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34(33): 행복에 이르는 길의 안내서

마리아 아나빔 2013. 6. 3. 16:30

 

 

 

                                시편34(33): 행복에 이르는 길의 안내서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짧은 격언(잠언)의 형식으로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시편이다. 시편작가는 주님을 끊임없이 찬미할 결심을 나타내고 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비천한 자에게 자신의 찬미에 소리를 합치라고 한다(1-3절).

 

자신은 크나큰 마음의 고통을 가지고 있었으나, 주님께 간청하고 그 기도를 들어 주시어 번민에서부터 해방되었다. 이리하여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서 모두에게 알리고자 하는 결론을 끌어낸다. 하느님을 지주로 삼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모자라는 것이 없고 주님의 천사가 이런 사람을 지킨다(1-4).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이 시편은 교훈조를 띤다. 자신의 경험의 결과인 짧은 교훈을 가지고 작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외경을 불어 넣으려고 한다. 그것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구하고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여 주께만 의지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깨어진 사람들 옆에 계시며 악인을 미워하고 벌하신다(12-22).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시편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당신과 함께 찬양하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그들에게 외경을 가르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한다. 교회 역시 전례 안에서 이 시편을 몹시 중요시했다. 이 시편 속에 있는 8절(“너희는 주님의 어지심을 맛들이고 깨달아라.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복되다.”) 때문에, 영성체의 전통적 노래가 되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감미로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초대 교회에 있어서 일치의 성사 성체가 영적 완덕과 하나 되어 있다. 교회는 또한 이 시편이 하느님께 대한 살아 있는 끊임없는 찬미라는 소망을 나타내고, 미천한 사람들을 이 끊임없는 소리에 합치도록 부른다.

 

또한 이 시편은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에 따라서 영성체 전의 좋은 기도로서 쓸 수 있다. 이 시편을 외우며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감미로움을 맛보면서 주님을 찬미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길을 보여 주시며, 우리에게 대답하신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계명의 묵상과 그 거룩한 외경과 형제와의 평화(13-14)는 우리 안에 영성체의 은혜를 보존하기 위한 필수조건임을 배운다(15-22).

 

 

Text 안에서

 

이 시편은 탄원 시편에 뒤따라오는 감사의 시편이다. 하느님께 간청을 드리며 어떤 약속을 드렸던 기도자는, 청원을 들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가서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과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전례를 가졌으리라는 것이다.

 

시편의 구성 내용을 보면, 이 시편의 전반부는 감사의 요소가 나타나며, 2-4절에는 찬양을 권고하는 도입부분, 5-8절은 자신이 받았던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9-11은 듣는 이들에게 자신의 체험에 동참하며 주님께서 좋으신 분이심을 깨닫고 고백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편은 전형적인 감사의 시편들과 다른 점이 있다. 기도자는 직접 하느님을 부르거나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는다. 감사시편의 전형적인 단어인 ‘감사하다ydb(히필)도 사용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의 체험은 매우 간략하고 일반적으로 진술되며(5,7절), 시편 전체는 청중들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도자가 시편의 전반부에 구원의 체험을 이야기 한 다음 듣는 이들을 향하여 교훈적 권고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시편 후반부인 12-23절은 감사시편이라기보다 지혜시편에 가깝다. 특히 12-15절의 어조는 감사의 제사는 제의적 배경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 저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혜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을 통하여 주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다.

 

또한 이 시편에서 지혜문학에 자주 나오는 단어들로 저자가 청중들을 “아이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아들들”이라고 지칭한다(12). 그 이외 여러 가지 권고와 행복의 약속, 의인의 운명과 악인의 운명의 대조 등이다. 끝으로 이 시편은 알파벳 시편이다. 알파벳 시편이란 시편의 각 구절이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알렙, 베트, 게멜 등의 글자로 시작되는 시편들을 말하는데(번역된 성경 본문 옆 괄호 안에 “알렙” “베트”하고 표기되어 있는 것이 그 행을 시작하는 글자의 이름이다), 이런 기법이 지혜문학에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고 애가 1-4장 같은 경우도 훌륭한 알파벳 시들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시편 중에서도 지혜시편들에서 이러한 형식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시편 119).

 

그러므로 이 시편은 여러 요소가 섞여 있기에 시편의 종류를 어느 한 가지로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대략 전반부는 감사시편, 후반부는 지혜시편의 면모가 보이지만, 이 시편은 탄원시편, 감사시편, 찬양시편 등 다양한 문학유형에 속하는 요소들을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비구원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포괄하고 있다.

 

1절: 머리글

 

“다윗. 그가 아비멜렉 앞에서 정신이 나간 체하여 아비멜렉이 내쫓자 그가 떠나갈 때에” 머리글에 “다윗”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다른  시편과 마찬가지로, 이 시편의 경우도 다윗이 실제 저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편이 담고 있는 신학이 유배 중 또는 유배 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시편을 다윗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시편의 머리글은 1사무 21, 11-16에 나오는 사건과 연결된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은 아비멜렉이 아니라 갓 임금 아키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떤 의도에서 저자가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을 넣어 놓았는지, 아니면 단순한 실수인지는 분명치 않다.

1사무 21장에서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니기 시작한다. 사울은 자신과 이스라엘을 위하여 훌륭한 일을 했던 다윗을 질투심 때문에 추격하고, 다윗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원수들인 필리스티아인들에게까지 가서 피신하지만 거기에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갓 임금 아키스가 자신을 알아보는 듯하자 그는 미친 체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다윗은 영광스런 임금이 아니라 이유 없이 박해를 받는 의인이고, 그런 다윗의 모습은 시편의 내용에 부합된다. 실상 의인의 고통은 이 시편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다윗 임금은 지금 갓 임금에게 쫓겨나고 있는 상황이다. ‘내쫓다’라는 동사는 구원이나 해방이 아니라 거부를 표현한다. 그럼에도 시편의 본문에서 그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신뢰하며 위험 속에서 하느님을 찬미한다. 이 시편이 감사시편이라면, 그것은 고통 한 가운에서 바친 감사의 기도인 것이다.

 

전반부 -감사시편(2-11절)

 

2-4절: 찬양권고

 

이 시편은 먼저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이들을, 3절에 언급된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는 기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4절 후반에 이르러서는 “나”와 “너희” 곧 가난한 이들이 “우리”로 결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찬양시편의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인 ‘찬양권고’라고 한다면 이 시편에서 말하는 찬양이 과연 어떤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절에서 저자는 스스로 하느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저자 자신의 뜻을 밝히기 위하여 첫 번째로 사용한 동사는 “찬미하다”로 번역된 brk인데 흔히 ‘축복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이나 그 밖의 대상에게 강복하시는 것을 지칭하여 많이 사용되고(창세 1,22.29 등), 임금이 백성을, 아버지가 자녀들을 축복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말로 ‘축복하다’는 것은 ‘복’, 곧 어떤 선을 기원하는 것인데, 하느님께는 더 이상 선을 기원할 수가 없다. 이 때 하느님께 적용되는 brk은 이미 그분께 속해 잇는 것인 어떤 능력이나 통치권 등을 선언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피조물이 하느님을 brk한다고 할 때에는 ‘축복하다’보다는 ‘찬양하다’‘감사하다’‘고백하다’등의 의미가 된다. 인간은 아무것도 보태 드릴 수 없다. 단지 자신이 하느님을 찬미하기 이전에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게 속한다는 것을 고백할 뿐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감사송4).

 

‘찬양하다’와 ‘찬미하다’라는 단어의 의미 가운데 지속할 수 있는 요소가 인간이 충만하신 하느님께 더 무엇을 보탤 수 없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행위는 내적으로 그분을 받들어 모시고 순종하며 외적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찬양에서 전례적이고 한시적인 의미보다 삶의 태도와 관련된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그렇게 할 때 시편 34를 서로 무관한 두 부분으로 갈라놓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2절 후반에서는 시편집에서 여러 차례 만났던 단어인 hll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찬양하다’라고 번역되는데, 드물게 사람에게도 적용되어 명성이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하느님께 적용된다. 그런데 시편 34, 2절에서는 “언제나” “늘” 주님을 찬미하겠다는 결의가 눈에 띈다. 우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전에서 전례 때에 이루어진다. 지금 시편 34편의 기도자도 전례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뜻을 밝히고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편 저자가 자신의 찬양에 시간적 제한을 두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그가 항구하고 지속적인 찬양의 자세로 삶의 모든 순간을 살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성전에서의 찬양이 삶 전체로 확산하고 그의 삶을 가득 채우게 된다.

 

“언제나” “늘”이라는 표현에서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고통의 순간도 포함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1절과 연결된다. 이 시편에서 5.7.8절 등 여러 부분에 탄원의 요소가 들어가 있고, 20절에서는 명시적으로 “의인의 불행이 많을지라도”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시편저자는 어려움 속에서도 중단되지 않는 끊임없는 기도, 삶의 모든 순간에 드리는 찬양을 이야기한다. 행복 속에 드리는 찬양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크고 작은 선물들도 찬양의 기도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의 찬양은 오직 한 가지 이유뿐이다. 즉 주님만이 찬양의 동기가 된다. 그래서 그것은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주님께 드리는 찬양이다.

 

3절에서는 “주님을 자랑하다”라는 동사가 사용된다(hll 히트파엘,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주님 안에 자랑하다.”). 이것은 어근 hll이 다른 형태로 활용된 것으로서 “주님 안에서 자랑하다.”라는 표현은 “주님을 찬양하다”와 동의어로 볼 수 있지만 글자 그대로 “주님 안에서 자랑하다”라는 고유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달리 자랑할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은 재산, 힘을 자랑하고, 그것이 성경에서 비판을 받는다. 따라서 참으로 자랑할 것은 “자랑하려는 이는 이런 일을, 곧 나를 이해하고 알아 모시는 일을 자랑하여라. 나는 과연 자애를 실천하고 공정과 정의를 세상에 실천하는 주님으로 이런 일들을 기꺼워한다.(예레 9, 23). 자비롭고 정의로우신 주님,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자랑이다.

 

“가난한 이들은 듣고서 기뻐하여라.” 기도자는 하느님을 찬미 하지만, 여기서는 그 찬양을 들어야 하는 이가 가난한 이들임이 강조된다. 그런 다음 그 가난한 이들의 기쁨에 동참한다. 한 “가난한 이”이가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다른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의 동기가 된다. 시편 22의 끝 부분에서 보았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것이다.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그들이 그 소식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또 그 소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즉 시편저자가 전하는 소식이 가난한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저자는 모든 사람이 자신과 기뻐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보게 된다. 하늘나라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인 이유(마태 5,3) 그들이 지금의 세상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한 것이다. 시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참된 행복과 매우 가깝다.

 

4절에서 그 “가난한 이들”의 역할이 변화된다. 그들은 찬양을 듣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다 함께” 라는 표현들은 이렇게 찬양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처음 기쁜 소식을 들었던 이들에게 전달하도록 권고 받는다.

 

여기서 주님을 “칭송하다gdl"(피엘)라는 동사는 역시 본래는 ‘기르다’ ‘크게 만들다’를 뜻하고 ”높이 기라다rwm"(폴렐) 역시 ‘높이다’를 뜻하는데,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더 크고 더 높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인간들에게 드러난 그분의 높고 위대하심을 선포함을 의미한다. 주님의 “이름”을 높인다는 것 역시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주님께서는 한없이 높으시지만 “이름”이라는 것은 그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드러나 있는 측면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2-4절에서 시편저자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찬양한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기에 그와 같은 상황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기뻐하라고 초대한다. 그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을 찬미하고 가난한 이들은 이로써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5-8절: 가난한 이의 구원

 

5-8절은 조금씩 표현의 형태를 바꾸어 가며 가난한 이가 하느님께 부르짖을 때 하느님께서 그를 온갖 어려움들에서 구해주심을 이야기 한다. “주님을 찾는다.”는 표현은 구체적으로 성전의 사제나 예언자에게 문의하러 간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편들에서 “주님을 찾는 이들”이라는 표현은 더 일반적으로 주님께 충실한 이들, 주님께 의지하는 이들을 칭한다(시편 53,3).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께 매달리고 신뢰를 가지고 하느님을 향하는 것,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며 그분께 피신하는 것을 가리켜 “하느님을 찾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의 “응답” 역시 예언자를 통해 주어진 신탁을 가리킨다고 보기보다 기도를 들어주심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온갖 두려움에서” 구해 주신 것을 이야기하는데 두려움의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그가 고통을 겪었음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6절은 대단히 아름답다. 5절과 7절에서 고통 가운데 주님께 부르짖은 체험을 이야기한다면, 6절에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도 어려움 속에서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분을 향했음을 뜻할 수 있다. 예로니모를 비롯하여 많은 이가 “주님을 바라보아라, 너희는 빛나리라.”로 번역하고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만남의 성소에서 주님을 뵙고 나온 모세의 얼굴을 빛났다는 구절을 떠올리기도 한다.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시편 42,12;43,5)은 그대로 번역하면 “내 얼굴의 구원, 내 하느님을”이다. 이 의미는 슬픔에 잠겨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이 눈길을 들어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 “당신의 빛”(시편 43,3), 곧 “당신의 얼굴 빛”(시편 44,4)이 그 사람의 얼굴을 비추어 그의 얼굴을 밝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사람들 사리에서도 따뜻한 눈길이 슬퍼하는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듯이, 하느님의 자애로운 얼굴빛을 바라볼 때 얼굴에서 어두움이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즉 부끄러움을 당할 청지에 있는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7절의 내용은 일반적이나 8절에서는 천사의 표상을 사용하며 “진을 치다”“구출하다”등 군사적 단어들을 사용하여 하느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표현한다. 이집트 탈출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 갔던 천사나(탈출 14,19) 히즈키야 시대 산헤립의 침공 때에 예루살렘을 포위한 아시리아 군대를 쳤던 천사를 생각 할 수 있다(이사 37,36).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 또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주제는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에 나타나는 주제이다. 그 의미를 경신례를 통해 주님을 경배하는 것, 주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 지혜문학적인 의미에서 윤리적 가르침을 따르는 것 등 세 가지로 구분하지만, 그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34편의 12절의 경우는"주님의 경외함을 가르쳐 주마."라는 표현 때문에 지혜문학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 역점을 두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경신례와 율법과 윤리라는 것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근본 태도가 세 가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외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ex: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아브라함, 히브리 산파들) 그러한 경외심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9-11절: 가난한 이의 행복

 

이 부분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사람의 행복을 이야기 한다. 같은 어근이 9절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가리키며(“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11절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누리는 행복을 지칭(“좋은 것 하나도 모라자지 않으리라”), 그 행복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표시해 준다. 반면 12-15절에서는 말하는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간 편에서도 노력을 해야 함을 보여줄 것이다.

 

9절에서 시편저자는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이들도 이에 동참하기를 권고한다(1요한 1-4참조).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라는 구절은 “맛보다”라는 단어는 ‘먹다’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의미가 구분되어 맛을 감별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눈여겨보다”역시 단순히 ‘보다’라는 의미에서 출발하여 ‘체험하다’ ‘주시하다’ ‘검토하다’등의 여러 의미를 지닌다. 이 시편을 성전의 경신례와 연결 짓는 이들은 이 두 단어가 제사에 참여하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과 연관된다고 보기도 하고 우리는 이 구절을 성찬 때에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문장은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를 목적어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의미에서 ‘먹는다’는 것보다 은유적 의미의 ‘맛보다’라는 번역이 더 문맥에 적합하다. 따라서 이 표현을 통하여 시편저자는 그의 청중들에게 삶의 기쁨과 슬픔 속에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알아보는데 이르라고, 그것을 맛들이고 배워 가라고 권고한다. 그렇게 맛을 들이고 나면 주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게, '체험할’수 있게 될 것이다.

 

9절 후반은 그런데 주님의 선하심이라는 것이 그렇게 명백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그런 상황에서 주님께 피신하기로 결단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믿음이 요구된다.

 

10절에서 다시 ‘주님을 두려워함’에 대한 주제가 나온다. 그리고 12절에서 “주님을 경외함을 가르쳐 주마”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이처럼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8절)에게 주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이란 완전에 이른 이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 경외함’을 배워가는 여정 중에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10절에서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아쉬움이 없어라“라고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거룩한 이들”은 ‘가난한 이들’로 살아가고 그들의 ‘피난처’(9절)이신 주님은 이 세상의 눈에 그다지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10-11절에서는 믿기 어려운 말을 한다. “사자들”, 곧 세상의 세력가들이 곤궁하게 될지라도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는 “좋은 것”이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좋은 것”이란 주님의 선하심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다. 그 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면서도 분명 눈에 보이는‘많은 불행’(20)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10-11절은 경험을 넘어서는 신앙의 고백이다.

 

 

후반부- 지혜시편(12-23절)

 

12-15절: 주님을 경외함

 

이 부분에서는 교훈적 성격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시편저자는 직접 청중들에게 2인칭으로 말하고 있으며, 7개의 명령문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권고를 한다(‘와라/ 들어라/조심하여라/ 피하여라/ 행하여라/ 찾아라/추구하여라’). 여기서 두 개의 명령문은 이들을 초대하는 것이고, 다른 명령문들은 구체적인 가르침들이다.

 

12절에서는 저자는 자신의 의도가 ‘주님 경외함을 가르쳐 주는 것’임을 밝힌다. 여기서 사용하는 “아이들아” “들어라” “주님 경외함” “가르치다”와 같은 단어들은 모두 지혜문학적인 표현들이다. 시편저자가 사용한 “아이들(아들들)”이라는 단어는 잠언에 매우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들을 부를 때에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스승이 제자들에게도 사용하던 호칭으로서 스승이 마치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지닌 인물임을 나타낸다. 아버지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의견이나 충고가 아니라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들어라”단어 자체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뜻에 따르는 것,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내포한다.

 

“가르치다”라는 단어는 신명기와 시편에서 자주 사용되지만, 시편저자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금 이 본문과 시편 51,15뿐이다. 이 시편에서 가르침이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지는 2-3절과 12절을 비교할 때에 나타난다. 2절을 해설할 때에 강조한 바와 같이, 시편 34 절반의 찬양은 듣는 이들을 전제하고 있다. 2-3절에서 시편저자가 “찬양”을 하고 가난한 이들이 듣는데 비하여, 12절에서는 그가 “가르치고” “아이들이” 듣는 것이다. 2-3절과 12절의 청중들이 동일한 인물들이라고 한다면(가난한 이들=아이들, 제자들), 시편저자는 지금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그분을 찬양하고 있다. 즉 주님을 향한 찬양과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이 서로 중첩된다.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의 업적을 말한다면 그것은 찬양인 동시에 가르침이다.

 

13절에서는 “생명을 갈망하다”와 “장수를 바라다”가 동의적으로 병행되고, 그 두 가지를 추구하는 목적은 ‘좋은 것(선)을 보는 것’이라고 규정된다. 이로써 이 질문은 9-11절에 연결되며, 시편저자의 가르침은 “좋은 것”을 보려고 하는 이들을 향하게 된다. ‘생명’ ‘장수’는 지혜문학과 신명기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제이다(신명 30, 15.19-20;32,47). 지혜시편 가운데서는, 토라를 묵상하는 의인을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에 비유했던 시편 1과 “저를 살려 주소서”라고 계속해서 말하며 율법을 통해 생명을 누리게 해주시기를 청원하는 시편 119를 기억할 수 있다. 신명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늘 잘되고 오늘 이처럼 우리를 살게 해 주시려고, 주님께서는 이 모든 규정을 실천하고 주 우리 하느님을 경외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다”(6,24) 이 모든 본문에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생명과 선을 누리기 위한 길로 제시되며, 그 ‘생명’이라는 것은 올바른 삶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충만한 의미의 삶을 뜻한다(생명과 행복/죽음과 불행- 계명과 규정과 법규: 신명 30, 15-16).

 

여기서 “생명”이 “장수”와 병행되기에 내세의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좋은 것을 보려고 장수를 바란다.”는 것은 “좋은 것”을 보는 것이 이 세상에 살 동안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비록 그 “좋은 것”이 알아보기 어려울지라도 말이다. “생명” “장수(오랜 날)”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날 행복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오랜 고통 후에, 먼 미래에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편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주님을 두려워하며 그 주님의 선하심을 보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라도 말이다.

 

14-15절에서는 이를 위한 지침들이 주어지는데 “너희”가 아니라 “너” 한 사람을 향한 명령문들로 되어 있는 개인적 가르침이다. 동시에 지금까지 ‘선’ ‘좋은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 절에서는 ‘악’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악이 존재하는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응답으로 14절에서는 말에 대해서, 15절에서는 행동과 지향에 대해 말하고 있다.

 

14절에서 사용된 “조심하다”라는 단어는 ‘경계하다’‘보호하다’‘지키다’등을 뜻하며, 시편(특히 시편119)과 잠언에서 많이 사용된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혀와 입술이 피해야 하는 악으로는 교만(잠언 15,5), 교활함(시편 12,4), 속임수(시편 52,6), 거짓(시편 108,2; 잠언 6,17;26,28) 등이 있다. 혀 그 자체가 악의 도구인 것은 분명 아니다. 혀로 하느님의 정의를 노래하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편과 그 밖의 지혜문학에서는 자주 혀가 악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함을 볼 수 있다. 입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찬미하는 그 입으로 악을 범할 수도 있기에 조심하라는 것이다.

 

15절 절반에서도 다시 한번 악을 피하라고 권고한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악을 피해야 하는 것은, 악이 그에게도 유혹이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시편 73,2-3). 악인들의 성공을 보고, 의인도 자신이 올바로 살려고 노력한 것이 헛되다는 생각을 있다는 것이다(시편 73,13). 악인의 행복은 의인들의 신앙에 위기를 가져오는 반면, 의인들의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편1,1에서는 의인의 행복이 바로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피할 것을 말한 다음 “선을 행하라”라고 말한다. “선”이라는 단어는 “악”과 대조된다. 13절에서 시편저자는 ‘좋은 것(선)’을 ‘보는’ 것을 말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주님이 베푸시는 선하심을 말했다면, 이제는 시편저자는 가르침을 듣는 그 사람이 결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 라고 말한다. “평화”로 번역된 유명한 히브리어 단어 “살롬”(시편 122편 참조)은 그와 함께 사용된 “찾다”라는 말과 함께 지속적인 노력을 내포하는 ‘추구하다’라는 동사로 표현된다. 이 동사는 마치 사냥꾼이 짐승을 잡으려고 따라가거나 적을 추적하듯이 쫓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를 깨뜨리지 않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간절하고 열렬하고 열렬하게 그것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마태 5,9; 시편 34,13-17, 1베드 3, 8-16). 여기서 저자는 정의를 위해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항구하게 선(평화)을 행할 것을 권고한다.

 

16-23절: 의인과 악인의 운명

 

시편 1이나 146편과 마찬가지로 이 시편도 마지막 부분에 와서는 의인의 운명과 악인의 운명을 대조하며, 이 세상에서 어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가난한 이들/ 주님을 두려워 하는 이들) ‘의인’이라는 것이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고 악인들의 죄 역시 드러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악인들과 대립되어 있는 상황,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시는 것이 결국 그의 의로움을 드러내며 이것이 바로 심판의 순간이 된다는 것이다.

 

16절에서 나오는 주님의 눈과 귀, 곧 주님께서 보고 들으신다는 것은 그분의 개입을 예고한다. 노아 때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을 보셨고(창세 6,5), 아브라함 시대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창세 18, 20-21), 모세에게도 당신께서 당신 백성의 고통을 보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말하신다(탈출 3, 7-8). 이렇게 당신께서 직접 확인을 하신 다음 그에 따른 개임을 하시는데, 시편 34의 경우 16절의 결과는 23절의 심판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라는 구절은 시편 1,6을 생각하게 한다. 하느님은 의인들의 길을 보고 계시고 아신다는 것이다. 의인들은 고통을 겪지만, 그 고통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버리셨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혜 2-3장에 나타난 의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에 근접하며,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순교의 신학을 항해 가는 중간단계를 보여준다. 이제는 의인에게는 고통이 없다거나 의인의 고통을 겪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으로부터 의인은 당연히 고통을 받게 되어 있고 그 고통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주님의 눈과 귀에 이어 17절에서는 주님의 “얼굴”이 언급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라는 민수 6, 24-26의 축복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의 얼굴은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애와 연결된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다(시편 27,9). 그러나 지금의 경우 주님의 얼굴은 악인들과 “맞서신다”. 하느님의 선하심을 핑계삼아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애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얼굴과 악인들과 맞서시는 하느님의 얼굴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행위가 의인에게는 구원이 되고 악인에게는 징벌이 되며, 그것이 하느님의 심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아의 홍수 때에는 모든 악인이 죽고 노아의 가족이 구원되었으며,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는 롯의 가족이 멸망을 피했다. 이집트 탈출 때에, 이집트인들에게는 재앙이 닥쳤지만 이스라엘은 해방되었다. 같은 하느님의 현존이 상반된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18-21절에서 악인들의 심판보다 의인들의 구원이라는 측면이 부각된다. 이 구절들은 5-8절과 유사하고 여러 단어가 반복되지만, “나”라는 한 개인의 체험을 이야기하기보다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진술하고 있으며 “의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그들을 악인들과 대조시키고 있다. 그러한 대조를 통하여, 의인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하게 강조된다. 이 시편이 말하는 행복역시 깊이 숨겨져 있다. 19절의 “마음이 부서진 이” “넋이 짓밟힌 이”라는 표현 역시 그러한 의인의 상황을 나타내 준다. 그들은 마음이 올바르고 주님께 실한 이들이지만 그런 이유로 무시당하고 박해를 받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수고를 알고 계신다. “경건한 삶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 속에 있고, 또 그분의 도우심에 대한 생생한 경험 속에 들어 있는 것이며, 고난과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다. 고난은 의로운 이의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마음이 상하고 정신적으로 깨어졌던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도우신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경험한다.

 

20절은 바로 그런 현실을, 이 세상의 부조리함과 불완전함을 표현한다. 의인의 운명과 악인의 운명에 대해 아무리 강조해도 현실은 의인에게 고통이 많다는 것이다. 지혜 2장에서 잘 드러나듯이 의인의 생활방식 자체가 그에게 고통을 가져오게 된다.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신앙과 현실의 격차, 같은 시편 안에서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움이 없어라”(34,10)라고 말하고 또 이어서 “의인의 불행이 많을 지라도”라고 말하는 그 모순(34,20). 이 세상에서는 악인들이 판을 치고 그것이 신앙을 흔들게도 한다. 그러나 행복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악을 견디면서 선을 행할 때에만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22-23절은 긴밀한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병행을 보려면 22절 절반을 “불행이 악인을 죽이고” 또는 “악이 악인을 죽이고”로 직역해야 한다. 악인들의 운명은 죽음이고 의인들의 운명은 생명이다. 여기서 악인의 죽음은 하느님의 개입 없이도 그 자체가 악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악인을 벌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죗값을 받다”는 악인의 운명과 의인의 운명을 나타내는 데에 모두 사용되었으므로, 그 서로 다른 운명은 단 하나의 어떤 사실에서 나온 결과임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인 ‘아샴’은 범죄나 공격, 또는 잘못을 갚기 위한 보상 제물을 뜻한다. 그리고 이 단어가 ‘-에게’라는 전치사와 함께 사용되었을 경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라는 것은 그가 잘못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에게’라는 것 없이 독립적으로 사용되었을 경우는 내적으로 죄책을 느낌을, 곧 스스로 죄인이라고 느낌을 의미한다. 이것은 죄를 범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죄의 결과를 가리키며, 죄책을 지니게 됨을 뜻하는 것이다. 악인의 운명이 죽음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면, 그와 반대로 의인의 운명은 곧 구원을 의미한다.

‘죗값을 받는다.’라는 말은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양심에서 느끼는 가책, 자신의 죄로 인한 고통과 죄의식을 지칭한다. 양심의 소리가 하느님의 소리라 할 때, 이것은 그의 마음 안에서 내려진 하느님 심판의 결과이다. 즉 직접적으로 처벌을 표현하는 단어라 아니면서도 어떤 심판의 주체를 전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22-23절의 윤리의 바탕이 되는 하느님 경외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양심의 가책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시편 26,2) 주님의 현존 안에 체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3절은 의인의 운명으로 “사람이 사람을 결코 구원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 제 몸 값을 치를 수도 없다. 그 영혼의 값이 너무나 비싸 언제나 모자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승의 손에서 나를 기어이 빼내시리라”라고 말하는 시편 49,8-10.16 등 몇 몇 시편에서처럼 죽음에서 구해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목숨을 건지다”라는 표현은 “죽이다”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이 동사가 무죄한 사람을 재판에서 풀어낸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종”이라는 것은 노예라는 의미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고 꼭 비천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며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시편집에서 단수일 경우 저자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시편 116편,16). 반면 제3이사야서에서 “주님의 종들”이라는 표현이 “악인들”과 대조되는 하느님께 충실한 이들을 지칭하여 사용된다. 시편 34,23의 경우 “당신 종들”은 “그분께 피신하는 이”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이것은 9절과 연결된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과 “그분께 피신하는 이는 아무도 죗값을 받지 않으리라.”가 같은 의미라고 한다면, 의인의 행복은 바로 주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참된 행복은 주님의 뜻을 행하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 있다. 시편저자는 이렇게 하여 자신의 몫인 삶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시편저자는 자신의 체험과 기쁨과 행복을 나누고자 한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의 모순된 현실을 잊은 것은 아니다. 그의 찬양을, 그의 가르침을 듣는 이들 역시 올바르게 살아가면서도 가난하고 위협받고 고통 받는 이들일 것이다. 이 시편의 행복선언은 충실한 이들에게는 고통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이런 현실 속에서 그의 청중들을 격려하려 한다. 그가 가리켜 보이는 행복의 길은 바로 모든 것을 아시는(시편 1,6)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의인들의 행복은 오직 그분과 함께 있음을 아는 것,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 주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안내서이며(시편 1,1) 동시에 주님께 피신하는 가난한 이들의 기도라는 점이다(시편 34,9). 그 가난한 이들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하여 시편집은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시편 34,9) 라고 말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맛 들임”수 있다면, 이 가난함 속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성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p. 245-249.

                구약성서 새 번역(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96-97.

                시편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 생활성서, 안소근, 2011, pp. 246-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