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70(69): 구원의 울부짖음
들어가면서
이 시편은 내용면에서 시편 40의 제 2부의 되풀이다. 작가는 적이 수치를 당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뻐하고 격려 받도록, 하느님의 조속한 도움을 간청한다. 이 시편은 성전에서 제물에 따른 예물을 바치는 동안에 노래했던 것 같다.
또한 이 시편은 시편 40편과 같이 메시아적 시편으로 간주된다. 교부들의 전통은 이 시편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기도로서, 혹은 교회의 청원으로 보고 있다. 성 목요일의 전례는 이 시편을 적에 대해 도움을 얻기 위한. 괴로워하시는 주님의 청원으로 본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대 “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하하’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짖는다더니, 십자가에 내려와 네 목숨이나 건져 보아라.‘하며 모욕하였다”(마르 15, 29-30)라고 쓰고 있다. 그들의 손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신다.
교회는 이 시편으로 성무일도의 모든 시편을 시작한다. 이리하여 주님께 자신의 기도를 바치면서, 그 기도에 합당하게 다하기 위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청한다. 주님께서 도우러 오실 뿐 아니라, 전례헌장이 말하는 것같이 “그리스도는 이 사제적 과업을 당신의 교회를 통해서 계속 수행하시니, 교회는 미사성제를 거행함으로써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특시 성무일도를 바침으로써 하느님께서 간단없이 찬미를 드리고,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한다(전례헌장 8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일치케하고, 우리의 입에 아버지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같은 말을 주시어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신다. 교회는 시편 70편을 목요일의 마지막 기도와 또는 청원제의 연도의 마무리로서 또 사순절 때 부른다. 이 때에는 악마의 올가미에 대한 싸움에서 교회는 특히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여기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모으시고, 영적인 적에 대해 강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예수님과 교회를 닮아서 유혹을 받을 때에, 이 시편의 도움을 받아 극복하도록 해야겠다.
Text 안에서
시편 70편은 먹구름 속에서 죽을 위험에 빠져 있는 탄원자가 어서 당신의 청명한 얼굴을 보여 달라고, 그래서 자신의 적대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편은 개인 탄원시에 속하며, 제3주간 수요일 낮기도와 위령성무일도 낮기도에 사용된다. 또한 모든 성무일도의 시작으로 이 시편의 2절을 인용한다.
시편 70편은 시편 40편 14-18절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단 하나의 구절(70,4 부끄러워 되돌아가게 하소서/ 40,16 부끄러워 몸이 굳어지게 하소서)과 호칭(주님/하느님)이 다를 뿐이다. 그렇기에 두 시편의 관계성에 대한 여러 가설들이 존재해 왔는데, 70편이 먼저 독자적으로 형성되었고 이후 40편이 이 부분과 다른 시편을 연합하여 형성되었다는 입장, 반대로 40편 14-18절이 본래의 전승이며, 왕정시대부터 기원해서 70편에 다시 반복되고 있다는 입장이다.
시편 70편이 드러내는 또 다른 특징은 다음에 등장하는 71편의 머리글이 누락되어 있어서, 이 두 시편(70편과 71편)을 함께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71편과 70편에는 다음과 같은 유사 내용이 발견되기에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이 70편과 71편을 구분하고 있기에, 이러한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70,2.5 /71,2.12: 하느님께 드리는 구원의 기도
70,3/70,13.24: 원수들에게 수치가 임하도록 해 달라는 기도
70편은 급박한 요청으로 시작된다(“어서 저를 구하소서.”) 유사한 내용은 끝부분에서도 발견되는데(“구하소서... 서둘러 오소서... 지체하지 마소서.”) 하느님의 신속한 개입을 간청하는 내용이 부각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3-4절과 5절도 대구를 이루는데, 2절과 6절이 동의적 대구법(A-A: 하느님, 어서 저를 구하소서 ↔ 하느님, 어서 제게 오소서)으로 되어 있다면, 3-4절과 5절은 반의적 대구법(B↔B": 제 목숨을 노리는 자들 ↔ 당신을 찾는 자들, 제 불행을 즐기는 자들 - 당신 구원을 사랑하는 이들)으로 되어 있다. 70편 전체의 구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절: 머리글
머리글은 “지휘자에게”라는 말을 통해 70편이 음악적 요소를 내포함을 암시한다. 이어 등장하는“기념으로”라는 표현은 시편 38편의 머리글에도 등장하는데, 직역하자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매한 표현이기에 역시 많은 가설이 산출되었다. 레위기 2장 2.9.16절; 5장 12절; 6장 8절; 이사야서 66장 3절 등에 보면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히브리어 ‘아즈카라’가 등장하고 있고, 이는 ‘불살라 바치는 기념제물’을 의미하기에 혹시 70편의 ‘기념으로’가 제물 봉헌 예식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2절: 탄원의 시작(긴급한 이중의 호소)
노래의 시작은 이중의 호소로 되어 있다. “하느님, 어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자가 처한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은 2절의 동사들을 통해 드러나는데, 한국어 성경에서 “어서 구하소서. 어서 도우소서.”라고 번역된 부분은, ‘잡아(낚아)채다’, ‘덤벼들어 가져가다’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나찰’의 하필형과 ‘돕기 위해 서두르다’라는 의미의 표현(‘아자르’의 동명사와 동사 ‘후쉬’)이 합성된 것이다. 둘 다 신속한 개입을 간청하는 내용이다. 또한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하느님)과 야훼(주님)로 두 번 호칭하는 것은 이 탄원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명시한다.
3-4절: 적들에 대한 벌(수치-치욕- 부끄러움)
3절은 2절의 다급한 요청이 적들의 포위로 인한 것임을 알려준다. 적들은 “제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고 “제 불행을 즐기는 자들”이다. 이들의 강력함은 도무지 대적이 불가능하므로 이제 탄원자는 하느님의 힘과 도움의 증거를 그들 앞에 드러내 달라고 기도한다. 이 모든 고난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드러내는 것뿐임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4절에서는 “옳거니!” 하며 기도자의 불행과 고통을 즐거워하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원래 히브리어 본문에 등장한 단어는 ‘헤야(아하!)이며, 이는 다른 이들의 불행과 곤궁을 통쾌히 여길 때 나오는 일종의 의성어이다.
5절: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환희를 노래
5절은 3-4절과 대조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제 목숨을 노리는 자들”, “옳거니 하며 놀려 대는 자들”은 이제 “당신을 찾는 이들”, “당신 구원을 사랑하는 이들”과 반의적 대구를 이룬다.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 체험하게 될 구원과 행복의 전망이 제시되는데, 이는 일종의 ‘감사제‘를 배경으로 한다. 5절 마지막 부분의 “... 아뢰게 하소서.” 는 고대 근동의 성전에서 거행되던 예식 기도문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머리글에 제시된 “기념으로”라는 표현의 전례적 성격을 확인시켜 준다.
6절: 탄원의 끝(긴급한 이중 호소)
6절은 2절의 내용과 동의적 대구를 이룬다. 탄원자는 스스로를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로 묘사하는데, 이는 매우 유사한 발음의 히브리어로 되어 있어서 문학적 기교를 드러낸다(가난한 존재: 시편 69, 30;86,1;88,16).
구역성경은 하느님의 도우심이 주는 실제성에 대하여 늘 강한 확산을 드러낸다. 특별히 시편 70편의 탄원자인 ‘가난한 자들’은 적을 대적할 그 어떤 힘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이지만, 그들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과 현존은 그들을 구원에 초대된 이들로 격상시킨다.
※ 참고문헌: 성서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 431-432.
구약성서 새 번역(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 177.
시편, 그 특별한 노래, 김혜윤, 생활성서(2112/12), pp. 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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