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나눔

시편 150: 장엄한 끝노래

마리아 아나빔 2013. 7. 1. 20:20

 

 

 

시편 150: 장엄한 끝노래

 

 

들어가면서

 

 

시편 150편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초정의 형식으로 시편집을 마무리짓는, 장엄한 보충의 노래로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당신의 거처로 택하셨던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또 그분의 영원한 거처인 하늘에서 찬양받고 기림받으셔야 할 분이시다(1). 다른 시편에서 자주 나온 찬미의 이유가 여기에 요약되고 되폴이된다. 그것은 창조의 업적과 역사에 나타나시는 하느님의 힘, 아울러 그 위대하심이다(2).

 

 

이 시편은 시편집 전체에 걸쳐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을, 여기에 모아 놓은 것 같다. 나팔을 울리는 사제들(민수기 10,8; 역대기하 5,12), 가수와 거문고와 수금을 타는 레위인들(역대하 5,12), 춤에다 북으로 반주하는 여인과 처녀들(탈축 15,20;판관기 11,34)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악기를 가지고 노래를 반주하는 온 백성들, 끝으로 삶을 살고 있는 모두가 하느님을 찬미한다(3-6).

 

이 시편은 시편집이라고 하는 큰 심포니의 마지막 힘찬 휘날레와 같다. 할렐루야(하느님을 찬미하여라)는 열 번 되풀이되고, 온갖 모티브를 어우러져 이어지는 것처럼, 마지막 개선의 끝 곡으로 마무리 한다.

 

         알렐루야는 하늘의 노래다(묵히 19,1-6)

그리스도께서 그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이 기쁨의 노래를 주셨다. 알렐루야는 부활절 때의 교회의 노래이기도 하다. 성 토요일의 장엄미사의 옛 의식에서는 편지를 읽고나서 부제가 회중을 향하여 엄숙하게 이렇게 알렸다. “여러분에게 크나큰 기쁨을 알립니다. 알렐루야”

 

유감스럽게도 이런 예절은 사라졌으나, 그러나 세 가지 알렐루야의 노래가 지금도 남아있다. 그 노래는 점차로 음조를 높이고, 부활의 복음의 알림을 준비한다. 부활날 밤 미사의 영성체 후, 전례는 끊임없이 이 시편의 알렐루야를 되풀이하게 하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만남을 맛보려고 한다. 이리하여 시편 150편의 알렐루야는 교회가 지닌 부활의 기쁨의 가장 깊은 표현으로 남아있다.

 

 

이 알렐루야의 환호하는 부활시기 동안 교회의 기도에 동반하고 있다. 다른 계응은 모습을 감추고, 조국과 선택된 자의 새로운 노래인 이 노래가 그것을 대신한다. 그러므로 부활시기의 미사와 성무일도에는 끊임없이 알렐루야가 울려펴진다. 교부들은 알렐루야의 신비적, 영적 의미를 설명하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알렐루야의 노래를 부른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활절로 대표되고 있는 기쁨과 휴식과 승리의 시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우리 찬미의 대상을 가지지 못하였으며, 참된 알렐루야를 그리워하며 기디리고 있다.

 

주님의 부활 후, 이 찬미가 교회에 되풀이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부활 후에도 이것을 끊임없이 노래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주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를 되풀이하자, 부활절의 날마다 끝없는 나날을 생각하자. 영원한 거처로 향해가는 우리 발걸음을 서두르자. 나그네로서 알렐루야를 노래하자. 그리고 노래하면서 우리의 고생에 위로를 받자, 노래하면서 걷자.“

 

 

이 시편에 나오는 여러 가지 악기는 교부들에게 흥미깊은 감상을 일으키는 기회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창조주의 말씀은 모든 것에 절을 가지고 질서를 주고, 온갖 잡음적 요소를 조화의 음률에 복종케 하셨다. 이것은 온 세계로써 하나의 심포니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윗에 앞서 존재하셨던 말씀은 다윗의 자손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우주를 조율하시고, 특히 사람이라고 하는 소우주의 몸과 영혼을 조율하셨다. 이 많은 소리를 내는 악기를 가지시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당신도 사람의 이 악기와 조절하여 노래하신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교부들로부터 하느님께 완전한 찬미의 노래를 바치시는 악기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도 또 하나의 악기이며, 이 악기를 가지고 신비스러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신자를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어러분은 나팔, 거문고, 수금, 북, 춤, 현금, 피리, 잘 조정되어 울려 퍼지는 자바라이다. 여러분은 그 모두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덧없는 비열한, 멸시받을 것이 하나도 끼어들지 못하게 주의하십시오.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은 노래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조정하고, 불협화음에서 아름다운 조화로 돌리는 것이다. 이리하여 영혼은 상상의 고요와 밝음을 돌이키고, 미래의 좋은 것을 더욱 열심히 바라는 것이다. 영혼은 조화가 잘된 말을 기다리고, 자신의 사욕을 잊고, 기쁨 가운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라보고, 그리고 모든 좋은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부들은 음악을 인간의 내부적 생활조화의 표현으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사랑의 덕을 만드는 하모니로서도 간주하고 있다. 어느 날엔가 선택받은 대 군주의 오케스트라에서, 하느님께 대한 대찬미가 넘치도록 흘러나와 굉장한 소리로 울려 퍼질 것이다. 지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리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조화시키려고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부어 주시는 그 감미로운 멜로디가 우리를 성인들과 영원히 노래하는 하늘의 합창단으로 들어가게 해 주기를 빈다.

 

 

 

Text(성 아우구스티노의 주석) 안에서

 

 

시편 150편이란 숫자 안에서 숫자 15는 신구약의 조화를 상징한다. 구약에서는 일곱째 날이 샵바트로 지켜졌는데 그날은 안식일을 뜻하며(탈출 20,10), 신약에서는 여덟째 날이 주일로 지켜졌는데 부활을 가리킨다. 안식일은 일곱째 날이요 주일은 일곱째 날 다음 날 , 곧 여덟째 날인데 이 둘을 합하면 열다섯이다. 이 숫자는 성전의 층계가 열닷섯이었던 사실에서 유래한다.

 

50이란 숫자 역시 크나큰 신비를 가진다. 이 숫자느 일곱날을 일곱 주간 하여 만들어진 숫자에다 여덟째 날을 가리키는 기수 하나를 보태서 50이라는 숫자로 완결시킨 것이다. 주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50일이 찼을 때에, 그리스도 안에 한데 모였던 사람들 위에 성령이 내리셨다(사도 2,1-4). 성령 또한 일곱이란 숫자를 통하여 찬양받으시는데 이사야서에도 묵시록(1,20)에서도 하느님의 일곱 영을 언급하는데 한분이신 성령의 일곱 가지 작용 때문에 나온 표현인듯 하다. 쉰이란 숫자는 또한 마흔과 열로 나누신 적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사십일에 하늘로 올라가셨고, 그 다음 열흘이 지나자 성령을 보내셨던 것이다(사도 2,3 참조) 40이라는 숫자는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내는 잠세적 거처를 가리키셨다. 즉 4 라는 숫자는 세상에 사방이 있고 한 해에 사계절이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 10이라는 숫자가 곱해지는데, 10은 십계명이라는 율법을 완수한 일과 선행에 대해서 베푸는 품값이므로, 영원을 표상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50에 삼위를 곱하듯이 3을 곱하면 150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시편의 숫자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감지할 수 있다.

 

 

시편은 50편이 회개에 관하여, 100편이 자비와 심판에 관하여, 그리고 마지막 제 150편이 그분의 성소에서 받으시는 하느님 찬양에 관한 노래이다. 이것은 우리가 바로 이런 단계를 거쳐서 영원하고 행복한 삶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의 죄악을 단죄함으로써, 그 다음 선하게 삶으로써, 그리하여 악한 삶을 청산하고 선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1-2절: 그리스도 안에 성도들 안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권능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성소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웅대한 창공에서”

이것은 그분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위업으로, 또는 그분의 지존한 권력으로 라고 해석한다. 즉 “그분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가없는 위대함으로” 사도들에 의하면 하느님의 성도들이 바로 그 자체이다. 성도들은 하느님의 의로움이며, 하느님이 그들 안에 행한 의로움은 바로 그분의 권능이고 위업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최고의 권능이다(필립 3,10). 따라서 그분의 권능은 창공에서! 라는 표현은 참으로 훌륭한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분의 권능이 확고해진 까닭이다.

 

 

이어 성도들을 온갖 악기로 표상하는데 하느님을 찬양하라는 구절 뒤이어 나온다. 3절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뿔나팔을 불며” 나팔은 참으로 명랑한 소리를 울려 찬미를 드린다. 수금은 높은 곳으로부터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표상하고 비파는 낮은 곳으로부터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표상한다. 천상 존재들 가운데 찬양하는 사람들과 지상 존재들 가운데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다 만드셨음과 같다. 수금이라는 악기는 통나무를 판 뒤 위에 줄을 매놓는 것으로 울림통이 위에 있는 악기이다. 그 대신 비파는 아래에 울림통이 있는 악기이다.

 

 

4절: 여러 악기의 상징

 

 

손북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살가죽치고는 변모된 살가죽이요, 지상의 부패로부터 초래되는 역겨운 냄새가 더 이상 나지 않는 까닭이다. 사실 손북은 살가죽을 말리고 팽팽하게 당겨서 만든다. 합창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태평을 누리는 집단이 찬양하기 때문이다. 수금과 비파는 줄이 있는 현악들이다. 풍금은 화음을 내는 모든 악기들을 통칭하는 보통이름이다. 지금 와서는 풀무로 부풀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를 부르는 공유한 이름으로 통하고 그 이름이 널리 펴져 있다. 풍금을 가리키는 ‘오르가눔’은 실상 소리를 내는 기구 모두를 통칭한다. 현악기와 풍금으로라는 표현으로 시편작가는 줄이 있는 악기는 무엇이나 다 나타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악기에 오르가눔을 보탠 것은 마치 오르가눔에 줄을 맨 것처럼 두 악기가 비록 다른 악기지만 마치 현악기 줄이 풍금에 매여 있는 것처럼 완전하게 일치하는 화음을 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후세에 하느님의 성도들이 비록 각기 다른 인물들이면서도 불화를 초래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악기들에서 나오는 소리이지만 서로 어긋나는 불협화음이 나오지 않고 지극히 감미로운 화음이 이루어진다는 것과 같다.

 

 

          5-6절: 악기로 형상화된 성도들

 

 

“주님을 찬양하여라, 낭랑한 자바라로” 자바라는 서로 부딪치면서 소리를 내므로 혹자들은이 악기를 우리 입술에 비유한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웃한테서 칭송받을 때에 자바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셈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칭송하는 가운데 사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혼백 없이 음만 내도 자바라는 자바라라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환희의 자바라로”라는 구절이 덧붙여졌다. 환희, 형언할 수 없는 찬미는 영혼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터져 나오지 못한다. 음악에는 세 가지 소리가 있다. 성악이라는 것은 노래하는 사람이 아무 악기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목청과 입천장을 울려서 내는 소리이다. 관악기 소리는 피리나 이와 흡사한 악기를 써서 내는 소리이다. 타악기는 거문고나 이와 흡사한 악기를 써서 내는 소리이다. 이 시편에서는 그 어느 소리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합창에서 우리는 성악이 있고, 뿔나팔로 울리는 관악기 소리가 있으며, 거문고로 울리는 타악기 소리가 있다. 마치 지성과 영과 신체를 상징하는 듯하다.

 

 

따라서 이 시편은 하느님께서 성도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행사하셨기 때문에 그대들은 ㄸ한 하느님의 지존한 권력이요 가없는 위대함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느님의 뿔나팔이요, 수금이요, 비파요 손북이고 합창이요 현악기와 풍금이다. 환의의 자바라이다. 화음을 내기 때문에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들이다. 그 어는 것 도 하찮거나 덧없거나 장난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육을 따라 맛을 들이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나 “숨 있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러므로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미소한 힘이 미치는 한에서, 진심으로 또 크나큰 감사를 드려야 한다. 진심으로 주님의 선하심에 의지하며, 주님의 권능으로 우리 행실과 생각에서 원수를 몰아내 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시며, 정신을 이끌어주시고, 영적인 생각을 일으켜주시도록 기도하자.

 

 

 

 

 

※ 참고문헌: 성경 주해집(시편), 크리스찬출판사, 1986, pp.850-852.

                구약성서 새 번역(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340.

                성 아우구스티노의 찬양시편,C. 보르고뇨/ 성염, 바오로 딸, 1995, pp.373-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