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0편: 지혜로운 마음
들어가면서
시편작가들은 언제나 인간을 하느님 앞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하느님은 누구이시며 인간은 무엇인가? 그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 심오한 질문을 가지고 존재의 가장 어두운 골짜기에서부터 최고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긴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을 여러 측면에서 이해한다.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시편 8,5;144,3) 귀한 존재이다. 반면 하느님께 버림받은 인간은 ‘구더기’(시편 22,7)와 같이 보잘 것 없으며, 한낱 ‘숨결’(시편 62,10)이나 ‘입김“(시편 39,6.12)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인생은 일시적으로 만발하다가 사라지는 ’풀‘이나 ’들꽃‘(시편 103,15)에 비유된다. 이에 비해 시편 90편에서 말하는 인간은 풀처럼 덧없는 존재지만 하느님께로부터 ‘지혜로운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이점에서 시편 90편은 놀랍고도 독특한 인간이해이다. ‘인간은 영광과 존귀의 관’(시편 8,6)을 받기만 하는 것도 아니며, 벌레나 숨결같기만 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들꽃과 같은 운명만의 더욱더 아니다. 덧없는 인생이지만 ‘지혜로운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편 90편의 작가는 통합된 인간 이해를 보여준다. 시편은 다양한 인간이해와 여러 가지 인간의 마음을 노래하는데, 90편의 '지혜로운 마음'은 하느님과 인간의 본질과 인생의 깊은 의미를 찾도록 도와준다.
시편 90편은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과 대조되는 ‘덧없는 인생’과 ‘지혜로운 마음’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먼저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을 장엄하게 선포한 후에 덧없는 인생과 인간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얻고자 하는 염원을 드러낸다. 이로써 인생무상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초월하여 ‘지혜로운 마음’을 얻으면 더 이상 덧없는 인생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의미 있는 삶에 희망을 걸고 투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편이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찬양과 덧없고 나약한 인간 본질에 대한 탄식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절망이나 허무주의에 빠지도록 하지 않으며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내적 평화와 신뢰와 희망을 가지게 한다. 더욱더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동시에 인간의 죽음도 명령하시는 모순 앞에서도 시편작가는 ‘지혜로운 마음’에 희망을 두고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시편작가는 ‘덧없는 인생’과 ‘지혜로운 마음’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과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 관계 안에서 이해한다. 덧없는 인생은 ‘시간’과 관련되며 시편 90편은 시간에 대한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시편작가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임을 암시한다. 만일 시편작가에게 시간이 본질적인 문제였다면 지혜로운 마음 대신 장수하도록 기도했을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수보다 더 큰 축복은 없었는데(시편 21,5; 61,7;91;133,3) 수명을 연장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마음이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편 90편의 작가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 죄가 밝히 드러남을 고백하면서도 다른 시편작가들과 달리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하기보다(시편 65,4; 78,38) 지혜로운 마음을 얻고자 기도한다. 그에게는 지혜로운 마음이 죄의 용서보다 더 우선이인 것이 다른 시편작가들과의 다른 점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인생과 지혜로운 마음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 지혜로운 마음은 그에게 삶의 질의 변화를 불러오는 개념이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의 중요한 단서이다.
지혜로운 마음은 이스라엘 현인들이 인생의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열렬히 추구했던 것이다. 그들이 갈구했던 지혜로운 마음은 시편 90편의 중요한 주제이다. 시편 90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인생에 대한 가르침과 깊은 위로와 희망을 안겨준다.
덧없고 나약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묵상은 이 시편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동시에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이 하느님과 깊은 대화를 하도록 초대한다. 시편 90편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를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시편보다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시편작가는 지혜문학의 전통 안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올바른 인생길로 나아가기를 염원한다. 시편 90편에서 ‘지혜로운 마음’은 올바른 인생길을 걷게 하는 중심적인 동력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올바른 인생길을 걷기 위해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인생의 깊은 의미를 찾으며 올바르게 살기위해서 ‘지혜로운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시편 90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
시편 90편의 작가는 공동체 탄원 시편에서 나오는 질병, 가난, 박해, 기근 등과 같은 문제로 씨름 하지 않는다. 그는 덧없는 인생을 성찰하는 자세로 고백하고 간청드린다. 공동체 탄원 시의 삶의 자리 대신 지혜문학적 전통과 제의적 배경이 삶의 자리이다. 이스라엘의 지혜는 어떤 계획적인 면에서도 반종교적이거나 비종교적이지 않기에 현인들이 제의에 참여했다. 실제로 유배 이후에 많은 서기관들은 사제였으며 기도는 그들의 관심이었다. 이 시편이 개인적인 구체적인 반성의 상황에서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가 되었고 제의와 필연적인 관계를 가졌다. 결론적으로 시편 90편은 어떤 한 의인의 경건심에서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공동체가 제의에서 인생에 대해 성찰하고 기도할 목적으로 이 시편을 사용했으리라.
시편 90편의 구조
시편 90편의 본문은 1-12절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로 그 내용은 덧없는 인생에 대한 탄원이며 13-17절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로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부분이다. 주제가 다른 독립된 두 시편이 내적 요소들로 하나로 결합된 통일성을 지닌 단일 시편이다.
이 시편은 크게 표제(1 ㄱ절),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1ㄴ-2절), 덧없는 인생(3-10절), 지혜로운 마음(11-12절), 복된 삶(13-17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편작가는 처음부터 주님이 대대로 인간의 거처이시며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하면서 주님께 대한 신뢰를 선언한다(1-2). 그러나 곧이어 당혹스럽게도 창조주 하느님이 인간의 죽음을 명령하시고 인간의 죄를 밝히시며 진노하시는 분이라고 말함으로써(3-10) 하느님은 인생을 덧없게 만드는 장본이이 되신다. 그래서 인생은 풀과 같이 덧없고(5-6절), 한숨처럼 지나가며(9절) 제한된 수명마저 쏜살같이 날아간다(10절). 더욱더 하느님은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3절), 홍수로 쓸어버리시고(5절), 분노로 소스라치게 만드시며(7절), 인간의 세월을 노고와 고통 속에 보내게 하시며(9-10절) 폭력을 행사하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그 폭행 이면에는 인간의 죄(8절)와 그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할 줄 모른다는 뜻이 내포되어있다(11절). 그렇지만 시편작가 폭력을 행사하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기는 켜녕 오히려 그분께 ‘지혜로운 마음’을 얻고자 하는 기도로 전환한다. 더욱이 열린 마음 자세로 복된 삶을 위해 간청한다.
Text 안에서
1. 표제: 기도, 하느님의 사람 모세
일반적으로 시편 표제는 후대의 편집적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시편 전체에서 거의 절반이 다윗과 관련되지만 유일하게 시편 90편의 표제에만 모세가 나타나는데 이 모세의 이름만으로 정확한 뜻을 밝히기란 어렵다. 이 시편의 표제와 본문에 나타나는 언어와 사상이 모세의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는 것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모세를 종종 이 시편의 저자로 간주한다. 특히 모세가 하느님과 특별한 친밀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를 이 시편의 저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편 90편 본문의 내적 요소들과 모세오경의 자료들은 모세가 이 시편저자가 아님을 입증해준다.
이 시편의 저술시기 역시 이 시편이 가장 오래된 시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욥과 코헬렛의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4-3세기까지 광범위하게 거론한다. 사실 이 시편의 엄숙한 분위기와 지혜 용어들은 이스라엘의 유배 이후의 시대 상황을 잘 반영해 준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유배이후의 암담한 현실에서 새로운 희망의 기도를 드리며 특히 모세의 중재 기도를 기억했던 시대 상황을 반영하므로 여기서는 ‘모세의 기도’로 옮긴다. 하지만 모세의 기도로 옮긴다고 해서 모세가 저자라는 의미는 아니며 단만 모세를 기도의 모델로 생각하는 것이다.
시편 90편이 모세와 관련성으로 보아 시편저자가 모세오경에 익숙하여 토라를 잘 알뿐만 아니라, 시편 90,5-6과 이사 40, 6-7이 병행하는 것으로 보아 후대 예언문학과 지혜문학이 공존하던 분위기 속에서 살았던 어떤 현인으로 추정된다. 시편 90편의 표제에서 터필라는(기도) 이 시편이 제의에서 사용된 공동체 기도였음을 뒷받침 해준다.
‘하느님의 사람’에서 이쉬는 개별 인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에노쉬와 아담이 가지는 일반적 개념과 다르다. ‘하느님의 사람’은 예언자들에게 붙여진 칭호이며, 사실상 예언자와 동의어(1사무 9,8; 1열왕 13,18)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엘리야, 엘리사, 사무엘, 다윗, 느헤, 스마야, 익달라, 그리고 익명의 사람에게도 이 칭호를 사용했다. ‘하느님의 사람’은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그에게 호소하는 사람을 병이나 기근과 같은 문제에서 도와줄 수도 있다. 그는 절대적으로 백성의 편에 서 있는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받은 대사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람’은 기원전 8-6세기의 문서 예언자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대기 상.하권, 에즈라기, 느혜미야기와 같은 후기의 책에서는 모세와 다윗은 단순히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으로 언급된다. 특히 모세는 하느님의 절친한 친구였으며(탈출 33,11;민수 12,8; 신명 34,11) 율법과 지혜 스승이었다는 점에서 구약성경이 그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불렀다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 구약성경에서 모세는 유일하게 백성의 대표로 하느님과 대화하고 그분께 기도드렸으며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여 그분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얻어냈다. 따라서 표제의 ‘모세’는 이 시편의 저자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어려운 시기에 살았던 이스라엘인들의 기도 모델이요 지혜 스승으로 소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전능하고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1-2절)
언뜻보기에 1ㄴ-2절은 하느님의 영원하심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편작가는 하느님을 우주의 주인이요 창조주로 장엄하게 선포한다. 부사로 쓰인 ‘대대로’ ‘영원에서 영원까지’는 하느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하느님은 지혜로써 모든 것을 창조하신다(시편 104,24;잠언 3,9;예레 10,12). 하느님은 자연을 창조하심으로써 그분의 지혜를 드러내시는데,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로 ‘지혜로운 마음’(12절)을 주실 수 있다는 일종의 복선이다. 하느님은 공간적으로 인간의 거처이시며, 시간적으로는 영원히 계시는 분(영원하신 하느님)이다. 시편작가는 창조의 기억을 떠올리며 일찍이 그의 공동체가 체험했던 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회상하고 미래에도 주님이 영원히 계신 분임을 선포한다. 인간과 다르게 영원하신 분이이라는 것이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그리고 땅과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하느님이 계셨다(2절)는 신뢰선언은 모든 탄원과 청원을 위한 기초이다. 시편작가가 시편의 시작부터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보호자이며 영원한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덧없는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현실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순명하는 사람의 태도를 반영한다. 결국 시편저자는 하느님은 전능한 보호자이시고 영원한 창조주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이 인간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실 수 있음을 예고한다.
주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시편작가와 하느님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를 확고하게 설정한다. 종으로서 하느님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섬기는 것’이고 종교적으로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시편작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을 ‘주님’으로 부름으로써 온 우주 만물과 인간의 일이 주인이신 그분께 속해 있음을 고백한다. 즉 하느님은 만물에 대하여 권한을 가진 전능하신 분이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아울러 언제나 인간과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시편저자는 창조주 하느님이 피조물에 대해 책임진다는 사실을 ‘거처’의 표상을 통한 보호자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구약성경에서 거처는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뿐 아니라 백성이 모여드는 장소인 성전의 개념도 지닌다(시편 15,1;84,2-5). 거처인 하느님이 많은 세대의 사람을 위해 진지가 되시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오아시스가 되신다는 은유는, 하느님이 보호자이시라는 표상과 관련된다. 하느님이 인간의 거처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상황에서 ‘편안한 쉼터’, 안전한 장소가 되어 주신다. 즉 하느님이 튼튼한 신뢰의 기반이 됨을 암시한다. 또한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분 안에 안식처를 마련한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분과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절에서 하느님은 현존은 성전, 성소, 피난처의 개념을 뛰어넘는 공간적 상징으로 칭송받는다. 여기서 하느님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모든 세대가 의지할 수 있는 ‘거처’로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스스로 존재하시는 ‘전능한 분’(1ㄴ절)으로 등장한다. 하느님은 세상의 하느님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기원에서부터 세상의 창조주로 기억한다. 이 출산하는 하느님이 12절에서 여성형 지혜와 짝을 이루어 마침내 창조주 하느님이 인간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는 분으로 발전한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에서 산의 생성은 고대의 다양한 창조 신화들을 연상케 한다. 주님께서 산들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언급은 시간과 영원성, 창조된 우주와 창조주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한다. 산은 ‘어머니의 땅’의 자궁에서 태어난다는 신화를 연상시킨다(욥15,7). 여기서 신화적 사고를 흔적을 반영케 하지만 창조에 앞서 창조주가 먼저 계셨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인다. 시간적 부사들(전에, 영원히)과 공간적인 장소들(산, 땅, 세상)을 사용하여 모든 것에 앞서 계시고 끝이 없으신 영원한 하느님과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찬양한다. 하느님은 생명을 낳으시는 분이요 창조주이심을 이시다. 구약성경에서 ‘산들’은 땅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으로 고대나 영속적인 힘의 상징으로도 사용된다. 물리적인 피신처(시편11,1)과 내적인 힘(시편 30,8)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편작가는 주님께서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심을 강조하려고 많은 피조물 가운데 특별히 산을 선택한다. 산은 ‘안정감’과 ‘영속성’이라는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땅(에레츠)과 누리(테벨)’ 즉 땅과 세상은 병행어로서 한 쌍의 낱말이다. 주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우주의 안정된 특징과 우주의 창조주인 주님의 권위를 강조한다. 땅도 세상도 하느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하느님의 창조주이심을 의미한다. 땅은 우주론적으로 하늘과 대조되고 바다와도 대조되며 사람이 서 있고 지질학적으로 개인의 영역이나 분재된 땅이며 정치적으로는 어떤 이가 통치하는 곳이다. 이 밖에도 ’지하세계‘와 ’저승‘을 뜻한다. 창세기에서 땅이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고 폭력으로 가득차 있었다(6,11)고 할 때 에레츠는 땅과 그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것이었다. 테벨은 하느님의 창조행위와 관련되고 그 결과로서 땅의 안정성이나 견고함을 나타내는 문맥에 사용된다. 따라서 세상은 땅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세상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부분의 땅이나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시편 9,9;19,5;96,13;98,9). 에레츠는 이스라엘의 땅을, 테벨은 이방인의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시편 96,10). 그러므로 이 시편에서 땅과 세상이라는 표현은 어떤 피조물도 그 기원에서 하느님과 견줄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 세상만물보다 그분이 먼저 계셨다는 사실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영원에서 영원까지‘라는 시간 용어를 사용한다. ‘영원에서 영원까지(올람)’는 하느님의 시간을 말한다. 올람은 기본적으로 과거와 미래의 관점과 함께 무시간, 변하지 않는 시간인 영원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가장 먼 시간’을 의미한다. 시작부터, 영원에서 태곳부터로 볼 수 있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고대의 시간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미래의 시간까지 말한다. 무한한 과거에서 무한한 미래까지이다.
2절에서 시편작가가 하느님을 엘로 표현한 것은 고대의 사고와 일치한다. 엘은 모든 것의 창조주요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엘은 땅의 주인이다. 창세기 14,19에서 ‘엘 엘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로 나타난다. 주님은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하느님이시오. 다른 피조물과 비교도 안되는 영원한 분이심을 찬양한다. 하느님의 어머니다운 출산과 아버지다운 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이 깊은 신뢰심이 하느님께 대한 지혜로운 마음과 그분께 간청을 드리는 원동력이 된다.
3. 덧없는 인생(3-10절)
시편 90편에서 시편작가가 이 시편의 도입부(1-2절)에서 자연계의 가장 강한 피조물의 표상을 사용하여 하느님을 찬양한 이유는 하느님의 전능에 비해 인간의 나약함(3-10절)과 극적인 대조를 위한 것이다. 1-2절이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묘사라면 3-10인 덧없는 인생에 대한 묘사이다. 영원한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대조이기에 인생의 덧없음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주님이 보호자이시고 창조주이며 영원한 하느님임을 인간이 감지할 수 있도록 강력한 표상인 거처, 산, 땅, 세상(1-2절)을 적용하는 반면 인간의 비참함, 덧없음, 나약함을 표현하고자 인간에게는 물질계에서 가장 연약하고 보잘 것 없고 가치 없는 것들인 먼지, 잠, 풀(3-5절)에 비유한다. 하느님이 든든한 거처이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은 먼지에 지나지 않으며 잠이나 풀과 같고, 죄인이요 한숨 속에 노고와 고통의 짐을 져야하는 존재이다. 어떤 문학작품도 영원한 하느님과 덧없는 인생 2-6절에서보다 더 날카롭게 대조한 곳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에 대한 깨달음은 주관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하느님께 그 기원이 있다.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느님(1-2절)이 3절에서는 갑자기 죽음을 선포하시는 분으로 변한다.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3절), 사람들을 쓸어버리시는(5절) 하느님의 모습은 무섭고 과연 폭력적으로 보인다. 특히 하느님의 진노와 분노에 압도되어(7절) 인간의 세월은 한숨 같고(9절) 노고와 고통뿐이다(10절). 그러므로 3-10절에서 인생이 덧없는 이유는 하느님께 있다. 그런데 인생의 기간을 단축시키는 하느님의 진노와 분노는 의롭지 못한 인간의 죄탓이다(시편 38). 인생을 잠이나 풀에 비유하고 노고와 고통에 관심을 쏟는 지혜문학과 흡사하다. 덧없는 인생의 현실(3-6절)과 죄에 대한 인식(8절) 은 시인이 ‘지혜로운 마음’(12절)을 얻고자 하는 근본적인 동기이다.
짧은 인생(3-6절)
시편저자는 3-6절에서 나약한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백한다. 저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찰자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현인의 모습이다. 천년, 어제, 야경, 아침저녁(5-6절)과 같은 시간 용어들은 덧없는 인생을 표현한다. 3절은 먼지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의 죽을 운명을 말하고, 5-6절은 두 가지 죽음, 곧 홍수에 휩쓸려 가는 것과 같은 ‘갑작스런 죽음’과 풀처럼 돋아났다가 시들어 말라 버리는 ‘자연스런 죽음’을 암시한다. 두 죽음 모두 허무하기 마찬가지다. 3절은 창세 3,19에서 인용된 것으로 명백히 인간의 죽음을 암시한다. 사람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제는 이스라엘 현인들의 중요한 사색거리이다. 시편 8,5절의 인간은 비참하고 허무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90편 3절에서 인간은 덧없이 사라져야 하는 연약한 인간으로 풀같이 시들어 말라 버리는 존재를 의미한다. ‘돌아가다’라는 동사는 동일하게 사용하며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는 사상을 반영한다. 3절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죽음을 명령하시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암시한다. 이렇게 인간을 창조하시고 죽음을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바로 하느님이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뜻한다. 생명이 하느님의 창조에 해당되는 것처럼 죽음도 하느님의 섭리에 속한다. 단지 시편작가는 그 안에서 인간이 지혜롭기를 바란다(12절). ‘돌아가다’의 이차적 의미는 회개를 의미한다. ‘당신께서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는 덧없는 인생, 곧 인간이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가리킬 따름이다. 구약성경에서 ‘돌아가다’, ‘내려가다’는 흔히 죽음을 뜻하는 은유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죽을 운명에 속한 연약한 존재임을 말한다.
천년은 인간에게 엄청난 시간이지만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단지 하루의 몇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천년은 성경에서 구백육십구 년으로 가장 오래 살았다고 하는 므투셀라의 수명(차세 5,27)과 비슷한 기간이지만 영원한 하느님에게는 겨우 밤의 몇 시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표시하는 그분의 계약의 약속도 천대에 이른다(신명 7,9; 시편 105,8절) ‘천 대’는 인간에게 무한한 시간이다. ‘천’은 하느님의 영원한 주권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시편작가는 하느님의 무궁한 시간에 비해 인생의 기간이 너무도 짧음을 하루와 천년이라는 비유를 들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다.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기에 베드로 사도도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2베드 3,8). 따라서 ‘천년도 당신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라는 표현은 무한하고 영원한 정신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지나간’이란 말은 현재로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는 시간이 전혀 의미 없다는 것을 선포한다.
‘야경’은 이스라엘인들은 ‘경’을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경’은 일정한 밤 시간을 나타낸다(시편 63,7).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모세시대만큼이나 오래된 기원이다(탈출 14,24). 이스라엘에서 ‘경’은 호위병들을 위해 밤 시간을 나눈 것으로서 아마 그들이 측량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시간 단위였을 것이다. 이 문장에서 이스라엘 호위병들에게 가장 긴 기간인 ‘천’과 가장 짧은 기간인 ‘경’이 대조된다. 한경은 네 시간으로 하느님의 눈에 천년이 네 시간과 같다는 비유는 천년이 하루(어제)같다는 비유이로 하느님이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음을 뜻한다.
5-6절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교차 대구(잠/저녁: 아침)로 여기서 아침과 저녁은 인생의 짧음을 뜻하는 시간에 대한 은유이다. 하루살이 식물처럼 덧없는 인생을 가리킨다. 덧없는 인생을 뜻하는 잠과 풀은 영속하지 못하는 일시적인 특징을 띈다. 인생을 꽃에 비유함은 연약함이다. 인생의 짧음을 하느님의 영원성에 아침에 피어나서 저녁에 시드는 하루살이 풀과 같다는 비유는 가나안의 건조한 여름 기후의 상황에서 나왔다. 그런 기후에서 풀은 아침 이슬을 먹고 푸르렀다가 날씨가 더워지면 순식간에 바싹 말라 버린다. 현인들은 자연을 관찰하고 관찰한 바를 인생에 적용함으로써 인간의 올바른 생활을 조명했다. 이러한 특색이 지혜문학과 예언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시 예언자, 사제, 현인들이 공통된 문화 환경 속에서 살았고 많은 언어들이 상이한 집단에 공용된 것에 있다. 구약성경에서 물(홍수)는 자주 죽음의 은유로 사용되고 여기서는 인간의 생명이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점을 강조한다. 순식간에 홍수에 쓸려가듯 우리의 인생도 허무하게 순식간에 끝나 버림을 비유한다.
구약성경은 여러 가지 신학적 상황에서 ‘잠’을 이야기 한다. 잠을 못 자거나 두려운 불안감과 대조적으로 하느님의 보호를 받으며 무사하게 잠을 잘 수 있다(시편 3,6;4,9). 신선하고 상쾌한 잠은 하느님께서 의롭게 본 행동의 결과로 간주되고, 불면증은 악한 삶의 길과 연결된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에게 잘 때에 복을 주신다(시편 127,2). 이는 매년 신이 죽고 부활하는 가나안의 다산 제의의 영향을 받아 구약성경은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려고 ‘잠’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본래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편으로 잠은 모든 혼란과 삶의 불안이 끝나는 무덤의 고요 속에서 죽음의 잠을 자는 영원한 잠이며, 종말론적 희망의 상황에서 죽음의 잠에서 일어남을 언급한다. 또한 성경에서 잠은 악인의 삶과 관련되어 ‘그들은 잠과 같다’(시편 73,20; 욥 20,8) 하느님이 죽음을 선포하시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다. 하느님은 밤에 잠자는 인간을 죽음으로도 데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장춘몽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인생을 잠이나 꿈에 비유한 것은 거의 모든 언어에서 공통적이다. 이는 잠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리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 역시 짧은 한 순간을 거듭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침은 짧지만 축복과 경고를 주는 시간이요 동시에 희망의 시간이다. 시편 작가는 저녁에 울음이 깃들어도 아침에는 환호하게 된다(30,6)라고 노래한다. 그래서 ‘아침’은 모두 다 좋은 세상이나 사람과 관련된다. ‘아침에 돋아난 풀’을 인생에 비유한 것으로 모든 인생에는 얼마간 찬란한 희망의 때나 한창 때가 있음을 의미한다. ‘돋아난다’라는 말은 인생에서시작이 있고 희망이 있음을 의미한다. ‘풀’은 오래 살지 못하는 특성 때문에 주로 덧없는 인생을 상징한다. 멸망하는 적이나 연약한 인간에 대한 비유로 사용한다. 인생을 풀에 비유한 신학적 의미는 인간이 풀과 같이 덧없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결코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저녁’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제의’와 ‘위험’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저녁’은 제의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저녁에 봉헌기도를 드리기 때문이다(시편 141,2) 그런가 하면 아침에 하느님의 도움이 있다는 것과 달리 저녁에는 위험과 공포가 맹렬히 찾아들기도 한다. 테러집단의 공격, 죽음, 등 ‘저녁’은 인생의 ‘노년기’에 해당된다. 또한 ‘저녁’은 죽음의 시간을 암시한다.
6절에서 ‘시들다’와 ‘마르다’라는 동사는 비참하고 허무한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시인은 5-6절에서 홍수, 잠, 풀의 표상을 가지고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는 3절에서 인간의 본질을 기술한다. 이러한 표상들이 주는 죽음에 대한 강한 분위기 때문에, 5-6절에서 덧없는 인생에 대한 분위기가 한층 더 고조된다.
인간의 죄와 제한된 수명(7-10절)
시편작가는 3-6절까지는 보편적인 인간에 대해 3인칭 복수로 말하다가 7절부터 1인칭 복수로 ‘우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우리’는 유배 중에 있는 이스라엘과 관련시킨다. 또한 하느님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라 할 수 있다. 7절 이하에서는 새로운 전이가 일어난다. 1-2절에서는 영원한 하느님과 3-6절에는 덧없는 인생에 대조를, 7-10절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죄가 선명이 대조를 이룬다. 시편작가는 관심은 하느님의 영원하심에서(1-2절) 하느님의 노하심(7-9절), 그리고 인생무상(3-6절)에서 세대가 겪는 고통(10절)으로 바뀐다. 5-6절에서 덧없는 인생에 대해 사용한 마르는 풀의 표상이 7-10절에서는 하느님의 진노(노여움)과 같은 의인화된 용어로 바뀐다. 하느님의 무자비한 감정은 창조에 거슬러 표출하는 그분의 파괴적인 힘으로 보인다. 또한 하느님이 인격체로서 모든 감정요소를 가지고 인간사에 정열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임을 묘사한다.
7-10절에-서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노하심 그리고 그 결과로 초래되는 인간의 제한된 수명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구약성경에서 인생의 기간이 제한되는 것은 종종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설명된다(창세 6, 3,13). 이 죄는 육체적 죽음의 원인이기도 하다(창세 2,17;로마 5,12) 그런데 성경에서 ‘죽음’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키기에 죄가 있는 곳에서는 인생의 덧없음이 심각한 문제가 된다. 또한 죄의 필연적으로 고통을 불러온다. 죄가 고통 및 인간의 수명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이런 사항은 지혜 스승들이 말하는 인과응보의 원칙에 매우 가깝다. 따라서 지혜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죄에 대한 벌로서 하느님이 내시는 진노, 분노, 노여움과 같은 감정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더 지혜롭게 하기 위한 교육적 성격이다.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노하심(7-9절)
7-9절에는 진노, 분노, 노여움과 같은 하느님의 노하심과 관련된 용어들이 나오는데, 이 용어들은 구조적으로 ‘우리의 죄악들’과 ‘우리의 감춰진 죄들’을 둘러싼다. 이 구조는 인간의 죄 때문에 하느님이 노하신다는 것을 설명한다. 하느님의 노하심은 그분의 인격적인 활동이고 그분의 역사하심을 인간 편에서 강하게 느끼게 하는 방식이다. 진노와 우리들의 죄악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느님이 노하심 역시 인생무상의 원인이다. 시편에서 하느님의 노하심의 표현은 그분의 자애 못지않게 자주 발견된다. 시편작가는 하느님은 노하시고 또 회복시켜 주시는 분으로 인식한다(시편 60,3). 하느님이 고통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그분께서 불평과 비난을 쏟아 놓지만,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근본적인 태도는 신뢰이다. 신뢰는 구원을 위한 길을 열어준다. 7-9절에서 시편작가는 자기 죄를 솔직히 고백하며 죄로 인한 벌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식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특별한 이유 없이(창세 32,23-33; 탈출 4,24), 백성의 죄 때문에)1열왕 8,46;2역대 6,36), 그리고 백성의 불순종(민수 32,10-14)과 불신앙(민수 11,1.10.33) 때문에 진노하신다. 그러나 대부분 하느님의 진노는 인간의 그릇된 행동에서 비릇되며 그분의 진노는 반드시 계약관계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느님의 진노는 교육적인 효과를 갖는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노는 그분의 거룩함과 정의와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본질적 요소와도 같다. 여기서 진노는 노여움의 결과로서 개인적으로 숨 가쁘게 만드는, 육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흥분 상태를 말하는 반면, 분노는 더욱더 내적인 감정, 곧 노여움의 내적인 불을 강조한다. 인간의 분노는 악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가라앉혀야 한다. 따라서 진노, 분노, 노여움은 모두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며 하느님의 자애와 대립되는 개념들이다.
하느님의 분노는 유배이전에는 주로 백성의 그릇된 행위 때문에 일어난다면(예레 4,4) 유배 동안이나 그 이후에는 외국 민족들(시편 76,6)과 그 백성 가운데 있는 개별적인 죄인들(시편 6,2;38,2) 때문에 생긴다. 진노의 경우 하느님의 분노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고 그 계약의 의무를 실행하지 않은 것에 있다(신명 29,27). 그래서 시편에서 하느님의 분노와 벌은 밀접히 연관된다. 하느님은 분노를 격렬하게 표출하시는데 불처럼 태우기도 하고 물처럼 쏟아 붓기도 하신다(79,6). 시편에서도 인간을 소스라치게 만드는 하느님의 분노 이면에는 인간의 죄악과 감춰진 죄가 놓여있다(8절).
8절에서 하느님은 심판자요 인간은 죄인의 모습으로 나온다. 이스라엘이 행한 모든 일은 그분 앞에 드러나고 그들의 온갖 죄악(부정직한, 타락한)은 주님 앞에서 드러난다(집회 17,19-20). “저희의 감추인 죄를 당신 얼굴 빛 앞에 두셨나이다.” 인간에게는 숨겨진 잘못이 있고, 주님의 얼굴을 피해갈 곳이 없다는 점은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입증되는 진솔한 고백이다(시편 19,13; 139,7)). 죄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은 도덕적 요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거룩함은 윤리적 본질보다 오히려 더 비이성적으로 종교적인 ‘금기주의’의 본질에 놓여있다. 따라서 종교적 윤리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죄가 하느님과 인간의 간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점에서 덧없는 인생에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8절에 알려진 죄와 숨겨진 죄는 고대의 형식이다. 고대인들은 인간의 양심에 그늘진 지역이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부지중에 하느님의 법령들을 범하거나 하느님의 특별을 침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감춰진 죄’는 우리의 동료들이나 심어지 우리 자신들에게조차 감춰진 것들이지만 우리 마음의 비밀(마음의 내적인 죄)을 아시는 하느님께는 알려지는데(시편 44,22) 그분께는 어떤 잘못도 감춰질 수 없기 때문이다(시편 69,6). 죄악과 감춰진 죄들은 아마도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결과이다. 마음이 지혜롭지 못해서 계명을 지키지 않은 죄를 시편작가는 시인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가르침과 계명은 인간에게 장수와 행복을 준다. 이러한 죄를 심판하는 도구가 주님의 얼굴빛이다.
‘당신의 얼굴의 빛’은 주님 자신이 친히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의미한다. 또한 시편 90,8에서 하느님의 얼굴빛은 일종의 등불로서 인간의 비밀들을 폭로한다. 8절에서 ‘당신의 얼굴 빛’은 89,16에서 하느님의 호의를 의미하는 것과 달리 모든 것을 찾는 하느님의 눈을 가리킨다(시편 139). 하느님 앞에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기 때문에 하느님의 밝은 부분은 우리의 어두운 구석을 밝힌다. 결국 이것은 그분의 전지하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8절에서 죄는 우리가 보는 그대로의 죄가 아니라 하느님 얼굴빛 앞에 있는 죄이다. 마찬가지로 지혜는 절대적 순수함과 빛과 선을 발산한다(지혜 7,25-26). 이러한 지혜의 특성을 인정하고 시편작가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서 지혜로운 마음(12절)을 기도의 목표로 정한다. 지혜로운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이미 죄의 용서받음에 대한 증거이다.
9절에서는 ‘우리의 모든 날’과 ‘우리의 세월’이 끝나 버린다. 이런 시간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4절에서 시간을 하느님 관점에서 바라보고 ‘천 년’에서 ‘어제’ 그리고 ‘야경’으로 수렴시키는 반면, 9절에서는 시간을 인간 편에서 보아 ‘우리의 모든 날(전 생애)’에서 ‘우리의 해들’(세월)로 확장시킨다. 하느님의 노여움 속에서 한숨처럼 세월을 보낸다는 시인의 인생관은 상당히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더욱이 ‘지나가 버리다’, ‘끝내다’와 같은 동사들은 인생무상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이는 하느님의 진노, 분노, 노여움 때문이다. 하느님의 노여움에 압도되어 ‘한숨처럼’ 세월을 보낸다고 말한다. ‘우리의 세월’이란 인생의 햇수로서 언제나 끝을 향해 흘러간다. 그러나 하느님의 햇수는 끝이 없다(시편 102,28). ‘한숨처럼’ 대신 학자들은 이야기, 마음의 생각, 속삭임, 그리고 신음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한숨’은 깊은 탄식과 생명력이 없는 삶의 표현이다. 의인이 생명의 말씀인 토라를 ‘묵상하는 것’과 달리 ‘한숨’은 삶에서 아무런 이익도 의미도 없이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 낙심한 분위기이다. 한숨은 인간이 그것을 내쉬는 순간 사라지는 특징이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은 덧없이 한순간을 살아가 죽게 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전 인생은 ‘긴 한숨’이요 ‘신음’ 로 이해 할 수 있다.
제한된 수명(10절)
10절에서는 칠십년 내지 팔십 년이라는 인생의 기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탄식한다. 제한된 수명은 지혜문학 저자들의 관심거리이다.(코헬 2,3; 욥 14,5) 칠십 년 내지 팔십년의 인간 수명은 영원의 날수 앞에서 겨우 몇 해일뿐이다(집회 18,10). 인간은 이 정 해진 시간과 갈등한다. 이 갈등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과한 재앙으로도 본다. 하느님은 시간도 정해 놓고, 인간에게 시간의 변화를 깨닫을 수 있는 의식도 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도 단축시킬 수도 있다(시편 89,46;102,24). 이 절에서 인간이 사는 동안에 겪어야 하는 노고와 고통은 최조의 인간에게 주어졌던 고통(창세 3,17)을 상기시킨다. 그러기에 노고의 고통은 인류의 역사와 기원을 같이한다.
코헬렛에게 인간의 고통은 시간과 관계있다. 하느님이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이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생은 온통 노고와 고통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은 자기기만과 모든 그릇된 이데올로기를 밀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사라져 버리고’ 인생이 ‘나는 듯 가 버린다’는 표현은 3-9절에서 덧없는 인생을 뜻하는 동사들(돌아가다, 지나가다, 쓸어버리다, 시들다, 말라 버리다, 스러지다, 지나가 버리다, 끝내다)과 일치한다. ‘근력’은 생명이 하느님께 달렸음을 믿는 신앙인의 자세로 본다. 즉 평균 활력을 넘어서는 것으로 해석한다. 사실 칠십년을 이스라엘인의 평균수명으로 보기 어려우며, 더욱더 팔십년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고대 근동은 전쟁, 역병으로 유아사망률이 높았으며 호시절에도 평균수명이 약 사십세였다. 구약성경에서 한 세대를 대략 사십년으로 잡는다. 따라서 칠십년 팔십년은 그야말로 최고 연령에 가깝다. 이스라엘 현인의 장수는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준수한 결실로 본다. 시편에서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과 관련된다. 어쨌든 시편작가는 인간의 인생은 하느님처럼 영원할 수 없으며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존재임을 말하고자한다.
‘고통’은 지혜문학에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악이나 죄악을 행하는 자 이외에도 노고, 불행, 역경과 같은 인생의 고통스럽고 슬픈 측면을 의미한다. 히브리 사고에서 죄는 불가피하게 역경과 고통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시편작가는 지혜로운 마음을 얻고자 하고 이 덧없는 인생에게 노고와 고통의 시간으로 주어지는 것에서 11절에서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알게 하려는 것에 있다.
4. 지혜로운 마음(11-12)
창조주와 피조물(3-6), 거룩한 분과 죄인(7-10)의 관계였다면, 11-12절은 하느님은 인간의 경외를 받으셔야 할 전능한 분이시며 인간은 마땅히 지혜로워야 한다 것이다. 1-10절에서 영원한 하느님과 덧없는 인생 사이의 간격이 11-12절에서는 하느님의 전능과 인간의 무지 사이의 간격으로 나타난다. 시편저자는 그 간격에 하느님께 호소하지 않고 하느님과 인간 관계에 반드시 ‘지혜로운 마음’이 필요함을 인식한다. 또한 여기에는 ‘주님을 경외함’이라는 지혜문학의 주제들이 있다. 사실 인간이 제한된 수명을 깨닫는 그 자체가 이미 지혜와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그는 하느님의 분노 앞에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 ‘지혜로운 마음’을 얻고자 신뢰로 기도한다.
주님을 경외함(11절)
11절은 인간이 주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하느님의 분노를 체험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가 부족함에서 온다는 것이다. 지혜문학에서 주님을 경외함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란 사상이 담겨있다(잠언 8,13; 욥기 28,28). 인간이 지혜가 부족하면 하느님을 제대로 두려워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11절에서 시편작가가 말하는 하느님의 진노의 위력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분노하시는 기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가 아는가’라는 수사의문문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두려움이란 낱말은 대부분의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창조주가 계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지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수사의문문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함을 의도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고 연약한 인간이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지혜는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 능력의 한계, 인간 지혜와 인간 지성이 깨칠 수 있는 바에 대한 한계가 있음을 의식하는데서 온다. ‘당신 진로의 위력’은 세력이나 힘, 성벽 또는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피난처, 보호, 요새를 뜻한다. 두려움도 지혜도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혜로운 마음을 얻음(12절)
시편저자는 자신의 구원을 얻고자 ‘지혜로운 마음’을 얻고자 기도한다. 지혜로운 마음은 분명 풀(5-6절)과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지혜로운 마음이 부족하면 인생은 덧없어 진다로 말할 수 있다. 덧없는 인생과 인식에서 인간의 한계와 고통의 직면에서 지혜로운 마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알고 있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지혜로운 마음이 필요하지만 먼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얻을 수 있다(12ㄱ).
12절에서 지혜로운 마음을 얻기 위해서 ‘날 수를 올바르게 헤아리는 것’이 전제조건으로 제시한다. 하느님께 ‘가르쳐 주소서“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을 지혜의 스승으로 이해한다(잠언 3,11). 지혜의 스승은 교육자로서 인간을 교육시키고 희망을 심어준다. 또한 하느님의 율법 전통 안에서 토라 교훈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생명의 길을 가르쳐 달라’ 는 토라의 교훈을 포함한 것이다. 생명은 이스라엘 하느님이 백성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지혜를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생명을 누리는데 있다. 12절에서 시편작가는 시간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냉소적이거나 체념적으로 삶을 회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인생의 날수를 헤아리고자 한다. 이는 주님의 손에 인간의 운명(시간)이 달렸기(시편 31ㅡ16)기 때문이다. 또한 날수는 인생의 길이를 헤아린다는 것보다 왜냐하면 인간 편에서 날 수를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우리에게 부족한 식별력’이나 ‘끊임없는 인생의 덧없음과 짧음’을 묵상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시편 119,100) 하느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지혜로워질 수 있다. 지혜의 시작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진실한 소망이다. 가르침을 받으려고 염원함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고 지혜를 사랑함은 그 법을 지키는 것이며 법을 따름은 불멸을 보장받는 것이고 불멸은 하느님 가까이 있게 해주는 것이다(지혜 6,17-19). 가르침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다, 이런 가르침을 받기 위한 근본적인 자세는 신뢰이다. 하느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이에게 그들의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칠 수 있다(12). 즉 덧없는 인생을 올바르게 해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결국 시편 90편은 ‘날 수를 헤아릴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표현에서 ‘생명의 길’에 대한 암시를 줌으로써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에 대한 희망이다. 이 마음은 전체 시편에서 매우 독창적이다. 또한 덧없는 인생에 대한 절망감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통합하는 뛰어난 신학적 전망을 보여준다.
‘마음(렙)’은 지혜문학에서 가장 많이 나온다. 마음은 대개 내적이고 비물질적인 본질에 관련되거나 또는 인간의 세 가지 전통적인 인격의 기능(감정, 생각, 의지)에 해당한다. 마음이 은유적으로 사용될 때는 인간의 영. 육체적 생활의 중심, 그리고 인간의 온전한 내적 생활과 연관된다. 마음이 육체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생기, 성적인 힘과 욕망의 기관과 관련된다. 한편 심리적 측면은 여러 가지 감정(고통, 기쁨, 두려움, 의심)에 따라 적용된다. 렙은 소원과 감정과 같은 활공의 장소이며 그 주된 활동은 인식이다. 인식, 인지, 기억은 렙의 지적 기능과 관련된다. 통찰력, 비판적 평가 능력, 법적인 평등과 같은 지적 역량은 모두 렙의 일이며 이 지적인 측면은 특히 지혜사상에서 중요한 의미하는데 현인의 렙은 언제나 좋은 말을 하게 한다. 렙은 사물에는 적용되고 주로 사람의 마음을 말하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시편에서 렙은 신체기관인 심장(시편 37,15)과 바다의 중심(시편46,3)을 말한다. 따라서 시편에서 렙은 육체, 심리, 지적, 기능과 인간존재의 모든 차원을 다 포함한다.
‘지혜’(호크마)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기술, 종교적 신중성, 그리고 윤리와 도덕적 지혜’를 뜻하는데 시편에서는 이해력이 있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 잡으면서(시편 58,7; 90,12)그 사람의 모든 생활과 사고에서 현인임을 증명한다. 또한 호크마는 자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관련된다(시편 111,10). 후기 지혜서에 나타나는 지혜는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지혜 8,21). 고대 이스라엘에서 지혜는 높은 지성과 신중한 연구, 다년간의 경험 등에 의거한 인간적인 능력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의인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제관에게 율법을 주었고 예언자의 입에 말씀을 넣어준 것처럼 현인에게는 조언(지혜)을 주었다고 전한다(예레18,18).
성경에서 마음과 지혜는 밀접히 연관되며 인간의 마음을 폭넓은 지적 활동의 영역으로 본다. 인식, 기억, 사고, 이해, 주의가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지혜도 그 마음 안에 자리답고 있다(1열왕 3,12).그래서 마음은 지적교육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하다. 12절에서 마음은 지혜의 자리로서 시편작가의 정신적이고 의지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또한 이 마음은 11절에서 하느님의 분노의 위력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마음은 도덕적 숙고와 결정의 중심인 지혜의지리이며 인생길에 대한 분별과 선택도 이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
성경에서 지혜로운 마음은 ‘듣는 마음’과 밀접히 연관된다. 솔로몬이 백성을 다스리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청했을 때(1열왕 3,9), 하느님은 그에게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마음’도 주셨다. 솔로몬에게 듣는 마음은 하느님의 율법과 정의에 귀기울이는 마음으로 선악을 분별하여 그분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분별력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 뒤에 숨어 있는 동기와 원의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마음은 기도로 얻어진 것이고, 시편 90,12의 지혜로운 마음은 하느님께로부터 얻기 전에 먼저 날수를 헤아릴 수 있는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종말을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얻을 수 있는 열매, 처세술과 관련되고, 단순한 지적 이해가 아니고 도덕적 인식과 행동,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이다.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이는 현인이며 부족한 사람은 지각없는 사람이다. 지혜로운 마음은 입을 사려깊게 하여 입술에 말솜씨를 더해 준다. 말을 신중하게 하는 것이 그 특징이며 대답하기 전에 깊이 생각한다(잠언 15,28). 코헬렛의 지혜의 마음은 때와 심판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마음은 어리석고 죄스러운 삶에서(3-10절) 주님이 현존하시는 복된 삶(13-17_절로 옮겨 가게 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5. 복된 삶(13-17절)
13절에서 ‘주님의 돌아오심’과 17절에서 ‘하느님의 어지심’과 ‘우리 손이 하는 일 잘되게 하소서’라는 표현은 주님이 함께하심을 뜻하는 마로서 의미상 서로 연결된다. 12절의 ‘지혜로운 마음’에 이어 13절에서 기도가 계속되는 것은 지혜문학의 특징을 반영하며 기도와 지혜는 서로 연결되어있다. 시편작가가 지혜로운 마음뿐만 아니라 복된 삶을 간청(13-17절) 할 수 있는 확신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 ‘기쁨’(집회 4,12; 6,28), ‘영광’(집회 6,31), ‘어지심’(잠언 3,17)은 지혜가 가져다주는 중요한 열매들이다.
하느님의 현존(13-17절)
이 부분에서 핵심어는 ‘당신의 종들’이 13.16절에서 반복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말하는 ‘야훼님의 돌아오소서’(13절)과 ‘드러내심’(16절)이 의미상으로 포괄 구문을 이룬다. ‘언제까지’(13절)와 ‘불행했던 햇수’(15절)는 하느님의 부재 상황을 반영하는 반면, 하느님의 돌아오심은, 불쌍히 여기심, 배부름, 환호와 기쁨, 영광, 그리고 드러내심은 하느님의 현존을 강하게 반영하는 용어들이다. 이 단락은 13-16절은 하느님의 돌아오심(13절)과 기쁜 인생(14-16)이라는 주제로 짜여 있다.
13절의 경우 ‘돌아오소서’ 는 인간이 하느님께 간곡히 부탁하는 간청이다. 이제 주님이 돌아오시도록 요구받고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유일이 불행을 기쁨으로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부분은 공동체가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13절은 탄원은 단순한 탄원이라기보다 하느님과의 친밀감을 드러내는 대담한 표현 양식으로 볼 수 있다. 그토록 단호하게 하느님께 돌아오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시편작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성찰과 그에 따른 지혜로운 마음을 청하면서 눈이 열려 하느님께로 돌아서고 있음도 있다. 또한 시편작가의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 즉 근본적으로 하느님은 인간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분(호세 11,8-9; 아모 7,3)이시라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속성이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인 ‘자애’(14절)이다. 그래서 시편작가는 어려운 시기마다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셨던 자비로운 하느님 ‘야훼’ 간청한다.
하느님의 이름 역시 1절에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 아도나이와 창조의 하느님의 이름인 엘을 칭송하고 13절에서는 자비롭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께 기도드린다.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로 부르는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모세의 기도를 상기시킨다(3,12). 야훼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언제나 자유롭게 행하시는 분이시며 인간을 위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돌아오소서, 야훼님’이라고 호소함으로써 현재로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지 않지만, 곧 하느님이 함께 해주실 것에 대한 확신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은 구원의 하느님이시다.
‘언제까지’(어찌하여)는 탄원시의 특징이며 하느님이 숨으시고 지체하심에 대한 질문이다. 하느님 부재에 대한 질문으로 시편작가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하느님께 있음을 말해준다. ‘자비를 베푸소서’는 야훼의 행동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며 그 행동의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에 의심이 없다. 이 말은 ‘마음을 바꾸소서’나 ‘후회하소서’라고 옮기기도 한다. ‘가엾이 여기다, 연민을 느끼다’로 모세가 금송아지 사건에 재앙을 내릴 때, 또 판단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판관들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의 탄원으로 사용한 기도이다.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분노에 대한 자비를 구하는 죄인의 기도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선 신앙인의 기본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기도이다. 나약하고 죽을 운명에 처한 모든 인간이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시편작가는 이 말 속에서 인간들 가운데 가장 비천하고 나약한 인간인 당신 종에게 연민을 쏟으시도록 요청한다.
‘당신의 종들’은 하느님의 이름인 아도나이 상응하는 호칭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주종관계는 이미 1절에서 시인이 아도나이라고 부를 때 암시되었다. 하느님은 주인이시오, 시편작가는 종이 됨으로써 그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음을 말해 준다. 주종관계에서 주인의 종에 대한 근본적인 임무는 종의 삶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종관계는 주님께 속하면서 주님과 함께 있는 안전함이지 결코 부정적인 의미의 예속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후배 이후에 종에 대한 묘사는 제3이사야서와 같이, 경건하지 못한 자들과 대비하여 경건한 자들을 지칭하게 되었다(56,6). 시편에서는 야훼께 속한 사람은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 지혜로운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
기쁜 인생(14-16절)
14-16절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7-10절에서 분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오히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시며 천 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푸시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하시는 분이시다(탈출 34,6-7절). 또 모든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염원하는 이 부분은 인생의 모든 날이 노고와 고통이라고 하는 10절의 내용과 정확히 대조된다.
14절에서 ‘기쁨’이 주제로써 여기서 환호하고 기뻐하는 것은 주님의 자애로 인한 구원 체험에서 솟구치는 감정이다. 기쁨은 의인의 희망에서 오며(잠언 10,28), 주님은 의인을 배불리신다(잠언 13,25). 시편에서 기뻐하는 것은 의인의 특징이다. 16절에서 주님의 종들과 자녀들에게 주님의 일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3절에서 사람들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3절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먼지로 돌려보냄으로써 그들 가장 비참한 상태로 낮추시는 반면, 16절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그분의 일과 영광을 보여주심으로써 그의 품위를 드높인다. 탈출기 1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에서 빵으로 배부르게 되지만 이 시편 14절에서는 하느님의 자애가 그들의 음식이다. 시편작가는 마치 유배생활에서 귀환이라도 하듯이(시편 126) 온 공동체가 환호하며 기뻐하도록 간청한다.
‘배불리소서’에서 이 의미는 ‘만족하다’, ‘포식하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평화와 번영의 표상이다(1열왕 4,20;코헬 2,24;3,13). 14절에서는 물질적 배부름보다는 하느님의 자애로 배부른 상태, 곧 하느님의 충실한 계약의 사랑에서 오는 만족감을 강조한다. 특히 ‘아침’에 배부르게 해달라고 한다. 이는 아침보다는 ‘곧, 즉각적으로’ 또는 ‘신속히’ 등으로 번역한다. 단 한번이 아닌 매일 그렇게 해달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도움이 아침에 온다고 기대하는 것(1사무 11,9; 2역대 20,17)은 태양이 매일 아침에 떠오르고, 어둠이 빛으로 변하고, 아침에 재판이 이루어지고, 새벽에 있었던 큰 구원체험과 같은 일들에 영향을 받았다. 또 아침에 전례가 거행되고 법적 절차도 이루어진다(시편 59,17). 시편에서 아침은 하느님의 응답과 도움을 받는 시간이다(시편 5,4). 그러기에 아침은 구원의 시간이다. 학자에 따라서 아침은 ‘젊은 시절’, ‘새로운 은총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으로, 하느님이 ‘깨어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새로운 날’을 가져다주는 때로 또는 ‘밤의 무서움과 죽음을 없애는 하느님의 강한 생명의 은유로 본다.
5절에서 아침에 풀이 돋아나고 꽃이 피는 시간, 곧 생명이나 인생의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다. 아침은 풀이 저녁에 시들어 죽는 시간과 대립되는 생명의 시간이다. 아침은 인생무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상징한다. 시편작가가 아침에 자애를 구하려고 드리는 기도는 지혜를 추구하는 이스라엘 현인들의 삶을 반영한다(잠언 8,34;집회 39,5).
‘자애’로 번역된 헤세드는 폭넓은 의미를 지닌다. 충실성이나 항구한 사랑, 또는 더 일반적인 자애의 개념은 강한 관계의 측면이다. 헤세드는 서로를 향한 인간의 태도나 행위에 사용되지만, 더 자주 충실한 사람들로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및 일반적인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속성과 유익한 행위를 묘사한다. 그분의 은총과 자비, 충만된 영원한 사랑이다. 이 용어는 절반이상이 시편에서 나온다. 시편에서 헤세드는 자애를 뜻하며 원수들이나 고통에서 구원됨을 말한다. 하느님의 헤세드는 하느님 백성의 내적생활과 공동체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구원된 사람들이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감사드리고, 기억되고, 묵상되고, 이야기 되는 것으로 교육적 기능을 한다. 이 시편에서 이 헤세드는 하느님의 진노와 노여움과 대조된다. 이 헤세드는 하느님의 역정을 저지함으로써 구원받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기뻐하게 한다. 이 시편에서 헤세드는 지혜로움 마음과 관련되고, 기쁨에 넘치는 찬미는 지혜에서 나온다. 기뻐하여라는 정신적 면에서 깊은 내적차원의 기쁨까지 묘사할 수 있다. 지혜문학에서 마음의 기쁨은 곧 사람의 생명이며 즐거움은 인간의 장수이다(집회 30,22). 구약에서 인간에게 기쁨의 요소들에는 포도주, 향유와 향, 지혜로운 아들, 좋은 말,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하느님의 향연, 이스라엘의 귀환 등이 있지만 그 가운데 구원은 가장 큰 기쁨의 동기가 되고 하느님은 인간을 기쁨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신다. 시편은 하느님 안에 기뻐하라는 것으로 가득차 있다. 시편에선 그분의 현존, 피신함, 축복, 주님의 힘, 법규, 사랑, 통치, 등이 있다. 따라서 15절에는 하느님은 고통과 불행을 주시며 동시에 기쁨도 주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인간의 불행도 행복도 모두 하느님 손에 달려 있음을 암시한다. 삶과 죽음 역시 그분에게 있다. 또한 하느님은 불행을 기쁨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불행을 겪었던 그 햇수만큼’ 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옮기면 ‘우리가 악을 보았던’이다. 그것은 우리가 고통을 겪었다는 의미이고 불행했다는 뜻이다. 15절은 분명이 공동체가 고통을 겪었음을 이야기 한다. 시편작가는 공동체가 오랫동안 죄로 인해 즐거움이 없었으므로 이제 지혜를 추구하며 그만큼 기쁨을 갈망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역사에서 토라를 지키지 못함에서 이제 그 길을 지켜 의인의 길을 가겠다는 다짐이다.
16절에서 ‘당신의 일’가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종들’과 ‘당신의 자손들’이 동의적 대구를 이룬다. 16절에서 하느님의 행위가 나타나기를 비는 소망은 17절에서 주님의 어지심이 있기를 소원하는 것과 평행하다. 미래의 세대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를 가지는 모든 인간들이라 할 수 있다. 미래의 세대가 하느님의 영광을 보도록 시편작가는 요청하는 것에 신뢰의 정신이 나타난다. ‘당신의 일’에서 ‘일’은 전형적인 기도 언어이다. 그래서 16절에서 야훼의 일이 드러나고 야훼의 일이 기억하기도 하고 야훼의 일을 찬양하기를 간청한다. 주님의 일은 역사 안에서 이루었던 하느님의 업적이나 모든 행적을 암시한다. 일을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백성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야훼의 섭리를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야훼 자신이 아닌 그분의 행위(일)이다. 일은 야훼의 자비로운 다스림이다. 또한 구원섭리의 행사 또는 하느님 섭리의 작용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여기서 주님의 일은 이스라엘에서 국한되었던 구원의 역사만이 아니고 그분의 모든 창조 행위까지 포함된다.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에서는 대해 왕권의 특징인 장엄함을 뜻한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임금의 위엄과 쌍을 이룬다. 주님의 영광은 주로 그 백성의 구원에서 빛난다(시편 111,3). 본래 왕에게 적용되었던 것으로 인간 속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편 8,6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의 관을 주신다고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낸다. 지혜문학에서 노인의 영광이 백발(잠언 20,29)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백발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지는 장수를 뜻하는 것인지라 지혜롭고 덕스러운 사람의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16절에서 시인은 하느님의 영광을 그 자손들에게 보이도록 기도드림으로써 하느님이 인간을 비참한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3절)과 달리, 인간의 품위를 그분께로 들어 높임으로써 창조의 영광과 구원의 업적이 온 인류에게 미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느님의 축복(17절)
시편작가는 ‘주님의 어지심’과 ‘잘되게 해’ 달라는 두 가지 간청으로 이 시편을 마무리한다. 두 가지 기도는 간청은 충만한 하느님의 현존을 위한 기도이다. ‘우리 손이 하는 일이 잘 되게 하소서’라는 반복 구분은 이 시편의 분위기를 처음 상태로 돌려놓는다. 그리하여 시편작가가 처음에 가졌던 신뢰가 마지막에서 확신으로 연결된다. ‘우리 손이 하는 일이 잘되게 하소서’ 라는 구절을 반복하는 것은 비참하고 덧없고 허무한 인생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효과를 준다. 특히 ‘잘되게 하소서’라는 반복 구분을 통해 ‘하느님의 돌보심’과 ‘함께 계심’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표현한다. 이 반복은 의도적인 것으로 인간의 일은 온전히 하느님의 축복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주님은 피조물인 인간이 하는 일을 잘되게 하신다’는 표현은 1-2절에서 주님이 거처요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이라는 내용과 연결된다. ‘잘되게 해달라’라는 간청은 철저한 인생무상을 체험한 사람이 하느님의 보호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편작가는 이제 모든 어둠을 몰라내고 긍정적인 삶에 대한 강한 의지로 가득차 있다. 시편작가는 인생여정이 단순히 창조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얻어 다시 복된 삶으로 순례하는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17절에서 첫째 시편작가는 주님의 ‘어지심’을 위해서 기도한다. 어지심의 사전적 의미는 친절과 즐거움의 뜻이다. 여기서는 어지심으로 사용되지만 27,4에서는 아름다움으로 쓰인다. 둘째, 시편작가는 주님을 ‘주 우리 하느님’이라는 부름으로써 야훼 대신에 엘로힘을 사용하여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 아닌 보편적인 하느님을 제시한다. 하느님이 이 일반적인 이름은 통상 인격적인 이름인 야훼뿐만 아니라 엘과도 상호 교환되었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곧 이스라엘의 인격적인 하느님임을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주 우리 하느님’(17절)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며, 동시에 13절에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더 나아가 시편작가는 17절에서 야훼를 사용하지 않고 엘로힘을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우주의 하느님을 제시하고자 한 의도를 엿보인다.
셋째는 지혜의 모티브인 ‘잘되게 하다’을 반복으로 기도를 마무리한다. 이것은 어떤 일을 확고하게 세우거나 증진시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손이 하는 일’은 ‘당신의 일’과 ‘당신의 영광’과 연관이 있다. 이 일과 관련 하여 신명기에는 항상 ‘복’을 내린다(신명 2,7; 14,29;16,15)는 말이나 풍성하고 번성케 한다(신명 30,9)는 말과 함께 사용한다. 그래서 여기 ‘우리 손이 하는 일’은 우리 삶 전체를 의미하며, ‘잘되게 하소서’는 ‘복을 내리소서’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 손이 하는 일’은 우리의 삶 전체를 가리키며, 일이 잘되게 하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다. ‘하는 일 마다 잘되는 것’은 지혜에서 나오며 시편에서는 의인이 받는 축복이고(1,3) 하느님은 의인을 보살피신다(시편 1,6). 모든 일이 잘되어 그 결실은 공동체에 생명을 준다. 지혜로운 마음과 의인의 길은 하느님이 함께하시어 공동체를 풍부한 생명력으로 넘치게 하며 절망대신에 희망을, 어리석음 대신에 지혜로써 인생의 길을 성공으로 이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나오면서
시편 90편이 전해주는 지혜로운 마음은 영원한 창조주와 덧없는 인간이 만나는 곳이요,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사는 길이다. 마치 모세가 하느님의 가장 친한 친구였듯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친밀감 속에서 살아가도록 이끌어 준다.
첫째는 주님은 전능하고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이시며 항상 인간과 함께 계시는 보호자이시다. 전능하신 분으로 인간의 거처가 되어 주시고, 인간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분이다. 둘째는 나약한 인간의 본질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시편90편이 말하는 인간의 본질이란 흙으로 돌아가야 하고, 풀과 같이 덧없고 나약하여 죄를 짓고는 하느님의 진노에 떨고 제한된 생애를 사는 동안 노고와 고생을 겪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약한 인간 본질은 창조주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인생의 덧없음이 하느님의 책임이라는 사실은 하느님이 인간의 주인이라는 뜻과도 통한다. 인간의 덧없음과 나약함은 전능한 하느님 앞에서 가장 크게 느껴진다. 이에 대한 성찰은 시편작가에게 인간에게 지혜로운 마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반면 이에 대한 깊은 체험이 없는 사람일 경우는 지혜로운 마음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셋째, 지혜로운 마음은 인간을 원한다. 하느님은 인생을 덧없게 만드신 장본인이시며 동시에 인간을 허무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인생무상과 나약한 본성 때문에 하느님은 인간을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한다. 지혜로운 마음은 그분께서 인간을 초대하시는 길이다. 이를 얻기 위해서 인간은 하느님께 기도드려야 한다. 이스라엘 현인들은 우리에게 좋은 기도의 모범을 남겨 놓았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을 만드신 주님을 찾는 일에 마음을 쏟고 지존하신 분 앞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고 간청한다(집회 39,5). 그래서 지혜로운 마음은 죄의 용서와 구원을 얻기 위한 기도이다. 지혜로운 마음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하느님은 이것을 거저 주시지 않는다. 인간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욥 28,28). 인간은 지혜로운 마음을 얻음으로써 구원을 체험한다. 따라서 지혜로운 마음은 인간의 덧없음과 한계를 알면서 동시에 하느님이 함께해 주시는 구원의 의미를 포함한다.
넷째, 지혜로운 마음은 하느님의 현존 속에 사는 복된 삶이다. 의인의 길과 같이 하느님이 보호해 주시고 함께 하시는 삶이라는 의미에서 지혜로운 마음은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한다. 지혜로운 마음은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인식이다. 복된 삶은 기쁨, 영광, 어지심과 같은 지혜의 열매들을 누리는 것이며, 이런 열매들은 모두 하느님의 현존의 강력한 표시들이다.
시편 90편에서 주님은 옛날과 변함없이 인간의 거처로서 그와 함께 계시어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지금도 하느님의 의인화된 표현들(눈, 얼굴빛, 진노, 불쌍히 여기심) 안에 함께 계시며, 앞으로도 인간이 하는 일이 잘되도록 그와 함께 계실 분이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서 인간이 하는 일을 잘되게 하는 것은 지혜의 일이며 그것은 의인의 길과 관련된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에는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으며 더 이상 인생무상이나 죄가 자리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덧없는 인생이 지혜로운 마음을 지니면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은 그를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신다.
참고문헌: 시편 90편과 지혜로운 마음, 전봉순 지음,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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