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춤사위

시편 22에 대한 단상(의인의 고통과 희망)

마리아 아나빔 2014. 4. 8. 19:53

 

 

의인의 고통과 희망

(A agony and hope of the righteous)

 

“저의 모태에서부터 당신께 맡겨졌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하느님이십니다.

제게서 멀리 계시지 마소서.”

- 시편 22, 11-12.ㄱ절 에서 -

 

 

 

시편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중의 하나는

슬픔의 노래, 도움을 청하는 울부짖음, 재앙, 개인 혹은 국가에 대한 비탄이다.

그러한 슬픔의 시편들은 시편 저자의 삶 속에서의 절박한 상황들,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필요성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때, 노래하는 이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고,

자신의 벗들과 그 기쁜 소식을 나눌 수가 있다.

즉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자신의 개별적 경험을 또 다른 삶의 상황에서 표현한다.

 

 

시편 22는 탄원(2-22절)과 감사(23-27절) 그리고 찬양(28-32절)로 구성되었다. 주된 내용은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이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상황으로써,“나의 하느님”께서 멀리 계시고 자신의 처지에 응답하지 않음에 대한 고통이다. 하느님을 신뢰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을 받기는커녕 사람도 아닌 구더기처지로 버려지고 죽음의 흙에 앉혔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그 고통의 하나는 자신의 원천에 대한 단절과 부재일 것이다. 관계의 단절과 부재에서 오는 고통은 심연의 늪 속, 혼돈의 상태에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 안에서 함께 있음에도 느껴지지 않는 한편에서 느끼는 그 고독감과 고통이 느껴진다. 이 관계는 하느님 편에서도, 인간 편에서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사랑 안에 함께 있지 않음에서 오는 단절감은 일치하지 못함에서 오는 고통일 수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 안에 단절됨 없이 일치하고 구별되면서도 하나를 이루신다. 그 안에는 충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관계가 인간과 하느님 안에서 단절감을 느낄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고 하느님은 현존을 느낄 수 없는 상태의 고통이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씨름이고 그러할 때 인간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폐쇄될 때, 그 때는 진정 믿음의 위기를 초래한다. 시편저자가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외쳐 부르는 기도,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시편저자는 실상 자신이 가장 위험한 순간(사자의 입과 들소들의 뿔에서)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대답해 주심”을 고백한다.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은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상황으로부터 위협을 느낀다. 원수들을 비롯하여 질병과 고통과 박해와 권력들의 폭력이 수반된다. 박해하는 사람들의 종류도 원수에서 비룻하여 내 가장 가까운 가족과 동료들에게서 온다.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최대의 사건인 죽음에 앉힌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께 부르짖고 하느님은 그 안에 실상 함께 하신다. 그리고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 주신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 구원이다. 멀리 계시다고 느꼈던 하느님이 응답하심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구원의 체험을 선포한다. 구원의 선포는 가장 가까이 있는 형제들에게,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 세상 끝, 창자 올 세대로 까지 초대되고 확장된다(23-32절). 시편저자의 구원의 선포는 참으로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며 시공을 초월한다. 하느님의 구원이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열려있음에 대한 시사이다. 그 구원의 소식은 가장 가까이 있는 자매에게, 하느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 뜨는 곳에서 해지는 데까지, 그리고 아직 도래할 미래의 세상과 사람들에게까지 열려있다. 여기서 하느님 위대한 사랑과 관대함과 전능하심이 드러난다.

 

 

고통과 희망, 죽음과 생명은 같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이다. 그 자리에 하느님이 계신다. 생명을 주시는 그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죽음도 주신다. 하느님은 우리의 죽음과 생명을 좌지우지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모든 삶은 그분 손 안에 있다. 이처럼 구약성경의 사고 안에는 일체에 대한 통합된 사고가 있고, 이 사고는 우리에게 삶에 대한 폭넓음 여백과 관조를 건네준다. 죽음조차 수용하는 생명이고, 생명은 죽음 없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의 죽음에 대하여 초연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더 크고 넓은 믿음과 마음을 요청한다.

 

 

모든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탄원할 수 있음은 하느님 현존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임금으로 고백하고 찬양할 때 우리 안에 거주하시고 가까이 하시게 된다. 즉 우리의 기도 안에 하느님은 현존하신다. 우리가 아무리 큰 시련과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해답이 있다. 하느님께서 이미 내 고통과 슬픔과 시련 속에 함께 하신다. 단지 머리를 들어서 그분을 바라보면 된다. 그렇지만 고통 중에서 마음을 움직이고 고개를 든다는 일이 고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의 심연에서 헤매인다.

 

 

사실 이 시편의 또 다른 주인공, 가장 이 기도에 맞는 분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 역시 죽음의 자리에서 ‘사자의 입’, ‘들소들의 뿔’ 앞에서 고통을 체험하셨고, 심지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체험을 하셨다. 한편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는 “가난한 이”이의 체험이 “흙으로 내려가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었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셨고, 이로써 모든 이들에게 찬미를 받을 이유가 되신 분이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이야기는 ‘우리 주님의 이야기’이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죽음에서 일으키기 위해서 그분을 죽음에 버려주셨고, 그리고 구원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하신 일은 장차 올 모든 세대에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