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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사랑 맛들이기(seasoning of God's love)

마리아 아나빔 2010. 7. 28. 10:16

 

 

하느님 사랑 맛들이기(seasoning of God's love)

 

                                                                                                                                       2010. 5.

 

                                                                                                                               - 마리아 아나빔 -

                                                                                                                        

들어가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투명하고 생명가득하며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충만하다. 특히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은 더욱 그런 것 같다. 이렇듯 특별한 계절과 시간과 공간속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나누어주기 위해 당신의 8명의 신부들을 초대하셨다.

종신서원 5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어쯤 이 시기는 참 사랑에 눈을 뜬다는 의미에서 이제 겨우 수도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시간, 그 무언가에 자신을 투신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한 시간이기도하며 또한 반면에 그 무엇인가에 한눈을 팔기위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기도 하는 시간인 것 같다. 이렇게 각자 다른 상황과 사도직 그리고 마음의 상태에서 우리는 마치 무상으로 우연찮게 받게 된 선물처럼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임금님께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의 통지서를 받고 그분의 처소에 입소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8명의 수녀들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5월의 신부들이 되었다.

   먼저 8일 동안 침묵 가운데 피정을 통하여 그분과의 깊고 특별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분이 마련하신 쉼과 기도를 통한 영육간의 유희들은 우리들을 기쁨과 행복 가득한 사람들로 만들었다. 피정 안에서 그분의 사랑은 단순하고 투명했다. 그리고 우리를 초대로 부르신 이유는 그저 그분 사랑에 머물러 깊이 맛들이고 그 사랑의 삶으로 투신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그분의 깊고 넓고 끝이 닿지 않는 사랑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그분의 사랑에 비례에 우리의 그분께 대한 사랑과 믿음의 부족임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안에서 그분의 사랑은 지금 이 시간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신 은총의 시간들과 함께 마치 5월의 햇살처럼 우리를 맑고 투명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순례여정

 

   이러한 마음을 안고 우리 각자는 자신들이 원하였던 대로 10박 11일의 긴 영정을 그분과 함께 하는 순례 길에 올랐다. 에스텔 수녀님은 ‘산 위에 마을’ 이라는 유기농업 체험현장으로 나머지 7명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키우기 위해 특별히 이 땅에서 우리 임금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며 목숨 바쳐 죽어갔던 순교자들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 이였다. 에스텔 수녀님은 하루 전에 떠났고, 나머지 7명의 수녀님들은 그 다음날 이른 아침 홍천 기도의 집 경당에서 각자 자유기도로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긴 장정의 성지순례의 여정에 올랐다.

우리 모두는 성서의 말씀대로는 아닐지라도 각자 나름대로 지향을 지닌 봉헌의 마음과 최소의 소지품을 넣은 배낭하나만을 매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첫 행선지는 충북 땅 진천에 위치한 배티성지였다. 강원도 땅인 홍천에서 원주 그리고 충북 땅인 청주에서 진천행 버스를 갈아타야하는 긴 여행길이었다. 진천에 내려 우리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배티성지 까지의 22킬로미터의 긴 거리의 도보를 시작했다. 쉴 새없이 많은 차들이 오가는 국변도로를 뜨거운 오후의 햇볕 아래 걷는 일은 집 나서면 고생이라는 말을 그대로 생각나게 했다. 그나마 그 길에 백운 호수가 있어 연초록 갓 돋아난 잎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의 지친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걸어도 걸어도 당겨지지 않는 먼 길을 한 낮을 걸쳐 걷기는 역부족이었다. 모두들 지친 나머지 차를 세우는 작정을 시행하였지만 그 역시 실패하였다. 한 참을 걸은 후 우리는 겨우 지나가는 시내버스를 잠시 타고 다시 걸어서 배티를 향한 313번 국도로 접어들었고, 쉽게 지쳐버린 7명의 신부들의 걸음을 오가며 지켜보았던 한 텀프 트럭 운전기사분이 우리들을 태워주었다. 모두들 자기키보다 높은 텀프 트럭에 올라타고 내리는 난생처음의 일을 치루었다. 겁도없이 말이다. 운전기사분은 친절한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였고, 아침만 하여도 화사하였던 7신부들은 어느새 고지지한 나그네들이 되어 해질녘에 성지에 도착하였다.

   배티성지는 한국의 카타콤바라고 불리만큼 박해시기 박해를 피해와서 살았던 무명. 유명의 순교자들이 살았던 교우촌으로 배론 보다 먼저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곳이며 또한 최양업 신부님과 프리 니콜라 신부님의 사목중심지로 20가구에 120명의 교우들이 살았던 곳이다. 산새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곳에 지금은, 박해 시대 공소를 순방하기위해 낮엔 걷고 밤늦게 교우 벽촌에 도착하여 고해성사와 미사를 봉헌하고 다시 새벽녘에 길을 떠났던 최양업 신부님의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머리에는 갓끈을 단단이 매고 등에는 행장을 왼손에는 지팡이 오른 손에는 성서를 들고 막 걸을 떠나는 모습의 성인상이 인상 깊게 서있었다.

   우리는 일찍 그곳에 마련된 집에서 잠자리에 들고 이른 아침 일찍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그리고 미사를 통해 이곳에서 순교하신 순교성인 성녀들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과 삶을 하느님께 봉헌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배티고개를 넘어서 6명의 무명순교자 무덤과 14인의 무명순교자들의 무덤을 찾아 기도하였다. 어른에서부터 꼬마 아이들까지 주님을 위해 당의 의 가장 소중한 목숨을 하느님께 바친 그 의 신앙은 7명의 신부들의 마음을 으로 가다듬게 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에게 순교자의 정신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생각해보았다.

    함께 순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이고 수련이다. 매순간 다가오는 사건들 앞에 의견을 서로 조율하고 각자 서로 다른 성격과 삶의 방식 안에 자신들의 행동과 말과 감정들을 절제하면서 애덕어린 마음으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으면서 십인십색의 사람이 함께 사랑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정 이 순례의 여정이 우리에게 주는 큰 의미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또한 최양업 신부님처럼 하느님의 일을 위해 끝없는 자기포기의 삶과 하느님 말씀 선포에 대한 투신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안주하지 않고 끓임 없이 길을 떠나는 삶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 생각되기에 함께 로사리오 기도로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며 배티성지의 이틀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집을 떠난 이틀 후인 5월 12일 7명의 오월의 신부들은 행장을 꾸러 충북 땅을 넘어 차령산맥 기슭, 끝없는 평야가 바둑판처럼 펼쳐진 충남 내포지방에 이르렀다. 우리는 곧장 합덕 성당에서 운영하는 합덕 유스호스텔에 짐을 풀고, 4킬로미터의 들판 길을 가로 질러 신리성지에 다다랐다. 신리성지는 성지복구공사로 한창이었다. 우리는 먼저 새로 지어진 성당에 들러 그곳에 계신 신부님과 샤르트르 수녀님의 소개로 이곳의 거룩한 이야기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신리 성지는 충청도 내포지방의 중심부에 자리한 곳으로 조선천주교회의 요람으로써 한국 천주교회 초기부터 끊임없이 예비자. 신자, 순교자들을 배출한 곳이었다. 특히 1866년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하신 손자선(토마tm)성인의 생가가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초가집은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안토니오) 주교의 주교관이자 조선교구청이 있었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입국하신 다블뤼 주교님은 이곳에서 끊임없이 찾아드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초창기의 한글 교리서 저술과 간행,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 정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는 일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등 각지에 활동하는 선교사제들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복원된 생가(주교관) 이지만 아직도 기둥과 뼈대는 옛날 그대로이다.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집 집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등 상당 부분의 실물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성인들의 숨결과 손때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그곳 수녀님께서 우리들이 종신서원 5주년 재교육 수녀들이라 했더니 이 모든 것을 보고 만져 볼 수 있게 해주셨다. 당시 다블뤼 주교는 이 집 지하에서는 인쇄 작업을 했었는데, 기계가 내는 소음을 막기 위해 마루위에는 쉼 없이 아낙네들이 다듬이질을 했다고 한다.

  

한 치의 자신의 삶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 언어도 문화도 모르는 먼 이국땅에 오로지 주님을 향한 사랑 하나로 목숨걸고 오신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 다블뤼 신부님, 오매트르 신부님 그리고 위앵 신부님, 입국 당시 다블뤼 신부님은 겨우 갓 서품을 받은 27세이였다. 수녀님께로부터 다블뤼 신부님의 짧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다블뤼 신부님의 집안은 프랑스에서 귀족에 신앙이 두터운 가톨릭 집안이었다고 한다. 아들을 한국으로 떠나보내기 전 신부님의 아버지는 하느님을 위해 죽으러 가는 아들을 위해 두 사람의 초상화를 나란히 그려 받고 서로 나누어가졌다고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초상화를, 아버지는 아들의 초상화를 나누어가지면서 아들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아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후 그동안 자신이 간직했던 아들의 초상화를 교회에 건네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곳에 27살의 다블뤼 신부님 한손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들고 그것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모습의 초상화가 있었다. 그 그림위로 부자의 애틋한 인간적 마음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신앙과 인간적 정이 서로 교차됨을 느끼면서 가슴이 애틋하게 저려왔다. 그리고 다블뤼 주교는 자신의 사제서품의 상본 글귀 ‘주님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자다.“ 라는 그의 신앙의 마음처럼 그는 한국 땅에 왔었고, 이곳에서 21년 동안 목자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으며 마침내 순교의 길로 그의 삶을 마무리했다.

    우리는 예전에 전 신자가 교우들로 이루어진 이곳 그리고 병인박해 때 이 모든 신자들이 순교의 이슬로 사라진 거룩한 땅을 걸어서 집으로 오면서 진정 이토록 위대한 선교사들의 복음적 정신과 이곳에 살았던 신앙인들의 믿음의 정신을 이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그 믿음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귀로에 올랐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에게 반문 해 보았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들이 주님께 대해 지녔던 뜨거운 사랑과 믿음이 있는가? 때마침 막 모내기를 준비하기 위해 마련된 끝없이 펼쳐진 논들 위로 피의 순교로 이루어진 이 땅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아름답게 지고 있는 일몰을 바라보며 감사한 마음으로 오늘 하루의 밤을 위해 마련된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아름다운 유럽풍의 조그만 한 고딕식 양식으로 지어진 합덕성당에서 당시 이곳에서 활동했던 많은 선교사들의 자취를 가득히 느끼며 새로운 하루를 하느님께 봉헌했다. 그리고 신앙과 순교의 내포 땅을 걸어서 한국의 최초의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나신 솔뫼성지에 도착했다.

 

   솔뫼성지는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할아버지 김진우(비오) 작은 할아버지(김한현) 아버지이신 김제준(이냐시오)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이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편안함이 가득히 느껴지는 이 마을에서 박해를 피해 은이공소에 가서 살기까지 김대건 신부님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조상들로부터 신앙과 가문의 예법을 배우며 마치 어린 시절의 아기 예수님처럼 자라났을 것이다. 모태신앙의 뿌리로부터 그리고 여러 박해시기를 걸쳐서 다져진 신앙이 있었기에 그는 은이 공소에서 15살 어린 나이로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사제가 되고 순교에 이르는 삶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 되었다. 왜냐하면 순교의 신앙은 평상시의 삶의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당신처럼 매순간의 삶을 옳곧은 마음과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김대건 신부님과 같은 휼륭한 신앙인을 길러내는데 많은 믿는 이들의 힘이 되어준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루드비코 곤자가)의 생가가 있는 여사울성지로 향하였다.

 

   충청도 지방에 최초로 복음이 전해진 여사울 성지로 가는 길은 넓은 내포평야를 달리는 길로 가로수들조차 없어서 무척이나 더웠다. 이 길을 수없이 오가면서 선교사들을 영입하고 주님을 모르는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했던 성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많은 땅을 걸어서 복음전파를 다녔던 바오로 사도를 연상케 했다. 세계역사 안에 유래 없는 천주교가 시작되었던 한국 천주교 신앙의 역사에 있어서 바로 이곳 여사울 출신의 이 존창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이곳이 내포 천주교회의 심장이며 신앙의 고향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많은 신자들이 살았던 내포 여사울 신앙 공동체 중심에는 바로 이 존창 사도가 언제나 그 가운데 있었다.

   특히 이 존창은 1785년 영세를 받고 고향 여사울에 돌아온 그는 학식과 아름다운 그의 품행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었고 사람들을 사로잡는 특별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았다고 한다.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의하면 여사울에 사는 30여 가구가 넘는 그의 친척뿐만 아니라 그 마을에 사는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전교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전교 활동은 신분과 지역의 범위를 넘는 것이였고, 김대건 최양업 두 신부님의 집안도 이존창 사도의 전교로 입교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블뤼 주교는 훗날 순교자들의 많은 수가 모두 이 존창이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렇듯 여사울은 성인 이존창의 전교활동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과 출발이었고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순교자의 못자리 역할을 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의 신앙적인 삶의 모범과 전교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그분의 백성들을 탄생시키는 복음전파의 위력에 감탄을 하였다. 그것은 마치 작디 작은 겨자씨앗이 새들이 가득히 깃들일 만치 큰 나무로 자라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 참으로 걸맞은 삶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 안에서 진정한 선교사의 모습과 삶을 배울 수 있었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온 삶을 바친 복음적 삶을 살아야 하는 수도자로서 우리들의 삶의 태도를 그의 삶에 비추어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생가 터를 중심으로 참으로 인상적이고 아름답게 꾸며진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주님을 향했던 그의 선교사적 삶의 열정과 반석 같은 신앙을 청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을 떠나 다음 순례지인 내포의 또 다른 성지 무명 순교자들의 줄무덤이 있는 청양의 다락골 줄무덤 성지를 가는 도중에 한번 더 풋풋한 사람냄새 가득히 넘치는 친절어린 정을 지닌 이 존창 사도의 후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불볕더위의 뜨거운 시멘트 도로 위를 걷고 있는 우리를 보고 차를 세워주신 기사님, 금구 수녀님이 졸다가 두고 내린 잠바를 버스운전기사님이 친절히 연락하고 주선하여 다시 찾을 수 있게 하여주신 것과 점심 식사를 잘 할 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신 일 그리고 청양 터미널에 내려 성지까지 차편이 없어 동동거리고 있는 우리에게 성지의 차를 보내주신 다락골 성지 신부님 이 모든 분들은 바로 또 다른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해서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이게끔 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선교의 또 다른 현대의 모습이리라. 그리하여 우리는 이날의 마지막 순례지인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에 도착했다.

    무명 순교자들의 줄무덤이 있는 청양의 다락골 이곳은, 달을 안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달인골’이라고 하며 마치 성광이 성체를 모신 듯한 아름다운 곳이다. 이러한 곳에 홍주 읍성에서 순교하신 분들과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순교하신 약 250명의 교우들의 시신을 밤중 암암칠야에 모셔 와서 이곳 청양의 외딴 비탈에 매장하였는데 이일을 하느라 두 발 가락이 문드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최양업 신부님의 조상들이 신유박해를 피해 낙향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마을 사람들을 개종하여 이룬 교우촌을 이룬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직도 최양업 신부님과 그분의 부친이 사셨던 생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한 고로 무명 순교자들의 줄 무덤은 산 중턱을 넘어 많은 최씨 가문의 무덤들과 함께 제 1,2,3,줄로 나란히 있다.

   우리는 무명 순교성인성녀들의 무덤 앞에서 참으로 가난한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신앙생활을 하신 믿음의 조상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무명이란 그 자체가 내포한 의미는 신분이 천해서 재판조차 받을 가치가 없었던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재판절차 조차 없이 순교했기에 지금껏 이름도 없는 것이다. 참으로 남녀노소 신분의 고위 없이 누구나 하느님 앞에 평등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주님의 복음 말씀을 굳게 믿었던 이들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는 시대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들의 삶은 ‘하느님 사랑’의 큰 표징으로 다가오는 지도 모르겠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무명이 아닌 자신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야 하는 시대와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신앙을 증거하며 사는 바로 ‘무명순교자’의 영성이라는 것을 이곳 성지에서 크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하루의 긴 여정을 보령군 대천 해수욕장 옆에 있는 마치 고래의 뱃속에서 3주야를 재냈다는 요나서를 바탕으로 아름답게 지어진 요나 성당에서 마무리 했다.

 

    다음날 아침 5월 14일 우리는 바닷가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갈매못 성지를 찾았다. 고마수영이라고도 불리는 갈매못이란 말은

 

갈마연에서 온 말로 갈증을 느낀 말이 목을 축이는 연못이란 뜻이다. 지명이름 대로 지금은 말이 아닌 영적 목마름을 느낀 신앙인들이 이곳을 찾아 이곳에서 순교하신 다섯 성인과 많은 순교자들의 하느님 사랑과 믿음 속에서 다시 힘을 얻고 돌아가는 곳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다락골 성지 신부님의 배려로 봉사오신 두 분 자매님의 차로 일찍 도착해서 사람이 없는 성지의 정취를 느끼며 모두 마음을 가다듬어 일찌감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형장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 달레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이곳은 신리에서 생활하셨던 다블뤼 주교님, 위앵 신부님, 오매트르 신부님, 황석두(루카), 장주기(요셉) 성인 그리고 500여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순교하신 곳이다. 다블뤼 주교는 자신들 때문에 교우들이 심한 박해를 받기에 스스로 관헌에 자수하셨고 후에 다른 두 신부님도 자수하라고 권하여 모두가 주님의 양떼들을 위해 목숨 바친 착한 목자들이 되신 분들이시다. 그 외 다블뤼 주교님을 모시고 18년을 비서로 살았던 황 석두 성인과 배론에서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제공하고 회장으로 전교 활동을 하셨던 장주기 성인도 한양의 감옥에서 합세하여 순교하게 된다.

    이들은 한양에서 많은 고문과 매질을 맞고 당시 고종황제의 국혼이 있는 관계로 그곳에서 처형되지 못하고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갈매못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그들에겐 순교의 형장으로 가는 그 길을 마치 천국을 향해 행진하는 축제의 길로 생각하며 오성바위에서 막걸리로 자축하며 시편과 떼데움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순교의 길로 향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어찌 인간이 힘으로 가능한 일겠는가? 누구나 할 것 없이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것이 인지상정 일 진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초월하게 했는지 참으로 그들의 죽음을 뛰어넘는 하느님을 향한 초월적 사랑과 믿음에 넋을 잃었다. 예수님 한 분 때문에 먼 이국땅까지 왔고, 온 삶을 투신했으며 그리고 자신의 양떼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까지 내 놓은 이 모습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삶’이다. 이들의 삶을 통하여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배우게 된다. 우리는 얼마만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기도와 희생과 봉사를 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 어쩌면 이 순례의 여정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우리들 사랑의 정도를 순교자들의 삶을 통하여 점검하게 하는 참된 사랑을 다시 맛들이고 배우는 분명 은총의 시간임을 재확인 하게 된다. 만약 우리의 삶과 마음이 이 사랑에서 좀 더 멀어졌다면 다시 길을 돌려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회개의 마음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친 이분들의 사랑과 믿음의 길을 우리도 잘 따라 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거룩한 순교자들의 땅 충청남도를 떠났다.

   5월 15일 순례의 길에 오른 닷새 후, 요나 성당에서 군산, 전주, 정읍, 광주를 지나 한 나절을 달려 우리나라 남도의 마을인 강진 땅에 도착했다. 첫 발을 내딛은 강진의 이미지는 정이 많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진리와 정의에 대한 희망을 안고 있는 곳 이였다. 그것은 아마도 강진읍에 자리 잡고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식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민족 시인이자 서정시인인 김 영랑(윤식)의 생가와 그의 문학정신이 살아있고, 실학의 고향으로 100년 만의 재상으로 600여권의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과 후생 양성으로 귀양살이를 보낸 정약용 선생의 정신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시 김영랑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그의 생가는 오래된 대나무와 동백나무들이 집을 둘러싸고 황토 빛이 나는 흙마당엔 우물과 그의 시에 등장하였던 모란이 가득히 심어져 남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대가였다. 그러기에 그는 일본 동경에 가서 영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돌아와서 이곳에 살며 ‘동백닢에 빗나는 마음’ 이라는 서정시로 문단에 등단했고 그 후 그는 나라 잃은 마음에 해방의 날을 기다리며 지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서정성이 가득히 깃든 여성적 목소리로 노래한 시인의 정신과 마음이기에 정치와 무력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들보다 더 호소력 있음을 그러기에 무력보다 문력이 더 위대하다고 노래하였던 세인들의 말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이곳에서 시인만이 줄 수 있는 평화로움으로 긴 여행의 여독으로부터 휴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노래하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많음 시인들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세상을 희망하며 김영랑의 생가에서 다산이 처음으로 이곳에 귀양 와서 머물렀던 주막집이 있는 ‘사의재’에로 이어지는 ‘다산 옛길’이라는 길을 따라 걸었다.

 

  

사의재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골목길들이 아름답게 이어진 곳으로 운치 가득히 깃든 길이다. ‘사의재’는 강진읍 동서리 동문 밖 주막이었던 곳으로 다산이 강진에 처음 유배와서 이 주막의 뒷방을 빌려 살았다고 한다. 그는 성군이었던 정조를 잃고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인해 발생된 신유사옥때 당파싸움과 종교 신앙문제로 이곳까지 귀양길에 올랐다. 눈물가득 머금고 삶을 포기하려는 그에게 이곳 주막할머니의 위로의 말은 그에게 새 삶을 심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서 다시 마음을 다시 잡게 되고 이곳을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 이라 불리게 된 것에서 ‘사의재’이다. 그 네 가지란 ‘생각은 맑게 하되 더욱 맑도록 하고 용모는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하고, 말은 요점만 말하되 더욱 말을 줄이고, 행동은 조심스럽게 하되 더욱 조심히 한다.’ 생각과 태도와 언행을 올바르게 되잡는 것이 바로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이리라. 그는 이곳에 4년이나 거처하면서 경세유표, 애절양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러기에 이곳은 그의 삶에 새로운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었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 사랑을 향한 새로운 도약과 열정으로 종신 서원 5주년 재교육을 맞는 우리들에게 각자의 삶의 자세를 새롭게 되잡기 위한 하느님의 초대라 생각 되었다.

 

   우리는 이곳을 뒤로 하고 다산이 그의 귀양살의 14년을 저작 활동을 펼치며 18명이나 되는 후생들을 양성하며 사셨던 다산 초당으로 향했다. 다산은 이곳에 살면서 특별히 백련사에서 재배되고 있던 야생 녹차를 보약처럼 마시며 사셨는데, 이로부터 다도문화가 생겨났고 그것은 그의 정신적 수양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그러기에 그가 살았던 초당 마당에는 그 당시 집 옆의 연못에서 물을 길러다 신선처럼 차를 끊여 마셨다던 넓고 큰 바위가 아직 그대로 있었고 그가 바위위에 새겼던 정석이라는 글자도 그대로 있었다.

   우리는 다산명가에 짐을 풀고 다산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위하여 자주 다녔던 백련사로 향했다. 초당에서 800미터가 되는 이 길은 아직까지도 다산의 자취가 남아있는 듯한 무척이나 아름다운 오솔길이었다. 지금은 그 옛날 그 진가를 알아봐주던 주인은 사라졌지만 야생 녹차밭 만이 여전히 주변에 무수히 즐비한 동백나무들을 벗 삼아 굳굳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길을 주님안의 길벗들끼리 서로의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묵묵히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다산이 흑산도에서 귀양살이 하던 약전 형을 그리워하며 바라보았다던 자리에 세워진 천일각에서 우리들은 주님을 향한 애태움과 목마름을 가득히 담아서 저녁기도를 바쳤다.

 

   실학의 성지 강진에서의 첫 밤을 보낸 우리는 집을 떠나 처음으로 ‘주님의 날’을 맞았다. 우리는 강진읍에 위치한 강진 성당에서 마치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서 남의 땅에서 안식일을 지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들처럼 순례의 여정 가운데 맞는 주일을 벅찬 마음으로 바쳤다. 그곳 성당은 인심 좋고 신앙심 깊은 소박한 신자들이 성당설립 50주년을 준비하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 미사 가운데 우리는 주임신부님으로부터 인사 소개를 받았고 미사후 에는 그곳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시튼 수녀회 수녀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다산 옛길을 오후에 한번 더 조용히 생각하면서 걸으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하느님의 계획은 다른 것이었다. 데레사라 불리는 한 자매님의 친절어린 호의로 강진의 명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7명의 수녀들이 자가용 한 차에 빼곡이 타고 고성사에 가서 사찰 비빕밥과 칼국수로 점심을 얻어먹고 비구니 스님께서 간 밤에 만드셨다며 갓 만든 발효녹차를 맛보여주셨다. 그리고 해남까지 가서 두륜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흥사라는 산새가 아름답고 규모가 크게 잘 지어진 조계종 사찰을 방문했다. 사찰 진입 입구서 사찰까지는 차로 15분이 넘는 아주 길고 푸른 수목들이 가득히 하늘을 덮은 아름다운 길이었다. 비가 오더라도 우산도 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그곳에 ‘차 축제’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해남의 다양한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었고, 맛있는 토속음식 시식의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다시 차로 한 시간을 달려 우리나라의 제일 남단인 땅끝마을까지 갔다. 송호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땅끝 마을 전망대에 표시된 이정표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았다. 작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우리 조국인가? 이 땅끝에서 우리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이 나라의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산 초당을 지키고 있는 윤동환님으로부터 다산에 대한 이야기들과 함께 차도에 대하여 배우면서 차 대접을 받으며 하루를 마감했다. 이렇듯 주님의 날에 하느님은 당신의 5월의 신부들에게 사랑과 자비로 가득한 싱그럽고 푸르른 사랑을 선물처럼 주셨다.

 

   일찍 서둘러 일어나 우리는 강진 성당에서 아침 미사를 하고 편의점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나주역으로 가서 전북지방에 위치한 나바위 성지로 가기 위해 강경행 기차를 탔다.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는 강경에 도착했고, 역부근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나바위 성지에 도착했다.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위치한 나바위 성지는 김대건 신부님께서 사제가 되어 조선에 들어오는 길에 제주도에 표류 후 이 땅에 첫발을 내딛은 곳이다. 송시열이 화산(아름다운 산)이라고도 부른 곳으로 굉장히 큰 너럭바위로 지금은 그 위에 성인의 입국을 기리는 한옥과 고딕식 양식을 접목한 고풍스러운 나바위 성당이 세워져 있다.

   1845년 10월 12일 11명의 교우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강경에서 좀 떨어진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페레올 주교는 그의 편지에 이 일을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였다. 그 하느님의 섭리가 목자가 없는 조선 땅에 라파엘호라는 목선을 타고 신앙의 빛을 비춰주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착륙하도록 하였다. 나바위를 중심으로 사방이 바다였던 이곳은 이제 수박하우스들이 즐비한 수박 바다가 되어 있다. 그 수박 바다 가운데 성당이 있고 그 성당 옆에 있는 바다의 별 피정의 집에 우리는 이곳에서의 이틀간의 여정을 풀었다.

 

   이곳에 소임중인 순교복자회 수녀님의 안내로 우리는 이곳의 역사를 들었을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이곳엔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초대 본당 주임으로 베르모텔 신부가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의 설체도에 따라 중국의 목수들에 의해 지어진 한옥의 전통 양식건물이다. 그래서 중국, 서양 우리나라의 건축과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성당이다. 성당 내부엔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의 한부분이 모셔져 있고 아직도 남녀가 따로 미사들 드렸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국가지정 문화제사적 318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한다. 우리는 설명을 들은 후 라파엘호가 착륙한 지점에 가서 그 때의 감동을 느꼈고, 나바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십자가의 길을 돌면서 기도를 바쳤다.

   이곳 성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 그리고 우리들이 거쳐 온 많은 숙소보다 가장 편안하고 아득한 숙소였던 ‘바다의 별 피정의 집’에서 우리는 저녁을 맛있게 해 먹고 오랜만에 함께 둘러 않아 오락으로 웃음꽃을 피웠다. 그리고 밤새도록 비가 내렸고, 그 비는 다음날 까지 계속되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우리 모두는 오늘의 일정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모두 일찍 행장을 꾸리고 점심 도시락을 싸고 비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려 할 때 비는 바람과 함께 더욱 거세어 졌다. 이 날의 일정은 나바위에서 여산의 숲정이 성지까지 16킬로미터의 거리를 도보로 걸어가는 것 이였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끝에 빗속이라도 우리의 순례여정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성인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서고자 하는 7명의 신부들의 마음을 악조건의 날씨조차 꺾지를 못했다.

 

   우리는 출발 전 성당에서 출발기도를 바친 다음 다시 한없이 쏟아지는 비 속에 둘러서서 이 도보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서 각자 한 가지씩의 특별 지향기도로 마음을 다졌다. 무엇보다 어수선한 우리나라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총회를 앞둔 우리 수도회의 쇄신과 일치 그리고 지금 순례여정 일치 있는 우리 각자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 우리들안의 일치와 연대에 지향을 두며 도보를 시작했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바람까지 더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금새 옷은 젖어 있었고, 차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를 걸어야 했기에 오가는 차들의 물세례도 받아야 했다. 비오는 도로엔 오로지 7명의 신부들만이 개미처럼 대열을 지어 걷고 있었다. 도보 중 라보레 수녀님이 신발이 불편하여 걷기가 힘들 때 금구 수녀님이 기꺼이 바꾸어 주는 듯 서로의 어려운 상황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애덕을 베풀었다. 비가 와서 날씨가 추운 관계로 화장실에 갈 일도 자주 있었지만 그때 마다 주님의 천사들의 배려로 볼 일도 보고(젖은 옷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는 등 상황은 고생스러웠지만 마음만은 사랑으로 따뜻함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특히 막바지에 이르러 배고프고 춥고 허기졌을 때 방울토마토 하우스에 들어가 먹었던 방울토마토의 맛은 잊을 수 없다.

   빗속을 약 4시간에 걸쳐 걸어 우리는 여산 성당에 도착하였다. 모두 흠뻑 젖은 생쥐들이 되어 성당에 서서 주님께 노래로 찬미가를 불러 드렸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뜨거움으로 달아올랐었고 눈물과 빗물이 구분 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곧장 여산 동헌 옆에 있는 ‘백지사터지’ 들렀다. 이곳은 병인박해 때 순교자들은 동헌에서 재판을 받고 이곳에서 ‘백지사’라는 형벌로 순교시켰다. 그리고 지금도 그 사실을 증명하는 흥성대원군의 척화비가 동헌 안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백지사란 사람의 얼굴에 물을 뿌려 백지를 덮어가면서 질식사를 시키는 처형법으로 예수님의 죽음처럼 아침 9시에 시작하면 오후 3시쯤에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엔 오로지 비바람에 해를 수없이 거쳐 빛이 바래진 나무 십자가와 땅위에 백지사 형법의 모양을 재현한 돌조각이 쏟아지는 빗속에 의연히 그 때의 그 모습의 처절함을 말해주는 듯 하였다. 그래서 더욱더 무명 순교자들의 마음이 애절하게 다가왔다. 짧게 기도를 드린 후 우리는 곧바로 ‘숲정이 성지’로 향했다.

 

   숲정이 성지 고산, 금산, 여산 지역에 살았던 교우들이 잡혀와 ‘여산동헌’에서 재판을 받고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들이다. 그곳엔 25명의 순교자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평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이 성지는 입구에 피에타상이 성지를 지키는 수호천사처럼 있어 순교로 주님의 고통에 동참한 순교자들의 마음을 대신하는 듯 했다. 성지 정면으로는 돌 제단이 덩그러니 하나 있어 많은 이의 봉헌과 사랑을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오늘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잠시 우리들 또한 삶 속에서 어떤 희생과 사랑을 주님께 드리며 살아가고 있었는지,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따르며 살기를 원하시는지 각자의 마음의 성전을 들여 다 보았다. 그리고 아마도 성지 입구에 피에타상이 있음은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의 믿음이 성모님께서 예수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그 믿음처럼 바로 예수님을 그들의 목숨으로 끝까지 따랐던 이곳 순교자들의 믿음과 같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우리 모두 비바람 치는 거친 들판에 서서 그들의 이토록 굳건한 믿음과 우리들의 마음에 속에 있는 작든 크든 각자의 십자가을 끝까지 잘 지고 가기를 청하며 허기지고 지친 육신을 돌보기 위해서 식당을 향했다. 그리고 따뜻한 짬뽕에 준비해 갖던 밥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참으로 어려움 속에서 시작한 도보순례였지만 7명의 5월의 신부들은 오늘 하루 자신들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렸다. 그리고 그 감사의 보답은 우리들 또한 각자의 수도 삶의 여정에서 오는 많은 어려움들 가운데도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길을 걷는 것이라 마음 깊이 새기며 강경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5월 19일 우리는 강경성당에서 아침미사를 드리고 이제 1박 2일의 일정을 남겨두고 우리들 순례여정의 마지막지인 연풍에 있는 황석두(루가)의 생가와 그곳에서 순교하신 무명 순교자들을 찾아 나셨다. 강경에서 동대전까지 와서 상주를 거쳐서 문경 가까이의 점촌으로 가는 버스를 탈수 있었다. 그 길은 전라북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 땅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줄기의 하나인 이화령을 넘는 길이었다. 산새가 높고 웅장하며 숲은 깊어지고 평야가 적어지는 길이었다. 마치 버스는 하늘 길을 따라 높이 올라갔다 다시 내려가는 듯했다. 우리는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 행선지에 다다랐다.

   점촌에서 이날의 숙소가 있는 문경성당 내에 있는 교육관까지는 요한 보스코 수녀님의 지인 신부님이 나오셔셔 우리를 태워주셨고 그곳의 유명한 문경 약돌삽겹살로 저녁을 풍성하게 대접해 주셨다. 이리저리 하느님은 당신의 신부들에게 천사들을 보내시어 영육으로 보살피시고 계심을 온 몸으로 느끼며 신부님께 감사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것을 챙겨 집을 나서서 7시 30분에 문경새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10일 동안의 여행을 통하여 우리는 이제 쉽게 떠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니 단순하게 사는 삶에 조금 가까이 갔다고나 할까?

   문경새재는 아래 지방의 사람들이 이 길을 거쳐 한양을 향했던 길이고 선비들이 출세의 길에 들어서기 위하여 과거를 보러가던 길이며 신앙인인 우리에게는 다섯 개의 도를 넘나들며 교우촌을 방문하시던 최양업 신부님의 공소 순방길이기에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오늘 이곳은 푸르디 푸른 녹음이 짙어져 있고, 계곡으로 흐르는 물은 너무나 맑았다. 하루 전에 비가 와서 땅은 우리의 걸음들을 솜사탕 위를 걷는 듯 가뿐하게 해주었다. 7명의 5월의 신부들은 청정지역에서 뿜어내는 상쾌한 공기를 듬뿍 마시며 그동안의 여독을 풀었다. 7명 모두 완전 행복해하며 순례여정 마지막 마무리로 그리고 하느님 사랑을 다지는 새로운 출발의 마음으로 넘었다. 제1관문에서 제3관문에 이르기까지의 길 그것은 마치 영적인 삶의 여정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이곳의 길이 제 나름대로 고갯마루의 버거움 그럼에도 멋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듯이 우리의 영적 여정 안에서도 하느님은 온갖 고통도 주시지만 또한 골속골속 온갖 은총의 선물과 사랑의 꿀단지 마련해 놓고 힘들 때 하나씩 꺼내어 주시며 당신사랑에 이르는 우리의 여정을 위로하시고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특히 당신 사랑에 초대된 우리가 그러하리라.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그동안 지친 우리를 보듬어주시며 또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시는 시간인 것 같다. 이렇게 우리는 문경새재를 넘으면서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이 짙은 초록처럼 싱그럽고 상쾌하고 푸르른 사랑임을 확인하게 된다.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 땅에 들어선 우리는 연풍성지에 들러 미사를 하고 점심을 먹었다. 이곳은 각자 나름대로 한번 와 본 곳이기도 하다. 연풍은 박해가 계속되던 시절 신앙을 지키려는 교우들이 문경새재와 이화령을 넘어 경상도로 피신하던 길목으로 순교자들의 보금자리, 신앙의 길목이요 교차로이다. 그들은 연풍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렸고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넘는 순간에도 틈틈이 기도를 바치곤 했다. 최양업 신부님과 프랑스선교사 신부님들도 연풍읍을 거쳐 경상도 충청도 땅을 넘나들면서 교우촌을 방문했다. 그럴 때 연풍 골짜기에 숨어살던 교우들을 방문해 비밀리에 성사를 주셨다고 한다.

   황 석두 성인의 출생지이며 갈매못에서 순교하여 이곳에 모셔진 그분의 영원한 안식처 로 그분의 순교의 영성이 녹아 있는 곳이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 수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한 가운데에 구멍이 내어진 큰 형구돌에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목이 메어 순교의 영광을 받은 곳이다. 황석두 성인은 진리를 사랑한 나머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동정부부로 살면서 일생을 교회를 위해 헌신하시고, 목자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시다 순교하신분이다. 그랬기에 그의 영적 아버지요 스승이신 다블뤼 주교가 순교의 길에 오르자 스스로 십리길을 쫓아가서 함께 순교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고 갈매못에서 망난이들은 흥정을 하기위해 다블뤼 주교의 목을 반 만 쳐서 사지가 부들거리는 것을 새파랗게 질린 위앵신부님과 오매트르신부님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며 순교할 수 있도록 도우신 분이다.

    순교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오면서 참으로 다시 새롭게 느끼게 배우게 되는 것은 참된 교회의 새로운 모습이다. 즉 목자와 하느님 백성인 양떼가 서로 한데 어울려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 목자는 그의 양떼들을 위해 양떼들은 그의 목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주님을 위해 함께 목숨까지 바치는 이 모습이 진정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운 교회의 모습이리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다시 우리 각자에게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 하느냐?” 라는 베드로에게 하신 이 질문을 순례의 끝자락에 선 우리 7명의 신부들에게 당신의 사랑에 대한 다짐으로 그리고 삶의 터전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건네시는 당신 사랑의 확인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삶의 여정에 비추어 이 초대의 마지막에 주님을 위한 삶의 새로운 다짐으로 대답을 드려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 순례의 여정에 순교자들의 믿음에 비춰 이미 고백했을 것이다. 이렇게 “아시다 시피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엔 15년 동안 주님을 위해 살아온 각자 나름대로 수도 여정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진 것일 것이다.

 

 

나오면서

 

   푸르른 5월 한 달 주님의 사랑에 맛들이기에 초대된 우리는 이 성지 순례의 여정을 통하여 그동안 주님께 부족했던 우리들의 믿음과 사랑을 이 땅의 순교로 그 사랑을 증거한 순교성인들의 신앙의 모범을 통하여 새롭게 할 수 있었고 또한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삶속에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시간이며 또한 ‘더 깊은 데로 가서’ 나와 함께 그물을 치자고 초대하시는 우리를 당신과 더 깊고 넓고 높은 당신사랑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 사랑 맛들이기(seasoning of God's love) 의 시간이었다. 맛을 들인다는 것은 그 음식에 풍미를 더하여 그 음식이 지녀야 하는 고유한 맛을 살려내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깊은 맛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한 수도자의 삶 또한 이러하지 않을까? 하느님 사랑에 맛들이고 그 사랑의 삶을 살아냄으로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그분의 맛과 향기를 내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초대하신 그분의 의도도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한번 우리 삶의 본질과 정체성이 ‘하느님의 사람’임을 재확인하여 그분께 새로운 사랑을 바쳐드리며 이 성지순례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싶다. 이 순례의 여정 동안 함께 하여주신 우리 7명의 동료 5월의 신부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를 이 순례여정 중에 우리를 도와주신 많은 천사들, 이 복된 수도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울타리가 되어 주신 우리 수도 공동체 그리고 우리들의 수도 여정에 함께 하여주신 수도가족과 특별히 한달 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기도의 집에서 소임하시는 수녀님들, 그리고 모든 우리들의 은인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