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1(120): 이스라엘(나)를 지키시는 분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예루살렘을 그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오는 순례자, 그리고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해 걷는 나그네를 노래하는 순례의 시편이다. 눈을 유다의 산쪽을 향해 들고, 순례자는 나그네길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스스로 자문한다. 그리고 믿음은 곧 이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로부터만 옴을 말한다(1-2). 여기에 다른 소리가 끼어들어,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 속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보호하신다고 나그네를 격려한다(3-4). 하느님께서는 낮이나 밤이나 순례자 옆에 서 계신다.(5). 6절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자를 자연의 온갖 위험에서 지키신다는 뜻이다. 옛 의학에서는 달이 간질병의 원인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밤의 달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주님께서 낮이나 밤이나 성지를 향해 가는 이스라엘의 백성을 지킨 빛의 구름(탈출기 13, 21-22)에 대해 당연히 머리에 떠오른다(6). 주님께서는 떠날 때에도 돌아올 때에도 너를 항상 지켜 주시리라.“ 곧 탄생에서 죽을 때까지 신자를 지켜 주신다는 뜻이다(7-8).
이 시편의 구조는 대화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두 합창대에 의해 교대로 노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절대적인 신뢰의 감정이 이 시편의 전반적인 분위기이다. 먼 나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는 항상 온갖 위험에 부딪치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마음 편하게 피난할 수 있는 곳은 하느님의 보호밖에 없었다. 자기네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서는 이미 성조 야곱의 나그네길을 지켜 주셨고, 사막에서 겪은 멀고 먼 여행에서 이스라엘에 천사까지 보내신 그 하느님이시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다른 민족과의 동행을 일체 금지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가 하느님만으로 족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세상의 나그네인 교회는 이 땅에서 하늘까지 가 닿은 하느님의 거룩한 산 쪽으로 눈동자를 향한다. 그 하느님의 성전은 부활하셔서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곳에 이르기 위하여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스스로 묻고, 이 같은 시편의 깊은 신뢰의 기도는 교회를 위로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교회를 위하여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이 현존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켜주시고 그분 영으로써 살리시고, 그분의 성체와 피를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당신 신비체의 지체를 지켜주신다.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실현하셨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길을 걸어가고 있는 당신의 교회뿐만 아니라, 마지막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죽은 이들의 영혼마저 지켜보고 계신다.
무엇보다 시편 121편은 우리의 모든 영적 여정이 은총과 하느님의 보호에 대한 조건없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존재 안에 당신의 거처를 마련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을 자신이 맡으시고, 우리를 통하여 또 이 세상에 사시는 나그네가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한성”을 깊이 아시고 계시므로 우리보다도 우리를 잘 알고 계시다.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 영혼의 목자이시고 보호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은 신앙의 확신 아래 순례의 여정을 계속해야겠다.
Text 안에서
시편 121은 인간의 희망과 구원이 오직 하느님께로 부터만 옴을, 이유는 그분이 언제나 우리를 걸려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는 분’이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120-134편은 “순례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노래들인데, 특별히 120-122편은 시간적 연속성을 드러내 준다. 120편은 이방인들의 땅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121편은 예루살렘 근방이 배경으로 되어 있으며 122편은 예루살렘에 도착했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례를 중심으로 하는 연속적 진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21편은 한 순례자가 보여 주는, 하느님의 보호에 대한 굳은 믿음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대표적 신뢰시이며, 가톨릭교회에서는 2주간 금요일 저녁기도, 위령 성무일도 저녁기도,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2저녁기도, 삼시경을 위한 보충시편 등에 사용한다.
전반적으로 121편에는 두 개의 다른 전승층이 발견된다. 예루살렘과 그곳의 성전, 그리고 전례적 축복 등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 한편, 그것들과는 무관한 일상의 삶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원래는 일상적이고 개인적 내용의 노래로 제작되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루살렘을 부각시킨 범-민족적 내용으로 재구성되어 편집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구조상으로 볼 때, 1-2절은 질문과 대답이라는 일종의 ‘대화’ 형식을 통해 연결되어 있고, 3-8절은 ‘축복’에 가까운 내용으로 진행된다. 1-2절: 순례자가 보여주는 주님에 대한 신뢰, 3-8: 지켜 주시는 하느님의 보호에 대한 신뢰의 삼중 선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3-4절은 주님께서 주부시지도 않으시며 지켜 주실 것임을, 5-6절은 주님께서 그늘이 되어 지켜 주실 것임, 7-8절은 주님께서 환난을 면하게 하고 영원히 지켜 주실 것임을 말한다.
이 시편의 가장 큰 논쟁거리는 시편에 등장하는 인칭 대명사들에 대한 것이다. 시편에 등장하는 ‘나’와 ‘너’는 사실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한 개인의 독백을 대화제로 표현하였을 뿐), 글자 그대로 나-너의 대화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다양한 논쟁들이 존재해 왔는데, 예를 들어 폴츠는 예루살렘 순례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전해진 아버지의 축복이라고 주장하였고, 크라우스, 궁켈, 슈미트 등은 순례자와 제사장 사이의 대화라고 해석하였다.
1-2절: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이 노래는 “순례의 노래”라는 표제를 갖고 있는 시편 그룹의 두 번째에 등장하는 시편이다. 한국어 ‘순례의 노래’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쉬르 하마알로트’로서 번역하면 ‘오름의 노래’가 된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해설이 존재한다.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도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에 부른 노래이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주장, 성전이 계단을 오르면서 부른 노래(층계송)이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주장, 그것도 아니면 인생의 여정 중 하느님이 계신 곳을 향해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그런 제목이 붙었다는 해석도 있다. 또한 어떤 이는 유배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올라감’ ‘돌아감’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 노래들이 귀향 후에 성전과 공동체를 재건하던 때의 노래라고보기도 하지만 근거가 약하다. 그러나 시편이 시온이나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시편은 개인적인 기도였던 것을 어떤 편집자가 의도적으로 손을 대 예루살렘 성전의 전례에서 중요한 주제들인 시온신학과 축복이라는 요소를 가미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로 변모시켰다는 것이다. 반면 현제 상태의 이 시편은 성전 전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위한 것이고 실제적인 순례가 아니라 묵상 내지 영적인 순례를 위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시온과 일상의 삶을 이어주는 것으로 중요하게 부각되는 주제가 ‘축복’이다. 축복은 시온으로 오는 동시에 일상생활의 다양한 순간에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험한 풍파를 헤치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 속에서 시온과 그 축복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머무르시고 그들의 삶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기념하게 역할을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일상생활에서든 전례에서든 축복을 기원하는 자리에 잘 어울리는 문장이다.
그러나 120-122편이 예루살렘과 관련된 배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함은 분명해진다. 순례자는 “산들”을 언급하는데, 이때의 산들은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실제적 산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산은 신들이 거하는 장소로 이해되어 왔기에 다른 이방신들의 신전이 있던 산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산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에서 보면 ‘산들’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동반되어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을 암시한다고 본다. 이러한 산은 두 가지로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부정적 의미에서 산은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산들이나 순례자가 예루살렘까지 가는 도중에 지나가야 할 산들로써 구체적인 장소적 의미에서 위험한 곳들을 의미할 수 있다. (예: 착한 사마리아 사람) 또 어떤 이들은 “산들”이란 다른 신들, 가나안 인들이 섬기던 우상들에게 바쳐진 신전들이 있는 언덕들을 뜻한다고 본다. 그런 “산들” 곧 이교인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이 2절에서 언급된 “주님”과 대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해석하면 이 구절의 뜻은, 기도자가 그의 삶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요소 속에서 헤매다가, 또는 구원이 어디서 올것인지를 찾으며 먼저 다른 신들에게, 아니면 다른 어떤 기댈 곳에 눈길을 돌렸다가, 2절에 이르러서 그가 찾고 있는 구언은 다른 누구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될 것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산들은 산들을 향아여 눈을 든다는 것은 높은 곳,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하늘을 바라본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하늘에 좌정하신 분이여 당신께 저의 눈을 듭니다.”(시편 123,1). 이것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즐겨 사용되던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 라는 말은 시편 저자가 구원을 주실 분을 찾기 위하여 이러저런 (긍정적인 또 부정적인) 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혼자서는 삶을 헤쳐나갈 힘이 없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매일의 삶을 살아내기에 필요한 도움이 다른 누가 아닌 바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 표현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146편)에서의 호칭처럼 무질서한 혼돈에서 질서를 부여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 다른 누구도 지니지 못한 “무로부터의 창조”를 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 온 세상이 유지되도록 지탱하고 계신 바로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당신의 능역과 섭리를 통하여 우리의 길을 안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 그 얼이 나가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인 인간은 홀로 하느님 앞에 설 때,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분께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존속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2절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더욱 이 해설이 설득력을 가진다. 이 표현 안에는 ‘야훼’야말로 세상의 창조자이기에 모든 것의 확실한 주인이 되시는 분임을, 그러므로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그분의 주도권을 통해 이루어짐을 여러 측면에서 강조한다. 결국 순례자가 찾는 “도움”은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만 옴을 천명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 시편은 어딘가 ‘피신할’ 곳이 필요한 사람의 기도임이 분명하다.
3-8절: 깨어 지키시는 하느님
후반부는 1-2절에서 얻게 된 통찰을 다시금 강조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지는데, 미래적 약속을 포함하는 축복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조되고 있는 대표적 단어는 ‘지키다’이다. 모두 6번이나 등장하며,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인간을 지켜주시는 분으로서 하느님을 서술하고 있다. 3절은 두 번의 부정문을 병행적으로 처리하는데, 특별히 앞선 문장에서 “그분”이라고 묘사한 존재를 뒤의 문장에서는 “너를 지키시는 분”이라고 병행시킴으로써 순례자가 이해한 하느님의 속성을 강조한다. 1-2절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기도자에게 다른 누군가가 항상 깨어 지키시는 하느님에 대해 말해준다. 동시에 하느님의 돌보심, 그분의 축복을 기원한다. 때론 시편저자들은 하느님은 하느님께서 졸고 잠들어 계시다고 느낀다. “저의 권리를 위하여 깨어 일어나소서!”(시편 35, 23). 풍량을 만난 배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른다(마태 35, 23). 따라서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기도와 “얼굴을 감추시는” 하느님 앞에서의 당황스러움을 표현하는 기도가 함께 들어 있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굴곡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편 121편은 아무 걱정없는 사람의 기도가 아니다.
순례자는 그분이 ‘졸지도 잠들지도 않고 인간을 지켜 주시기에 인간은 비틀거리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졸고 잠드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다. 인간은 잠들지 않고 오랜 기간을 버틸 수 없다.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의미가 있다. 즉 하느님의 돌보심, 하느님의 보호는 인간적인 돌봄과 비교 할 수가 없다는 뜻에서 말이다. 이러한 신관은 4절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는데, 하느님의 지키심이 이스라엘 민족 전례로 확대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곧 그분은 너를 지키시는 분(3,5절)이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4절: 성조들의 삶/ 이집트 탈출과 광야여정) 도 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지켜 주신 하느님께서 삶의 길을 걸어가는 한 사람 한 사람도 지켜 주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처럼 공동체 차원과 개인적인 차원이 분리되지 않는다. 신앙과 조상들의 역사와 체험을 통하여 물려받은 신앙이고, 시편을 기도하는 개인은 신앙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5절에 등장하는 “그늘” “오른쪽”이라는 표현은 모두 보호와 관련된 전통적 어휘들이다. 태양이 강렬한 지중해성 기후에서, 그늘은 태양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었고, 오른 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더 많은 상황에서 오른쪽은 보다 강한 곳, 더 큰 능력을 가진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스 문화의 전통에서는 그늘, 그림자라는 것은 흔히 어둠이나 덧없음과 연결되어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히브리 전통에서도 그림자가 무상함을 뜻하는 경우가 있지만, 고대 근동과 이집트에서 신들 또는 임금의 “그늘”이라고 말했을 때에는 주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그런 지역들에서는 강한 햇빛이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시원한 그늘이 숨을 돌릴 수 있는 곳, 생기를 되찾을 수 있는 곳으로 느껴졌다는 체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림자는 주인과 분리될 수 없기에 그 그림자 주인의 영향력 또는 그 현존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어떤 임금이 그늘에 있다는 것은 그의 왕국의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가 되고, 산들의 그늘에 있다는 것 역시 그 신에게서 구원을 받고 생명을 보전함을 뜻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편 중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는” 으로 시작되는 시편 91에서 가장 분명하게 이 표상의 의미를 알아 볼 수 있다. 구절에서는 “그늘"이 ”보호“를 뜻한다는 것이 병행 구절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그늘’이라는 은유는 하느님의 ‘날개’ 내지 성전에 계시는 그분의 현
존과 결부된다(시편 17,8).
6-8절: 하느님의 보호를 기원함
‘제유법’이라는 특수한 문학적 기교를 통해 연결된다. ‘낮과 밤’, ‘해와 달’(6절), ‘나거나 들거나’(8절)는 모두 두 개의 단어들을 결합시킴으로써 하나의 전체성을 상징하는 기능을 갖는다. 시간적 요소들(낮과 밤)과 장소적 요소(나거나 들거나, 해가 있거나 달이 있거나)를 통해 ‘항시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삶에서는 언제나 위험이 있을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매 순간 그 하나하나를 지키고 계시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느님 아닌 다른 누구에게 기대려 한다면 그 기대는 언제나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무너지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시편 121편에서 강조되는 것은 야훼 하느님의 속성이다.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존재는 그분뿐인데, 이는 그가 온 세상을 “창조주”이시고(2절),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3-8절). 그러므로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인생의 모든 길 고비 고비마다에서 그분의 보호를 약속받는다.
※ 참고문헌: 성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 723-725.
구약성서 새 번역(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299.
시편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 생활성서,안소근, 2011, pp. 205-228.
시편, 그 특별한 노래, 김혜윤, 생활성서(2112/10), pp. 62-67.'시편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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