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길잡이

에제키엘 예언서 입문

마리아 아나빔 2013. 9. 8. 20:47

 

 

 

                                      에제키엘 예언서 입문

 

 

I. 입문

 

예루살렘 멸망과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6)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자들에게 파견된 예언자가 에제키엘이다. 에제키엘서는 그가 고집 센 유다 백성의 고착된 신앙을 비판하며, 마침내 하느님의 자비로 예루살렘이 재건되리라 예언한 내용을 담고 있다.

 

1. 책의 이름

예언자 에제키엘이 전한 말씀을 모아 놓은 것이라 그 이름을 따서 ‘에제키엘’이라 했다. 이 이름에는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하느님께서 힘을 주신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특징은 시문이 아닌 산문체로 되어 있다. 연대기 순으로 편집되었으며, 예루살렘 함락전과 후의 메시지 내용이 달라진다. 레위기의 성결법전과 유사한 사상들이 나타난다(17-26장).

 

2. 저자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백성의 불행을 함께 겪으면서 선포한 예언의 말씀을 제자들이 모아 놓은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에제키엘은 사제 부즈의 아들로서 바빌론 유배지에서 소명을 받았으며 기혼자였다(1,3;24,15-18). 그는 1차 바발론 유배 대 야호야킨 왕과 함께 바빌론에 끌려온 사람이다. 유배 5년째, Nippur 근처 그발강가 텔‘ 아비브의 유다인 공동체 거주지에서 처음으로 환시를 보고 부르심을 받는다. 그는 에제키엘’이란 이름이 뜻하는 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실의에 빠진 유배자들 한가운데서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신’ 힘의 탑이 되었다.

그가 전해야 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범상치 않은 상징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에제키엘은 온 삶에서 풍부한 감수성으로 그것을 표현하여 백성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ex) 에제키엘의 예언자로서의 삶

- 593년-5년까지 예언활동(20년)/ 유다인의 사제활동기간(30-50살까지)

-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

- 결혼하고 살다가 부인이 예루살렘 함락 직전사망

- 유비인들 가운데 영향력 있는 사람

- 비범한 예언적 표징(실어증과 마비증상)

- 불가사의한 환시

 

ex) 에제키엘은 가슴속에 두 영혼을 품다

- 엄격한 규범과 규정 속의 사제이면서도 초월적인 예언자

- 정열적인 설교자이며 정확하고 기술적인 저술가로써 이상주의적이면서도 현실주의 적인 언어의 마술사이다.

 

ex) 에제키엘의 소명

-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을 사람의 아들아로 부름(93번), 사람의 아들은 사명할 존재, 하느님 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상징한다(욥기 25,6;이사 56,2).

- 영이 네 안에 들어와 나를 일으켜 세움(엘리야와 엘리사 등의 영의 전통)

- 불행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소명을 받음(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 두루마리를 받아 삼김(비탄, 탄식, 한숨의 메시지) / 두루마리를 삼킴은 하느님의 말씀을 예언자가 자신 안에 일차적으로 내면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

- 두루마리를 받아 삼킴다음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됨 그리고 이레 동안 탈진

- 예언자는 파수꾼으로서의 직무를 받음(33장)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에 경고함.

이러한 예언자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호세아, 이사야, 하바꾹 등)

 

ex) 예언자들의 표징

- 아이야: 입고 있던 새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음

- 호세야: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

- 이사야: 벌거벗은 채 3년 동안 예루살렘을 돌아다님

- 예레미야: 나무멍에와 쇠멍에을 맴(바빌론의 멍에를 지게 됨을 상징하는)

- 에제키엘: 실어증, 인분으로 빵을 구워먹음, 수염깍기, 아내의 사망, 나무토막 두 개 등

 

3. 시대배경

 

기원전 6세기 근동지방을 다스린 이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못 읽은 유다의 여호야킴은 무모한 항쟁으로 나라를 패망에 이르게 한다. 결국 뒤를 이은 여호야킨이 3개월 동안 버틴 후 예루살렘은 바빌로니아에게 항복하고 임금과 백성은 유배를 간다(기원전 597). 그때에 에제키엘도 끌려가 그곳에서 예언자로 부름 받는다.

 

ex) 시대적 배경

605년 바빌로니아 팔레스티나 정복

600년 여호야킴이 바빌론에 반기를 듬

598년 바빌론의 포위 중 여호야킴 사망하고 여호야긴이 왕이 됨

(예루살렘의 함락과 1차 바빌론 유배:598-539귀환/ 애가, 오바디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멸망할 대 유다 땅을 침공한 에돔을 경멸

588 치드키야가 왕이 되지만 반란도모 이어 비빌론의 침공으로 유다 멸망

(제2차 바빌론 유배)

ex) 남아있는 자들: 혈통과 종교혼합주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씀(할례, 안식일 준수, 식사규정 이 신앙 고백의 위치를 차지함)

ex) 유배 중에 유다인들은 주로 세 부류로 나뉘게 됨(철저한 유다인/ 중간/ 철저히 토착화)

 

ex) 유배인들의 삶

시편 137: 바빌론 강 기슭에 앉아...

예레, 29,1-239바빌론에서 70해를 채우며 살아야...

국제 공용어: 아람어 사용

바빌론 달력과 달 이름을 받아들임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을 재확인과 구축

 

ex) 유다인들의 신앙생활

- 정화의식의 필요에서 물이 많은 곳에 정착하여 살았음

- 강가에서 경신례 거행(시편 137편)

- 야훼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 유배민족들과 함께 살았던 사제들과 예언자들의 활동이 있었음

 

4. 구분

 

에제키엘서의 내용은 예루살렘의 함락을 기점으로 둘로 구분된다. 첫 부분은 7년 동안 선포된 심판과 위협, 파멸에 관한 예언이다. 둘째 부분은 15년 동안 예언된 내용으로 위로와 격려, 회복의 희망이 중심을 이룬다.

 

I. 심판에 관한 내용(1-24장): 야훼 여기 안 계시다

1-3장: 부르심과 사명

4,1-33,20: 예루살렘 함락을 예시하는 상징 설교, 이민족을 향한 심판

25-32장: 이민족들에 대한 예언(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회복시켜 줄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에 있다.)

 

전환점 - 33,21: 예루살렘 함락

 

II. 회복에 관한 내용(33-48장): 야훼 여기 계시다(야훼 샴마)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구원 예언)

33-39장: 이스라엘의 부활 -예고

40-48장: 이스라엘의 재건(구원) -실현(새 예루살렘)

ex) 에제키엘서는 요한 묵시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곡과 마곡, 네 생물, 생명수, 옥좌환시, 천상궁전 등 또한 신비주의(merkabah) 영향을 주었다.

 

 

 

II. 내용

 

1. 주님의 발현/ 주님의 영광 목격(1,1-28)

 

에제키엘 예언서의 첫머리에는 환시를 보는 수신인, 환시의 때와 장소가 소개된다. 에제키엘은 ‘환시의 예언자’로 불릴 만큼 놀라운 환시를 많이 체험한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크바르 강가, ‘텔 아이브- 폭풍신의 언덕);에 정착한 유배자들 가운데서 매우 독특한 환시를 본다. 크바르 강은 바빌론 남쪽 니푸르 성읍 근처를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의 한 지류이다(1-3).

먼저 거의 신적존재로 알려진 네 생물의 형상과 바퀴의 환시가 나타나는데, 이는 신적 현존을 묘사한다(1,4-25). 이어서 예언자는 어좌 형상 환시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본다(1,26-28).

 

ex) 하느님 어좌의 환시(1,4-28)

주님의 현존이 영광의 현상으로 나타남/ 유다인들은 유배지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예배할 수 있을까? 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이에 에제키엘은

- 하느님은 움직일 수 있는 분(예루살렘에만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그곳을 떠나서, 유배지 에 함께 계시는 분이다. 모든 곳에 존재하시는 하느님이시다.

- 하느님의 존재가 찬란히 드러남은 하느님은 절대타자로서의 초월적인 모습을 상징한다. 이에 경외심으로 하느님을 알아듣는다. 특히 이것은 사제집단에 더욱더 그러했다.

 

ex) 상징과 가르침

1) 흙벽돌에 그린 도성의 포위망 -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과 함락(4,1-3)

2)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눕는 자세 - 위로가 없는 포로생활(4,4-8)

3) 부정한 연료로 만든 빈약한 양식 - 기근에 관한 상징(4,9-17)

4) 칼로 수염과 머리를 깎고 1/3씩 나눔 - 철저히 파고된 도성, 주님들의 죽음과 흩어짐을 상징(5장)

5) 유배의 짐을 꾸려 성벽에 구명을 뚫고 빠져나감 - 유배민으로 끌려감을 뜻함

(12,1-17;17,20)

6) 날이 잘 선 칼의 상징 - 임박한 심판을 뜻함(21,1-17)

7) 네부카드네자르의 칼 - 정복자 바빌론을 뜻함(21,18-23)

8) 모든 것을 녹이는 용광로 -죄악에 대한 벌과 심판의 상징(22,17-31)

9) 예언자 아내의 급사 -거두어 버린 복(24,15-27)

10) 두 개의 나무토막 - 이스라엘과 유다의 재통합(37,15-17)

 

2. 예언자가 하느님께 받은 사명(2-3장)

 

그때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에게 ‘사람의 아들아!’라는 독특한 호칭을 쓴다. ‘사람의 아들’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로서 나타내는 표현이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시는 목적은 사람들이 듣든 듣지 않든 상관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유배지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 심판의 말씀을 전하고, 그것을 통해 역사의 주인이 주님이시라고 증언한다. 영광뿐 아니라 심판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신앙을 가르친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그 나라의 흥함뿐 아니라 멸망에 이르는 심판을 주도하시는 분이다.

 

3. 예루살렘과 주변 나라들에 대한 선포(4-32장)

 

에제키엘은 상징적 행동과 신탁을 통해 예루살렘의 운명을 예고한다(4-7장). 이어서 예루살렘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고 파괴되며(8-11장)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과 지도자들이 단죄받을 것(12-14장)이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심판의 비유와 은유로 유다를 심판하시는 하느님 신탁(15-24장)과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신탁(25-32장)을 전한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전과 예루살렘’은 결코 망할 수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유다 백성의 신앙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성전 파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떠나 살았기 때문이라고 예언자는 지적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 강복의 모형이지만 동시에 심판의 모형이기도 하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인간 이 성전을 하느님보다 더 크게 생각하며 우상처럼 섬김 결과이다. 우상숭배의 열매는 상호 불신과 경쟁과 비방이다.

 

4.위로의 신탁(33-39장)

 

에제키엘이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서 소명을 새롭게 하며,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에제키엘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주시는 미래의 왕국을 선포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을 새롭게 살리시라는 구원의 메시지도 선포한다. 여기에서 주님은 양떼를 먹이고 살리는 목자로, 당신의 영을 넣어 주시어 당신의 백성답게 하시는 생명의 주인으로 드러난다.

 

5. 새 이스라엘, 새 성전, 새 예배, 새 땅(40-48장)

 

정화된 이스라엘에 새 질서가 선포된다. 성전 구역이 복구되고 새 성전에 주님의 영광이 돌아와 가득 차며 이스라엘이 완전히 새롭게 된다. 바로 그 성전에서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할 샘이 솟아 흐르며,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나는 구원의 역사가 펼쳐진다. 이제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뜻의 ‘야훼 삼마’를 새 이름으로 받는다(48,35).

 

ex) 3개의 환시

- 주님의 영광(1,1-28) : 그 발강

- 주님의 영광에 예루살렘에 나타남(8-11장)

- 주님의 영광이 성전에 돌아옴(40-48장)

 

ex) 새 마음과 새 영

- 유배민들에게 하느님은 성전이 되어 주시며 흩어진 이들이 돌아와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실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회개와 내적 정화이다.

- 회칠한 무덤은 평화가 없는데 마치 평화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두 마음을 의미한다.

- 소수의 의로운 이가 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이에 연대책임도 있지만 개인이 행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정의는 이 모든 것을 함께 요구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심판하겠다는 것이다.

- 쓸모없는 포도나무: 포도 나무는 오직 포도의 수확을 위해서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을 어디에도 사용할 수 없는 나무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러한 쓸모없는 포도나무에서도 유를 창조 해낼 수 있는 분이다.

- 레바논의 독수리와 향백나무: (치드키야의 운명)

- 마른 뼈의 부활: 마른 뼈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행방과 재건이 ‘창조’와 ‘탈출’(제2의 에집트 탈출)을 의미한다. 에제키엘은 현재 이스라엘의 모습이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들’과 같다는 생각에 동의하지만, 그 뼈들의 부활환시를 통해 하느님 안에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마른 뼈들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III. 신학사상

 

1. 하느님의 영광의 환시

 

에제키엘은 예언직을 받던 날 하느님의 환시를 체험한다. 네 생물의 머리위에 는 어좌 형상이 있고, 그 둘레에는 무지개처럼 보이는 광채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으나, 광채로 둘러싸인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야훼는 아니었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이었다. 이에 예언자는 최대한 경외하는 자세로 받아들인다.

에제키엘에게 하느님은 ‘가려진 분’이시다. 사람의 눈으로 뵐 수 없는 존재, 이성을 초월하시는 분, 신비에 싸여 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 절대적인 초월성은 그분의 영광을 통하여 드러나지만, ‘영광의 형상’은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기 위한 가시적인 모습뿐이다.

 

2. 죄로 얼룩진 이스라엘의 역사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많은 축복을 내리셨다. 가나안에서, 이집트 종살이에서, 광야에서 여러 번 죄를 지어 죽을 뻔한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왕정시대에도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를 무시하고 우사을 숭배하느라 야훼께 돌아서지 않았다.

광야시기를 이상적 시기로 묘사하며 그리워하는 호세아나 예레미야와 달리, 에제키엘은 그때부터 현재까지 하느님을 저버린 우상숭배와 간통이 난무한 죄의 역사만을 이야기한다. 이런 이스라엘을 정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떠나야 한다(11,22-24). 그래야만 하느님 분노의 칼과 불꽃이 모든 죄인을 쳐내고 모든 찌꺼기를 걸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21, 1-37).

 

3. 회개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이 현실로 이루어졌다(33,21). 간신히 화를 면한자도 칼에 맞아 쓰러지거나 짐승에게 먹히고, 흑사병으로 죽어 우상숭배와 역겨운 것으로 하느님을 거스른 죗값을 치르게 된다. 그 중에 살아남은 이들은 주변 나라들로 쫓겨나 흩어지고 이방민족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절망할 필요가 없다. 심판과 함께 구원이 선포되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이들, 특히 유배자들 사이에서 회개의 외침이 일기 시작한다. 에제키엘은 ‘돌아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슈브를 사용하여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는 죄로 얼룩진 과거의 모든 행실에서 몸을 도려 주님께 돌아가는 행위이다. 이스라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성성을 모독했던 우상숭배를 버리고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죄악을 버리고, 하느님을 벗어난 악한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4. 개인의 책임

 

에제키엘은 예언자 중 처음으로 조상들과 연계된 공동체적 연대책임과 개인 책임의 원칙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개인책임의 논리보다 공동체의 연대 책임에 입각한 논리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탈출 20,5). 그러나 에제키엘은 공동체에 연대책임이 있다고 해서 개인의 책임에서 모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18, 4.9. 13.18.20.24).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잠언 18,2). 이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는 백성 전체의 책임이므로 이제와서 회개한다고 처지가 달라질 리 없다는 논리이다. 이에 대해 에제키엘은 공동체의 연대 책임 때문에 개인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한다면...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리라.”(18,21-22)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18,26). 이것이 곧 하느님의 공평이다(18, 25-29). 따라서 매순간 성실하게 하느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IV. 가르침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부정, 특히 안식일 규정위반(20,12.24) 같은 제의적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것은 주님께서 사람과 달리 초월자이시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나의 거룩한 이름”(20,39;36,20;43,7)이란 어구에서 잘 드러난다.

 

하느님의 정의와 인간의 책임

하느님 안에서 모든 생명은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내 생명은 중요하고 남의 생명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나,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 안에서 생명의 가치를 존중해야 할 ‘공동의 의무’곧 연대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무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공동체는 하느님 앞에서 ‘연대 책임의 원칙’에 따라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심판은 획일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생명과 관련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공동의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곧 의인은 그 삶을 인정받고 그에 부합하는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연대책임의 원칙을 적용시켜 하느님의 심판 대문에 자신들이 유배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이스라엘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분은 죄인이라도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고, 그를 위해서는 당신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어주시는 분이다. 그가 의로움으로 돌아서서 생명을 얻게 되면 더할 수 없이 기뻐하는 분이시다.

 

오직 인간이 살기만을 바라시는 하느님

죽임이란 본래 인간의 것이 아니었고 또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도 아니었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인류 안에 들어온 것이다. 죽음은 단순히 목숨이 끊어진 상태라기보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짐, 아니 하느님과 단절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인간이 영원한 죽음에 갇히지 않고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리하여 회개와 믿음으로 아들의 생명을 나누어 받고 죽음에서 일으켜서 다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인간에게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18,32)하고 애원하듯이, 그러니 회개하고 살아라. 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회개하여 생명을 얻는 길을 선택하여 살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공동체와 개인 모두의 정화이며 그들이 당신과 함께하는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개인과 공동체 모두가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8,31).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마음과 섭리를 깨우쳐야 한다.

따라서 거룩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응답에 좌우되지 않고,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넣어 주신다(36,26-28). 이렇듯 미리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새 생명과 새 삶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 듣든지 간에 예언자는 파수꾼으로(3;33장)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충실히 보여 주고 또 경고하는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그 때 주님께서 계시는 새로운 도성이 드러날 것이다.

 

 

 

 

※ 참고문헌: 성경읽기 안내 구약2(성서사십주간), 성서와 함께, pp. 91-96.

                예언서, 김정훈, 바오로딸,2006, pp.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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