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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書에 나타난 사막의 의미와 修道生活에 대한고찰 I

마리아 아나빔 2010. 8. 2. 22:00

 

聖書에 나타난 사막의 의미와 修道生活에 대한고찰                                

                                                                                                          

 

 

                                                                                                                                                             

                                                                                                                                                                   - 마리아 아나빔- 

들어가면서

 

    성서에 나타난 사막은 지리학적인 장소적 의미와 구원사적인 독특한 체험시기를 의미하는가에 따라서 사막의 그 의미는 달라진다.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막은 하느님이 축복을 내리시지 않는 저주의 땅이다. 거기에는 물이 귀하고 그것은 마치 비가오기전의 낙원과 같아서(창세기2,5) 풀과 나무가 드물어 그 곳은 도저히 거주할 수 없는 장소이다. 반면에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젖과 굴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먼저 그들로 하여금 가공할 만한 땅을(신명기1,19) 통과하게 하셨다. 이러한 사건은 사막의 상징적 의미를 바꾸어 놓게 된다. 사막은 삭막한 곳으로써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구세사의 한 시기를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히 하느님께 신뢰하고, 또한 하느님은 당신을 그들에게 드러내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종교적인 신앙체험이 있는 곳을 상징 하게 된다. 이러한 성서의 사막의 두 가지의 커다란 상징적인 측면을 통하여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으로 떠났던 초대교회의 수도생활의 첫 수도자들의 삶과 하느님 사랑과의 일치를 위한 신앙의 여정에서 반드시 겪게 되는 수도생활 안에서 영적인 사막의 의미를 고찰하여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사막의 의미를 재조명해 봄으로써 하느님이 인간과의 첫사랑을 위하여 만남으로 허락되었던 사막을 통하여 하느님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뜨겁게 하고자 하는 마음의 갈망에서 고찰하게 되었다.

 

 

Ⅰ. 성서에 나타난 사막의 의미

 

  지리학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사막이 상당히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즉 팔레스티나는 전통적 경계인 ‘북쪽 단에서 남쪽 브엘-세바까지’(판관20,1:1사무 3,20) 남쪽으로 242킬로미터, 동서로는 45킬로미터(갈릴레아 호수에서 지중해까지) -87킬로미터(사해에서 지중해까지)에 걸쳐 펼쳐진 낮은 구릉과 평원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이러한 팔레스티나는 크게 다섯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해안 평야지대, 서부 고원지대, 동부 고원지대, 사막지대가 그것이다. 그래서 성서에서 사막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성서에서 사막에 관한 이야기를 크게 몇 가지로 나누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에집트 탈출과 더불어 40년 동안의 광야생활, 예언서들에 나타난 사막의 이야기,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에 40일 동안 사막에서 유혹을 당하신 이야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사막이라는 낱말이 사용된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기에 오늘 우리는 사막의 의미를 보다 명백히 하도록 노력할 필요도 있다. 여기서는 성서의 나타난 사막의 두 가지 상반된 의미인 지리학적인 특징과 관련된 의미와 출애굽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통한 체험에서 발생한 사막의 상징적인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1. 사막의 지리학적인 특징과 관련된 의미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막은 물이 없어서 생명이 생겨 날 수 없는 불모지이며 따라서 인간도 살 수 없는 땅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사막은 어느 문화권에서도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서에서도 이런 의미가 존재하는데 창세기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하늘을 만드시던 때이었다. 땅에는 아직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던 것이다.”(창세2,5) 즉 풀과 나무가 드물어 그곳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장소인 것이다. 또한 어떤 땅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은(이사6,11) 이스라엘이 범한 죄들이 바로 이러한 것을 초래하게 하는데(에제6,14; 애가5,18; 마태23,38), 그것은 원초적인 혼돈 상태를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예레2,6;4,20-26), 이러한 황무지에는 마귀들(레위16,10;루가8,29;11,14),귀신(레위17,7)과 해로운 동물들이(이사13,21; 14,23; 30,6; 34,11-16; 스바2,13-14)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막이란 마치 저주가 축복에 반대 되는 것처럼, 살 만한 땅과 반대되는 장소를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막은 인간이 원래 하느님과 친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낙원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인도를 받아 차지하게 될 약속의 땅과 대립된 장소인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외면하면 이 약속의 땅은 황무지가 되고 사막이 되어버린다.

    “내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이렇게 나의 속을 모르다니, 미련한 자식들, 철없는 것들, 나쁜 일 하는 데는 명석한데 좋은 일은 할 생각조차 없구나. 땅을 내려다보니 끝없이 거칠고 하늘을 쳐다보니 깜깜합니다. 산을 바라보니 사뭇 뒤흔들리고 떨고 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하나 없고, 하늘에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갔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옥토는 사막이 되었습니다.(예레4, 22-26)”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사막은 또한 악령들이 거주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 약령이 어떤 사람 안에 있다가 그에게서 나오면 물 없는 광야에서 쉴 곳을 찾아 헤맨다.(마태12,43) 이러한 측면들은 사막의 지리학적인 특징과 관련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1.2. 사막의 종교적 체험에서 발생된 상징적 의미

 

    한편 성서에 나타난 사막에 대한 주도적인 관점은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젖과 굴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기 전에 먼저 그들로 하여금 가공할 땅(신명1,19)을 통과하게 하시는데 이 사건은 사막의 상징적 의미를 바꾸어 놓게 된다. 즉 사막이 삭막한 곳으로써의 성격을 띠고 있긴 하지만, 이것은 하느님 백성이 탄생하는 구세사의 한 시기를 상징하게 되고 종교적인 체험을 상징하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출애굽의 사건은 어떤 기행문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신학자들이 에집트를 떠났을 때부터 이스라엘 땅에 자리 잡았을 때까지의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자기들이 체험한 종교적인 의미에 대한 작업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 그리고 인간이 그 분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사막을 통과하는 여행의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시련의 시기, 그리고 또한 배신의 시기였으나, 하느님의 입장에서 이것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시기였다. 사막에 대한 이러한 기억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하느님 섭리의 계획,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에 따른 정화의 길, 셋째는 하느님자비의 실현시간 그리고 하느님 현존의 체험 장소로 나눌 수 있다.

 

1.2.1. 하느님의 섭리의 계획

    하느님은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그리고 당신 자신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자로 키우시려는 분이시다. 먼저 출애굽기의 동기에서 에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압하며 노예취급을 할뿐만 아니라 없애려고 까지 했다. 이때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백성으로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모세를 시켜서 파라오의 위력을 겪으신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집트인 들의 육체적인 억압과 위협으로부터 해방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본다 하더라도 육체적인 결핍을 견디어 내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느님께서 계획적으로 택하신 길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흠숭해야 할 곳은 시나이 사막이었고, 거기서 그들은 율법을 받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맺음으로써 유랑민인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사막에서 탄생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인간을 당신의 백성과 사람으로 손수 이끄시고 계획하신다는 것에 종교적인 상징의 사막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2.2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에 따른 정화의 길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막의 길은 식량이 풍부하고 안전한 에집트의 비옥한 땅에 비길 수는 없었다. 그 길은 이스라엘을 이끄시는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신앙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루 길을 걷기도 전에 그들은 주님의 이끄심에 불평해 하기 시작했고, 사막에서의 제일세대와 제이 세대의 불평 즉“안전도 없고 물도 없고 고기도 없다.”라는 불평의 소리가 성서에 시종일관 적혀있다.(출애14,11;16,2-3;17,2-3; 민수기14,2-4;16,13-14;20,4-5;21,5)

    불평의 동기는 에집트에서 평범한 생활에 대한 동경이었다. 즉 에집트에서 생활이 가혹하다할지라도, 하느님의 배려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이 비정상적인 생활보다 더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죽음의 위협보다는 노예생활이 더 좋았고, 맛없는 만나보다는 빵과 고기가 더 좋았다. 즉 사막생활을 겪어야 할 시련을 극복할 줄 모르는 인간의 마음을 폭로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는 본능적이고 불완전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정화를 필요로 하는 인간임을 고백함과 더불어 새롭게 신앙의 여정을 가는 회개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3. 하느님 자비의 실현의 시간

    하느님께서는 불신과 불충실에 굳혀진 모든 이들이 죽도록 버려두시지만 당신 백성의 불만을 친히 견디어 내시어 그 날 그 날의 삶을 마련해  주시고, 마침내 당신 백성이 무사히 약속의 땅에 들어서게 하신다.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 내신다. 하느님께서는 투덜거리는 백성에게 놀라운 양식과 물을 내려주시고, 죄인들을 처벌하시지만 구리뱀과 같은 뜻밖의 구제방법을 마련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라가기도 하고 불신하기도 한다.

또한 하느님에 대한 백성의 배신을 고발한 예언자들은 회심하지 않으면 나라가 사막이 되어 버리겠다고 말하는데 이때의 사막은 죽음과 멸망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하게 된 시련은 결국 신을 자기의 욕구를 채워주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이 시련을 통하여 그들은 그릇된 종교심으로부터 해방되어 주님인 동시에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존중하는 인격적인 신앙으로 이끄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느님 최후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막의 시기는 백성 편에서의 불충실의 시기라기보다는 반역자를 일깨우시고 당신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충실의 시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2.4 하느님 현존의 체험 장소

    사막은 하느님이 보여주신 아버지다운 배려의 시기이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하느님 현존을 상징한다.

호렙 산으로 가는 엘리아는 다만 사막을 피신의 장소로 찾을 뿐 아니라, 기운을 다시 회복하는 장소로 사막을 찾고 있다.(1열왕19장) 또한 단순한 처벌, 그것이 부정한 아내를 일깨워 주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사막으로 인도하여 사랑을 속삭여 주신다.(호세2,16) 그때에 약혼의 시기가 되돌아 올 것이다.(호세2,21-22) 사막에서의 “만나”는 천상적 양식이요(시편78,24) 맛이 휼륭한 빵이다.(지혜16,21) 자애로우신 아버지이시요(호세11장), 목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성실하신 분이시어서 그분은 당신이 과거에 하사하신 선물들을 통해서 줄곧 당신의 현존을 보증하신다.(이사40,11;63,14-14;시편78,52). 이스라엘이 이렇게 가까이 지내던 시기를 돌이켜 본다면, 이끌어주시고 돌봐주시는 분을 어떻게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을 수 있을까(시편81,11) 또한 욥의 설화(욥기45,1-5)에서 욥은 인간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막에 처해 있었지만 이 결핍 속에서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만났었다. 이것은 또한 약속된 땅의 영적인 의미와 인간적인 삶의 의미를 말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영적인 사막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대표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이 사막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곳으로써 종교적인 의미의 상징이 크다고 할 수가 있다.

 

 

 

Ⅱ. 수도삶의 시작인 사막

 

2.1. 지리학적인 특징과 관련된 수도생활의 기원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와 그리스도인이 실행해야 하는 최고의 계명은 사랑이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

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오.5,48)와 같이 “완전한 사랑”에 있어서 가장 완전한 모델은 예수그리스도이다. 그는 이 사랑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었고 그리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9,23)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교회 초기부터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남녀신자들이 교회안에 있었다.

이들 소수의 무리들은 “동정녀들과 금욕자들”로써 본격적인 수도생활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특별한 생활양식을 택하였고 두드러진 특징은 하늘나라를 위하여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독신으로 지낸다는 것인데(1고린 7, 25-35; 사도21,8-9; 1디모5,9-16)남자는 금욕자(고행자)라고 불렀고 여자는 동정녀 또는 과부라고 불렀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온전히 자신을 바친 이들로써 세속의 재미와 사치생활을 멀리하고 3세기 초에는 지방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기도, 단식, 자선 그리고 생계유지를 위한노동에 투신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고 본당 공동체의 특정한 지역에서 살거나 집에서 부모와 함께 생활했었지만 점차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남녀가 따로 살게 된다.

    그 후 4세기 초반에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더 철저히 따르고자 하는 고행자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떠나 사막이나 산에 들어가 온전히 혼자서 살기 시작하는데 수도생활의 기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거스르는 이기심과 자아심을 끊어버리는 더 철저한 자기 버림을 위하여 사람이 살기 힘든 사막을 택하였고, 그 사막으로 나아갔으며, 그 곳에서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았는데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성 안토니오’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막과 관련된 또 다른 수도생활의 기원과 관련된 견해는 ‘데치오(Decio)의 박해(249-251)때에 많은 신자들이 사막으로 피신했는데, 박해가 끝난 이후에도 사막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런 생활을 했다는 것과 박해시대가 끝났을 때 순교를 대신하는 이상적인 크리스쳔 생활로 생긴 것이라는 견해들이 있다.

 

2.2. 사막과 수도생활

 

    일찍이 3세기말부터 일부에서 시작된 은수 생활에 있어 사막에 은거하여 사는 은수자들의 수효는 상당히 늘어났고 이들이 사회와 세속을 떠나서 사막을 찾아간 유일한 동기들은 보다 더 충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을 하기 위한 것으로써 복음과 복음적 생활을 더 충실하게 살려는 것 즉, 그들의 갈망은 자기들의 크리스챤 성소를 근본적으로 더 극단적으로 사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은수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철저한 생활양식을 위하여 “사막‘을 찾아간 근본적인 이유와 동기들의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은수자들의 글과 교부들의 글을 통하여 살펴보면.

    첫째는 모든 수도자들의 사부이며 대표자인 성 안토니오에게 있어서는“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사막에서의 은수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성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오의 생애에서)

   둘째는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견해로써 “초대그리스도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셋째는 “바꼬미오의 제 2생애”에서 “순교를 대신하기 또는 순교를 준비하기 위한 동기”로써 “그 은수자들 중에 가장 오래된 이들은 순교자들의 인내와 투쟁을 목격했기 때문에 순교자들의 생활을 본받기 위하여 사막(광야)에 들어갔다.”라고 말하고 있다.

  넷째는 “악마들과 싸우기 위하여” 사막의 고요함과 고독함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악마들은 사막에서 거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은수자가 사회와 사람들이 사는 곳을 떠나서 악마들의 본거지에서 그들과 싸우고 승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섯째는 “영적순례 귀양살이를 하기 위하여” 사막으로 나갔는데, 이 관점은 성서적 세인물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아”가 은수자들의 본보기가 되는 것으로써 즉 고향과 집을 떠난 아브라함처럼, 또한 사막을 통해 약속된 땅으로 백성을 인도한 모세처럼, 그리고 하느님을 만나러 호렙 산이나 카르멜 산으로 올라간 엘리아처럼 은수자들도 자기 고향과 집을 떠나서 약속된 땅 즉 천국을 향해 하느님을 만나러 광야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여섯째는 바꼬미오의 견해로써 “천사들의 생활을 본받기 위하여” 즉 육적인 모든 욕구에서 해방되어 항상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천사들처럼, 모든 것에서부터 해방된 은수자도 항상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사들의 생활을 선택하는 은수자는 육적인 인간 본성의 모든 욕구를 극복한 것이기에. 영적인 생활에로 올려진 것이다. 결혼하지 않는 천사들처럼, 은수자는 하느님의 아름다우신 얼굴밖에 다른 미(美)를 바라보는 분심을 두지 않습니다.” 일곱째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견해로써 “아담의 무죄 상태에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즉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영광 중에서 하느님과 친구처럼 사귀는 것, 바로 이것은 은수자들의 할 일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깨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기 위하여” 로써 즉 묵시록의 마지막 구절 “오소서, 주 예수여”라는 이 기도가 은수자들이 외치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오시기를 고대하는 희망은 수도자들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이다.

    하여튼 사막에서 은수생활의 기원에 있어서 그 원인이 여러 가지 다양하게 표현되기에 간단하게 단정 할 수는 없지만 각 경우의 중요한 해당사항은 단순하게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것” 뿐이라는 것에 있다. 그럼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동기가 원동력이 되어 은수생활이 시작되었고, 오리게네스(Origenes,185-255년)는 이런 고행자(Asceta)의 생활을 세 가지의 고유한 특징으로 분류하였는데 그 하나는 하느님을 신비주의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결혼과 재산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겸손과 자제력과 극기 등을 통하여 덕행을 닦는 것인데 바로 3세기말에서 4 세기초의 사막에서의 은수생활은 바로 막지막의 특징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회를 떠나서 사막에 은거하는 것을 보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사막의 은수자들”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보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서 그 분을 만나기 위하여 사막으로 갔었다.

 

2.3. 수도생활 안에 나타나는 사막의 두 가지 측면

 

   구약성서에서 사막“은총”과 “유혹”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개념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초기 수도생활 안에서 나타난 사막에서의 은수생활 역시 두 가지의 상반된 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하느님의 큰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친밀한 장소로 사막”인 반면 한편으로 “사막은 은수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마귀의 유혹을 동반하는 투쟁의 장소”로 그려지고 있다.

   그 첫 번째인 하느님의 큰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장소인 사막은 그 지리적인 여건들로 인하여 쉽게 외부의 잡다한 사념들로부터 영혼을 분리시켜주는 외면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데. 즉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위하여 모든 것을 끊어야 하는데 듣는 것, 말하는 것, 보는 것과의 전쟁에서 해방시키는 물리적인 외적인 고독은 영혼을 내적으로 통합시켜 하느님 안에 마음을 모아 그분과의 일치를 도와주게 한다는 것이다.

   반면 그 반대개념인 사막에서의 마귀와의 유혹과 투쟁은 무질서한 욕정으로 드러나는 원죄의 결과로써 은수자가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세상을 도피 하지만 사막에서 바로 그 악마를 만나게 되고 그것과 투쟁하게 되는 유혹의 장소라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원래 의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러자면 수행이 필수적이고 그 수행에는 언제나 유혹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 예를 사막에서의 성 안토니오에게서 본다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시오. 여러분의 적수 악마가 사자처럼 으르렁대며 누구를 삼킬까 돌아다닙니다.”(1베드5,8) 그럼으로 은수자라도 자신의 불완전함, 나쁜 성향을 지닌 채 은수생활을 하기에 마귀의 사나운 공격을 사막에서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영혼이 불안하고 슬프고 형제에게 불만을 품고 있고 막연한 논쟁을 할 때 마귀가 노기를 띠우고 있으나 약한 것들이다.”라고 가르쳤고 마귀의 계략에 맞서 싸우는데 믿음, 기도, 단식, 십자성호가 강한 무기라고 하면서 그는 사막에서의 유혹을 이야기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