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 : 왕이신 메시아에 대한 찬가
시편 2편은 왕적, 메시아에 대한 찬가를 그린 군왕시편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왕을 하느님의 아들로 여겼다. 왕의 모습 안에는 더욱더 분명하게 왕이신 메시아의 모습을 드러낸다. 다윗 왕좌가 준비된 것도 언젠가 영원히 당신 백성을 지배하시게 될 저 메시아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왕적 시편이 메시아적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각 왕은 왕이신 메시아의 상징이며, 다윗에게 준 약속도,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걸었던 기대도, 실제에 있어서 메시아에게 실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왕시편은 찬양시편이나 탄원시편의 경우와 같이 형식상으로 어떤 구성요소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임금을 중심 주제로 하는 것이기에 임금의 노래, 임금을 위한 노래 등 여러 가지의 시편을 포함할 수 있고 각 시편이 생겨난 배경이나 형태가 상당히 다양한데,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해석의 차이에 있다.
고대 교부들이나 중세의 성경해석에서는 군왕시편을 메시아적, 그리스도론으로 이해했다. 즉 이 시편들이 장차 나타날 구세주를 노래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과 고대 근동 문명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이 시편들에 사용된 표현이 꼭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궁중에서 임금을 기리기 위해 사용되었던 노래들과 많은 공통점을 보인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현대는 군왕시편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왕적 시편으로 백성들의 왕권에 대한 찬양 노래이다. 시편 2나 45같은 일부 군왕시편에 대해서는 더 구체적으로 이들이 임금이 등극 때에 또는 임금을 위한 다른 날에 사용된 본문으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이 시편들은 적어도 그 일부는 유배 이전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왕정이 사라지고 난 다음이라면 그런 노래들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실제적인 이스라엘의 임금에게 적용될 수 없는 부분들이 나타나고(시편 2), 때론 언어적, 신학적으로 왕정 붕괴보다 늦은 시기의 특징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임금이 존재하지 않은 시기에 군왕시편의 의미는 이 시편들이 궁정에서 사용되던 노래들을 그 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며 임금에게 사용되던 표현들을 통해 유배 이후 공동체의 메시아 희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기원전 2세기 이후; 유배이후).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성전에서 시편 2와 시편 110편을 메시아에 관한 것으로 여긴다.
시편 1과함께 시편집의 머리말을 이루고 있는 시편2는 주님께서 메시아 임금을 세우시는 순간을 선포하는 시편집의 첫 군왕시편이다. 그런데 이 시편은 하느님께서 다윗 왕조를 선택하신 순간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장차 올 메시아 임금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다. 군왕시편이 처음 생겨났을 당시의 그 시편들이나 적어도 거기 사용된 표현들은 실제로 임금이 있었던 유비 이전 시기에 다윗 왕실의 임금을 위해 사용되던 것들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시편들이 후대에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은 메시아적 해석 때문이었던 것이다. 군왕시편이 한데 모여 있지 않고 시편집 각 권의 끝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즉 시편집의 편집자가 의도했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현재의 위치들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편 2편은 그 내용으로 보아 메시아에 대한, 그리고 당신께 반역하는 이 세상 왕들에 대한 그 싸움에 관한 예언적인 말씀이다. 시편작가는 먼저 하느님과 그 메시아를 향한, 이 세상의 여러 나라 백성과 왕들의 음모와 반역을 극적으로 표현한다(1-3). 그리고 나서 시편작가는 힘 있는 인간적 표현을 빌려 하느님께서 왕들의 이런 교만한 태도를 비웃으시고, 그들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회답을 알린다(4-6). “나의 거룩한 산 시온위에 내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 이어 주님께서 기름부은 자는 당신의 서임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린다. 왕,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며(이스라엘의 왕/ 하느님의 양자; 사무엘 하 7,14). 당신에게는 땅의 끝에 이르기까지 만민에 대한 권력이 주어졌고, 스스로 상대의 온갖 저항을 부수어 버리라고 말한다(7-9). 이 시편은 끝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하느님께 복종하라고 이 세상 왕들에게 타이른다. 하느님의 노여움에 부딪치면 멸망하고 말지만, “그분께 몸을 피하는 자 모두 다 복되어라”(10-12).
이 시편을 신약성경은 자주 메시아적 의미를 지적하고 이것을 그리스도께 대한 뚜렷한 예언으로 보고 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도 13, 32-33). 이 시편은 말씀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영원이기도 하지만 또한 부활의 날이기도 하다. 즉 하느님의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광채와 모든 박해자에 대한 그분의 마지막 승리를 엿보게 한다. 또한 이 시편은 부활의 노래로 부활의 아침 그리스도께서 거친 바다를 다스리는 것처럼(루카 8, 24) 여러 나라 백성 위에 계신 분이다. 따라서 이 시편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축하한다. 이러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모든 사람의 마음에 세우고 싶어 한다.
Text 안에서
시편 2의 구조는 주인공, 인용된 말, 장소의 변화에 따라 1-3, 4-6절, 7-9절, 10-12절의 네 연으로 나눌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주님, 메시아, 임금, 민족들, 세상의 임금들이다. 메시아 임금과 대립하는 이들은 민족들, 겨레들, 통치자들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일컬어지는데, 이 시편에서 반복되는 단어인 “세상(땅)의 임금들”이라는 명칭을 그 대표격으로 볼 수 있다.
1-3절에서, 전면에서 움직이는 주체는 세상의 임금들이다(땅의 임금), 이 연은 지상에서 전개되며, 이 임금들은 주님과 그 메시아와 대조된다. 첫째 연을 끝맺는 3절에서는 지상 임금들의 말이 인용된다.
한편으로 세상 임금들, 다른 한편으로 주님과 그 메시아 사이의 대립은 둘째 연에서도 계속된다. 4-6절에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놀라게 하시리라”라는 행위들의 주체는 지상의 임금들이 아니라 주님이시다(하늘에 좌정하신 분).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다. 2연의 마지막인 6절에 인용된 구절 역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4-5절에서 메시아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임금들과 맞서 주님께서 내세우시는 것은 바로 기름부음을 받은 임금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6절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나의 임금”이 다시 등장하여 다음 연을 준비하게 된다.
하늘에 앉아 계신 주님께서 시온 산 위에 메시아 임금을 세웠다면, 지금 여기에서는 그 메시아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먼저는 주님께서 “나의 임금”이라는 말로 주님과 메시아 임금의 관계를 밝혀 주셨다면, 지금은 메시아 임금이 주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선언함으로써 다시 한번 주님과 메시아 사이의 관계를 확인해 주신 것이다.
8-9절에서는, 주님과 그 메시아를 거슬러 일어났던 세상의 임금들에 맞서, 주님께서 메시아에게 온 세상을 통치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연이 전개되는 배경은 시온인데, 시온 산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위치하여 중개자인 메시아의 역할을 상징한다. 마지막 연은 지상에서 전개되고, 주인공은 다시 세상의 임금들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은 시편 저자로서 그는 직접 세상의 임금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1-3절: 민족들의 반란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례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이견이 있기도 하지만(새 임금, 임금에게 말하는 사제나 예언자), 2절에서 메시아에 대해 3인칭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그분의 기름부음받은 이를 거슬러”) 1절의 화자는 시편저자 자신이다. 그는 민족들의 반란을 보며 놀라워한다(“어찌하여?”). 저자는 그 반란이 성공할 가망이 없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헛일”). 시편저자는 민족들을 반란 앞에 동요하지 않는다. 마치 이사야가 아하즈 임금에게 한 말처럼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이사 7,4). 왜냐하면 이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임금에게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기에, 그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 일어나는 것은 헛일,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민족들” “겨례들”은 흔히 이방인들을 지칭하며, “세상의 임금들” “군주들” 역시 세상을 쥐고 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세력을 나타낸다. 이 시편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실제 임금과 연결지어 설명하려 할 때에는 새 임금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나곤 했던 고대 근동의 역사를 반영한다. 3절의 “오랏줄”“사슬”은 그 민족들을 억누르는 통치를 나타내는 표상들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임금이, 자신이 정복한 민족들을 그 줄로 묶어 붙잡고 있는 상징적인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 줄을 끊어 버린다는 것은 독립과 해방을 쟁취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의문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언제 그렇게 다른 민족들을 지배했는가이다.
이것은 다윗 왕국에 대한 회상에서 비롯한 희망의 표현이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가장 넓은 왕국을 이루었던 다윗은 그의 후손이 새로운 임금(솔로몬 왕)이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은 그가 땅 끝까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시편 72,8)다스기를 기원했다. 이 희망의 출발점은 다윗 시대이며 그로부터 비롯하여 미래의 희망을 그려 보인다. 둘째, 신화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고대 근동의 관습의 표현으로, 임금의 통치가 온 세상에 미치기를 기원한다. 예루살렘의 다윗 왕실 역시 다른 나라들에서 여러 가지 개념과 표현을 빌려왔고, 그들의 신화적 사고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면 세상의 창조는 카오스에 대한 신(그 신이 어느 신인지는 나라에 달라 다를 것이다)의 승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새로운 임금의 즉위는 마치 새로운 창조와 같이 정치적, 사회적 혼돈에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창조신은 임금을 임명하여 그가 온 세상을 통치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 이 표현 뒤에는 이스라엘 임금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아다는 사상이 깔려 있다. 고대 근동의 임금들이 신화적인 의미에서 신들에게 임명된 왕이었다면, 이스라엘의 임금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임금이다. 그 임금이 온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할 때에만 이해 할 수 있다. 즉 다윗 왕실의 임금들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통치 아래에서, 그분에게서 통치권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어느 시대 어느 임금이든지 이스라엘의 임금과 맞선다는 것은 곧 하느님과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세계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의미).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그 임금이 온 세상을, 다른 민족들을 통치한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그의 배후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편 2편의 핵심 주제는 ‘ 이 세상이 누구의 손 안에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지상의 역사를 바라보는 이는 강대국의 임금들과 군주들이 땅을 뒤흔들고 있지만, 사실 역사를 결정하는 이는 그 뒤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러한 맥락에서 1절에서 온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의 통치가 온 세상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임금은, 비록 작은 한 조각의 땅을 다스렸을지라도 그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시편 2와 같은 시편이 임금의 즉위 때에 사용되었다면, 거기에는 온 세상 모든 나라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천명하는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지금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고 있는 임금이 힘이 없고 다른 민족들을 지배할 수 없다 해도, 다윗의 후손인 그는 하느님의 선택과 기름 부음을 받고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임금이다.(2사무 7). 또한 다윗 임금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신 2사무 7,16의 말씀은 다윗 왕조가 무너진 다음에도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 시편이 처음에는 유다의 임금을 위한 노래였다 하더라도 “이 유다 왕은 단순히 한 왕국의 군주가 아니다. 그는 하느님의 언약을 받은 존재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미래에 완전히 실현될 약속이다. 그러나 현재를 도외시한 약속은 아니다. 유다 왕국의 임금은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실현시키는 존재이다. 사실 이것이 군왕시편이 왕정 붕괴 후에도 계속 전승되고 시편집이 편집될 때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를 설며해 준다. 즉 당시의 왕실이 굳건하여 그 임금을 노래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실이 무너지고 국권이 약화하였기에 제2의 다윗을, 구원을 가져다줄 미래의 임금을 기다리며 군왕시편을 노래했던 것이다.
“헛일을 꾸미다”에 사용되는 동사는 “중얼거리다”라는 것으로, 시편 1,2에서 사용된 “되새기다”와 같은 단어이다. 이를 통하여 시편 1의 의인과 시편 2의 “민족들”“겨례들”이 대조된다. 의인은 주님의 토라를 사랑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반면, 민족들은 주님을 거스르기 위하여,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추구하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는 것이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것은 토라에 반대된다. 그것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그분께 순종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시편 1에서는 한 개인의 차원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이야기하는 반면, 시편 2는 국가적, 정치적, 집단적 차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4-6절: 주님의 응답
둘째 연은 하늘에서 펼쳐진다. 4절에서 시편저자가 1절에서 민족들의 반란에도 동요하지 않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땅의) 임금들”과 맞서 계신 분께서 “하늘에 좌정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에 앉아 계신 하느님과 맞서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임금들은, 세상 끝까지 간다고 갖는데도 하느님 안에 있다. 민족들은 술렁거리지만 그분께서는 흔들림이 없이 “좌정하고” 계신다. 그리고 “웃으시고”“비웃으신다”. 하느님은 그 위에 계시면서 그들의 반란을 언제까지나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은 아니지만, 직접 개입하시기에 앞서 그분의 웃음은 이미 인간의 교만을 꺾는다.
이 시편에서 하느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임금은 “세상의 임금들”과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을 거슬러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임금들이 “주님을 거슬러” 일어났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임금은 하느님과 결합하여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른 군왕시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군왕시편에서 지상에서 다스리는 이스라엘의 임금을 기리고 그를 드높이지만 그의 왕권은 하느님의 왕권과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하느님의 통치를 위한 것이다(6절). 그 임금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세우셨다. 그 임금은 “하늘에 좌정하신 분”,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고, 궁극적으로 세상의 역사는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편집의 첫 군왕시편에서부터 “기름부음 받은이(메시아)”의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기름부음받은이” 는 히브리 말로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 ‘mashach’라는 동사에서 나오는 ‘마쉬아mashiach’이다. 이 말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임금으로 세워진 사람을 말한다(1사무 10,1;16,113 참조). ‘마쉬아’는 칠십인역에서 크리스토스로 옮겨지고, 그리스 말과 라틴 말에서는 메씨아스로 음역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로 옮길 수도 있겠지만, 후대의 메시아사상 또는 그리스도론적 선입관이 개입될 여지가 있으므로, 원뜻을 살려 ‘기름부음받은이’로 번역하고 특수 명사로 해서 붙여 쓴다. 새 번역에서 “기름부음받은이”라고 붙여 쓴 경우에는 모두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뒤의 시편 해설에서는 “메시아 임금”이라는 표현도 사용할 것인데,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하느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은 선택된 임금을 가리키고 최종적으로는 그 임금을 통하여 메시아 희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진노하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슬러 일어나는 이들에게 응답한다. 그 응답이 바로 당신의 임금을, 메시아를 이 땅위에 세우시는 것이다. 6절의 말씀은, 3절에 나타난 세상 임금들의 말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 번역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원문에서 6절의 첫마디는 “그러나 나는”으로 시작된다. “나는”이라는 말도 “그러나”라는 말도, 모두 다음의 문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사실 히브리 문장에서 대명사 주어 ‘나’는 문법적으로 필요하지 않다. 강조하기 위하여 일부러 명사적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또한 “그러나”라는 말은, 강조되어 있는 그 “나”를 세상의 임금들과 대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직접 세상의 임금들을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임금을 세우신다. “나의 임금”은 “세상의 임금들”과 대조된다.
“나의 임금”과 함께 언급되는 “나의 거룩한 산 시온”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이다 메시아와 성전은 모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고 하느님께 속한다. 또한 고대 신화적 사고 안에서 성전은, 태초의 혼돈을 제압하고 온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창조를 완결 짓는 장소이다. 그래서 성전을 세상의 배꼽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마치 창조라는 작품 완성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서 지상에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장소가 성전이다. 그리고 지상에서 하느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사람이 임금이다. 임금 역시 민족들의 반란으로 표현되는 혼돈의 힘을 제압하는 역할을 한다.
6절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세웠노라!”라는 과거형의 표현은 우선적으로는 하느님께서 다윗 왕실을 세워주시던 때를 지칭하는데, 더 나아가서 2사무 7장에서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왕실을 세워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다윗 한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역대 임금들, 그리고 ‘다윗의 후손’이라 불리는 메시아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지금 시편 2에서 과거의 그 약속을 상기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에도 변함없이 그 약속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다윗 왕조가 무너진 시점에서 이 시편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서는 과거의 기억이라기보다 미래의 약속이라는 측면이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7-9절: 메시아의 선포
6절과 7절은 마치 거울과 같다. 6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임금을 세상 앞에 내놓으셨듯이, 7절 이하에서는 그 메시아가 자신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여기에서 “결정”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보통 ‘법령’을 뜻하는데, 대개지금의 문맥에서는 새로 임금이 되는 이에게 주었던 어떤 문서를 지칭한다고 본다. 7-9절에서 임금이 선포하는 내용이 바로 그 문서의 내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들어 있다. 첫째는 임금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 둘째는 세상의 통치권, 셋째는 원수들에 대한 지배이다.
“너는 내 아들”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화적인 의미에서 신의 아들로 여겨졌다. 아몬 신이 자신을 대리하여 세상을 다스릴 인간을 세우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왕비와 결합하여 아들을 잉태하게 한다고 생각했기에, 파라오는 잉태된 순간부터 아몬 신의 아들로 육화한 신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시편 2의 경우는 이와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에서도 임금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지만(2사무 7,13-14;시편 2,7; 89,27-28), 이집트에서와 같은 신화적 개념은 없으며 임금이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임금은 즉위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시편 2,7의 경우에도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라는 것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라고 선포되는 임금의 즉위와 같은 시점에 놓여 있다. 곧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임금이라는 그의 역할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임금이 됨으로써 그는 하느님의 옆에 자리하고,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주리라“
임금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데에서 임금의 특권들이 나오게 된다. “나에게 청하여라.”라는 말은 임금의 특권이 임금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무력으로 정복해서 되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부각하지만, 그 요청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약속으로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임금에게 “민족들을 재산으로”주고자 하신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이시고,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그분께 속한다. “아들”은 그 상속자이고, 따라서 통치권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민족들” “땅 끝”이라는 표현은 1절에서 말했듯이 보편적 차원을 지닌다. 이스라엘에 임금도 군대도 없던 시대, 오히려 외세에 억눌리고 위협받고 있던 시대에 이러한 약속을 현실적,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시편 2, 7-9를 단순한 과장으로 여기지 않고 진정한 하느님의 약속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임금에 대한 진술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너는 그들을 쇠 지팡이로 쳐부수리라.”
9절에 사용된 표현들 역시 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들에서 병행을 볼 수 있다.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원수들을 쇠지팡이나 칼로 치는 그림이 많이 나타나며, 옹기그릇이나 흙으로 빚어 만든 작은 상에 적대국의 이름을 써서 그것을 깨뜨림으로써 그 나라들을 저주하고 그들에 대한 정복을 상징하기도 했다. 아시리아 에서도 이와 유사한 관습이 있었다.
이러한 메시아의 행위는 1-2절에 나타난 민족들의 반란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주님과 그 메시아는 민족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 내지 ‘다윗’은 온 세상의 ‘정복자’와 거리가 멀다. 그는 자신보다 강한 원수들에게 희생되고, 고발당하고 박해를 겪으며 중상을 받는다. 9절의 말씀으로 하느님께서는 그의 메시아에게 눈에 보이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권세 있는 이들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고 미리 확인해 주려 하신다. 나자렛의 예수는 그의 지배를 철저히 비폭력적인 형태로 이해했다. 그러나 시편들은 이미, 그들을 전체적으로 이했을 때에, 아사야의 고통 받는 종과 같은 유형의 메시아 표상을 제시하고 있다(시편 22).
시편집의 메시아는 시편 2,1절에서부터 이미 반대 받는 메시아,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거부당하는 메시아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메시아에게,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에 메시아는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8-9절은 메시아적이고 종말론적인 전망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표현들은 상징적이며,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서서 영적인 메시아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였다. 세상의 임금들은 “주님을 거술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일어났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마대 25,31).
이러한 메시아의 나라는 결국 무력으로 이루어질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 안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는 메시아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예는 즈카 9,9-10에서 볼 수 있다. 시편 2 안에서도 민족들에 대한 마지막 태도는 강제적인 정복이 아니다. 10-12절에서 볼 수 있듯이 메시아의 사명은 모든 이를 하느님에 대한 순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10-12절: 민족들에 대한 최후통첩
히브리어 원문에 따른 번역으로 12절에서 “아들”에 대해 3인칭으로 말하고 있다고 본다면 (“아들에게 입맞춤 하여라”) 말하는 사람은 시편 저자 자신이 될 것이다. 그가 마치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과 같은 어조로 세상의 임금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10절은 분명한 지혜문학적 어조를 보인다. 지혜 1, 1과 6,1에서는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기도 하는데, 특별히 지혜 6,1-11을 읽으면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시편 2,10에서 시편 저자가 한 절로 표현한 것을 지혜서 저자는 길게 풀어 설명한다. 어쨌든 여기서 저자가 세상의 임금들에게 권고를 한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마음을 돌이켜 “주님”과 “그 메시아”의 통치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들은 주님과 그 메시아를 거슬러 일어나는 것이 “헛일”임을 알고(1절), “깨달음”을 얻어(10절) 하느님께 돌아와야 할 것이다.
이어서, 앞에서 “주님”과 “그 메시아”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그들에게 이제는 하느님과 그 “아들” 메시아에게 순종할 것을 권고한다. 11절에 사용된 “섬기다”라는 것은 “오랏줄” “사슬”을 끊어 버리려던 시도와 반대되는 태도, 곧 하느님을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대리자인 메시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고, “경외”는 지혜문학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을 두려워함, 곧 1-3절에 묘사된 교만과 대조되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제사를 의미한다. 그보다 더 강한 동사인 “떨다”, 9절에서 예고되었고 12절에서 다시 이야기될 하느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본문 번역상의 문제를 다루면서, 11절의 원문은 “떨며 환호 하여라”라고 지적했었다. 그런데 “떨다”라는 것과 “환호하다”라는 것이 서로 모순되어 보이기 때문에 많은 이는 히브리어 본문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태도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곧 주님께서 오신다고 하면, 우리는 기뻐하면서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시편 96편에서도, 먼저는 “온 세상아, 그분 앞에서 무서워 떨어라.”라고 하고 나중에는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은 소리쳐라. 들과 거기 있는 것들도 모두 기뻐 뛰고 숲의 나무들도 환호하여라.: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러 오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편 저자는 세상의 임금들에게, 이렇게 주님께서 오실 날을 생각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함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기쁘게 맞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12절을 “아들에게 입맞춤하여라.”라고 번역할 때, 그 “아들”이라는 호칭은 2절의 “기름부음받은이”에 연결되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 메시아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고 선포하시는 7절에 연결된다. 여기서 입을 맞춘다는 것은 존경과 복종의 표현이다. “주님”과 “그 메시아”를 거슬러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방책이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시는 것이었고, 이제 하느님의 대리자인 그 “아들”에게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라고 하는 것이다.
12절은, 10-11절의 권고가 최후통첩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진노의 때가 가까웠으니, 지금 이 마지막 기회에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 시편은 위협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오히려 마지막 말로, 세상의 임금들에게 그들이 주님께 피신한다면 그들은 “복되다”라고 선언한다. 시편 저자의 의도는 바로 여기에, 그들이 주님께 피신하도록 하는데 있다. “피신하다”라는 단어는 시편집에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고 앞으로도 여러 차례 이 단어를 만나게 될 것인데, 일차적으로는 위험을 피해 누군에겐가 몸을 붙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여기에는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에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시편에서 ‘주님게 피신하다’라고 할 때에 그것은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오직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김을 뜻한다. 그리고 보통 주님께 피신하는 이들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 주님께 충실한 이들이다. 그런데 시편 2에서는 온 세상의 통치자들에게도, 하느님과 그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 일어났던 바로 그 “세상의 임금들”에게도 그들 위에 계신,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편집의 주제: ‘주님과 메시아의 나라’
시편 2는 한편으로 왕정 시대의 기억이 깃들어 있고, 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들에 있었던 군왕에 대한 이해가 연관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옛 표상들이 왕정이 무너진 이후에 발달하게 된 메시아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해석은 시편집 전체의 신학을 이해 하는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상 시편 1는 또한 시편집의 주요 위치들을 차지하고 있는 시편의 주제는 고대로부터 있어 온 표현들을 통하여 아직 오지 않은 메시아, 아직 온전히 실현되지 않은 ‘주님과 메시아의 나라’를 노래하는 것이며, 그 나라는 바로 시편집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편집에 들어있는 다른 여러 가지 주제는, 마치 복음서의 여러 주제가 그러하듯이, 바로 그 ‘나라’라는 주제로 통합될 수 있다.
여기에서 시편집 전체의 신학에 대하여 이론적인 설명을 덧붙여둔다. 시편 2를 필두로 하여 시편집 1-3권에서도 이미 군왕시편이 종말론적인 전망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시편집의 구성에 대한 기존의 이론에 수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시편 2는 분명 2사무 7장과 연결되지만 이것은 과거에 대한 회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약속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약속은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지상의 나라를 통치했던 이스라엘의 임금들에게서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약속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왕정이 세워졌다가 무너진 다음에도 시편 2의 약속은 변함없이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시편 2에서 처음 주어진 약속은 시편 89편까지 가면서도 성취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약속으로 남아있다. 시편 89는 유배로 말미암아 역사적으로 그 희망이 꺾인 순간을 표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속이 취소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시편은, 다윗 왕조가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은 주님의 성실하심이 언젠가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저는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으로 당신의 성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 89,2).
최근에도 학자들은 시편집 1-3권의 전망과 4-5권의 전망을 대조하곤 한다. 그러나 시편 2를 이미 종말론적으로 해석할 때에는, 시편집 1-3권이 왕정과 결부된 메시아 희망을 표현하고 시편집 4-5권은 왕정 붕괴이후 그 위기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된 종말론적 하느님 통치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는 이론에는 변경이 필요하게 된다. 시편집은 처음부터, 시편 2에서부터 하느님 없는 메시아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메시아의 통치는 하느님의 통치를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집 4권 이후로도, 하느님의 통치 시편인 시편 93-100이후로도 군왕시편이 다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시편 101;110;132;144). 시편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주님과 메시아의 나라’를 선포한다(시편 2,2). 다윗 왕조 안에서 그 약속의 부분적인 실현을 보면서도 시편은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온전히 실현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시편집의 편집자는 왕정 붕괴 이후로도 군왕시편을 보존하고 시편집의 핵심적인 위치들에 이 시편들을 배치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약속의 성취를 본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여러 차례 시편 2를 인용하는 것이다. 시편 2,7은 주님의 세례(루카 3,22)와 변모(루카 9,35) 장면에서 인용되고, 사도행전(4,23-28;13,32-33)과 묵시록(2,27;12,5)에서는 시편 2에서 이야기하는 메시아와 민족들의 대립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는 한편으로는 그분께서 이미 오신 메시아로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믿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역시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그분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군왕시편을 보존하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도 “임하소서 임마누엘이여.”라고 노래하는 것에 비길 수 있다.
※ 참고문헌: 성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p. 91-96.
구약성서 새 번역(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32-33.
시편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 생활성서, 안소근, 2011, pp. 6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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