸 사실이다. 하느님께서는 역사적인 구체적 사건들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정의, 자애, 자비는 신약성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나타난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요한 3,16).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응답, 이렇게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그 잘못을 용서하시고 아픔을 낫게 하시고, 자비와 자애로 관을 씌워주시는 하느님, 그 자애와 자비가 하늘보다 더 이 세상보다 더 넓으신 하느님, 결국 당신의 외아드님까지도 보내주신 하느님께 대한 인간 쪽에서의 응답이 바로 찬미다. 그래서 이러한 시편 103과 같은 찬미시편은 모든 믿는 이들의 찬미도 되는 것이다.

 

 

※ 참고문헌: 당신말씀 나의 등불, 임승필, 성바오로출판사, 1992, pp. 243-265.

               시편,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250-252.

               시편,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기념, 크리스찬 출판사, P. 603-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