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문학과 잠언서(코헬렛·욥기)

코헬렛(7,1-29): 행복의 상대성

마리아 아나빔 2013. 11. 26. 16:24

 

 

                                코헬렛(7,1-29): 행복의 상대성

 

들어가면서

 

코헬렛 7,1-14절에서는 행복의 상대성에 대해 말하는데, 특히 7,1-11에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여덟 가지로 비교한다. 여기에서 코헬렛은 모든 인간적 선의 상대성을 부각시킨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와 하느님의 계획을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앞날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코헬렛은 중용을 지키라고 조언한다. 즉 일상에서 윤리적 극단을 피하라고 충고한다(7, 15-22).

 

코헬렛은 전통적인 인과응보 사상에 비판을 가하며(8,14), 너무 의로운 것도, 바보가 되는 것도 좋지 않다고 가르친다. 코헬렛에게 지혜는 현실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이제 코헬렛은 지혜에 대한 탐구를 다시 시작하여 자신이 탐구 결과를 밝힌다(7, 25-29). 그는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올곧게 만드셨지만” 인간이 비뚤어진 길을 간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어서 권력에 대한 충고, 전통적 지혜에 대한 가르침과 그에 대한 의문을 동시에 제기한다(8,1-17). 코헬렛은 절대적 힘을 가진 임금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전통적 인과응보 사상에 어긋나는 세상을 관찰한 내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경외해야 함을 주장하는 부분이 엇갈려 나타난다. 그리고 16-17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사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는데, 이 부분을 이어지는 9장의 서두로 보는 견해도 있다.

 

 

Text 안에서

 

1-10절: 행복의 상대성

 

인간은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선을 알 수가 없을지라도, 인간생활에 있어서, 어느 상태는 다른 상태보다 좋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코헬렛의 저자는 구약의 지혜자의 방법을 따라서, 일반 속담을 쓰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넣는다. 1-14절은 일곱 속담을 포함하고, 하나하나는 “낫다(좋다)”라고 하는 말로 되어 있다(1,2,3,5,8,11). 따라서 설교자는 이 짧은 속담으로써 자신의 인생철학을 보여주고 가르친다.

 

1절에서 “명성이 값진 향유(잔치나 기쁜날에 몸과 머리에 바르는 향유로 행복과 풍요의 상징이다. )보다 낫다”에서 ‘명성(솀)’과 ‘향유(셰멘)’은 히브리말에서 언어유희를 이루고 있다. 기름과 향유는 옛날에는 창녀가 썼으나, 일반 사람도 목욕 후 혹은 땀 냄새를 지우기 위하여, 또는 축일에 썼다. 인생의 거친 넘어서 명성을 얻은 사람의 죽음은, 안식의 날 곧 평화의 항구에 이른 날이며, 그 명성은 영원히 기억된다. 따라서 갓 태어난, 이제부터 미지의 인생을 시작하는 탄생의 날보다 좋다고 설교자는 역설한다.

 

2절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에서 초상집이란 상을 당한 집으로 안면이 있으면 친척이 아니라 해도 상가를 찾아가 위로를 하고 돕는다. 상가집에 가면 죽은 사람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이 종말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유다에서는 복상 기간이 이레 계속되었다(창세 50,10; 집회 22,12). 그 동안 친지들이 모여와서 슬픔에 젖고 사람들을 위로 하였다(요한 11,19) 반면 “잔치집”은 쿰란사본에서 “즐거움의 집”이라고 되어 있다.

 

3절의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는 슬픔을 겪고서야 참 기쁨이 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속죄된 신약시대 사람들은 기뻐해야 한다. 이 구절 문맥의 앞뒤를 보아도 기쁨 자체를 나쁘다고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연회에 나가 즐기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묵상하는 편이 소중하다. 그리스도인은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그 죽음을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값진 삶에 도움도 되지 않고 유익한 일도 아니다. 히브리어의 “마음”은 본래 지식과 지혜를 의미한다(잠언 15,31; 집회10,3;호세 7,11). 슬픔은 사람의 마음을 윤택하게 하고, 지혜를 헤아리게 하는 것이다.

 

4절 “지혜로운 이들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잔칫집(기쁨의 집)에 있다.” 의 의미는 인생의 괴로움은 참다운 행복을 발견하기 위한 좋은 교훈이 된다는 의미이다. 5절의 “지혜로운 이의 꾸지람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칭송을 듣는 것보다 낫다.” 이것은 잔치자리의 노래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여기서는 칭찬의 말, 혹은 어리석은 자의 아첨의 말로 보는 편이 좋다. 또한 이 말은 “칭송을 듣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된는 것보다”로 옮기기도 한다.

 

6절에서 “어리석은 자의 웃음은 솥 밑에서 타는 가시나무 소리 같으니”는 옛날에는 일반적으로 목탄을 사용하고 있었으나(시편 120; 이사 47,14; 요한 18,18) 가시나무를 때기도 하였다. 가시나무는 큰 불길과 함께 큰 소리를 내지만 곧 사그라진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의 웃음은 굉장하지만 진실미가 없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말에서 “솥”과 “가시나무”는 동음이의어이다.

 

7절 “억압은 지혜로운 이를 우둔하게 만들고 뇌물은 마음을 파멸시킨다.” 여기서 “뇌물”은 선물의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인심을 바쁘게 하기 위한 선물을 보고 “뇌물”(탈출 23,8;신명 16,19)이라고 번역하였다. 어떤 학자는 그리스어 70인역과 라틴어 불가타역을 따라서 “중상은 지혜자를 미치게 하고, 그 용기를 잃게 한다.”이기도 하다.

 

8절 “일의 끝이 그 시작보다 낫고 인내가 자만보다 낫다.” 한 가지 일을 완성하는 것은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낫다(1열왕 20,11).“자만”은 성급한 마음으로 표현하며, 9절에서 “마음”은 영, 정신을 뜻한다. 10절에서 “어째서 옛날이 지금보다 좋았는가? 묻지 마라.”는 과거를 예찬하고 현실의 곤란에서 도피하는 것은 노인의 경향이다. 저자는 이것을 타이르며, 이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없고(1,9) 또 과거도 미래도 현재보다 나은 것이 없고, 인간의 역사는 항상 같은 일의 되풀이라고 주장하며(1,9-11;3,15)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고 바로잡고 있다.

 

 

11-18절: 실생활의 지혜

 

이스라엘의 라삐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면 행복을 얻고, 충성하지 않고 등을 돌린다면 불행에 빠진다고 가르쳤다. 이 원리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도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행복하게 되고, 악을 행하면 불행하게 된다. 따라서 건강도, 재산도, 명예도 그 사람의 신심 여하에 달린 셈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일상경험에 비추어 보아 그런 사고방식을 반대하고, 하느님의 섭리는 사람이 미칠 수 없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1절 “ 지혜는 상속 재산처럼 좋은 것 태양아래 사는 이들에게 득이 된다.” 에서 ‘태양 아래 사는 이들’이란 의미는 ‘태양을 보는 이들에게’로 바꿀 수 있다. 이 대목은 ‘재산이 따르는 지혜는 좋은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 주신 재산이 이 지혜를 지탱하며, 지혜와 재산을 아울러 가진 솔로몬왕의 경험에 서서 지혜자의 이상적 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1-14절의 속담은 모두 비교하여 ‘...하는 것은 좋다’라고 구어로 되어 있기에 태양 아래 사는 이들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12절 “지혜의 그늘에 있는 것은 돈의 그늘에 있는 것과 같다.” 여기서 ‘그늘에 있는 것은’보호나 피난처 등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표현 성경이 자주 등장하며, 지혜의 활동을 보여주고, 잘 사는 것, 곧 하루하루의 생활에 있어서 행복한 생활을 가르친다. 그리고 지혜문학에서 “지식”과 “지혜”는 동의의가 된다.

 

13-14절에 걸쳐 코헬렛은,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하고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내지 못한다는 점을 되풀이하여 강조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욥기 1,21; 집회 11,4). “내 허무의 날들에”는 ‘내 허무의 날들에’로, 사람은 선에 있어서나 악에 있어서나 극단의 길을 피하고, 중용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극단은 마음의 행복을 흐트러놓기 때문이다(15-18). 또한 자신의 결점을 시인하고 남의 결점을 이해하는 것은 지혜의 근본이다(19-22). “의롭지만 죽어가는 의인이 있고 사악하지만 오래 사는 악인이 있다” 나의 헛된 나날들에 곧 사라져갈 인생이 덧없음을 의미한다. 설교자는 자기 경험에서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가르침, 의인은 오래 살고(신명 4,40; 시편 91,16; 잠언 3,2), 악인은 요절한다는(시편 37,10; 73, 18-19) 것에 대한 반론이다.

 

그러므로 16절에 “너는 너무 의롭게 되지 말고 지나치게 지혜로이 행동하지 마라” 즉 지나치게 바르거나 지혜가 너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중용의 길을 벗어나 사람들의 증오를 받고, 외톨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저자는 지적한다. 그래서 코헬렛은 너무 의롭게도 너무 악하게도 되지 말라고 조언한다(17절). 여기서 요절을 사악과 어리석음의 벌로 인정하고 있다. 악행에 대하여 중용을 말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설교자자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죄와 악에 대하여서만 아니라 아마도 율법의 온갖 관습을 엄격히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만일 죄와 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날의 생활에 있어서 사람의 나약함에서 오는 결점과 조그마한 과실 등에 대하여 한도를 넘지 않도록 하는 조언이다. 이처럼 설교자는 두 극단에 대한 중용의 도를 강조한다(18).

 

19-24절: 지혜의 가치

 

19절의 “지혜는 지혜로운 이를 성안에 있는 열 명의 권세가보다 더 힘차게 만든다” 다 역시 지혜의 강함을 강조한 속감으로써 설교자는 강력함을 보여준다, “성 안에 있는 열명의 권세”란 팔레스티나를 포함한 당시의 헬레니즘 지배하의 도시의 운영이 열 사람의 지도자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요세푸스, 고대사, XX). “더 힘세게 만든다”는 표현은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어 죄를 짓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의로운 인간이란 이 세상에 없다고 이야기 한다. 즉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다(욥 4,17; 시편 130,3;잠언 20,9). 현인은 역시 남을 중상한 적이 있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나쁘게 말한다고 해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20-24절에 걸쳐 지혜에 관한 권고에 대해서 개인적인 결론을 말한다. 즉 세상만사에서 사물의 도리를 아는 일이 알 수 없고 어려운 일임을 이야기 한다. 즉 “존재하는 것은 멀리 있으며 심오하고 심오하니”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 곧 지혜를 가리킨다. 그러나 고대 번역본들에서는 “존재(지혜)”하는 것보다 더“로 읽는다.

 

25-29절: 여성에 대하여

 

여성에 대한 이 테마는 지혜문학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여기서 설교자는 여성의 마성에 대하여 말한다. 즉 여성은 사람을 유혹하는 힘을 가지고, 그 유혹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죄에 빠뜨린다. 설교자는, 착한 여인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며(28절), 또한 모든 악의 원이라고 말한다(29). 이러한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 9장 7-9절을 참조하며, 잠언의 저자도 악을 가져다주는 여자에 대하여 똑같이 엄격한 판단을 내리지만(2,17-19) 착한 여인은 매우 칭찬하고 있다.

 

“나는 천명 가운데 남자 하나를 찾아내었지만” 착한 여자를 찾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아마도 설교자가 지은 속담이리라. 그리고 여기서 “천명”은 큰 숫자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 및 영향력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암시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올곧게 만드셨지만 그들은 온갖 재주를 부린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고 배덕한 자가 되었다. 설교자는 이것을 때달았다고 말하고 있다(집회 15, 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