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사막
3.1. 구약에서의 사막
3.1.1 출애굽기안에서
출애굽기의 대 주제는 하느님의 역사 안의 개입과 구원이며, 무엇보다 구체적인 주제는 사막에서 체류할 때 하느님께서 베푸신 보살핌이라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광야 체험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한껏 체험하였다. 비록 그들이 그곳에서 온갖 불평과 배신으로 그 분의 계약을 자주 저버렸지만, 광야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래도 아직 믿음의 순수를 간직한 곳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3.1.2 열왕기 상권안에서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은 비옥한 땅을 차지한 다음에 재빨리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 이때 사막이란 낱말의 의미는 달라지게 되는데 즉 죽음과 위험한 장소로 여겨진 것이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이상화된 곳으로 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주로 예언서에 나타나게 되는데 엘리아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는 우상숭배하고 있는 이세벨 왕비와 맞서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왕비의 미움을 샀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시나이산을 향하여 사막으로 갔고 그 사막은 그에게 하나의 피난처이며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열상19, 3-6) 결국 엘리아는 사막에서 또 다시 하느님의 부름심을 받아 자기의 사명에 대한 확인을 받을 수 있었다.
3.1.3 호세아에언서 안에서
호세아는 하느님과 백성의 사이를 부부사이처럼 말해준다. 하느님은 부정한 아내를 일깨워주기 위하여 그녀를 사막으로 인도하시어 사랑을 속삭여 주신다.(호세2, 4-22) 이처럼 사막은 더 이상 어떤 지리학적인 장소가 아니라 사막은 우상들이 다스리는 이 세상과 대립되는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곳이요, 구원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의미하고 있다.
3.1.4 기타
시편 78장, 지혜서3,7-19 동시에 에언자들이 선포하였듯이 이 사막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곳이었다. 에제키엘16,7-19에서 하느님께서는 많은 표징과 기적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돌보신 것도 사막이었다. 신명기 29,4. 반면 모든 것이 안정된 문명사회는 풍요와 우상숭배를 통하여 신앙이 위협 받는 장소였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순수한 신앙을 지녔던 사막의 신앙을 이상으로 돌아가기를 강력히 촉구하였다. (열상19장, 특히 호세2장)
3.1.5 사막은 우리의 불완전한 인간성
출애굽 안에서 우선 사막은 시련과 그에 따른 불평의 장소였다. 목마름과 배고픔, 그리고 절망과 같은 인간 실존의 기본적인 욕구의 문제에 봉착하여 이스라엘은 불평을 하게된다. 그리고 불평에 관한 주제는 출애굽의 전체에 연연히 흐르고 있다.(출애굽14,11; 15,24; 16,3; 17,1-7; 32장; 민수기11,1-4; 12,1; 14,1-4; 16,3; 16,14; 20,2-5; 30,5) 이러한 모습들은 모두 우리의 불완전한 인간성의 모습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사막의 상징적인 의미가 어떤 도피이나 문명을 규탄하는 사상도 아니다. 사막은 그저 땅이고 우리 세상이지만 생명이 이 땅에서 생길 수 있기 위해서는 물이 있어야 하듯 사막은 우리의 불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구원과 희망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불평의 장소에 살기 위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만이 그들을 살수 있게 가능케 했던 것처럼 우리의 불완전한 인간성들은 바로 그 자신의 불완전 함들로 인하여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3.2. 신약에서의 사막
3.2.1. 세례자 요한 안에서
신약성서 안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사막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루가복음 3,10-14절 안에서 또는 마르1,1-4 루가3,1-4에서 세례자 요한의 사막의 체험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세례자요한은 태중에서부터 예언자로 간택되어(루가1,13-17.66.76-79.80)광야에서 자라나게 되며 마침내 하느님의 말씀이 내려 그때부터 예언자로 활약하게 된다.
세례자 요한에서의 사막은 ‘장소적인 사막’과 ‘영성적인 사막’을 동시에 접하게 된다. 장소적인 사막은 그가 실제로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걸치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르고, 오직 메뚜기와 들 꿀만을 먹으며 예언자의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마태3,1-5; 마르1,1-6; 요한1,19-23) 즉, 그가 터전을 두고 살아간 곳은 사람이 살아가기 조차 힘에 겨운 사막이었고, 그 안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사막’을 준비시키고 촉구하며, 초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에게서 주목해야 할 사 막은 꿈란 공동체처럼, 엣세니 공동체들처럼 도시와의 격리를 주장하고 사막으로 피신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그가 사막에서 복음 선포를 한 것은 다만 사막이라고 하는 특권적인 시기를 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을 물로 새로 나게 한 후에 그들을 일터로 다시 돌려보낸다.(루가3, 10-14)
그가 사람들에게 준비시키고자 한 영적인 사막은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와 그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써 각자의 삶 속에서 각자에게 걸맞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중, 세관원들, 군인들에게 각자의 신분에 걸맞은 회개를 부르짖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에게서 거쳐야 할 영적인 사막의 체험은 바로 회개로써 등진 하느님과 이웃들에게로 되돌아서는 방향전환이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인 회개를 드러내는 구체적 행동을 의미한다.
3.2.2. 예수그리스도의 사막
예수 그리스도는 사막생활을 체험하셨다. 사막의 그리스도적인 의미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유혹을 당하셨다는 복음의 이야기를 생
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떤 역사적인 사건을 말해주기 보다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간, 백성, 더 나아가 자녀의 마음가짐을 소개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이 제안하는 영광, 권력, 재산 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유혹이나 시련은 그 분이 사십 일간만 당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은 매순간마다 세속적인 유혹을 물리치시고 또 다시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요한4, 31-33) 그리고 목이 말라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는 그리스도는 사막에서 헤매는 동안 불만을 외치는 이스라엘 백성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기도 한다. 즉 그분은 육체적 갈증보다 신앙과 사랑을 요청하고 계신다. 끝으로 그리스도는 수난을 당하셨을 때 침묵만 지켰는데 이 침묵의 의미와 그 분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루가 23,46) 또한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막이라고 할 수 있다
3.2.2.1 공생활전의 사막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밟아온 과정을 당신 스스로 밟으시려고 하셨다. 그분은 그 옛날 히브리인들처럼 하느님의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사막에서 시련을 받게 되셨다.(마태4,1-11; 루가4,1-11) 광야에서의 예수님의 시련은 구약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하여 거쳐야 했던 통과의식의 성격을 띠게 된다. 모세도 하느님에게서 율법을 받아 백성에게 선포하기 전에 시나이 광야에서 40일간 식음을 전폐했다.(출애34,; 신명9. 18)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공적으로 활동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기 위한 사막의 시기를 보내신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 요한에게 “우리는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루가3,15) 하심으로써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겠다는 결의를 드러내신 바 있다. 예수께서는 이 결의에 따라 사탄의 유혹들을 물리치시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겠다,(루가4,4)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루가4,10)고 하신다. 이 처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성조들과 달리 시련을 극복하시고 아버지께 충실한 나머지, 빵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적보다 신뢰심을, 지상 권력의 망상보다는 하느님을 모시는 봉사를 택하셨다. 에집트 탈출과 사막시대에 실패로 돌아간 시련은, 이스라엘의 과업을 성취하시는 맏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본래의 의미를 되찾게 되었다.
3.2.2.2. 공생활 중의 사막
공생활 중에 예수께서는 군중을 피하시어(마태14,13;마르1,45;루가4,42) 홀로 기도하시기 위해서, 사막을 그 적합한 장소로 택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행동은 사막이 내포하는 상징과 별다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공생활 중에 다가오는 많은 일들 안에서도 당신 아버지와의 일치의 시간을 갖기 위하여 마련하신 기도의 장소이고 시간이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마련하시는 재충전의 시간이고, 침묵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식별의 장소이며, 아버지와 모든 것을 의논하시는 대화의 장소이다.
예수께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만치 바쁘게, 일하시고, 휴식의 시간조차 갖기 어려울 정도의 사도적 일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공생활 중의 사막에서 두 가지의 커다란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사막은 바쁘고 고달픈 생활 중에서도 많은 더 많은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제공하여 주는 쉼과 식별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생활 안에서도 예수님의 공생활 중의 사막의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인간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 안에서 행해질 때 그것은 더욱더 많은 일을 쉼 없이 행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 “사랑은 흘러 넘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는지 모른다. 둘째, 예수께서 공생활 중에 찾으신 사막은 침묵을 수반하는 기도의 시간이다. 즉 깊은 기도의 시간 없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하느님 나라를 올바르게 선포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많은 일 가운데 침묵 안에 머물러 주님을 만나는 사막의 시간이 필수적인 일이고 중요한 것임을 예수께서는 손수 보여주신 것이 된다. 길게는 자신의 인생의 여정 안에서, 짧게는 매일의 일상의 삶 속에서 예수께서 홀로 외딴곳을 찾으신 그 사막의 시간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3.2.2.3. 수난 안에서의 사막
수난 안에서의 예수의 사막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홀로 고뇌하고, 죽음의 두려움 체험해야만 했던 고독의 사막(마태26,38-39; 루가22,40-44)과 하느님께조차 버림받은 것 같은 고독감과 아울러 그래도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깊은 신뢰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사막이다.(마태27,45-46; 마르15,33-34; 루가23,44-46) 전자는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예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한 인간으로써 반드시 치루어야 하는 사막의 체험을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반드시 홀로 고독한 가운데 치루어야 하는 인간의 가장 커다란 사건이기 이다. 또한 죽음은 부자도 가난한 이도,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부모도 자식도, 대신하여 줄 수 없고, 모든 것을 버린 채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그토록 사랑하고 따르던 제자들도 스승의 죽음의 여정에는 함께하지 못했다.(마태26,40-46) 후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막의 완성으로써 당신 일생의 전부이셨던 하느님께 조차 버림받은 좌절감 안에서 불신과 두려움이 믿음과 신뢰로 변화되어 하느님의 기묘한 옛 업적을 당신 속에서 완성하시는 분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생명수, 천상의 빵, 길 그리고 지도자이시다. 그분은 또한 어둠 속에 비치는 빛이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당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베푸는 광야에서 높이 들리움을 받으신 뱀이시다.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 살과 피를 나누어 받음으로써, 비로소, 얻게 되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막이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시련을 극복하고, 하느님과 완전히 결합하게 되었다. 이제 장소와 시간으로서의 사막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다. 여기서 실제는 상징을 능가하게 된다.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장소적 사막은 이제는 더 이상 죽음이 상징이 아닌 모든 이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된다.
3.2.3. 교회의 사막
3.2.3.1. 순례여정 중에 있는 교회
사막의 상징들은 교회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계속해서 맡고 있다. 예수께서 사탄의 세력을 타파하러 돌아오실 때 까지, 교회는 사막 속에서 산다.(묵시12,6) 사막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보다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사는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사막에서 빵을 많게 하셨다.(마태14,13-21; 마르6,32-44; 루가9,10-17; 요한6,1-5)) 이러한 상징은 구약성서의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 사막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위하여 순례의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구약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육적인 음식인 만나를 먹었지만. 신약에서의 백성들은 세상의 사막 속에서 예수그리스께서 친히 당신 자신을 영적인 빵으로 내어 주시는 영원한 영적인 양식을 먹고 살고 있다.
3.2.3.2. 바울로의 사막
신약시대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바울로이며, 바울로는 개인적으로 커다란 사막의 체험을 가진 사람이다, (사도9,3-12. 15-19) 그의 사막의 체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 사랑 때문에 행해진 광야의 체험이고,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통과의식으로 치룬 이방인들의 사도로써의 준비의 시기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써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영적인 사막의 시기인 회심의 시간이다. 바울로가 자신이 박해하던 그리스도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자신의 전통적인 믿음 안에 접목시키기 위하여 주어진 시간이다. 또한 그가 예수를 이방인들에게 전할 소명을 받은 계기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방인 선교가 인간의 판단과 결정이 아니라 하느님 의지와 적극적인 계획에 따라 시작되고 전개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광야의 체험은 후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교회의 체험이 된다. 바울로도 이와 같은 견지에서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교육을 위하여, 옛날에 이 사건들이 일어났다고 가르친다.(1고린10,1-13) 구약의 하느님 백성도 광야에서 예외 없이 모두 만나와 바위에서 흘어 나오는 물을 받아 마셨는데도 우상 숭배 등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하느님의 벌을 받아 광야에서 죽어야 했다.(출애16,4.14-18) 바울로는 이것을 생각해서라도 그리스도 신자들은 세례를 받고 성체성사를 통해 광야의 백성들처럼 영적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지 교회도 언제나 회개의 마음과 쇄신의 정신으로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막의 여정을 계속해야 된다는 것이다.
3.2.3.3. 안식처 전 시련의 장소
옛날에 히브리인들이 바다와 구름 속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우리는 이제 오늘날 그리스도안서 세례를 받고 생명의 빵을 먹고 빵을 먹고 그리스도이신 바위에서 쏟아지는 성령의 물을 마시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도 사막에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성사를 통해서 사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사막의 상징은 신앙생활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상징이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이 마련하신 안식처에 다다르기까지 시련 속에서 영위되어 간다.(히브4,1) 옛 사건들을 되새기면서 우리도 마음이 완고하면 안 된다. 시련 속에서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실 그리스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히브3,14) 우리는 오늘날 승리에 대하여 확신하고 있다.
3.2.4. 오늘 날의 사막
3.2.4.1. 우리의 사막인 그리스도
구약성서 안에서 사막의 상징적 의미는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며(출애13,17-18; 20-22)이며, 그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깊이 인식하고(호세아2, 4-22), 보살핌을 받는 장소였다.(열왕기상19, 3-6) 신약에서의 사막의 의미는 하느님 사랑과 일치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과 장소로써 자신의 삶과 존재 전체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전환하는 회개(metanoia)와 쇄신의 장소이며, 하느님의 시간(kairos)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공생활 전에 사막으로 가셔셔 준비의 시간을 가지셨으며, 공생활 중에도 군중을 피하시어(마태오14,13; 마르코1,45; 6,31; 루가4,42)홀로 기도하시기 위해서 사막을 그 적당한 장소로 택하셨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기묘한 옛 업적을 당신 속에 완성하시고, 또한 생명수, 천상의 빵, 길, 진리, 생명 그리고 우리의 참된 스승으로써, 우리 모두의 사막이 되어 주시고 계신다.
또한 오늘날의 사막은 예수그리스도로서 모든 것들 안에서 우리에게 ‘현존’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분은 어둠 속에 비치는 빛이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당신을 바라보시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베푸시는 광야의 “구리뱀“이시고, 골고타에서 높이 메달리신 구원의 십자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나누어 주시는 살과 피를 나누어 받음으로써, 하느님과 그 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그분께 대한 깊은 인식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오늘날의 우리의 사막이시고,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시련을 극복하고 하느님과 완전히 결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장소와 시간으로서의 사막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다.
3.2.4.2. 세상 안에서의 사막
사막이라는 낱말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 의미가 변천되고 다양화되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보다 깊이 알게 될수록 의미가 변천되었는데 출애굽에서 끔찍한 상황에 처해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원만하고 의심까지 하게 되는데 여기서 사막은 결핍으로 표현된 하나의 악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반면 바로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이 자기 내부로부터 나온 욕심에서 발생한 자신의 인간적인 타락상을 깨닫게 되는데 이때 사막은 결핍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살핌의 장소와 시간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그 사막 속에서 살고 있고 그 모습들도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사막의 모습들은 일이 자신의 계획대로 잘되지 않을 때, 갑작스럽게 불행한 일이 생길 때, 인생의 중년의 육체적인 변화와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새롭게 느끼게 될 때, 그리고 세상 안에서의 고독감들, 가족 안에서의 이해부족과 더불어 사랑의 결핍들, 개인주의적인 사회현상들 안에서의 소외감등 작게 그리고 크게 다가오는 삶의 모든 것이 사막으로 다가오는 것들이다.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사막의 체험 못지않은 것들로 매순간 다가와 선택의 길에 서게 한다. 그리고 뜻밖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자기가 사막을 건너가고 있고 이 상황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일깨워 주시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막의 상징은 신앙을 이해 하기위한 필수적인 상징이고 신앙생활은 하느님이 마련하신 안식처에 다다르기까지 시련 속에서 영위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히브리서4,1) 그리고 우리는 옛 사건을 되새기면서 마음을 완고히 가지지 않으며 시련 속에서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실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있음을 의식하며 이것의 승리를 확신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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