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길잡이

열왕기 상권 길잡이

마리아 아나빔 2012. 11. 26. 21:44

 

 

     열왕기 상권 길잡이

 

 

1. 책의 이름

 

열왕기 상. 하권은 구약성경의 열한 번째와 열두 번째 책이고, 역사서로는 여섯째권이다.

열왕기는 사무엘기와 역대기와 더불어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정시대 즉 왕들에 대한 기록이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부터 이스라엘이 남북(북 이스라엘/ 남유다)으로 분열되어서 멸망하기까지 왕들과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라는 책 이름은 ‘왕들’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멀라킴’에서 붙여졌다. 칠십인역에서는 열왕기 상.하권을 ‘왕국기’라 불렀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가 연이어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열왕기는 사무엘서와 마찬가지로 본래 한권의 책이었다. 분량이 너무 길기 때문에 그리스어 성경에서 아합의 죽음까지 잘라 두 권으로 만들었는데, 그 뒤 다른 성경들도 모두 이 분류를 따르게 되었다.

 

열왕기는 이미 앞에 나온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와 함께 묶여서 ‘전기 예언서’ 또는 ‘신명기계 역사서’라 부른다. 열왕기는 역사서이지만, 현대의 역사같이 ‘사실’을 비판적으로 정리 기록한 그런 역사서가 아닌, 신명기 역사가의 관점에서 정리된 ‘신학적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가나안 땅 정복으로부터 멸망해서 가나안 땅을 잃게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2. 저자 및 형성과정

 

유다교의 탈무드 전승에는 예언자 예레미아가 열왕기를 썼다고 밝히지만, 이것은 다만 성경 저자들을 예언자에게 돌리려 했던 후기 유다이즘에서 기인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이는 율법은 모두 모세, 시편은 다윗, 지혜문학은 솔로몬 하는 식으로 성경의 권위를 관련된 특정인에게 모두 연관시켰던 후대 유다교의 한 경향)

 

열왕기는 어느 한 사람이 한 번에 집필한 작품이 아니라, 시대를 달리하는 각종 전승 자료를 토대로 여러 단계를 거쳐 신명기계 사가들에 의해 집성, 편집된 책이다. 이들은 주로 바빌론 포로기 시대에 활동한 인물들인데, 특별히 야훼신앙에 투철했다고 여겨진다.

 

열왕기가 편집된 시기는 이스라엘에게 최악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이후이다. 이스라엘 왕들의 제위 때 기록된 문서로 추정해본다면, 어떤 것은 솔로몬 시대에 기록되어 전해오다가 현재와 같이 하나로 정리된 시기는 아마도 바빌론 포로기나 그 이후일 것으로 생각한다.

 

 

3. 저술목적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한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론에 의해 파괴되고, 임금과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참상을 겪게 되면서 실의에 빠진 유다인들과 그 후손을 위하여 쓰였다.

 

바빌론 포로기를 겪은 신명기계 사가들은 이러한 멸망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저버리고 다윗 왕조를 영원히 세우겠다는 약속을 파기하셨거나 무능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계약에 불충했기 때문에 당연이 맞게 된 파국이라고 설명한다. 즉 그는 야훼 하느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망한다는 역사의식을 갖고 그들의 역사를 되돌아보았던 것이 신명기계 역사서이다. 더불어 그 역사 중에 하느님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어 하느님의 능력과 성실하심도 일러 주었다.

 

이 책은 임금들의 행적을 다루고 있으나, 왕조실록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치를 서술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것은 아니다. 신명기계 사가들은 자기네 신학 사상에 근거하여 왕정 역사를 써 내려감으로써, 지나간 역사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열왕기를 유심히 보면 각 왕들의 치적이 일정한 도식으로 반복해서 기술되어 있으며, 요시아 왕이 가장 칭찬 받는 반면 므나쎄 왕이 가장 나쁜 평을 받음을 알 수 있다. 그 평가기준은 정치경제적 역량이 아니라 야훼 신앙에 얼마나 충실했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열왕기는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고 그분만을 섬기는 것이 다시 하느님 공동체를 회복하여 잘 사는 길임을 포로기 시대의 동족들에게 강조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모든 나라와 개인의 삶 속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4. 열왕기상권의 줄거리

 

사울- 다윗 - 솔로몬 (분열) - 예로보암 /르하브암 - 북 이스라엘 열지파/ 남 유다

 

- 열왕기 상권은 다윗 임금의 노후에 그 뒤를 이을 후계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궁중 암투로 시작된다. 다윗을 도와 통일 왕국을 일으켰던 개국 공신들이 저마다 다른 왕자를 지원한다. 그래서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물리치고 왕위를 계승하여 왕국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숙청된다. 그후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대외 중계무역도 활발히 하며 문화 활동도 증진시켜서 이스라엘 왕국의 황금기를 이룬다.

 

- 그러나 남북 간 차별 정책으로 말미암아 솔로몬이 죽은 후에, 북쪽의 열 지파는 예로보암을 임금으로 추대해 독립해 나갔고, 남쪽 지파는 르하브암의 치세 아래 별도로 발전해 나간다. 그 후 남북 왕국은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북왕국에 오므리 왕조가 시작되면서 서로 협력, 공존하는 관계로 탈바꿈한다. 열왕기 상권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다스리던 시절까지 두 나라의 안팎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1) 솔로몬의 등극(1장)

 

다윗의 연로로 왕위계승 문제가 이스라엘의 중요한 과제로 부상한다. 그래서 다윗의 사랑을 받아 솔로몬(장군 브나야, 사제 차독, 예언자 나탄)이 아도니야장군 요압, 사제 에브야타르, 호위병 50명)를 제치고 임금으로 선택되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왕좌에 오른다.

 

솔로몬의 계승으로 인해 다윗 왕좌는 세습직으로 변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로써 앞으로 유다를 다스릴 임금들은 모두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게 된다.(그리스도도 그러했듯이)

 

2) 다윗 임금의 유언(2장)

 

다윗의 유언은 그의 삶이요 가치관이다. 그는 무엇보다 주님의 법을 지키라고 당부한다.

다윗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흥망성쇠가 하느님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며 사는가모세의 율법을 어떻게 따르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마지막 훈계이자 유언을 솔로몬에게 남긴다.

EX)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3) 솔로몬 임금의 치세(3-10장)

 

(1). 외교정책

 

솔로몬이 이집트 공주를 아내로 맞는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외교정책의 일환이었다. 당시 국교는 결혼 동맹으로 체결되었다.(고려처럼)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외교 정책으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솔로몬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 긍정적 측면:

이젠 이스라엘도 어엿한 국가로 강대해졌음(솔로몬이 펼친 외교정책의 성과)

부정적 측면:

공주가 믿는 이교예식도 공공연히 거행-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퍼지게 됨

 

(2). 문화적 번영: 솔로몬의 지혜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솔로몬 시대에 건축, 미술, 음악이 크게 발전한다. 솔로몬은 이집트 문화등을 적극 수용하고, 제사의식을 다채롭게 하였으며, 성전 중심의 문화 활동인 시편, 격언 등의 지혜문학과 기록 및 전례 음악을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솔로몬의 궁전은 지혜문학의 중심지가 되었고, 후세에도 솔로몬은 지혜로운 자의 표상이 되어 지혜에 관한 글이면 솔로몬을 저자로 보는 경향이 생겼다.

 

 

(3). 정치 경제적 수완

 

4장에 보면, 고급 관리들의 명단을 상세하게 열거한 것으로 보아, 솔로몬 정부의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고 세금이 과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솔로몬의 정책은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 왕국의 예처럼, 임금의 권력이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특히 유다지역과 기타 지역의 조세 부담을 달리하는 차별정책을 취함으로써, 훗날 북쪽 지파들의 반감을 더욱 증폭시키게 되었다.

 

솔로몬은 해상 무역에 관심을 보여 상선대를 창설하고, 티로 임금 히람의 도움을 받아 보석과 희귀 물건들을 날라왔다. 또한 병거 부대를 위한 도시를 세워 요새화했을 뿐아니라 군마를 중계무역하여 막대한 이득을 남겼다. 그는 지혜와 상술을 발휘하여 무역을 발전시키고, 금을 입힌 대형, 소형 방패 수백 개를 왕권의 시위용으로 제작했다. 이렇듯 하느님의 은혜로 최상의 영화를 누리던 솔로몬은 주인이신 하느님의 은혜를 잊고 차츰 자신의 계획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혜를 선물 받았지만, 이를 하느님과 백성을 위해 쓰는 마음이 부족했다.(하느님 탈란트의 사용)

 

(4). 솔로몬의 실정

 

솔로몬은 7년간 성전을 지었고, 성전보다 훨씬 더 큰 궁전과 각지의 요새들을 13년에 걸쳐 건설하는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다. 그는 막대한 공사비를 감당하기 위해서 왕국을 열두 징세 구역으로 나누어 각 구역마다 지방 장관을 배치하였다. 또한 피정복민 뿐 아니라 이스라엘 3만 명을 뽑아 레바논에 보내 만명이 한 달씩 번갈아서 일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건축 계획들은 재정상의 지출은 물론 또 다른 큰 희생을 요구하였다. 사무엘 예언자가 왕정을 원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미 경고했던 대로, 임금이 휘두르는 권력으로 인해 백성의 자유로운 생활은 억눌리고 힘든 부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4). 왕국의 분열(11-13장)

 

분열의 원인: 비생산적인 건축, 사치품--- 과중한 세금 부여

강제 노동 동원 --- 백성의 자유로운 생활 억압

중앙 집권체제 ---전통적 부족 동맹의 유대 깨짐

급격한 경제 발달 --- 빈부격차, 심화, 이농현상

 

 

“ 내가 솔로몬의 손에서 이 나라를 찢어 내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11, 31)

 

솔로몬의 강제 노동에 시달려 왔던 이스라엘 부족은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르하브암에게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르하브암은 이 요구를 묵살해 버리고 만다. 이로 말미암아 북쪽 지파들은 기원전 922년경에 아히야의 예언을 받은 예로보암을 임금으로 추대한다. 이로써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은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예로보암은 북쪽 성조인 야곱과 인연을 맺었던 스겜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단과 베텔에 성전을 세워서 주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금송아지를 하나씩 세운다. 이로 말미암아 처음에 이 금송아지를 하느님이 어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경배하던 백성이, 점차 풍요의 신의 표지로 보고 경배하면서 종교 혼합주의에 빠지게 된다. 예로보암은 이렇게 해서 자기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참 하느님 야훼를 배반하는 길을 만들었다.( 처음의 의도와 다른 것으로 변함)

 

5) 남북으로 갈라진 왕국(14-22장)

 

남북으로 왕국이 갈린 후,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암살, 자살, 음모 등으로 임금이 뒤바뀌는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었다. 오므리 왕조 때에 전성기를 맞지만, 야훼 신앙이 흔들리면서 위기를 직면한다.

 

오므리 임금은 50년간 계속된 북왕조의 불안한 내정을 안정시키고, 남부 유다와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또 시리아에 공동으로 대적해야 했던 페니키아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자신의 아들 아합과 시돈인들의 임금 엣바알의 딸 이제벨을 결혼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도 페니키아처럼 바알 신당과 제단, 아세라 목상이 세워지고 이교를 숭배하는 무리가 늘어나면서 사회악이 많이 생겼다.

 

 

아합은 오므리가 이룩해 놓은 왕조의 유업을 계승해 나갔다. 그런데 신명기계 역사가는 아합의 죄목으로 네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바알을 섬기는 이제벨과 결혼했고,

둘째, 본인 스스로 바알을 섬기고 예배했으며,

셋째,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과 제단을 세웠고,

넷째,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다.

 

아합이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움으로써, 바알 신앙은 이스라엘의 공식 신앙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예언자들이 저항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아합의 시대에 와서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5. 열왕기 상권의 신학적 의미

 

열왕기 상하권은 신명기 사가들에 의해서 편집된 신명기계 전승이다. 이들은 북 왕국 멸망 후 지독한 고통을 체험한 이들은 신명기계 신학을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가자는 신학적 반성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율법에 대한 순명을 강조한다. 율법에 얼마만큼 성실하게 순명하느냐에 여부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주어진다. 즉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배는 곧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불충실에서 기인한 사건이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신명기계 전승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며, 성조들의 하느님이시자 계약의 하느님이신 야훼께 온전한 자유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이 백성에게 땅, 제도, 왕, 사제, 판관, 예언자를 약속해 주셨음을 부각시킨다.

 

1) 우상숭배 단죄

 

신명기계 사가에 의해 경고되고 단죄 받은 우상숭배의 죄는 이스라엘 임금들의 평가기준이다. 야훼와 다른 신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묘사는 솔로몬의 혼인정책으로 빠져든 우상숭배, 그리고 북 이스라엘 예로보암으로 시작하여 역시 아합의 혼인정책으로 인한 우상숭배에서 비룻한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의 예언자들 사이의 갈등과 싸움에서 심화되어 드러난다.

 

ex) 예로보암의 금송아지 사건: 예로보암의 금송아지 사건은 열왕기 전체를 통해 북이스라엘의 임금들에게 붙게 되는 죄목이다. 그들이 예로보암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스켐에서 북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후 베텔과 단의 산당에 주님의 상징물 금송아지를 만들어 안치한다. 그는 그 장소만으로 부족치 않아서 그곳에 야훼의 현존을 표시해 줄 상을 만든 것이다. 금송아지는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나라들과 그 경계 안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송아지 혹은 황소는 남성적 풍요의 상징이었다. 여로보암에 야훼를 상징하는데 그런 상징물을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그는 반 야훼주의로 드러나고 백성들을 잘못 이끄는 길을 만든 것이다. 이에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는 바알 숭배가 만연해 있는 가나안 땅에서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야훼 신앙의 대변자로 이스라엘 임금을 상대로 야훼 신앙을 수호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열왕기는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저술되기 시작한다.

 

2) 율법의 준수

 

열왕기는 신명기계 저자의 중요점으로 율법에 대한 순명을 강조한다. 즉 이스라엘 임금의 훌륭한 삶의 치적은 율법에 얼마만큼 성실하게 순명하며 살았는가가 기준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배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율법에 대한 불충실성에서 기인한 사건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가장 율법에 충실하게 살았던 다윗왕의 삶의 모범을 이상적인 왕의 모델로 제시한다.

 

다윗의 유언은 그의 삶이요 가치관이다. 그는 무엇보다 주님의 법을 지키라고 당부한다.

다윗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흥망성쇠가 하느님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며 사는가모세의 율법을 어떻게 따르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마지막 훈계이자 유언을 솔로몬에게 남긴다. ex)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또한 솔로몬에게 내린 주님의 신탁에서도 나탄 예언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내린 신탁을 확증한다. 국가와 성전의 존망이 주님의 법규에 대한 순명에 달려 있음을 확고히 한다.

 

3) 계약 궤, 예루살렘 성전

 

열왕기는 예루사렘 성전 예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예루살렘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성읍이었음을 명시한다)1열왕 8,12). 예루살렘 성전의 중요성은 성전 봉헌때에 솔로몬이 바친 기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1열왕 8,23-53). 요시야의 종교걔혁도 성전을 중심으로 일어나며, 율법 두루마리를 발견한 것도 성전에서였다. 성전 건립 과정을 기술하기 위해 저자가 할애한 분량만 해도, 예루살렘 성전이 저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예로보암이 단과 베텔 등의 지방 성소에서 드린 예배는 거부되고 큰 죄악으로 고발된다(1열왕 12, 14). 열왕기 저자는 예루살렘에서만 제사를 바치라는 명령을 거역한 것만으로도 한 왕국을 총제적으로 단죄하고 심판하기에 충분한 죄악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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