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뜨락

하느님 지혜로 인도하는 고통

마리아 아나빔 2016. 7. 5. 15:50



하느님 지혜로 인도하는 고통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욥기 42, 2.3.5.)

 

  

  

지혜문학 속의 현인들은 욥과 코헬렛의 여정을 가야했다.

그들은 신비가 분명하게 하느님의 몫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들의 가르침의 한계가 실패도 난처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지혜 너머에 계시다는(잠언 21,30)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혜는 하느님의 신비에 직면하려는 대담함을 지니고 있고, 그 대면은 정직과 지혜의 움직임이 통합되는 기초위에 있다.

즉 지혜로운 이가 설사 안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파악할 수가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욥기의 저자는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단순한 이해를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


 

욥은 저자가 독창적으로 만든 이름이 아니다.

기원전 2천 년대 서부 셈족 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된 이름으로 회개하는 자, ‘미움받는 자로 풀이된다.

오늘날 욥이라는 이름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 중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

이해 할 수 없는 참변 중에 묵묵히 인내하는 인간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러나 욥기는 인간이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의 길을 가르치는 교과서도,

인간이 겪는 일반적인 고통의 기원이나 이유도, 개인적인 고통에 대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아무런 잘못 없이 고통 받는 일이 있으며, 의로운 이도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것은,

그가 자신의 고통에 최종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하느님과 항구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점이다.

하느님의 침묵은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이다.

그렇지만 욥이 집요하게 하느님의 응답을 요구하자 하느님은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는 풍문으로 들어왔던 하느님을 자기 눈으로 직접 뵙게 된다(42,5).

하느님의 거룩함을 대면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다.

왜 고통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지만,

욥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더 이상 고통에 눈을 돌리는 않는다.

그 순간 욥의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그렇다고 성경은 욥의 고통 자체가 사라졌다고도 말하지도 않는다.



욥기에서 고통은 하느님을 만나는 도구이고, 하느님의 지혜에 다가가는 길이며,

 하느님은 지혜 너머에 계시는 분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욥의 신앙은 가난하고 고통 받으면서도 하느님을 굳게 믿고 끝까지 의지하는 조건 없는 신앙이다.

그 신앙은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이루시는 자유의 권능의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다.

또 이전에 몰랐던 하느님의 신비와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것에 있다.

 이러할 때 우리는 겸손되이 주님과 새롭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욥의 이름은 회개하는 자이며, 고통으로 미움받는 자이다.

그 길은 바로 참된 하느님을 만나는 길로써 우리도 이 여정에로 초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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