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118편(117): 장막절의 노래(버려짐에 대하여)

마리아 아나빔 2012. 11. 5. 14:38

 

 

 

                   시편 118편(117): 장막절의 노래(버려짐에 대하여)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무엇인가 은혜를 받고, 적에게 승리를 얻은 저명한 사람이 드리는 개인적 감사기도라 하지만 오히려 성전의 전례용인 집단의 기도이다. 저작시기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지만 기원 전 444년의 장막절이라고 한다. 이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도성의 성벽을 재건하 고, 이 장막절을 성벽의 둘레를 도는 행렬로써 축하한다(느헤 12, 27-43). 또 하나의 가설은 마카베오의 유다가 기원 전 165년 때 행한 두 번째의 성전 재건 무렵, 성전의 정화예절에 사용하기 위하여 편집된 것으로 본다(마카 상 4, 36-59). 3부로 나뉜 이 시편은 전례 행사를 묘사하고 그 행사에는 자주 연도형이 사용되고 있다.

 

시편은 이스라엘의 사제들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향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리라고 하는 초청으로 시작되며, 백성이 되풀이 하는 후렴,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로 끝난다(1-4).

 

2부에서는 성전에 올라가는 사이에 백성 자신, 혹은 누구인가 지도자의 말을 이어진다. 그 이야기는 주께서 자신을 중대한 위험에서 구해주셨다는 것을 연상하고, 그렇기에 사람이나 능력 있는 이에게 의지하기보다 주님께 피신하는 편이 좋으리라고 말한다(5-9). 적은 벌떼처럼, 혹은 “가시덤불의 불”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쓰러뜨리려 하지만 주께서 자신을 구해 주셨다. 10절 1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 재건을 위하여 직면한 온갖 곤란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런 많은 시련을 겪은 뒤, 하느님께서 받은 보호의 개입은 크나큰 기쁨으로 변했다. 올바른 사람의 장막에는 기쁨의 환성이 울렸다(15). 15절은 도성의 재건을 이은 기원 전 444년의 장막절을 암시한다고 생각된다.

 

시편 3부에는 성전에 들어가려고 할 때, 또 성전 안에서 행렬의 지도자와 백성 및 사제들과의 대화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22절은 또 예루살렘의 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가까운 이웃나라는 이 재건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무시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오히려 주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서 택하셨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임을 나타내려고 한다. 백성은 재건의 날을 바라보는 것을 기뻐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호산나”(구원하소서)하고 외치며 하느님의 구원을 간청한다(25). 성전 안에서 사제들은 들어오는 사람들을 축복한다.

 

장막절은 빛의 재건이다. 날이 저물고 나서 성전은 부인들이 뜰에 놓여 있는 커다란 촛대에 비추어지고 그것은 밤새워 타오른다. 거룩한 도성 전체에 커다란 빛이 가득차 있다는 느낌이다. 사막의 빛의 구름을 기념하여 행하는 이 흥미진진한 예절은 하느님께서 그 빛을 가지시고 이제부터도 이어서 거룩한 도성과 그 신자를 이끄신다고 하는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시편 3부를 보면 감사의 시편이 어떤 사정 아래에 생겼던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감사의 시편을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례행사를 배경으로 하여, 그 행사의 일부를 이루고 군중의 활발한 참가를 나타내고 있다.

 

시편 118편은 구약의 과월절의 만찬에 사용되는 할렐루야의 시편의 하나였다. 이 시편은 히브리인에게 이집트로부터의 하느님께 의해 해방된 것을 회상시킨다. 주님의 오른 팔이 자기네를 위하여 신비를 행하신 영광의 나날을 회상하게 하고, 당시 히브리인은 그 장막에서 함성을 질렀다. 과월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만드신 날이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집의 모퉁이 돌로 선택된 날이며, 그 날에야말로 그들이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라고 외친 날이었다. 이처럼 과월절은 자유를 다시 찾아 얻은 기쁨과 감격의 날이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만찬 끝에 이 시편을 노래하셨다. 이리하여 성체로써 신약의 새로운 전례는 이 시편의 말을 가지고 시작되었던 것이다. 시편을 가지고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 그리고 영원한 날의 영광에 이를 길을 걸어가셨던 것이다. 이 시편을 가지고 예수께서는 메시아적 의미를 지적하시기도 한다. 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토론 할 때 ‘너희는 성경에서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라고 말씀하시며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질책하신다. 옛 이스라엘 적이 선민을 업신여기고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려 한 것 같이, 지금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를 거부하고 자기네 나라를 재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건축은 무너지고, 그리스도라고 하는 모퉁이 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요, 장애물이 된 바위였다”(1베드 2,7-8).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건축의 모퉁이돌이 되셨다.

 

히브리인의 전례를 위하여 지은 이 시편은 그리스도교의 전례에서도 잘 사용되었다. 그것은 여기에 그리스도의 생활의 가장 중대한 신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의 왕 또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탄생 때에 이 시편을 가지고 주님을 맞이하고, 그리고 또 매일 의 미사통상문에서도 쓰고 있다. 전쟁의 쓰라림과 포로의 슬픔 뒤에 거룩한 도성이 재건되는 것을 본 히브리인에게는 그것이 기쁨과 축하의 잊을 수 없는 나날이었다. 수난의 나날에 전례는 이 시편에 있는 말을 그리스도 자신께 말씀하게 한다. 성 목요일의 저녁미사에 그리스도의 입으로 하고 있는 이 시편의 말은 그 부활을 알리는 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되고 새로운 생명에의 인류의 부활을 축하하는 나날에 특히 이 시편을 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은 참으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교회는 이 새벽을 알렐루야의 노래와 이 시편의 노래를 가지고 맞이하는 한다. 부활축일 1주간의 모든 미사에 나온다. 그것은 이 시편이 주님께서 주신 이 날의 신비와 은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날에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와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나타내고, 그리고 우리는 그것 때문에 감사한다.

 

교회는 몇 세기부터 이 시편을 일요일 마다 부르고 있다. 일요일은 마치 조그마한 부활의 날과 같고, 그리스도인의 집회에서 주님께서 지으신 이날을 신비와 은총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시편이 그리스도의 신비를 나타내고 있으나, 우리는 전례년의 행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 안에서 그 같은 신비를 새로이 하심을 알고 있다. 이것은 종말의 날에 영광이 나타날 때에, 머리와 지체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의 음성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에서 이 시편을 노래할 그날까지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시편에서 청원과 특히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희망을 얻는 것이다.

 

끝으로 시편 118편은 순수한 기쁨의 노래이며, 인생의 고통과 시련은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을 인정하기 위한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지나간 쓰라린 회상은 하느님께 대한 보다 크나큰 신뢰의 근원이 되고, 기쁨과 감사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Text 안에서

 

어느 한 개인의 고난과 버려짐, 그 안에서 만난 하느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시편 118편은 이러한 계-응 구조를 잘 보여준다. 이 시편은 어느 특정 예식 때 불렀다고 추정되는데 ‘어느 날’이 등장한다는 점(24), 예식의 성전 문 앞과 성전 앞에서 거행되었다는 점(19-20) 제의를 집전하는 자와 회중의 계-응으로 진행되었다는 점(1-4), 축복이 선포된다는 점 때문이다. 이 시편에서 강조된 점은 메시아의 왕권이며, 그러한 이유로 가톨릭 시간 전례에서 1/3주간 주일 낮기도, 2/4주간 주일 아침기도, 단일 순교자 제1저녁기도, 여러 순교자 제1저녁기도, 성령강림 대축일 낮기도,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독서기도, 예수 부활대축일 독서기도, 예수 부활 대축일 낮기도에 불려지고 있다. 개인적 고백과 이를 청취한 회중의 공감이 함께 어울러진 118편은 크게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1-4: 감사와 찬양, 5-21: 고난 중 이루어진 구원을 고백, 22-29: 축복의 찬양이다.

 

1-4절: “주님을 찬송 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장애는 영원하시다.” 라는 1절의 표현은 시편의 마지막 구절(29절)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수미상관적 구조’를 통해 시편 전례의 통일성을 꽤했음을 볼 수 있고, 이로써 118편이 강조한 것은 “하느님의 영원한 선하심과 자애”이다. 1-4절은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라는 구절을 반복하는데, 계-응으로 부르는 방식으로 회중과 전례 진행자가 서로 연합한다. 즉 “찬송하라”는 외침으로 예식을 시작한 주도자는 “이스라엘”- “아론의 집안”- “주님의 경외하는 이들”에게 차례로 주님의 변함없는 성실하심을 찬송하라고 요청한다.

 

5-21절: 118편의 많은 부분(5-21절)은 한 개인이 고난 중 체험한 하느님을 고백하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고통과 절망, 기도와 매달림을 회중들에게 고백하고 그 안에서 만난 하느님을 증언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고통은 “두려움”에 있었다(6절).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나를 미워하는 자들”(7절)이라는 표현을 통해 ‘타인들’이 곧 그 두려움의 실체였음이 암시되는데,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하느님에 의해 소멸된다.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접고, 지상적 힘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였을 때(8-9), 즉 모든 인간적 방법과 힘에 의지하는 마음이 무너졌을 때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유일한 희망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특별히 10-12절에서는 그가 체험한 위기를 수사학적 대조를 통해 묘사하는데 “나를 에워쌌어도” “나를 에우고 또 에워쌌어도” “벌 떼처럼 나를 에워쌌어도”라는 반복적 대구를 통해 일종의 점층적 부각을 시도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사건과 적들이 그를 에워싸는 듯했지만, 주님에 대한 신뢰는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4절은 매우 강력한 찬양과 감사를 표현한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 이는 전통적으로 전승된 승리의 노래(탈출기 15, 2; 이사 12, 2)를 인용한 것으로 15-16절은 이 노래가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끄신 주님에 대한 찬양임이 암시된다. 그의 고난은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가지만 놀랍게도 저자는 이 고난이 하느님에 의해 시도된 것이었고 또한 하느님에 의해 해결되었음을 강조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그토록 벌하셨어도 죽음에 내버리지는 않으셨네.”(18) 죽을 만큼 힘겨운 고난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은총이었고, 이 목적이 이루어지면 결코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묘사한 것이다. 이제 그는 성전 문을 통해 성전 앞뜰에 들어가게 해 줄 것을 요청한다(19-21).

 

22-29절: 22절에서 전례 집전자는 ‘머릿돌에 대한 비유’를 통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운명 속에 일어난 체험을 더욱 분명히 노래한다.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은 “돌”같은 존재였지만 이제 그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 사실 건물의 머릿돌은 두 방향으로부터 짓누르는 건축물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선택해야 한다. 버림받았으나 그러한 고통을 통해 머릿돌의 자질을 갖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고백은 많은 이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켰고(23절), 신약성경에서도 종종 인용되었다(마태 21, 42; 사도 4, 11). 이러한 하느님의 기적, 그분의 승리를 경축하는 날이 바로 “이날”인 것이다(24절). 25절은 제사장의 축복 선포이며 감격한 백성들은 진심을 다해 믿음과 기쁨을 표현한다. 26절의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라는 표현은 4복음서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군중들에 의해 사용되었다(마태 21,9) 27절의 묘사는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켜 온 부분이다. “제단의 뿔에 이르기까지 축제 제물을 줄로 묶는” 행위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아서인데, 아마도 전례 시행되었던 일종의 ‘전례 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8절에는 개인의 노래가 다시한번 등장하고 이어 회중들의 감사로 노래는 마무리된다. 특별히 시작할 때 불렀던 내용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주님의 불변하는 사랑을 찬양한다(29절).

 

시편 118편이 부각시킨 메시지를 요약한다면, 주님께서는 나를 벌하셨지만 죽음에 내버리지 않으셨다는 것, 그렇게 주님은 내편이시기에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것,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주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하겠다는 것, 등이다. 버려짐과 고난, 그것을 극복하고 이룩해낸 승리를 표현한 것인데,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주도권을 쥔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에 대한 찬양과 감사 시편 전체의 근간이 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때, 자세히 보니 도와줄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일 때, 주제 파악 못하고 도움을 청하다니 가소롭다는 것이 그의 마음임을 알게 되었을 때, 심장은 돌처럼 굳어지고 돌이킬 수없는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울음을 그치고 비틀거리면서라도, 인간을 결코 죽음에서까지 버려두지는 않으시는 하느님을 향해 움직이며 걸어갈 때 나는 어느 순간 삶과 소통할 줄 아는 지혜를 얻게 된다. 돌덩이처럼 굳은 마음이 소중한 보물이 되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 삶이 누군가에 의해 뒤죽박죽되어도, 주변 모두가 두려움과 공포로 나를 압도해도, 차갑게 단단해진 심장을 움켜쥐고 차라리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 참고문헌: 성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695-702.

               구약성서 새 번역(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282-284.

               시편, 그 특별한 노래, 김혜윤, 생활성서(2112/5), pp. 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